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자락 수성동 비해당》
인왕산 골따라 맑은 물 흐르니 예로부터 물소리가 좋아 붙인 이름 水聲洞이라네. 소나무 사이로 흐르는 맑은 계곡이 謙齋 鄭敾의 그림 안에 오로시 담겨 있다. 이 그림은 조선후기 화가 겸재가 바위산과 계곡이 빼어났던 인왕산 기슭 수성동 골짜기를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조선 초기 세종대왕의 제 3왕자 안평대군(1418~1453)이 자신의 號를 따서 匪懈堂을 짓고 지내던 터(址)와 기린교로 추정되는 다리가 있다. 조선 후기의 정선이 이곳 주변의 경치를 그린 것으로 비해당 건물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도 비해당은 없는 것으로 볼 때 계유정란(1453년) 직후 헐려 없어진 후 안평대군의 품격이 복권되자 대군을 흠모하던 이들에 의해 증축되었을 것이고 다시 임진왜란(1592~1598) 병자호란(1636~1637) 등을 거치면서 불타 없어진 후 이날에 이르렀으리라 추측할 수 있겠다.
(수성동/水聲洞》紙本水墨淡彩 293cm × 335cm 澗松美術館 所藏 )
세종의 셋째 왕자 안평대군은 정치적 야심을 가진 둘째 형 수양대군에게 맞서 어린 조카 단종을 위해 목숨 걸고 신의를 지킨 왕자로 알려져 있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한 그는 이곳 수성동계곡에 비해당이라는 별장을 짓고 지내며 시와 그림을 즐겼으며 당대의 많은 문사들이 그를 따랐다. '게으름 없이'라는 뜻의 匪懈는 詩經에 나오는 구절인 夙夜匪懈 以事一人에서 따온 말로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으름 없이 한사람을 섬기라'는 의미이다.
비해당 앞 기린교를 놓은 계곡은 축대를 쌓은 것이 아닌 본래 지반이 바위로 이루어진 곳인데 중간을 잘라 낸 것처럼 물길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깊은 골이다.
《기린교》
왜! 기린교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생각을 가져 봤습니다. 조선시대 초기의 관료에는 堂下官 堂上官이 있었고 왕의 부친으로 왕에 오르지 못한 아버지는 大院君, 왕의 장인은 府院君, 그리고 임금의 정비가 출산한 적자는 大君이라는 품계가 있는데 그 품계의 상징으로 비단에 학이나 호랑이 그리고 기린을 繡 놓은 것을 가슴과 등에 꿰매 붙여 나타냈습니다. 이를 흉배라고 부릅니다. 당하관의 문관은 單鶴 무관은 單虎, 당상관의 문관은 雙鶴, 무관은 雙虎, 그리고 大院君, 府院君, 大君은 麒麟의 紋樣입니다. 그런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안평대군이 기거하던 비해당 앞에 놓은 돌다리를 기린교라고 이름 한 것은 그의 품계의 상징인 기린흉배에서 따온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기린은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辟邪의 상상적 동물로도 이용되고 있습니다.
비해당 옛터로 보이는 북쪽 너럭바위와 남쪽 바위 사이 협곡을 가로 질러 놓은 기린교로 추정되는 돌다리는 원래는 3개의 긴 方形의 石湺로 놓였던 흔적이 보이나 지금은 2개 만 보입니다.
《비해당 터》
그 단단한 나무의 樹皮를 뚫고 어떻게 저리 고운 새순이 나올 수 있을까! 네 모양 꽃에 버금가도록 아름답다.
지난봄에 지은 개개비의 둥지, 잔 나뭇가지에 풀잎으로 엮어 참 야무지게도 집을 지었네 그러기에 그 큰 뻐꾸기새끼도 키워내고 엄동설한 모진 눈보라도 저리 견뎌내고 또 봄을 맞이했겠지..
수성동 계곡 맑은 물을 먹고 자란 버들강아지의 탐스럽고 복스러운 자태에서 봄이 익어간다.
버들강아지 그 부드러운 촉감과 어린 시절 손바닥에 올려 흔들며 놀던 추억에 젖어 이리저리 살피는데 저만치 오수를 즐기던 산비둘기 한 마리 인기척에 잠깨어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네.
《 비해당사십팔영시/ 匪懈四十八詠詩》
안평대군을 비롯한 당대 문인들은 비해당 안팎에 펼쳐진 자연 속에서 48가지의 아름다움을 찾아냈는데 동백과 대나무, 만년송과 난초에서는 군자의 절개를, 작약과 장미, 모란과 살구에서는 부귀영화의 꿈을 발견하였습니다. 배꽃과 해당화, 노루와 꽃비들기로부터 신선의 삶을 느꼈고 떠오르는 달을 보며 은둔의 즐거움을 노래했으며 원추리와 등자에서 덕과 효행을 배우고, 바람에 실려 오는 종소리를 들으며 자신을 성찰했습니다. 스치기 쉬운 세상 풍경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심미안이 있다면 삶은 더욱 행복하고 풍요로워집니다.
정선(鄭敾. 1676-1759)은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로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 또는 난곡(蘭谷)입니다.
이웃에 살던 문인화가 관아재 조영석(趙榮祏1686~1761)과의 두터운 교분 속에서 산수와 인물 분야에 쌍벽을 이루었으며, 산수는 물론 인물, 영모, 화조(花鳥) 등 다양한 소재에 능하였습니다.
특히 남종화풍(南宗畵風)을 토대로 조선 산천을 담은 진경산수(眞景山水)의 전형을 확립하여 조선 후기 화단에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이후 그의 화풍을 따른 일련의 화가들은 '정선파(鄭敾派)'라 불립니다.
근세조선시대의 화가 중 謙齋 鄭敾만큼 老大家的인 풍모를 갖춘 작가도 드뭅니다. 겸재는 凡俗한 화가들처럼 중국산수화풍을 모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처해 있던 사회와 풍토를 깊이 호흡하면서 한국에 사는 즐거움을 그의 예술 속에 펼쳐왔습니다. 그러한 노력은 만년에 이르러 완숙해졌을 뿐 아니라 한국산수의 특징을 살린 眞景山水라는 그의 독창적인 준법(皴法)을 낳게 되었습니다. 겸재의 진경산수는 단순한 사경(寫景)이란 뜻이 아니라 사생(寫生)의 수준을 넘어서 繪畵의 독특한 畵法으로 발전한 미감(美感)창조(創造)인 것입니다.
인왕제색도(仁旺霽色圖)는정선의 나이 75세에 그린 그림으로 진경산수작품 가운데서도 같은 시기에 함께 국보로 지정된《금강전도(金剛全圖)》와 함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비에 젖은 암벽의 중량감 넘치는 표현으로 화면을 압도하는 인왕산 바위의 대담한 배치와 산 아래 낮게 깔린 구름, 농묵(濃墨)의 수목이 배치된 짜임새 있는 구도는 옆으로 긴 화면설정과 함께 현대적인 감각마저 풍깁니다.
특히 그림의 중앙을 압도하는 주봉을 잘라, 대담하게 적묵법(積墨法)으로 괴량감(塊量感)을 박진력 있게 재현한 솜씨는 동양회화권 내에서는 볼 수 없는 그림의 주제를 한국의 산수에서 잡았을 뿐만 아니라 그를 그리는 기법에 있어서도 그 자신의 고유한 한국적 화법을 개발한 독특한 작품으로, 한여름 소나기가 지나간 뒤 삼청동(三淸洞)·청운동(淸雲洞)·궁정동(宮井洞) 쪽에서 바라본, 비에 젖은 인왕산 바위의 인상을 그린 일기변화에 대한 감각표출과 실경의 인상적인 순간포착에 그의 천재성이 충분히 발휘된 그림입니다.
《겸재 정선 필 인왕제색도 (謙齋鄭敾筆仁旺霽色圖》 <國寶第216號 . 1984년 8월6일지정>
朝鮮時代 / 鄭敾(1676~1759) / 紙本淡彩 /縱 79.2cm × 橫 138.2cm /湖巖美術館所藏
인왕산을 바라보면 겸재 정선이 그린 인왕산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만의 독특하고 독보적인 필법 진경산수를 저 인왕산은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수성동 시냇가에 묵은 부들 잎 사이로 스치는 봄바람이 늦가을 인양 손끝이 시리다.
《 수성자수지/水城慈壽址》
아래 그림은 인왕산 아래 지금의 옥인동 부근에 있던 인수자수원(仁壽慈壽院)의 구지(舊址)인 모양이데, 인수, 자수원은 궁녀들이 노후에 주로 나가있던 이원(尼院)으로 왕실의 내원당(內願堂) 구실을 하던 도성 내에 있던 유일한 불사(佛寺)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림(士林)의 이상이 정치 현실에 철저하게 반영되던 시기인 현종 2년(1661)에 이를 철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겸재가 살던 시기는 철폐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기초를 알 수 있는 터가 뚜렷하였을 것입니다.
인왕산의 바위를 쇄찰(刷擦)의 중묵법(重墨法)으로 장쾌하게 쓸어내리듯 표현하고 미점(米點)과는 또다른 소위 겸재점(謙齋點)이 많이 쓰이는 것은 가옥의 선묘가 중후한 것과 더불어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가 이루어지던 70대 후반 이후의 작풍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수성동 비해당터 위쪽 계곡의 모습입니다.
수성동 맑은 계류는 또르륵 퐁퐁 바위를 타고 흐르다가 이끼에 몸 보시하여 생기를 주고 다시 생명을 찾아 보시의 길 떠난다.
멋진 나뭇가지 지붕 삼아 자리한 널찍한 바위 그 자리에 앉아 詩經을 논하던 선비의 모습 보이는 듯하네.
인왕산 북쪽 능선을 바라보며 담은 모습입니다. 저 능선을 타고 가면 무악재를 넘어 백악산 정상으로 이어집니다.
양지바른 곳의 산수유는 활짝 웃다가 저물어 가는데 너는 이제 갓 피어난 이팔 청춘의 소녀처럼 청순하고 신선하다
인왕산자락길의 이정표
감투바위 옆 넓은 공터에서 구한말 택견꾼들이 수련을 했던 곳인가 봅니다. 이 감투바위에서 한양을 바라보며 기울어가는 국운을 비통해 하였다는 글을 비석에 새겼습니다.
비를 세운 이곳이 감투바위의 전면이겠지요.
감투바위 남쪽 모습. 마치 비구니 승려의 고깔모자처럼 보이지요
한양의 심장부가 한 눈에 조망되는 위치에 밝은 햇볕이 화사한 자태로 머물고 있습니다.
연무처럼 또는 안개처럼 온 세상을 뒤덮은 저 재앙은 욕망에 눈이 멀고 자숙할 줄 모르는 인간의 자업자득이니 하늘을 원망하랴 땅을 원망하랴!
되돌아 내려오는 길가 암벽 밑에 빛깔도 고운 보랏빛 함박 미소 짓는 귀여운 제비꽃이 미세먼지에 시달린 하루의 피로를 모두 털고 가랍니다.
제비꽃을 侍衛하듯 돌나물이 호위하고 있네. 어느새 이렇게 돋아나와 파릇파릇 싱그러움 보는 나에게 생기를 주네.
2018년3월25일 일요일 -鄕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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