◆ 평화누리길

평화누리길 제11코스(임진적벽길)

鄕香 2018. 10. 1. 22:20

 

 

 

 

2018년 9월30일 구월의 마지막 날, 평화누리길 제11코스 '임진적벽길' 을 걷기 위해 집을 나섰다. 연천 임진강변에 솟아있는 누에머리 모양 같다는 蠶頭峰에 자리한 10코스 종착점이자 11코스 출발지인 숭의전으로 가기 위해 아침 일찍 1호선 전철을 타고 동두천중앙역에서 내려 역전 택시 정류장에서 기사님께 여쭤서 어렵게 찾아간 52번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였더니 버스는 방금 떠났다. 전광판을 확인해 보니 다음 버스는 1시간을 기다려야 하겠다. 전곡에서 다른 버스를 이용할 생각으로 전곡행 버스를 타고 전곡터미널에 도착하여 마전리 숭의전 가는 버스와 시각을 알아보니 여기서도 1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할 수 없이 터미널 근처 해장국집에서 아침 식사를 해결하고 난 후 80번 빨간색 16인승 공영버스를 타고 마전리 숭의전 앞에서 하차 탐방길에 들어섰다. 참고로 평화누리길 제11코스를 가실 분은 나처럼 헤매지 마시고 동두천중앙역 출구 밖 로터리에서 직진 다음 4거리에서 우측으로 가면 유일하게 숭의전으로 가는 52번 버스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방금 떠났다 해도 기다리세요. 제일 빠르고 편리한 방법입니다.

 

 

  

숭의전 좌측에 숨은 듯이 있는 '임진적벽길' 들머리이다. 파고라 뒤로 잠두봉으로 오르는 계단이 다소곳이 맞아준다.

 

 

 

고려 태조 왕건의 신위를 모신 숭의전 건축의 아름다움이나 제단의 엄숙함에 조화롭지 못한 시멘트로 자연석을 놓아 만든 계단이다. 

   

 

 

《잠두봉과 썩은 소 전설》

이곳의 지형이 임진강 건너편에서 바라보면 마치 누워있는 누에의 머리처럼 보인다 하여 잠두봉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잠두봉에는 숭의전의 건립과 관련된 썩은소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에 이어 조선을 건국하자 고려 왕족인 왕씨들은 큰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뜻 있는 왕씨 몇 사람이 태조 왕건의 신의를 안전하게 보호하고자 돌로 배를 만들어 싣고 예성강 입구에서 바다로 띄워 보냈다. 바다로 나간 돌배는 임진강을 거슬러 황해도 안악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강을 따라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동이리의 한 절벽에 이르자 이 배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멈추었는데 왕씨 후손들은 배를 쇠로 만든 닻줄에 메달아 놓고 주위에서 왕의 신위를 모실만한 장소를 찾다 날이 저물어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어 일어나 보니 배는 사라지고 배를 묶어 두었던 쇠닻줄은 모두 썩어 없어져 버렸다 크게 놀란 왕씨 후손들은 읽어버린 돌배를 애타게 찾으며 길을 따라 내려오다 누에머리 절벽 아래에 붙어 움직이지 않는 돌배를 발견하게 되었다. 하늘의 뜻이라 여긴 왕씨 후손들은 절벽 위에 사당을 짓고 태조의 신위를 모신 후 숭의전이라 이름 하기로 하였다. 지금도 날씨가 청명한 날에는 가라앉은 돌배石舟가 물속에 비쳐 보인다고 한다.

 

(썩은소 절벽 위)

 

 

썩은소 위 전망대는 큰 나뭇가지와 잎이 무성하여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  

 

 

 

 

이 칠언칠구는 정조 13년(1789년) 마전군수였던 韓文洪이 숭의전이 내려다 보이는 잠두봉 절벽에 새겨둔 것이다.

 

《중작 숭의전/重作崇義殿》

려조사궁사백추 수교목석갱신수 강산기의흥망한 의구잠두출벽류 왕세상심만월추 여금위군묘궁수 성조갱걸여생석 유흥징파만고류

麗組祠宮四百秋敎木石更新修 江山豈議興亡恨 依舊蠶頭出碧流 往歲傷心滿月秋 如今爲郡廟宮修 聖祖更乞麗牲石 留興澄波萬古流

 숭의전을 지은지 사백년이 되었는데/누구로 하여금 목석으로 새로 수리하게 하는고/강산이 어찌 흥망의 한을 알리요/의구한 잠두봉은 푸른 강물위에 떠 있구나/지난 세월 만월추에 마음 슬퍼 하였거늘/지금은 고을군수가 되어 묘궁을 수리 하였네/조선은 생석을 갖추어 고려왕들을 제사토록 하였으니/아마도 숭의전은 징파강과 더불어 길이 이어지리라.

 

 

 

잠두봉 아래 임진강물결을 바라보고 다시 잠두봉 등성이 따라가네.

 

 

 

질 좋은 흙냄새는 고향의 냄새일세. 그에 뿌리 내리고 무성하게 자란 싱싱한 참나무 기운에 내 심신 상큼하다.

 

 

 

〈왕순례의 묘/王循禮 墓〉향토문화재 제23호

잠두봉 능선을 내려오다 도로 옆 잠두봉 자락에 묘봉하나 눈길이 간다.

조선조 전기 형식을 갖춘 비석을 읽어 보려니 세월이 할퀴고 간 상처에 알아보기 어렵다. 마침 안내판이 있어 간략하게 옮겨 본다. "묘의 주인의 이름은 '왕순례'본명은 王牛知이다. 첫 崇義殿史를 지낸 왕순례는 고려 제8대 顯宗의 먼 후손이다 고려 멸망 이후 지금의 충남 공주에 숨어 살다가 조선국 제5대 임금 문종 대인 1451년 숭의전에 제사를 배양할 왕씨의 후손을 찾았을 때 관에 알려진 인물이다.  왕명에 따라 '순례'라는 이름과 함께 전답과 노비를 하사 받고 숭의전사로 임명되어 숭의전의 제사를 주관하였다. 한동안 失傳되었던 묘를 1988년 주변 도로 확장 공사 중에 발견되었으며 묘비의 앞면과 뒷면에 새겨 있는 글자를 통해 이 묘가 숭의전사 왕순례의 묘라는 것과 148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방금 내려온 잠두봉과 그 아래 도도한 물결 임진강.

 

 

 

다시 리본을 찾아 갈 길을 확인하며 국도를 따라 걸음을 옮긴다.

 

 

 

이름도 예쁘고 아담한 아미교에 들어선다.

 

 

  

바로가도 전곡이요 연천이고 휘어가도 연천이고 전곡이라 이리가나 저리 가나 길은 통한다. 

나는 주상절리 있는 임진강가로 가야하니 도로만 따라 갈 수는 없는 일 리본 또한 우측으로 들어서 있네.

  

 

  

 길을 가다 앞을 바라보니 저만치 울타리 안 잔디둔덕에 홀로 선 소나무 한그루, 평상 같은 전망대 설치된 둔덕, 줌으로 당겨보니 성벽이  분명하다.

 

 

 

궁금한 마음으로 굽어진 길 따라 내려가니 '연천당포성' 고동색 관광표시판이 보인다. 당포성이라 하면 될 일을 부디 연천은 왜 붙였을까 연천 말고 어디에 堂浦城이 또 있는 걸까!  하기야 한자는 틀리지만 남해 사량도에 唐浦가 있긴 있지.. 리본은 그냥 스쳐가고 있지만, 나는 잠시 들려보기로 한다.

 

 

 

 

『연천 당포성/漣川堂浦城』

사적 제468호 당포성은 임진강과 당개나루터로 흘러드는 하천이 형성한 삼각형 모양의 절벽 위에 만들어진 고구려城이다. 강에 접해있는 두 면은 절벽이기 때문에 별도의 성벽을 쌓지 않았으며 평지로 연결되어 적이 쉽게 공격할 수 있는 나머지 한 면인 동쪽에만 높고 견고한 성벽을 쌓아 내부를 성으로 사용하였다. 한강유역에서 후퇴한 고구려는 6세기 중엽 이후 7세기 후반까지 약 120여 년 동안 임진강을 남쪽 국경으로 삼았는데 임진강 하류에서부터 상류 쪽으로 덕진산성, 호로고루, 당포성, 무등리보루 등 10여개의 고구려성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였다. 당포성이 있는 곳은 강이 크게 굽어 흐르면서 강물의 흐름이 느려져 쉽게 강을 건널 수 있는 여울목으로 양주 방면에서 북상하는 신라군이 임진강을 건너 개성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해당하기 때문에 고구려의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포성은 고구려시기에 처음 축조되었지만 신라가 점령한 후에는성벽을 고쳐 쌓아 계속 사용하였다. 이 때문에 성내부에서는 고구려 기와와 함께 신라 기와들이 출토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제 살만 하니 관광지나 유적지마다 안내판이 번듯하다.

 

 

 

城 안은 넓은 야구장 형세다 잔디도 잘 가꾸어져 있고 한 가족이 화목하게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다. 이렇듯이 평화로운 곳에서 죽이고 사는 살육전이 벌어지던 곳이었다네. 

 

 

 

전망대에 오르면 이 일대의 동서남북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전망대 역할을 하지만 옛 삼국시대에는 城을 死守하려던 고구려 군사나 점령한 신라군이나 한가지로 성벽이였을 것이다. 한그루의 소나무, 장군의 기개인 양 獨也靑靑하도다.

 

 

 

 

 《당포성 동벽/堂浦城 東壁》

높이 6m 폭31m, 길이50m의 당포성의 동벽은 城內로 진입이 가능한 동쪽 방면을 차단하는 방어시설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돌을 쌓아 만든 성벽으로 보이지만 석성을 쌓기 전에 먼저 점토를 다져 쌓은 후에 그 외면에 돌로 쌓아올린 토심석축 구조이다. 중심 성벽이 받게 되는 하중을 분산시키기 위해 3단의 보축성벽을 쌓았으며 성벽 앞에는 폭 5m 길이3m의 구덩이(隍:해자)를 파서 적이 쉽게 성벽에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동벽 외부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조성된 수직의 기둥홈(柱洞)이 관찰되는데, 중국 집안의 환도산성, 패왕조산성, 흑구산성, 편양의 대성산성 들 고구려의 산성들에서 확인되는 특징적이다.

특히 당포성 동벽에는 수직의 기둥홈이 하부의 확과 세트를 이루고 있어 주목된다. 현재는 성벽의 훼손 및 붕괴 위험이 있어 흙을 덮고 잔디를 식재하여 안전하게 보호 하고 있다. 

 

 

  

당포성은 고구려시대 임진강변에 돌로 쌓은 平地城이다.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소하천의 침식작용으로 높은 수직 절벽이 끊어진 삼각주에 구축되었다. 임진강 물길이 만들어낸 수km에 달하는 수직절벽은 현무암주상절리로 되어 있는데 그 높이가 20여m에 이르고 있어 별도로 성벽을 쌓지 않더라도 적을 막아낼 수 있는 자연성벽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평지에 연결된 부분만을 돌로 쌓았는데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현무암을 이용하였다. 이러한 점은 연천일대 고구려城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당포성 남쪽 성벽인 주상절리 절벽은 다양한 주상절리의 모양과 함께 하천의 침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호젓한 당포성 터를 휘돌아 흐르는 저 강물이 옛 물이 아니 듯이 세월은 옛 성터에 흔적만 남겼다.

 

 

 

당포성 城內는 길을 중심으로 아쉽게도 저편은 개인 소유지여서 온전히 제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성을 쌓았던 돌들이 흩어져 있다.

 

 

 

 

당포성 안을 율무가 온통 차지하고 있다.

 

 

  

당포성을 나와 수 km를 리본따라 국도로 걸어간다.

 

 

 

그렇게 가다보니 6.25전쟁 당시 희생된 유엔군 전사자 화장장 표시판이 보인다. 어찌 그냥 지나 칠 수 있겠는가! 부모형제 모두 두고 이역만리 타국에서 자유를 지키자는 숭고한 정신들이 우리를 위해 귀중한 목숨 초개처럼 불사른 은혜로운 영혼들이 깃든 곳이 아닌가! 이번에도 리본은 그냥 가자고 하지만, 마땅히 그 혼백들을 위로하고 고마움으로 절이라도 해야 하겠다.

 

 

 

도로에서 100m도 채 안될 거리를 걸어 들어서니 '연천 유엔군화장장' 시설이다. 안내판을 옮겨 본다.

등록문화재 제408호.(1952년 건립)

"이 시설물은 한국전쟁 당시 유엔UN군 전사자들을 화장하기 위해 건립하여 휴전 직후까지도 사용한 화장 시설이다. 건물의 벽과 지붕이 훼손되었으나 가장 중요한 화장장 굴뚝이 그대로 남아있다. 주변의 돌을 이용하여 막돌 허튼층쌓기로 만들었다. 한국전쟁유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유엔군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시설로 가치가 있다." 

 

 

 

『유엔군화장장 시설』관리자:연천군수. 소재지: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로101번지.

"1950년 6월25일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을 비롯하여 16개국의 유엔군이 참전하였다.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쟁 초반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국군과 ㅠ엔군은 압록강까지 북진하였으나 중국군이 개입하면서 38도선 일대로 물러났다.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1951년 7월부터 휴전협상이 진행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휴전을 대비하여 고지챙탈전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유엔군 화장장 시설은 이 때 희생된 유엔군을 화장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이곳에서 화장된 유엔군은 누구를 위해서 꽃다운 젊음을 이역만리 타국에서 불사르고 갔는가? 우리는 숭고한 그 의미를 깊이 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국도를 자전거도로와 함께 병행해서 걸어오다가 자전거도로는 좌측으로 꺾어 들어가고 보행자는 그대로 국도를 따라 직진한다.

 

 

 

 

 

 동이리 배울마을을 지나 곧바로 간다.

 

 

 

배울마을입구를 지나 200m 에 이르러 우측으로 접어든다.

 

 

  

주상절리를 보러 가신다는 40대 자매님 세 분..

 

 

   

동이대교 진입로 100m 전에서 좌측 지방도로로 접어든다. 주상절리까지 1km.

  

 

 

사진을 찍는 동안 앞서 갔던 세 분 자매들이 보인다.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서부터 북쪽으로 임진강을 역으로 오르면서 수직절벽을 수 km에 걸쳐 발달된 국내 유일한 주상절리 명승이다. 제9코스 율곡길에서 볼 수 없었던 주상절리를 이 자리에서 願 없이 본다.

 

 

  

임진강을 가로 지르는 동이대교 좌우로 8~9m에 이르는 수직절벽의 주상절리가 兩 江岸에 마치 성채처럼 이어져 있다.

  

 

 「임진강 주상절리/臨津江柱狀節理」

평강군에 위치한 오리산과 근접한 680m 고지에서 분출한 용암이 한탄강 낮은 지대를 메우며 철원, 연천, 포천 일대에 넓은 용암지대를 형성하였고 임진강을 만나 임진강을 역으로 흘러 들면서 현무암층을 형성하였다. 이후 화산활동이 끝나면서 형성되었던 용암지대에 강물이 흐르면서 침식작용에 의해 현무암 주상절리가 만들어 진 것이다. 

 

 

 

평강군에 위치한 오리산과 근접한 680m 고지에서 분출한 용암이 한탄강 낮은 지대를 메우며 철원, 연천, 포천 일대에 넓은 용암지대를 형성하였고 임진강을 만나 임진강을 역으로 흘러 들면서 현무암층을 형성하였다. 이후 화산활동이 끝나면서 형성되었던 용암지대에 강물이 흐르면서 침식작용에 의해 현무암 주상절리가 만들어 진 것이다.

 

 

 

주상절리는 용암이 냉각과 응고에 따라 부피 수축에 따라 생성되는 사각 육각 또는 다각형 기둥이 형성되었거나 또는 그와 같은 금을 말한다. 

   

 

 

 현무암은 용암이 굳을 때 기상과 온도에 따라  수축작용으로 육각 또는 사각 등 다각적 형태로 수직 절리로 발달하여 다각형의 기둥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주상절리 절벽이 이루어진다.

 

 

이대로는 근접해서 주상절리의 뚜렷한 얼굴을 담을 수가 없겠다 싶어 다시 강물 따라 길 따라간다.

 

 

 

임진강변을 따라가는데 길이 강가 모래밭으로 향한다.

 

 

 

 능침 앞 文臣石像 모양으로 덩쿨을 뒤집어 쓴 나무의 모습은 돌아가는 풀밭 길을 그윽한 자세로 기켜보고 있다. 다시 보니 덤불을 뒤집어 쓴 나무의 형상이 스핑크스의 뒤태 같기도 하다.  

  

 

 

길을 가다 듬성한 사이로 바라본 주상절리의 황토색 표면이 눈길을 끈다.  오, 절리 중에서 흔치 않은 부채꼴 모양의 방사상절리이다.

절리는 형태에 따라 '기둥모양의 주상절리' , '땅과 수평을 이루는 판상절리' . '부채꼴 모양의 방사상절리' 등이 있다. 

 

 

 

 줌으로 당겨보니 방사상절리를 자세히 보니 그 형태가 주름잡은 웨딩드레스 같기도 하고 주름치마를 입은 옛 유럽의 마담의 뒷모습 같기도 하다 아무튼 이대로 그냥 갈 수는 없다싶어 거친 풀 섶을 헤치고 강가로 내려갔다. 

 

 

 

 이곳의 주상절리는 한탄강 차탄천의 주상절리와 다르게 상부층이 없다. 사진에서처럼 植生에 의해 주상절리가 붕괴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무너져 내려 형성된 잘 생긴 오늘의 행운, 방사상절리를 줌으로 당겨 자세히 보니 표면이 형이상학적 문양을 연출하고 있다.

 

 

  

자연이 그려낸 이 아름다움을 어떤 수사로 대신할 수 있을까! 옛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고 적벽이라 했다.

 

 

임진강 주상절리 계곡의 서쪽을 바라보고 담은 풍경이다 보이는 다리는 전곡에서 동이리를 잇은 동이대교이다.

 

 

임진강 주상절리의 동쪽의 모습도 담았다.

 

  

자연사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임진강지질공원의 아름다운 주상절리 계곡을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서서 길 나선다.

 

 

 임진강변 낮은 지대 강가를 따라 양 강안의 주상절리를 바라보며 가는 길은 그대로 절경을 이루고 있다.

 

 

어떤 물리적 타격에 의해 쪼개진 화산석의 단면에서 오염되지 않은 太古的 용암의 얼굴을 본다. 임진강 주상절리는 3억5천만 전에서 50만년 전까지 자연이 빗어 낸 신비의 작품이라 하겠다.

 

 

걸어가는 길가 바로 옆 절벽에서도 주상절리의 얼굴을 본다. 비록 위 상부에서 흘러내린 흙탕물이 덧칠을 했지만 다각을 이룬 작은 주상절리의 윤곽이 완연하다. 마치 꿀이 가득 찬 벌집을 보는 느낌이 든다.  

 

 

구태여 강 건너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가깝게 주상절리를 접할 수 있을 줄이야..

 

 

회백색 주상절리에 담쟁이넝쿨이 곱게 繡를 놓았다.

 

 

당장이라도 주먹도끼처럼 생긴 주상절리 조각이 머리에 떨어져 내릴 것 같은 주상절리 地帶 끝나는 곳을 지나온 후 돌아본 모습이다.

 

 

다시 평화누리길 안내 리본을 확인하고 길 나선다.

 

 

강변따라 가는 길 내내 풍경에 젖어 발걸음을 멈춘다.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길도 따라 아름답다.

 

 

   길을 가다 나뭇가지를 틀 삼고 珠簾 삼아 옥빛 물결을 담아본다.

 

 

 

 

멋진 기하학적 표면의 주상절리, 그 아래 꿈길에서 본 듯한 오솔길을 굽어진 비색의 물결따라 흘러가는 구름나그네..  

  

 

  이만한 그림이면 佳作임에 틀림없다.

 

 

  녹색 하모니 울려 퍼지는 길가에 무리지어 핀 흰 들꽃이 이채롭다.

 

 

  지나온 길 뒤돌아보니 또 다른 풍경이 그림처럼 곱다.

 

  

너 걸음 걷다 다시 돌아보니 江岸의 주상절리는 아담한 초원에 맑은 시내 흐르는 태초의 자연적 울타리가 되었네.

  

 

  네가 구절초 이든 쑥부쟁이 이든 그에 상관없이 나는 그냥 들국화라 부르겠다.

 

  

내 평생 이리 곱고 예쁜 길을 걸어보는 행운이 얼마나 더 있을까..

 

 

 아름다운 길을 지나온 뒤 다시 보니 또 다른 아름다운 길 하나 그 자리에 있네.

 

 

벼과 따위의 풀이 주를 이루고 있는 영역너머에 둑이 가로 막고 있다. 이 길은 어디로 이어지려고 모퉁이를 돌고 있지?

 

 

산모퉁이를 돌아서니 길은 둑 위로 이어지고 있다. 임진주상절리길이 끝나고 방죽 위를 거칠 것 없이 걸어가는 6km 거리의 여정이 열리는 순간이다.

 

 

산자락 끝에 이어진 제방 위에 평화누리길 문 格인 파고라가 나를 반긴다. 둑 끝 지점인 이곳까지 차를 몰고 온 한 부부가 가을 한 때를 즐기며 휴식을 하고 있다.

 

 

   걸어 갈 둑길 저만치에도 차 두 대가 보인다. 모두가 가을을 찾아온 가족들이다. 내 고적함 거기에서 본다.

 

 

  이곳 안내판을 보니 우정마을 인근이다. 임진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위에 다리가 있다 그 다리 앞 이정표가 橫으로 이어진 다리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안내판을 옮겨 본다.  '우정리'는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연천군 미산면에편입되었으나 1945년 8월15일 광복이 되면서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치하에 놓였다가 6.25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 11월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1개의 행정리, 6개반, 1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소우물다리》

본래 마전군 동면의 지역으로 임진강 옆에 큰 우물인 '소우물'이 있어 '牛井里'라고 하였다. 옛날에는 이 벌판에 넓은 평야가 있었으나 수리 시설이 없어서 논으로도 활용 못하고 너무 질어서 밭으로도 사용하지 못하는 쓸모 없는 땅이었다. 그래서 그저 소나 매놓는 정도였다. 벌판 한 모퉁이에는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큰 우물 하나가 있어서 噴水井이라고 불렀다. 넓은 벌판의 모든 소들이 분수정에 모여 물을 먹었다는데 유래하여 이 벌판을 순수한 우리말로 '소물개'라고도 불렀다. 소가 많았다고 하여 소牛자와 분수정의 井자를 합쳐서 지금의 우정리로 일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소우물다리 중간에서 바라본 하천 상류쪽 모습이다. 임진강변 가까운 낮은 지대이고 보니 둑이 높고 하천은 정비가 잘 되어 있다.

 

 

하천이 임진강으로 합수되는 하류 모습이다. 임진강에 물이 불어나면 이 하천으로 물이 거슬러 오르게 될 것이니 둑이 높은 까닭이다.  

 

 

   아담하고 산뜻한 모습에 난간이 활대처럼 안으로 굽은 것도 안정감 있고 나를 포옥 감싸는 느낌이 매우 인상적이다.

 

 

 임진강 방죽위로 가고 있다. '임진적벽길'은 말 그대로 임진강줄기를 따라가는 쾌적하고 경관 아름다운 길이라 하겠다. 이제 신비로운 적벽을 대신하여 赤路가 나의 눈을 물들이고 있다. 길가 파란 줄은 도보와 자전거 탐방 길을  병행한 표시한 線이다. 

 

 

임진강 방죽에서 좌측 농경지를 가로질러 우정마을로 이어지는 길이다. 녹색 들판을 가르며 뻗어간 눈부시도록 흰 외줄기 얼마나 아름다운 길인가! 주변경관과 잘 조화되어 보기에 좋다. 비록 전선줄과 전봇대가 그림을 망치는 아쉬움은 있지만, 

 

 

   임진강변의 좁지 않은 습지의 풍경이 마치 초원의 아늑함을 느끼게 한다.

 

 

  우정마을과 임진강 사이 농경지의 풍경이다. 예전에는 수리 시설이 없어서 논으로도 활용 못하고 너무 질어서 밭으로도 사용하지 못하는 쓸모 없는 땅이었다고 한다.

 

 

   적색 콘크리트길은 어느 틈에 아스팔트도로가 되어 끝 모르게 드리어져 있다.

 

 

  전봇대에 평화누리길 리본이 바람에 나부끼며 내 길잡이에 충실하고 있다.

 

 

  임진강 끼고 가는 벌판에 높은 강둑은 좋은 전망대 구실을 톡톡히 해낸다. 걸어가는 내내 아름다운 풍경을 파노라마로 펼쳐 준다.

 

 

시각을 보니 오후1시45분이다. 느끼지 못했던 허기가 갑자기 돈다. 그늘도 안되는 가로수 아래 호신용 스틱(마을을 지나칠 때 견공들이 떼거리로 달려 든 적이 있었기에)과 배낭을 내려놓고 케잌과 두유를 꺼내 소모된 열량을 보충하고..

 

 

다시 길 나서는데, 임진강변 쪽에서 길을 가로질러 농경지 쪽으로 손바닥만큼 큰 두꺼비가 느릿느릿 생사의 갈림길을 건너고 있다 어쩌다 오가는 차에 희생될까 싶어 길을 다 건너서 풀숲으로 들어설 때까지 지켜보고 다시 길 나섰다. 

 

 

 둑길 바로 아래 공원이 길게 꾸며져 있다. 이름하여  '임진물 새롬랜드'

 

 

  임진물새롬랜드 정문 앞 캠핑장과 주차장 그리고 화장실이 있다. 

 

 

  임진물새롬랜드 앞 둑에 세워진 이정표를 보니 오늘 여정의 절반의 지점이다.

 

 

  지금이야 알지만, 저 다리가 많이 궁금했었지요.

 

 

 코스모스 꽃잎에 벌레가 구멍을 송송 뚫어 놓았네요. 어떤 녀석이 이리 갉아 먹었을까? 나비의 애벌레일까 나방의 유충일까 아니면 무당벌레?

  

 

코스모스 꽃잎을 보다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본 풍경.

 

 

 아까, 다리이름이 궁금했다고 말했죠? 다리 이름을 찾아보니 '임진교'입니다. 이 다리를 건너가나 싶었는데, 아닙니다.

 

 

 임진교 입구 앞에 평화누리길 안내판이 있어요. 다리 밑으로 내려가랍니다. 

  

 

   임진교 앞 도로 건너편 마을 앞으로 번듯한 도로가 있는데 굳이 다리 밑을 고집하나 싶은데, 좀 더 자연에 가까운 곳과 안전을 위한 교통사고예방차원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리 밑 길은 흙길이고, 강변에 멋대로 자란 잡초와 푸른 강물 강건너 풍경 등 시각적 환경적 모두 나쁘지는 않습니다.

 

 

  피마자와 똑 같은데 우리가 흔히 보던 피마자와 다르게 줄기도 열매도 잎까지도 모두 불꽃처럼 붉습니다.

 

 

 

 나무를 뒤덮은 쓸모없는 외래종 가시덤불 그 등살에 나무가 죽기도 합니다.

 

 

  다시 둑으로..

 

 

 둑 위에 이정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등리 무등배수펌프장 앞 둑길 따라갑니다.

 

 

 

 숫자에 질릴까봐 거리표시를 감춘 것일까 틀려서일까 거리숫자마다 덧씌웠네요.

 

 

 

 둑방길을 걸어가며 시시로 변하는 임진강변의 풍경을 바라보니 한가지로 가을 뿐이네.  

 

 

 

 코스모스를 보는 심경 또한 깊어가는 가을색이 어찌 아닐가!

 

 

 

강 건너에는 가을색이 짙은데 길가 꽃밭에 토란잎은 홀로 청청 돋보인다.

 

 

 

이 녀석은 구실을 제대로 하는 군요. 목적지까지 7.7km라 하니 지나온 임진물새롬랜드 앞을 지키고 섰다가 절반을(9.2km)왔다고 알려준 이정표에서 겨우 1.5km를 온 셈이네요.  

 

 

 

 심상치 않은 환경입니다. 돌더미 가운데에 못보던 행색의 이정표가 고구려보루성인 고성산 보루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산자락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각오를 새롭게 하라는 듯이 입을 벌려 계단을 혀 모양으로 내 보이는 파고라 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둑길은 끝나고 산행 길에 오르는가 봅니다.

 

 

  

 제법 가파른 계단도 기다리고 있네요. 나 산행 온 것 아닌데..

 

 

 어언 간에 계단은 사라지고 완만한 둔덕으로 둔갑을 했습니다. 이 탐방로는 고구려 무등리 보루성의 일부입니다.

 

 

 평편하고 완만한 언덕진 곳 옆에 봉우리로 오르는 계단이 보이네요.

 

 

 어느 정도 좁지 않은 평편한 곳에 일단의 설명문과 '연천 무등리 2보루'라는 표시판이 세워져 있고 그 뒤로 원만한 오름에 원목을 이용한 계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안내판 글을 옮겼습니다.

 

 

 

 

계단을 오르고 나니 등성이를 타고 가는 전형적이 산행 길입니다만 고구려 성벽이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등성이를 300m정도 걸어가니 낮은 봉우리인 제2보루 터입니다.

 

 

무등리 2보루는 장대봉 북쪽 정상부에 위치해 있고 1보루와 마주보고 있습니다. 동쪽으로 인접한 임진강과 강너머 일대가 한눈에 조망되는 위치입니다. 유적의 평면 형태는 남북으로 긴 반달형에 가깝고, 성의 남쪽과 동쪽은 임진강에 면하여 거의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이 형성되어 있는 반면 서쪽으로는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편입니다.  

 

 

 안내판에 의하면, '무등리 2보루는 1999년에 강변쪽 절벽이 홍수로 유실되면서 성벽의 단면 일부가 노출되었는데, 강돌과 할석으로 축조한 석축시설이 5-6m 높이로 남아 있음이 확인되었고 고구려 기와 및 토기편, 철제 화살촉과 함께 탄화곡물이 수습되었다.탄화곡물은 연대측정 결과 6~9세기 사이의 쌀과 좁쌀로 밝혀졌는데, 쌀은 자포니카종으로 확인되었다. 탄화곡물이 다량의 벽채 파편과 함께 발견되었기 때문에 2보루에 軍倉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는 2보루의 동북쪽 내부에서도 고구려 토기편이 상당량 채집되었다.'고 합니다.

 

 

무등리2보루를 탐방하고 내려가는 길은 어느정도 가파르다.

 

 

이곳의 수종은 경기도 지방의 대다수가 그러하듯 참나무와 소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밤나무도 적지 않다.

 

 

고개마루에 도착하니 앞 봉우리는 철조담이 가로 막고 이정표는 좌측을 가리키고 있다.

 

 

100여m 정고 내려가니 나뭇가지 사이로 건축물 지붕이 보인다.

 

 

건물들이 앞에는 가로로 뻗은 길이 있고 그 길 좌측으로 군남홍수조절지 댐으로 이어지는 평화누리길입니다. 

 

 

좌측으로 내려가니 다시 리본은 과수원 옆 산길로 접어든다.

 

 

밝고 화사한 활엽수로 입구를 가린 그 안은 동굴처럼 침침하고 으슥하다. 숲이 짙고 어두운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활엽수가 아닌 침엽수를 조림한 곳이 아닌가 싶다. 

 

 

 막상 들어서서 좀 걸어가니 호젓한 등성이 길로 우측 아래로는 길이 있고 잡목이 있어 들어설 때와 달리 밝은 편이다. 그런데 이 나무들의 이름을 모르겠다. 수종에 대해 아는 것도 없지만, 잣나무는 아닌 것 같다. 전나무일까?

 

 

   다시 자연적으로 이뤄진 숲의 정감이 느껴지는 우리 야산의 모습이다.

 

 

  잠시 물 한 모금 마시며 거쳐 나온 숲을 바라본다.

 

 

 우측 아래를 보니 산자락에 붙어 번듯한 도로가 따라오고 있었나 보다.

 

 

 앞을 보니 넓은 구릉에 밭을 일궈 농작물이 자라고 그 옆 가운데 어둠을 머금은 숲길이 보인다.  

 

 

옆에 따라오던 번듯한 길은 어디론가 숨고 먼 들판만 보이고 나는 산길을 오른다.

 

 

좀 걸어나가니 다시 번듯한 길과 만나는 자리에 우측 봉우리로 오르는 녹색터널이 보인다. 필시 저 터널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렷다. 

 

 

번듯한 길은 꿈도 꾸지 말라는 듯이 녹색터널 앞에는 목적지가 5.7km임을 알려주는 친절한 이정표가 있었다. 

  

 

터널을 나와 다시 갈림길에서 우측 계단으로 리본이 앞선다. 난 네가 편한 길 나두고 힘든 봉우리로 올라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리본이 말한다. '어디긴 어디야 군남홍수조절지이지' "흥! 그게 다일까!" '그럼 일부러 날 힘들게 하겠니? 뻥 치는 거 내 다 알지!' " 흥 가보고 고맙다고 말할 생각이나 하셔~~"  '???'

 

 몇몇 작은 봉우리를 오르고 내린다.

 

 

 평화누리길이라했던가, 지금 오르락내리락 이것이 평화 누리는 길인가? 고생 누리는 길인가? 아쨌거나 평화도 고행도 나는 누린다.

 

 

 

 

키 큰 나무에 무성해 여기가 어딘지 임진강에서 얼마나 떨어진 곳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고성산보루성으로 간다는 것과 보루성이 있으니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인근 일거라는 생각이 전부다. 그렇게 고성산보루성에 이르렀다.

 

 

 

『고성산 보루/ 高城山堡壘』

고성산보루는 漣川郡 無等里山12의 고성산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왕징면 무등리와 북삼리의 경계지점에 해당하는 곳으로 동쪽으로 임진강과 그 건너편의 군남면 일대가 잘 조망된다. 유적의 남쪽으로 2km 떨어진 무등리 보루群과 함께 임진강 방면을 통제하기 위해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산 정상부에 원형의 석축시설이 있고 그 내부에 사각형에 가까운 함몰부가 조사되었다. 석축은 25-40cm 크기의 할석을 이용해 5~6단 정도 쌓아올렸으나 정연하지 못한 편이다. 석축 내 함몰부(동서5.4m, 남북4.4m, 깊이 1.8m)에는 불에 그슬린 석재들이 부분적으로 남아있다. 지표조사 시 함몰부 주변에서 고구려 토기편이 수습되었는데 이러한 형태의 토기편은 연천 은대리城과 호루고루, 서울의 몽촌토성, 청원 남성골 산성 등에서 출토된 바 있다.

 

<이 사진들은 안내판에 게시된 사진으로 발굴조사 전 모습이기에 복사해 올린다.>

 

 

 

 

 

 

 고성산정상이자 고성산 보루성 서편 모습이다.

 

 

 

고성산보루 동편 모습이다.

 

 

 

 하산에 앞서 바라본 고구려의 국경수비군의 고성산보루성의 모습.

 

 

 

고구려보루군 무등리보루와 고성산보루를 탐방하고 하산길에 들어선다. 이제 확트인 임진강변의 들판과 임진강 푸른 물을 보며 군남홍수조절지를 향해 4.1km 남은 거리를 오르내림 없이 가볍게 가는 일만 남았다.  

 

 

 

내림길은 대체로 찰흙이다.

 

 

 

 

시야가 트이는 곳에서는 임진강 건너 곱게 물드는 들녘과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은 봉우리들이 정겹게 스며든다.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제법 넓은 도로이다.

 

 

 

 

하산길에 우측을 보니 나뭇가지 사이로 절벽 아래 임진강 푸른 물과 군남홍수관리소가 얼핏 보인다.

 

 

 

 

이 계단을 마지막으로 고성산자락도 끝인가 보다.

 

 

 

  

자락을 내려와 길에 서서 임진강 쪽 우측을 바라보니 눈이 부시다. 강물이 아닌 황금빛 물든 벼이삭들에 빈약한 감정마저 풍성하게 물들여 진다. 

   

 

 

 

농가 몇 채 있는 마을을 지나간다.

 

 

 

 돌담장으로 잘 꾸며진 '허브 빌리지' 옆을 지나 나룻배마을을 향해 가는 길이다.

  

 

 

나룻배마을의 모습을 지나온 후 임진강 제방에서 담은 모습이다.

 

 

   

임진강 둑위에 서 있던 이정표가 주변에 설치된 운동시절 우측 방죽길 조만치 군남면으로 놓은 북삼橋를 가리키고 있다.

 

 

 

 북삼교 모습이다. 12코스를 탐방하기 위해서 다시 찾아와야 할 북삼삼거리는 다리 건너에 있다.

 

 

 

북삼교 다리에 서니 고성산 짙은 녹색 산속 6km에서 갇혀 헤매던 마음을 확 트인 임진강 주변에 매료되어 북삼교 다리 아래 푸른 강물에 나도 모르게 빠뜨렸다. 다리중간에 서서 임진강 풍경에 발길을 옮길 줄 모른다. 

  

 

 

임진강 물길 따라 길게 엎드려 있는 고성산, 그 아래 저리 시원한 물이 흐르건만 고성산에서는 짙은 나무숲에 묻히고 고구려 보루성에 이끌려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서쪽 강안의 절벽을 중점으로 담은 풍경이다.

 

 

 

 동쪽 모래밭을 중점으로 담은 풍경이다.

 

 

 

 

 군남홍수조절지 방향을 바라본 풍경이다.

 

 

 

 드넓은 강폭을 초지가 거의 다 차지하고 있다 큰 물 때에 상류로부터 쓸려 내려온 모래가 쌓여 이루어진 것이겠다.

 

 

   

군남면 쪽 북삼교 끝 우측에 강으로 내려가는 길로 내려서니 강가를 따라가는 말끔한 길이 호젓하다.

 

 

 

 

가녀린 몸에 곱게 핀 코스모스 너를 보면 늘 떠오르는 여인이 있다. 한탄강가 오두막에 살았던 그 상냥하고 붙임성 있던 그 여인의 따습던 정다움, 코스모스 곱게 피어있던 60년대 어느 해 가을 전곡국민학교 뒤 한탄강에서 내게 살포시 노래를 부러주던 그 모습, 그 노래, 살랑 바람에 실려 귀에 들리는 듯 보이는 듯 설레인다.

 

 

  

저만치 앞서가는 두 사람이 보인다. 당포성으로 들어설 때 당포성 탐방을 끝내고 나오던 부부이다. 따라잡아 인증 샷 한 장 부탁해야겠다.

 

  

 길도 주변 환경에 따라 어울림이 있다. 이 풍경에서 하천에 징검다리가 놓여 있고 옛 시골길이었다면 옛 이발소에 하나 쯤 걸려 있던 소박하고 운치 있는 풍경이 아니었을까?.

 

 

어느새 억새가  흰 손을 흔들며 기러기를 부르네.

 

 

 

 군남홍수조절지가 눈으로 보아 바로 코 앞인데 아직도 1.2km거리에 있단다.

  

 

 

'아름답다' 본래의 意味는 무엇일까? 사전적으로야 기쁨과 즐거움을 느낄 만큼 곱고 예쁜 것이다 하겠지만, 이 글만으로는 이 풍경이 가져다 준 좋은 감정을 온전히 헤아렸다 할 수 없네.

 

 

  드디어 부부를 따라잡아 얻은 내 모습 한 장..

 

 

젊어서 기차를 타고 여행할 때나 차를 가지고 시골마을 앞 국도를 지나칠 때 산자락에 고즈넉이 자리한  초가 굴뚝에서 뽀얀 연기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창문에 호롱불 깜박이는 아담한 집을 볼 적마다 달려가 마음이 소박할 그 집 사람들의 따스할 숨결 속에 한가지로 폭 싸이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었다. 저 빨간 기와집에서는 그 때 그 감정을 왜 느낄 수가 없을까?

 

 

아름다운 풍경속에 여울이 반짝인다. 아이처럼 달려가 예쁜 조약돌이라도 줍고 싶다. 고운 마음 글로 새겨 예쁜 그니에게 주고 싶다.  

 

 

  여울의 물결이 은어 떼가 되어 물살을 가르며 오르는 양 동화의 세계로 이끈다.

 

 

 멀기만 했던 군남홍수조절지를 지척에서 바라보니 그 무슨 다른 감정 있으랴 그저 아름답다는 생각뿐이다.

 

 

  길이 꽃을 물들였나, 꽃이 길을 물들였나! 한가지로 붉고 파랗고 파란하늘  구름 한 점 없네.

 

 

 군남홍수조절지는 육중한 무게감을 주는 댐과는 다르게 말쑥한 느낌을 주는 멋쟁이 신사 같은 느낌이다.

 

 

  군남홍수조절지 경내에는 비록 조형물이지만 수많은 두루미의 이야기를 표현한 테마파크이다.

 

 

평화누리길 제11코스 탐방을 마치고 다음날을 위해 제12코스 '통일이음길' 출발지를 찾아 헤매고 있다.

 

 

   두루미테마파크에서 100여m 떨어진 도로가 인도에 출발점을 찾았다. 시각은오후5시14분이다. 12코스는 길 건너 산자락을 오르는 것으로 시작이 된다. 잠시 사진을 찍기 위해 스틱을 파고라에 세워놓고는 그냥 두고 왔다. 아쉽지만, 누군가 잘 쓰겠지..

 

 

 아침 경의중앙선 구리역에서 05시49분 전철을 타고 회기역에서 1호선 동두천행 06시09분 전철로 환승 07시02분 동두천중앙역에서 마전리 숭의전가는 52번 일반버스를 타야 하는데 정류장도착 직전에 떠나 전곡행 버스를 타고 전곡터미널에서 전곡공영버스80번으로 환승하여 숭의전에 도착한 시각은 10시23분이었다. 따라서

숭의전(10시25분 탐방시작)-당포성입구-주상절리-임진물새롬랜드-허브빌리지-군남홍수조절지(총 19km)에 도착시각 오후5시14분. 모두 6시간50분이 소요되었다.

귀가는 군남홍수조절지에서 500m 정도 거리에 있는 북삼리 삼거리 버스정류장에서 55번 버스를 타고 연천역에서 하차, 통근열차를 타고 소요산역에서 1호선 전철로 환승하였다. 맙습니다.

   

 

 

2018년8월30일(일요일) -鄕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