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1일 평화누리길 제12코스를 신탄리역 종점까지 탐방하였으나, 강원도 평화누리길과 연계시키기 위해서 역고드름까지 연장한 3.8km 구간의 '신탄리역 - 역고드름 종점'을 탐방하고자 10월19일 1호선 전철로 동두천역에 도착, 다시 경원선 통근열차로 환승하여 연천역에 도착 "연천역~백마고지역"간 복선 공사"로 인하여 12월 말까지 임시로 무임(열차표를 역에서 반납하지 말고 버스기사에게 줘야 함)으로 연계 운행하는 버스에 탑승, 신탄리역에 도착하여 역고드름 종점까지 탐방을 끝냈다. 종점에는 평화누리길 제13코스(쇠둘레길)가 연계되는 시발점이기도하다. 역고드름 종점에는 6.25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된 철교의 한 부분이 66년간을 기념탑처럼 우뚝 서 있는데,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철원노동당사가 떠올랐다. 시각을 보니 오전 11시이다. 이대로 돌아서기에는 이른 시각이고 철원 칠만암까지 13코스를 완주하기에는 늦은 시각이다. 그러나 발길은 이미 철원 땅으로 들어서 있었다. 준비된 것도 없이 길목에 서 있는 안내판만 보고 가자니 한편 걱정스럽다. 13코스의 종착지 '칠만암에서 되돌아올 교통편도 모르고 낮에도 사람 찾아볼 수 없는 들녘에서 더구나 해 저물면 어쩌나 생각이 난감한데 발길은 그저 앞만 보고 옮기고 있다.
하천 중심부 둔덕, '여기서부터 강원도입니다."
하천을 건너 강원도 쪽에서 경기도 쪽 역고드름 종점을 바라본 풍경이다.
평화누리길 제13코스로 이어지는 길목에 외롭게 서 있는 이 안내판만 보고 알 수 없는 길을 알 수 없이 들어섰다. 이제까지와 다르게 '아치 파고라'도 인증박스도 없다. 어쩌면 폐철교에서 백마고지까지는 13코스의 연장구간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폐철교에서 시작하여 3.6km 정도 걸어서 도착한 백마고지역, "백마고지역-소이산-노동당사-도피안사-학저수지-덕고개마을-강회동-칠만암" 까지 17km/8시간20분 소요된다고 한다. 지금 현재 시각은 11시다. 안내판대로라면 쉬지 않고 걸어도 오후 7시20분이 되서야 종점 '칠만암'에 도착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17km에 8시간20분이 걸린다니 거리든, 시간이든 뭔가 잘못된 것 같다. 17km거리가 틀리지 않는다면 4시간30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시간이 맞는다면 적어도 30km거리는 능히 될 것이다. 소요되는 시간 보다는 17km라는 거리가 맞는다면 귀가에 별문제가 없겠지만, 반대로 소요되는 시간(8시간)이 맞는다면 오후7시경에 종착지 '칠만암'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과연 이 시간에 가능할까! 귀가나 할 수 있을까! 초행길인데.. 어쨌든 이미 발길은 칠만암을 향해 철원 땅을 걷고 있다.
길 양편에 태양열집열판이 인삼밭 차양처럼 설치되어 있다. 집열판이 설치된 터가 적지 않은데, 그 밑은 작물재배는 안될까? 저 설치물은 인체에 有害는 없을까? 태풍에 나무가 뿌리 채 뽑히고 전봇대가 쓰러지는데 저것은 견뎌 낼 수 있을까? 좁은 국토에 저걸 얼마나 설치해야 원자력발전량을 대처한단 말인가!
꾸불꾸불 휘돌아가는 예쁜 흙길에 마냥 즐거워야 할 마음이 이래저래 씁쓸하다.
폐철교에서부터 걸어온 길을 돌아본 정경이다 경원선철교가 터널로 이어져 백마고지역을 향하고 있다.
나도 지금 백마고지역을 향해 걷고 있다.
용담사거리에서 바로 직진,
거리표시가 정확하지 못하다. 총 17km라면 이 지점은 15.9km가 맞다.
콩밭을 지나가며 드는 생각, 콩서리해서 구워먹기에는 이미 때가 지나갔다.
역고드름시발점에서 25분 정도 걸어온 용담쉼터, 우측 숲속에는 맑은 물 흐르는 계곡이다.
우측 옆을 바라본 아름다운 가을 풍광이다. 길 옆 콩밭너머 숲속에 시내가 흐르고 그 너머 둔덕 위는 철원평야가 아닐가싶다.
평화누리길 좌측 둔덕에는 곰보에 거무죽죽한 덩어리 큰 현무암들이 쌓여있다.
돌들이 흙에 묻혔던 흔적으로 보아 그 위 도로를 낼 때 땅속에 묻혀 있던 돌들을 들어낸 것이겠다.
이 많은 콩깍지들이 지금은 다 어디로 갈까? 옛날에는 농가마다 소를 키워 소여물꺼리였다. 가마솥에 작두로 썬 짚과 콩깍지 그리고 쌀겨 등을 넣고 쇠죽을 쑤었다. 밭갈이라도 하고 온 날에는 콩도 넣어 푹 끓여 여물통에 담아주면 허연 침을 질질 흘리도록 그렇게나 좋아하며 달게 먹던 옛 광주군 돌마면 하대원리 외갓집 소가 생각난다.
길 안내 리본도 이정표도 보이지 않아 벌판을 이리저리 왔다갔다 헤매길 30분, 겨우 환경감시원을 만나 길을 물었더니 일러주며 한마디 덧붙인다. 이곳 사람들이 외지인 들고나는 것이 싫어 리본을 수거해 없앴다는 것이다. 허기야 남의 가을걷이를 차떼기로 훔쳐가는 사람들도 있다 보니 가을걷이 널려 있는 들녘에 외지인들이 드나드는 것이 곱지만은 않겠다.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왠지 마음이 개운치 않다. 허참 ! 어쩌다 세상이 이리 불신 투성이일까!
동쪽 벌판(용암대지)의 모습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철원평야라고 부르는 철원 용암대지 내부에는 야트막한 독립구릉이 여러 개 존재합니다. 이는 용암이 지표를 메워 평탄한 철원 용암대지를 형성할 때 기존의 산지가 용암에 완전히 매몰되지 않고 용암대지 상에 마치 섬처럼 돌출된 채로 남겨진 것입니다. 이러한 돌출된 지형을 스텝토(steptoe)라고 부릅니다.
그 아름다웠던 황금들녘이 가을걷이 끝난 후 트랙터의 바퀴자국으로 난장판이 따로 없고 황량하기 그지없다.
그나마 멀리 고대산이 정갈스럽다.
걸어온 길 다시 돌아보니 들판너머 고대산의 자태가 자못 웅대하다.
농로에서 37번국도와 백마고지역으로 나가는 길목이다. 일단은 백마고지역이 평화누리길 시발점인지 아치 파고라라도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 농로(평화누리길)를 이탈한다. 갈길이 아득 묘연한데 발길은 자꾸 泰然自若이다.
백마고지驛을 눈도장 찍고 그 앞에 정차해 있는 驛間 연계 운행하는 빨간 버스를 볼 수 있었다. 쇠둘레길을 완주하고 나면 남수동정류장에서 10번 마을버스를 타고 동송읍 이평리 정한약국 앞에서 13번 마을버스로 환승해서 다시 이곳 백마고지역에서 저 버스를 타고 연천역으로 가서 경원선 통근열차를 타고 동두천역에서 1호선 전철로 환승해야 한다. 12월이 되면 '연천역~백마고지역'간 복선공사가 준공되면 예전처럼 다시 동두천역에서 이곳 백마고지역까지 경원선통근열차로 올 수 있겠다.
백마고지 플랫폼도 확인해보고,
역광장도 둘러보고 아무리 둘러봐도 평화누리길의 아치 파고라나 안내판은 볼 수가 없었다. 이로써 미루어볼 때 13코스 시발점은 12코스 舊종착점 역고드름에서 250m 떨어진 경기도 연천군과 강원도 철원군 경계선인 폐철교 앞 종착점이 맞다. 백마고지역 광장에는 1년 전 동무들과 찾아왔을 때 한 끼 식사를 했던 천막 음식점이 조금은 세련된 모습으로 반긴다.
백마고지역에서 들판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평화누리길 이정표가 37번국도 옆 평행으로 뻗은 좌측 농로를 가리키고 있지만, 무시하고 마주 보이는 소이산을 향해 평야지대를 가로지른 농로로 들어섰다.
헤매던 들녘 끝자락에 있는 소이산으로 들어서는 길목이다. 들판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리본이 소이산 가는 길 안내판 옆에서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앞에는 온통 철조망에 갇혀 있는 수풀 지뢰지대를 좁은 길을 내서 숨통을 트고 있다.
철조망에 묶인 숲을 들어서면 지뢰꽃이 핀단다.
소이산을 향해 좁은 통로로 들어섰다.
비밀통로 같은 길 양 옆 철조망을 쳐다보니 역삼각형얼굴의 경고판이 붉그락푸르락 얼굴에 역성을 내며 지키고 있어 섬뜩한 느낌이 든다.
소이산 줄기를 따라가는 길을 걸어가며 좌측에 뻗어내린 소이산 능선을 바라본 풍경이다.
소이산은 철원평야와 북쪽 산맥을 한눈에 담을 수 있어 관광요소의 하나가 되었다. 해발 352m 높이의 크지 않은 소이산은 고려시대부터 외적의 출현을 알리는 제1爐봉수대가 자리하던 곳일 만큼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지이다. 철원평야지대에 우뚝 솟아오른 까닭에 정상에 오르면 노동당사를 위시해서 철원역, 백마고지, 김일성고지, 제2땅굴, 아이스크림고지 등 철원 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6.25전쟁 이후 미군의 레이더기지로서 일반의 출입이 통제된 지역이었고, 일제 강점기에 사태방지책으로 조림한 아카시아가 주종을 이루던 곳이나 주변이 지뢰밭이어서 사람의 발길이 끊겨 자연 생태가 되살아난 곳으로 생태계연구에 더없이 귀중한 곳이 되어 지금은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이라는 이름으로 길을 열었다. 지금도 산책길을 제외한 구간은 지뢰지대로 철책이 둘려져 있다.
소이산 고갯길은 마루턱으로 휘어 오르고 하늘은 더없이 푸르네.
짙은 향기 따라 눈길을 주니 길가에 무리지어 핀 들국화가 소담스럽다.
뒤돌아서서 바라보니 걸어온 길 끝이 없더라
고개마루턱에 오르니 敵戰車 침입방지시설물이 좁은 길목을 지키고 있어 애잔한 분단의 아픔을 느끼지만, 요즘 심상치 않게 급변하는 국내외정세에 우려스러운 마음, 그나마 이렇게나마 존재해 있는 시설물이 작은 위로가 된다.
고개마루턱에서 150여m 거리를 내려오니 소이산 입구다. 여기서 칠만암이 10.1km라니 해 떨어지자 목적지에 도착하겠다싶다 서둘러가야 하건만 그냥 국도를 따라가면 모를까 발길은 거리와 상관없이 이 소이산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겠단다.
얼마나 시간이 소요될지 몰라도 이제부터 평화누리길 코스를 이탈하여 소이산을 둘러보기로 한다.
철원을 한눈으로 볼 수 있는 중요한 곳이기에..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해가 그대로 예술이다.
소이산 오르내리는 길은 前方의 모든 산이 그러하듯 차량통행이 가능하도록 넓다.
길이 이토록 아름답고 정답게 느껴 질 줄은 예전에는 미처 몰랐지...
그런데, 지금은 저리 되도록 방치하는 거요 뭐요? 이 나라의 당면한 지금의 처지를 제대로 알고 잘 하세요!
LOVE(사랑), JOY(기쁨), PEACE(평화), HOPE(희망), PAITH(신념) 이 좋은 염원 중에서도 병사들이 더욱 간절하게 바라던 것은 평화였었구나! 그렇게 귀중한 피로 얻은 평화를 지금 우리는 잘 지키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말 미안하고 부끄럽구나!
단어를 나열한 구성과 빛깔에서도 평화는 줄기요 뿌리다. 사랑도 기쁨도 신념과 희망도 줄기로부터 돋아난 가지에 불과함을 강조 했듯이 평화 없는 곳에 어찌 사랑과 신념이 기쁨과 희망이 존재할 수 있을까!
금학산, 고대산 그 앞에 보개봉이 확인된다.
소이산(해발362m)은 비록 작은 산이지만, 철원의 평야지대에 우뚝 솟아 있어 외적 침입시 동태를 용이하게 살필 수 있어 고려시대부터 외적의 침입을 알리던 제1호 봉수대가 위치하던 곳이다. 한국전쟁 이전 구철원의 화려했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철원역사의 중심지로 소이산 정상에서 백마고지, 김일성고지(고암산), 철원역, 제2땅굴, 노동당사 및 최대의 철새도래지인 철원평야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다.
소이산 전망대
6.25 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백마고지와 김일성고지를 줌으로 당겨본 정경이다.
앞은 백마고지 뒤 험한 바위봉우리는 김일성고지(高巖山)이다.
미군은 이곳에서 전방을 살피고 레이더를 통해 적의 동태를 감시했고 파악해서 국군과 유엔군에게 상황을 알렸을 것이다.
철원평야는 물론이요 북한의 요새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중요한 군사시설이 지키던 임무를 박탈당했으니 지금의 긴박한 정세에서 심히 걱정스럽다.
좌측 앞 나란히 있는 봉우리 셋은 세자매 봉우리 그 뒤 백마고지 너머 흰 岩峰은 김일성 고지이다.
아이스크림봉은 삽슬봉의 별칭으로, 드 넓은 재송편의 한 가운데 솟아있는 해발219m의 얕은 산이지만, 입지적 이점이 많아 6,25전쟁 때는 피아간에 처절한 쟁탈전과 포격이 극심했고 산이 마치 아이스크림 녹듯 흘러내렸다 하여 아이스크림고지라고 불린다고, 예전에 이 산 밑에 삽송리(揷松里 또는 森松里)라는 마을이 있어서 이 산을 삽송봉(揷松峰/삽슬봉은 삼송봉의 구전 변형체)으로 불렀고 또 그 모양이 흡사 투구 같다하여 투구봉으로도 불린다. 또한 삽슬봉은 고려 시대에 산정상에 봉수대를 만들어 북쪽 평강의 진촌산 봉수대와 남쪽의 할미산(구수봉) 봉수대를 연결했다.
<지뢰 융단 > - 정 춘 근-
우리는 지뢰융단을 펼쳐놓고서는 당신을 기다리지요
지뢰를 즈려 밟고 아름다운 피보라 친 뒤에 끊어진 다리로 엉금엉금 기어오실 당신을 기다리다 철조망은 녹이 슬고 지뢰 융단이 낡았지만, 오시는 길목마다 총이며 대포를 장진해 놓고 당신 가슴에 환영 축포로 날리는 기다림은 여전하지요. 반도의 푸른 하늘에 인공위성 전폭기 띄워 놓고 서로를 손꼽아 기다리는 우리는 한 민족 위대한 배달민족이지요 오늘도 우리는 지뢰 융단 펼쳐 놓고 당신을 솝꼽아 기다리지요.
좌측 앞은 동우산성, 중심부의 보개봉 뒤 뾰족한 봉우리는 금학산, 그 옆 우측에 고대산이 목격된다.
옛 미군막사 건물 좌측 바로 앞 봉우리가 봉수대 봉우리이다.
나는 국제정세를 논하고 싶지 않다. 그저 지구촌에서 가장 헐벗고 가난한 이름도 모르는 작은 남의 나라의 평화를 지키고자 귀중한 목숨을 붉은 피로 뿜어내고 이 땅에서 산화한 유엔군들의 처절한 심경을 헤아려 보자니 마음이 먹먹하다. 그 은혜로운 젊은 외국군인들이 이 나라를 지키고자 한 때 머물렀던 낡은 저 막사를 보는데 가슴 아리다. 은혜를 입은 우리는 숭고한 그들의 넋을 이리 대하고 있다. 이것이 정상적인 태도 일까? 제대로 된 정부라면 하루라도 빨리 저리 방치하지 말고 마땅히 보수하고 보존해야 할 것이다.
소이산 정상, 전망대를 내려와서 바라본 모습,
봉수대로 오르는 계단,
봉수대로 가는 데크계단에 단풍이 꽃잎처럼 덮여 가을 풍취를 더하고 있다.
봉수대 대신 팔각전망대가 자리하고 있다.
내려다보이는 길, 철원노동당사 가는 길,
平康高原, 鐵原歷, 第二金融組合址, 氷倉庫, 農産物檢査所, 近代文化遺蹟館, Saemtong(철새도래지), 月井驛, 철원두루미관, 철원평화광장, 平和展望臺, 東松貯水池, 製絲工場址, Ice Cream hill .
세자매봉, 고만고만한 세 봉우리가 나란히 정답다.
팔각정 내부의 모습이다. 대형 유리창에 투시되는 풍경속 요소의 지명이나 건물의 이름을 유리에 명시해 놓았다.
팔각정을 내려와 기념으로..
鐵의 장막지대를 관망하고 내려오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소이산을 돌아보는데 1시간을 소비했습니다.
소이산 입구 앞에 세워진 이정표에는 이곳에서 가볼 수 있는 명소들의 거리를 알려주는 친절을 베풀고 있다.
소이산 입구를 뒤로하고 철원노동당사址를 향해 길 나선다.
붉은 포장 검은 포장 두 길이 나란히 정답다. 변화 없는 흉악한 북한정권과 대한민국이 과연 저리 정답게 갈 수 있을까!?
길가 우측에 안내판이 서있다. 노동당사로 가는 길 안내판에 동주산성이 소개되고 있다.
또 다른 안내게시판은 철원수도국址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리본은 대충 알고 가라는 듯이 노동당사 있는 곳으로 길을 안내하고 있다.
그윽하기 이를 데 없는 길가 풍경, 사랑과 희망이 샘 솟고 평화가 머문 곳이겠다.
갈림길이다. 우측은 수도국址가 있는 새우젓고개로 오르는 언덕길, 좌측은 노동당사로 가는 길이다.
잠시 갈등이 생긴다. 그러나 이내 평화누리길을 이탈해서 수도국지를 보고 가기로 했다.
(수도국址)
이곳 수도국은 일제 강점기에 구철원 시가지 주민의 상수도 공급을 위해 설치한 저수탱크 및 관리소 건물이라고 한다. 1937년에 발행된 철원읍지에 의하면 당시의 급수인구는 500가구에 2,500명이었고, 1일 급수가능량은 1,500㎥로서 강원도내 유수의 상수도 시설을 자랑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인1936년에 만들어진 수도국이다.
이 시설은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정수장,과 저수조, 관리소 등을 갖추고 있다.
저수조
아름다운 이 땅에, 어쨌거나 일제는 건설를 했고, 동족은 참혹한 사연을 남겼다.
6.25전란 때에는 노동당사와 내무서에 감금되어 있던 친일, 반공인사들을 이곳으로 이송 감금조치하고 있던 중 국군이 북진하자 약 300여명의 인사들을 총살 또는 저수조에 생매장하고 도주하였다고 한다. 아직도 전쟁당시의 총탄자국과 폭파된 흔적이 시설물 곳곳에 남아있다.
새우젓고개 마루턱 우측에 있는 이 수도국址는 일제강점기 철원읍 시내에 상수도를 공급하던 곳입니다.
당시에 500가구 2,600여명의 급수를 담당하던 강원도 내의 유일의 상수도 시설로 일제강점기 철원읍의 경제적 사회적 위상을 짐작케 합니다. 6.25전란 당시 반공투사들을 주살하거나 생매장한 학살의 현장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현재 등록문화재 제160호로 관리되고 있다고 합니다.
관리소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제160호로 등록된 유적이다.
반공투사들이 공산당에 의해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한 곳이라 그런가 유난히 단풍이 핏빛처럼 붉디붉다.
수도국 터를 둘러보고 노동당사로 가려고 도로에 나섰는데 고갯마루턱에 안내판이 보인다. 그럼 그냥 외면할 수 없지..
평화누리길 이전에 생긴 녹색길. 안내판을 들여다보니 평화누리길코스와 거치는 곳이 거의 같다.
평화누리길은 국도를 걸어서 소이산입구-노동당사-철원향교-덕고개-칠만암인데,
녹색길은 산 등성이 길 따라 노동당사-소이산-수도국지-철원향교-학저수지-칠만암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진즉에 알았으면 소이산에서 바로 노동당사를 거쳐서 이곳으로 왔더라면 좋았을 것을..
생각 끝에 우선 노동당사를 둘러보고 다시 이 자리로 오기로 한다.
새우젓고갯마루에서 좌측(남향) 동주산성으로 오르는 입구이다.
새우젓고개에서 다시 노동당사삼거리로 되돌아왔다 부부가 도리깨로 들깨를 털고 있는 주변이 온통 들깨향기로 진동을 한다. 그 너머로 철원노동당사가 보인다.
이 자리에서 목적지 칠만암이 9.3km, 그렇다면 노동당사를 둘러보고 다시 이 자리에 오면 앞으로 걸어야할 길이 10km가 넘겠다.
6.25 당시 악명 높던 노동당사 그 주변에 단풍이 참 곱다.
《철원노동당사 》
1945년 8월15일 해방 후 북한이 공산독재 정권 강화와 주민통제를 목적으로 건립하여 6.25 전쟁 전까지 사용된 북한 노동당 철원군 당사로서 악명을 떨치던 곳이다.
북한은 이 건물을 지을 때 성금이라는 구실로 1個 里 當 쌀 200가마씩 착취하였으며, 인력과 장비를 강제 동원하는 한편, 건물의 내부작업 때는 비밀유지를 위하여 공산당원 이외는 동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멘트와 벽돌조적만으로 지어진 무철근 3층 건물로써 당시 이 건물 일대는 인구 3만명이 살았던 철원읍 시가지였으나 62.5전란으로 모두 파괴되었고 유일하게 노동당사 건물만 남아 있다.
여기저기 포탄자국과 앙상한 뼈대만 남아 있는 노동당사는 6.25전쟁의 아픔과 비극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대표적인 건물이며 철원이 얼마나 치열한 격전지였는지 짐작이 간다. 공산치하 5년(1945년-1950년)동안 북한은 이곳에서 철원, 김화, 평강, 포천 일대를 관장하면서 양민수탈과 애국인사를 체포하였고 고문과 학살 등 소름 끼치는 만행을 수없이 자행하였으며, 이곳에 한번 끌려 들어가면 시체가 되거나 반송장이 되어 나올 만큼 무자비한 살육을 저지른 곳이라고 한다. 이 건물 뒤 방공호에서는 많은 인골과 함께 만행에 사용된 수많은 실탄과 철사줄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2002년 5월27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2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노동당사 우측면
통로 모습
우측 뒤 모습.
건물 뒤 모습 여러 곳에 철조 버팀쇠로 고였다.
좌측면의 모습
좌측에서 본 노동당사 전면 모습.
노동당사를 탐방하고 노동당사삼거리에서 우측에서 다시 좌측 새우젓고개로 갑니다.
다시 새우젓고개마루턱에 도착하여 좌측 산길로 접어들어 동주산성으로 향한다.
새우젓고개는 옛날 한강으로부터 임진강 한탄강 유역을 따라 배에다 실고 운반해 온 새우젓을 용담에서부터 새우젓장수들이 철원읍 장에 팔기위해 지고 가다 이 고개에서 쉬어 가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새우젓고개는 일제강점기 남쪽으로 통하는 주민들의 생활이동로 였고 6.25전쟁 때는 이 골짜기를 통과하던 피난민들이 인민군의 협공을 받아 몰살당했던 곳이기도 하다.
수도국지 맞은편에 위치한 동주산성 들머리는 가을이 깊어 갑니다. 머지 않아 저 아름다움 시들고 그 위로 흰 눈이 내리겠지 누구나 가고, 누구나 가야할 우리들의 길입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태어나서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을 내가 부모 되어 알아보리라~ " 어머니! 저 가을빛을 볼 뿐인데, 당신이 사무치도록 너무 그립습니다!
쉼 없이 300m 정도 오르니 데크전망대가 있는 정상부에 도달했다 성벽을 찾아보려니 주변은 돌보거나 가꾸지 않아 덤불과 잡초가 무성하여 모두 제초하지 않고서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데크전망대조차 덤불에 덮여 있다. 이리저리 둘러보다 실망과 아쉬운 마음으로 능선을 타고 철원향교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잡초를 헤치고 간신히 데크에 올라가서 이 풍경 한 장 담고 내려왔다.
1km 이상 걸어오는 동안 이정표를 볼 수 없었다 잡초에 덮여 흔적도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 내려가다가 확인도 못할 번한 이정표. 산을 헤어날 때 까지 이정표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좀 넓어진 길을 만나 따라가지만, 잘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정표도 없는 산 중에서 내가 얼마나 가고 있는지, 여기는 어디쯤인지, 철원녹색길은 가꾸지 않아 이미 쇠락하여 찾는 이 없고 자연으로 복귀 중이다.
또한 이 일대는 군부대훈련장이었는지 여러 가지 형태의 훈련장과 시설물들이 보이는데, 그 마저도 잡초와 덤불들이 뒤덮이고 제구실한지 오래일세.
한 봉우리 정상 모습이다. 예전에 병사들이 훈련 받거나 모여 있던 공터 같은 느낌이 짙다.
전차나 장갑차 또는 포를 배치하는 진지로 보인다. 북한은 변함이 없는데, 이렇게 군 작전시설을 폐쇄하고 어쩌자는 것인지..
봉우리를 넘고 넘어도 이정표는 없다. 길을 잘못 들어섰나 싶어 걱정이 앞서니 더 이상 길만 따라갈 수가 없어 軍작전도로를 벗어나 길도 없는 곳을 헤매다 겨우 마을을 거쳐 국도를 찾아 내려왔다.
삼거리 전봇대에서 나풀거리는 리본을 찾을 수 있었다.
호젓한 자연에 심취하고자 녹색 '한여울길'따라 산으로 들어섰다가 마음고생만 했다네.
삼거리 500m 앞에서 우측으로 접어들어 계속 도로로 가면 헤매거나 고생 안하고 좋겠지만 인도가 따로 없는 길에 위험스럽다.
길 따라 200m정도 가고 있다.
한다리에 이르기 전에 우측 차도로 가면 철원향교에 이르건만, 다리 건너 전봇대에서 리본이 나풀나풀 몸짓을 한다.
世稱 한다리 중간에서 바라본 풍경이자 내가 가야할 방향이다. 우측으로 향교로 가는 길이 보인다. 리본은 이 하천 둑으로 나를 이끌어 갈 생각인가 보다.
다리를 건너고 보니 다리 끝에 평화누리길 리본 달린 전봇대 옆에 안내판이 있다. 바로 '한여울길'안내판이다 그런데 평화누리길과 코스가 같다. 철원의 평화누리길은 철원의 '한여울길'을 활용한 것임을 알겠다. 그렇지만 나는 수도국지에서 동우산성을 거쳐 산길로 여기까지 왔으니 코스를 조금 이탈한 모양새다.
한다리 끝 우측 옆으로 내려간다.
한다리 위에서 바라보던 하천 둑 위로 가는 길은 그대로 자연과 어우러져 하나되는 즐거운 여정이다.
논에 황금 이삭들의 물결이 아쉽다. 멀리 금학산이 우뚝하다.
트랙터가 다닌 흔적이겠지만, 그러면 어떤가! 자연이 숨 쉬는 곳에 마치 두 길이 사이좋게 나란히 가는 듯이 보이니 보는 나도 덩달아 가슴이 따습다.
둑길이 산으로 인해 중단되고 개울을 가로질러 건너편 둑으로 길이 보이데, 리본은 나뭇가지에서 나풀나풀 춤을 추며 가던 방향 산자락 밑 쌓은 축대를 밟고 따라오라네.
산자락 벼랑 밑 모퉁이를 돌아 나가고 있습니다.
산모퉁이를 돌아가서 보니 다시 둑 위로 오르는 옆구리 傷한 나무계단이 아픈지 삐걱대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제 나타났는지 산에 막혀 보이지 않던 정다운 길이 놓여 있다. 이 길을 보는데 황순원의 분신 같은 소년소녀가 떠오른다. 언제부터일까? 나도 그 소년소녀의 순수한 마음처럼 살고 싶어 진 것이..
저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도 내가 감싸고 보호해 줄 소녀는 없다.
《화개산 도피안사 / 花開山 到彼岸寺》
화계산 도피안사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다. 안내문을 옮깁니다.
'도피안사(到彼岸寺)는 "깨달음의 언덕으로 건너간다."라는 뜻을 가진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末寺다. 국보 제63호 鐵造毘盧遮那佛坐像이 모셔져 있고 보물 제 223호 三層石塔이 있다. 통일신라 제 48대 왕인 경문왕 5년 (865년)에 도선국사가 철원 지방의 향도 천여명을 거느리고 산수가 좋은 곳을 찾던 중 화계산 현 위치에 터를 잡고 도피안사를 처음 세웠다. 大韓帝國 光武 2年(고종35년/1898년)에 화재가 발생하여 소실된 것을 당시 주지스님이었던 법운스님이 다시 세웠다. 그 후 1941년 1월 당시 주지 스님이었던 김의권 스님이 사찰을 고치고 정비하여 정통사찰로 이어져 오게 되었다. 광복 후에는 철원 지역이 공산 치하에 있었던 시기로 사찰도 공산치하에 있었다.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해 완전 소실된 것을 1957년 11월 육군 제15사단이 복원하여 軍에서 관리하게 되었다.1986년에 사찰 관리권이 민관으로 이관되면서 1988년부터 정부의 지원으로 대적광전과 삼성각을 개축하고 범종각, 사천왕문 일주문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천왕문/四天王門)
사대천왕은 안 좌우에 모셔져 있고 편액은 없다.
사천왕문 앞에서 바라본 정경입니다.
스님들의 생활 공간 요사채
범종각 옆 수령 500년이 넘는 멋진 느티나무 한그루 주변을 압도하고 있다.
대적광전/大寂光殿
《도피안사 삼층석탑/到彼岸寺三層石塔》
대적광전 앞에 세워져 있는 보물 제223호 도피안사 삼층석탑은 그 구조가 특이하다.
지반위에 하나의 두꺼운 방형의 지대석 위에 바로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8각 면석 각면에 眼象을 새긴 기단석 위에 覆蓮이 조각된 하대갑석을 올려 1층 기단부를 두고 그 위에 꾸밈이 없는 8각의 높은 기단면석을 올리고 그 위에 두꺼운 8각 면석을 상하 구분해서 상부는 8각면 그대로 하부는 8면에 두루 仰蓮을 조각한 상대갑석을 덮어 2층 기단부를 두고 바로 상대갑석 위에 3단으로 표현된 다소 높은 옥신괴임을 두었는데 이러한 방식은 석탑의 기법이라기보다는 불상의 기단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상대갑석 위 옥신괴임 위에 사면 각 모퉁이에 隅柱를 표현한 1층 탑신을 올리고 다시 탑신 위에 4단으로 옥개받침이 표현되고 적당한 높이의 전각이 표현된 屋蓋石을 올렸다. 2~3층은 모두 옥개받침만 3층으로 표현했을 뿐 형식에 있어서 1층과 같은 모습이다 상륜부는 갈라진 露盤이 있을 뿐 나머지 부분은 유실되어 있다. 이 탑은 법당 안에 모셔진 철조 비로자나불상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불상과 같은 시기인 통일신라 경문왕 5년(865년) 절을 건립할 당시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到彼岸寺鐵造毘盧遮那佛坐像》國寶 第63號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도피안사 적광보전 내의 이 불상은 몸체와 대좌가 모두 철로 된 신라말의 보기 드문 불상이다. 뒷면에 새겨진 139자의 銘文 가운데 "함통6년 기유 정월"의 문구가 있어서 신라 경문왕 5년(865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머리에 肉髻(머리위에 혹처럼 올라온 살 智慧를 상징) 의 표현이 분명하지 않은 점, 계란 모양의 단정한 얼굴, 이상적이며 생동감이 결여된 극히 현실적인 체구 등에서 참선하고 있는 스님을 대하는 듯한 친근한 느낌을 받는다. 법의는 얇게 빚은 듯이 평행 옷 주름이 전면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러한 옷 주름은 9세기 후반기 불상에 특징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특히 명문에 의하면 이 불상은 철원군의 居舍 신도 1,500여명의 열렬한 신앙심에서 만든 것으로써 당시의 활발했던 불교신앙 結社의 한 단면을 엿 보인다. 이와 함께 이 불상은 당시 유행하던 철조비로자나불상의 새로운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대적광전 또는 대광명전으로 불리는 법당은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신 법전입니다. 毘盧遮那라 하는 것은 불의 광명이 어디에나 두루 비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다시 말해 비로자나 부처님은 진리의 몸이 온 누리에 두루 비치는 큰 빛을 내어 모든 이를 이끌어 주시는 부처이십니다. 비로자나부처님의 沈黙, 寂照의 아름다움은 최상의 佛敎 美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엄숙하며 평화스러운 美라 하겠습니다. 비로자나 부처님은 왼손 검지를 오른 손으로 감싸 쥔 智拳印을 하고 있습니다.
1950년 6.25전쟁으로 도피안사가 전소되면서 대적광전에 모셔져 있던 불상도 함께 파묻혀 7년이 흘러간 1957년 당시 육군 제15사단장 이명재 장군의 꿈에 부처가 나타나 “내가 지금 땅속에 묻혀 있어서 너무 답답합니다. 나 좀 꺼내 주시오”라고 해서 꿈에서 들은 곳을 장병들을 데리고 가서 파보니 불상이 나왔다고, 이런 인연 덕분에 철조 비로자나불은 다시 도피안사에 모셔지고 절의 재건도 이명재 장군이 지원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도피안사 대적광전 안에 이명재 장군과 당시 불상을 처음으로 발견했던 장교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
(범종각/凡鐘閣)
(극락보전/極樂寶殿)
(삼성각/三聖閣)
사찰은 부처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그윽한 경내 풍경만으로도 마음이 고요로워 진다. 찾는 이의 마음을 자애롭게 품어 평안을 안겨준다.
경내를 대강 둘러보고 다시 일주문을 향하고 있다.
도피안사 일주문과 200여m 거리를 두고 마주보고 있는 철원향교에 들렸다.
《철원향교/鐵原鄕校》
鄕校는 公子의 儒敎를 바탕으로 한 교육기관이다. 그러므로 향교에는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를 위시하여 儒學에 지대한 공헌을 한 현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大成殿)이 존재한다. 또한 조선시대 유교문화이념을 수용하기 위해 중앙의 성균관과 연계시켜 사회질서를 유교문화논리에 접목하여 과거제 운영을 유교교육과 연계시키기 위한 사회문화기초기구로서의 기능을 담당한 곳이다. 지금의 공립학교와 갈음할 수 있겠다.
(명륜당/明倫堂)
명륜당은 조선시대 儒生(선비)들이 강론과 사서오경 등 선비사상과 글을 익히며 과거를 대비하던 강의실이며 옛 공립학교라고 할 수 있다. 명륜당으로 오르는 길(돌계단)은 중앙과 좌우 모두 3개이며 대성전으로 들어서는 댓돌도 3개, 문도 3개이다.
명륜당 뒤에는 한 단 높은 터에 文宣王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大成殿과 그 앞 마당 좌우로 東廡 .西廡가 있다.
동무와 서무는 성현의 위패를 모신 건물이다.
대성전 좌측 건물 西廡를 담은 사진이다.
明倫堂명륜당에 오르는 길(돌계단)과 명륜당건물 뒤 벽에 문이 셋이 있으며 대성전으로 오르는 돌계단도 3개, 명륜당과 대성전을 구분한 담에도 문이 3개가 있다. 따라서 향교 정문을 들어서 대성전에 이르기까지 모든 통로와 문은 3개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文宣王 公子 및 賢子들의 神位를 모신 대성전에 祭祀를 올리는 禮의 法道로 祭官과 從事者의 길이 구분지어져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경복궁 근정전 앞에 길이 3개로 구분되어 있고 광화문에 문이 3개 있는 것은 君臣간의 길과 문을 구분 지은 것이나. 王陵에서 神道와 王道, 臣道로 구분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명륜당 앞 뜰 좌우로 동측에 東齋 서측에 西齋라는 건물이 있는데 이는 儒學生의 거처로 지금으로 말하면 학교기숙사이다. 명륜당 앞뜰을 측면으로 본 서재의 모습이다 따라서 맞은편에는 동재가 있다.
이곳 이정표를 보니 앞서 수도국지에서 동주산성으로 들어서 길을 해메다 중도에서 큰 길로 내려가지 않고 계속 앞으로 갔다면 향교 옆 이 길로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철원향교 우측 뒤 산자락에서 본 풍경이다.
철원향교를 바라보는 좌측면의 이 길로 오르면 내가 들어섰던 새우젓고개로 내려간다고 한다. 결국 나는 새우젓고개 들머리로 들어서 동주산성을 거쳐 이 길로 내려올 심산이었는데, 이정표도 보이지 않고 길은 야생의 자연으로 돌아가도록 방치되어 결국 길을 헤매다 도중에 내려간 것이다.
철원향교에서 다시 도피안사 일주문 앞 하천 둑 위 길로 학저수지로 향한다. 또 다른 길은 철원향교 앞 도로를 따라가면 덕고개마을을 거쳐 칠만암에 도착할 수 있겠지만 그러면 학저수지를 근접해서 볼 수가 없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을 두고 어찌 그 겁나는 차도를 따라 가겠어요!
걸어가면서 눈길만 살짝 돌려도 별천지랍니다.
아름다운 길 만으로도 부족한지 금학산도 보여주고 보개봉도 보랍니다. 길가에 널어 논 들깨에선 그 고소한 향기를 무한 선사합니다.
툭하면 무릉도원을 빗대시는데, 이만 한 가요?
철원은 율무도 많이 심고 들깨도 많습니다. 길을 가다 보면 구름 한 점, 풍경 좋고 길도 예쁩니다.
낮은 산모퉁이를 돌았을 뿐인데 갑자기 길은 낮아지고 옆에 따라오던 냇가에 적 탱크나 장갑차 진입방지시설물인 철제빔과 콘크리트 설치되어 있습니다.
《학저수지댐/鶴沮水池堤》
학저수지 댐 앞에 정연하게 놓인 2차선 징검다리입니다. ㅎㅎ
하천을 건넜으니 다시 방죽으로 오르는데요 저 둑 위가 아주 중요합니다. 길은 바로 가는 길과 우측 방죽 따라 가는 길이 있는데 그리 가면 고생길입니다. 바로 가는 길도 버리고 우측으로 가는 길은 외면하고 좌측 산자락 밑으로 가야 합니다.
좌측 산자락 끼고 가는 어떻게 보면 수문조절 댐이 있고 철망으로 담이 둘려있어 길 같지 않아 보입니다.
산모퉁이를 휘돌아가 보니 탁 트인 저수지 수면 가장자리 산자락 밑에 데크로 놓은 길이 나옵니다.
제법 넓은 저수지입니다. 한바퀴 돌면 4.5km라고 합니다.
수위조절 댐의 모습입니다.
이제부터 잠시 코스를 이탈하여 鶴저수지를 함께 둘러보겠습니다. 감상은 각자 마음에 담기입니다.
우측 산자락 옆 도로를 따라 2km정도 가면 덕고개마을이 나오는데 도로공사 중이니 그냥 저수지둘레길 따라가다가 앞에 보이는 산자락 저수지가에 쉼터와 화장실이 있는 곳에서 공사 중인 도로로 나가서 진행방향으로 300여m가면 덕고개가 나옵니다. 덕고개에서부터는 리본이 안내를 충실히 하고 있습니다.
우측 비닐하우스 옆으로 도로가 있는데 비닐하우스 있는 곳으로 가서 도로로 나가도 도로를 따라 가면 덕고개에 이르게 됩니다.
어디 숨었다가 나타난 리본이 반가워서..
비록 평화누리길 이정표는 아니지만 덕고개란 글자를 보니 제대로 가고 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던 곳입니다.
쉼터와 화장실이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우측 도로로 나가 진행방향으로 산을 끼고 갑니다 도로는 공사 중이었습니다.
호수를 돌아보고 다시 화장실 있는 곳으로 되돌아와서 좌측 도로 덕고개로 가야 칠만암으로 갈 수 있습니다.
학저수지 북쪽 야영장에서 바라본 남쪽 풍경이다.
오늘은 어차피 칠만암을 찾아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어 호수를 한바퀴 돌아 다시 철원향교 앞 10번 버스정류장에 도착하기 직전에 저 만치 달려오던 버스가 나를 외면하고 그대로 지나갔다. 1시간을 기다리기도 그렇고 다시 노동당사 앞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서 13번 버스를 타고 백마고지역에서 내려서 경원선통근열차연계버스를 타고 연천역에 도착하여 통근열차로 바꿔 타고 동두천역에서 1호선 전철로 귀가하였다.
이후 사진은 재차 찾아와서 담은 사진들입니다.
덕고개 마루턱입니다. 도로공사중입니다.
고개마루턱너머로 덕고개마을과 들녘, 그리고 산이 빼꼼히 얼굴을 내보입니다.
보이는 들녘을 가로질러 산자락까지 가면 숨은 듯이 흐르는 한탄강협곡입니다. 그 협곡에 칠만암이 있는 곳입니다. 칠만암은 암자입니까? 글쎄요? 일단 함께 가보십시다.
덕고개건강장수마을이라.. 德을 쌓아 건강하고 오래 사는가봅니다.
이곳 한탄강에서 귀가 때는 이 도로에서 10번버스를 타고 동송시장이나 이평리(정현약국)종점에서 내려 '백마고지역'으로 가는 13번 버스로 환승할 수 있습니다.
리본은 길을 어찌 알고 들판으로 먼저 들어섰느냐 ?
가을걷이 지킴이 허수아비처럼 건들거리며 1km 정도 걸어가면 한탄강협곡입니다.
돌아서서보니 걸어온 길이 아득한데..
가야할 산자락은 저만치 있네.
또 도로가 나왔네요. 이정표를 보니 칠만암까지 200m랍니다. 하지만 실제로 가보니 1km가 넘습니다. 아무튼 건너편에 가로로 줄지어 있는 숲이 수상쩍네요.
길건너서 뒤돌아본 풍경입니다. 들판 끝에 덕고개 산자락이 너울거립니다.
한탄강협곡 따라 잘 정리된 산책 겸 자전거길입니다. 도로난간아래는 절벽을 이룬 한탄강 옥빛 맑은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단풍 빛깔만 고운 줄 알았더니 한탄강 협곡의 물빛 더욱 고와라.
절벽은 현무암덩어리들을 쌓아올린 성벽 같은 모습입니다.
칠만암 반대방향 포석정(7km)으로 가는 길이라고 합니다.
'이 길의 이름이 '한여울길'이라고 합니다. 이 자리에서 직탕폭포 4.1km, 승일공원9.4km 거리라고 합니다.
길을 따라 초행길을 적지 않게 걸어가건만 칠만암은 아직도 더 가야 하나본데 거리표시가 없어 답답하네요.
한탄강 협곡 따라 물길처럼 가는 길에 바람결에 뜬구름만 세월처럼 스쳐가고
잃어버린 지난 세월 후회는 없다 만은 비우고 빈 가슴속에 바람만 들고 나네. 2018년 10월25일(목) 오후2시11분. -鄕香-
"나뭇잎이 물드는 날에 울긋불긋 아름답게 사랑이 일고 끝없이 펼쳐나간 젊은 꿈이 아름다워- 귀뚜라미 지새울고 낙엽지는 가을에 아 - 꿈은 사라지고 꿈은 사라지고 그 옛날 아쉬움에 그지없이 서글퍼라." (故 최무룡 님의 노래 '꿈은 사라지고'의 가사를 살짝 개사했음.)
리본은 한탄강협곡에 넋을 잃었나보다 끝 모르게 가고 있네.
한탄강 협곡을 끼고 걸어가는 내내 울퉁불퉁 현무암 주상절리에 곱게 수를 놓은 단풍들에 다리 아픈 줄도 모르는 나그네..
거무죽죽 기기묘묘한 현무암, 그 사내다움에 반했는가! 수목은 연지곤지 형형색색 몸치장을 하였구나!
이파리가 특이로운 소나무 세 그루,
털북숭이 소나무 그 모습 기묘하다.
삐죽 뾰족 기묘한 현무암 주상절리에 알록달록 물이 든 단풍, 옥빛 물색이 어우러져 삼중주를 울리고 있다.
크레파스로 그렸을가? 수채화일까?
이정표는 한판강협곡을 끼고 걸어오는 내내 직탕폭포는 401km요, 고석정은 7km요랍니다. 허참!
이제서야 '칠만암'에 도착하는가 봅니다 데크계단이 계곡을 향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왔으니 칠만암은 봐야겠지요?
드디어 칠만암을 볼 수 있는 전망대에 도착입니다.
아! 칠만암, 기기묘묘한 자태로 금강산 봉우리보다 더 많이 솟아오른 그 아름다웠을 7만 봉우리를 몰지각한 인간들이 壽石감으로 몽땅 석재절단톱으로 잘라갔습니다.
몰지각한 사람들에 의해 철저하게 훼손된 칠만암
이 철원용암대지는 신생대 제4기 현무암의 용암류가 골짜기를 따라 흘러내리면서 형성된 화산지형으로서 남한 내륙지역에서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용암대지입니다. 철원 용암대지를 구성하는 현무암의 형성 시기는 약 54만년 전에서 12만년 전으로 추정합니다. 이 현무암의 용암류는 서울과 원산을 잇는 추가령구조곡 하부의 연약한 지점(오리산 452m과 검불랑 지역에서 동북쪽 4km에 위치한 608m고지를 잇는 선)을 따라 솟아올라 물처럼 넓게 퍼져 흐르면서 철원지대의 계곡과 낮은 부분들을 메우면서 현재와 같은 용암대지를 형성시켰는데, 이와 같은 화산 불출양식을 열하분출(裂罅噴出 fissure eruption)이라고 합니다. 한편, 화산활동말기에는 부분적으로는 중심분출도 일어나 오리산과 680m 고지 등 소규모 화산체를 만들었습니다.
용암대지 형성 이전의 철원지역은 기반암인 중생대 화강암의 차별 침식 및 풍화의 결합으로 완만한 구릉지대를 이루었을 것이고 그 사이를 한탄강이 유유히 흘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후 신생대 제 4기에 추가령 구조곡에서 점성이 낮은 현무암 용암류가 여러차례 분출하여 한탄강 유로를 따라 흘어내려오면서 낮은 부분을 채우면서 용암대지
(철원평야)를 이루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용암의 분출은 여러 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한탄강 중류의 철원읍 화지리 동쪽 강변의 암벽에서 11매의 현무암 켜가 관찰되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5~11번 정도의 분출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철원평야라고 부르는 철원 용암대지 내부에는 야트막한 독립구릉이 여러 개 존재합니다. 이는 용암이 지표를 메워 평탄란 철원 용암대지를 형성할 때 기존의 산지가 용암에 완전히 매몰되지 않고 용암대지 상에 마치 섬처럼 돌출된 채로 남겨진 것입니다. 이러한 돌출된 지형을 스텝토(steptoe)라고 부릅니다. 철원 용암대지 내에 위치한 스텝토들은 입지적 이점이 많아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하여 6.25전쟁 당시 격전이 벌어졌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아이스크림 고지(219m)입니다. 이이스크림 고지(철원군 동송읍 하길리)는 6.25전쟁 당시 포격을 받아 산이 아이스크림 녹듯이 흘러내렸다하여 봍여진 이름입니다.
신생대 4기, 한탄강 발원지 인근인 평강(북한) 동북쪽 680m고지와 오리산에서 수차례 용암이 흘러 내려와
철원일대를 덮은 용암은 거대한 용암대지를 형성하였습니다. 한탄강의 낮은 지대를 따라 파주 임진강 유역까지 110km를 흘러 내려갔습니다.
그후 용암대지 가장자리를 흐르던 물살이 오랜 기간 현무암사이를 파고들어 침식작용과 함께 무너져 내리며 지금의 한탄강 협곡이 만들어졌습니다.
구 양지리 통제소 방면 풍경,
7만개의 기암괴석들이 일부 무지한 사람들에 의해 석재절단톱으로 처참하게 잘라간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약 27만 년 전부터 형성되어온 보석보다 더 소중한 자연의 보물을 몹쓸 인간의 욕심이 한 순간에 뭉개버린 씁쓸함과 함께 발길을 돌립니다.
돌아서는 내 뒤로 억새가 하얀 손 흔들며 배웅합니다. 이로서 평화누리길 13개 코스 210.8km 종주를 기쁨과 아쉬움으로 마칩니다. 고맙습니다.
2018년10월25일(목요일) -鄕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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