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한개민속마을 / 성주

鄕香 2017. 6. 27. 13:37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 때 진주목사를 역임한 李友가 정착하여 560여 년을 내려오면서 성산이씨가 집성하여 살고 있는 전통 마을입니다. '한개'라는 이름은 크다는 뜻의 瀚과 개울이라는 의미의 漑가 합쳐진 말로, 예전에는 마을 앞에 나루터가 있어서 '大浦'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마을의 현존 건축물의 대부분은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에 건립되었는데 이 중 10동은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전체적인 마을 구성이 풍수에 따른 전통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류주택과 서민주택의 배치는 지역적인 특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대지의 특성에 따라 안채와 사랑채, 부속채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내외 공간의 구조가 다양합니다. 이에 따른 가구법도 전래적 방법으로 지붕, 대청, 안방, 부엌,툇마루 등 거의 원형 그대로의 모습이 잘 남아 있습니다. 또한 주생활을 이루었던 가재도구나 유교적 생활공간 등 중요한 모습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마을 입구에서 보면 길은 V자형으로 되어 있는데 중간에 두 길로 통하는 길이 하나 있다. 알파벳 A를상하의 위치를 돌려 놓은 형태이다. 좌측 길로 올라가서 중간 가로 뚫린 길을 통해서 우측길로 내려 왔다.



<돈재 이석문 신도비 >


《한주 이진상의 古宅》


한주종택 담장.




성주 응와종택 (星州 凝窩宗宅)은 한개마을 성산이씨의 발상지이다. 성산이씨가 한개에 立鄕할 당시의 종택이었던 대초당(大草堂)을 경종1년(1721년)에 처사 이이신(李爾紳)이 매입하여 응와종택의 터전을 마련하였으며 이이신의 아들 돈재 이석문이 북쪽으로 문을 내어 북비고택(北扉古宅)으로도 불린다. 돈재의 아들 사미당(四美堂) 이민겸(李敏謙)이 규모를 확장하였고, 사미당의 아들 농서(農棲) 이규진(李奎鎭)이 순조 21년(1821)에 정침을 신축하였으며 농서의 아들 응와 이원조(李源祚)가 헌종11년(1845년)에 사랑채인 사미당을 낙성하여 현재의 규모를 이루었다. 고종36년(1899년)에 솟을대문을 중축하여 대감댁의 면모를 갖추었고 순종4년(1910년)에 사당을 증축하였다. 돈재는 무신으로서 사도세자에게 충의를 다하였고, 농서는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은율현감을 지냈다. 응와는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를 지낸 문신이며, 조선 主理學의 학통선상에 있는 학자이다. 충절과 학문을 면면히 이어 온 이 가옥은 안채, 사랑채, 안사랑 채, 사당, 북비채, 대문채, 중문간 채, 등 6채로 구성되어 있고, 북비채에 있었던 장판각과 안대문 채, 아래채 등은 남아 있지 않다. 소실된 안대문 채는 중문간 채, 방앗간, 고방 등으로 이루어진 6칸이며 안채 맞은편 남쪽에 있었으며, 아래채는 안채의 동쪽에 지금의 안 사랑채와 마주 보며 있다.


 

<응와세가/凝窩世家>

솟을대문에 달린 현판이다.



 <北扉>

앞 건물에서 뒤문(北扉)으로 나오면 사랑채이다. 북으로 낸 이 작은 문은 영조 때 돈재 이상문이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 할 때 세손(훗날 정조)을 등에 업고 들어가 영조께 부당함을 간하다 곤장을 맞고 파직되어 이곳 고향에 돌아와 북녘으로 문을 내고 (無愧知心)이란 편액을 벽에 써 붙이고 조석으로 마주 앉아 두문불출 하였음을 정조대왕께서 그 가상함을 들어 돈재 이상문의 손자 이규진이 장원급제하였을 때 불러 "아직도 너의 집에 북녘으로 낸 문이 있느냐?"고 하문 하신 바로 그 문 北扉가 보입니다. 



북비 사랑채



성주 대산동 진사댁(星州 大山洞 進士宅)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328-1

이 집은 상량문(上樑文)에 戊午年 正月이라 쓰여 있어 성산이씨 정언공파 27세손 珠鎭(1748-1825)이 1858년에, 또는 29세손 이문상(李文相1810-1879)이1858년에 건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문상의 부인인 진성이씨(眞城 李氏)가, 예안 출신이므로 禮安宅이라 불렸다. 그 후 30세손 이국희(李國熙1868-1939)가 進士에 합격하였으므로 진사댁이라 부르게 되었다. 사랑채, 안채,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던 것을 1898년에 새 사랑채를 더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민속마을 지킴이 白猫 얼룩이.


응와 이원조 고택 돌담.


《돈재 이상문 神道碑》




《대산동 교리댁/大山洞 校理宅》

이 건물은 조선 영조 36년(1760년) 司諫院 司諫, 司憲府 執義 등을 역임한 이석구(李碩九)가 건립한 가옥이다. 그 후 사랑채, 사당, 서재는 1870년에 다시 고쳐지었다. 집의 이름은 이석구의 현손인 李龜相이 弘文館 校理를 염임한데서 비롯되었다. 

넓은 대지 위에 정면 7칸, 측면 1칸의 안채와 정면5칸, 측면 두 칸인 사랑채를 비롯하여 대문채, 중문채, 서재, 사당이 서로 떨어져서 배치되어 있다. '─'字形의 정침을 중심으로 각 건물이 독립되어 있으면서 전체적으로 터진 구 '口'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음은 이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형식이다. 이는 태백산맥 일대의 '││'字型과 남부'─'자형 민가를 섞어 놓은 배치 형식으로 생각되며 민가 유형의 지역간 전파, 교류, 절충 등의 과정을 살펴 볼 수 있는 중유한 자료이다.



교리댁 사랑채



담장길 마을 입구에서 보면 길은 V자형으로 되어 있는데 중간에 두 길로 통하는 길이 하나 있다. 알파벳 A를상하의 위치를 돌려 놓은 형태이다. 바로 이 길이다.



긴 담장길을 지나면 동편의 마을 관통길로 통한다.



담장 골목길을 다 나와서 뒤돌아보니 신도비 앞에서 보았던 지킴이가 따라 오고 있었다.



마을 공동우물이겠지 새로 꾸몄다.


새로 보수 중인 것같다. 기와는 조선시대 한옥전통기와가 아닌 근대식기와이다.



초가와 흰 억새꽃에 분홍색 감이 도발적이다.



주변 산세와 초가에 분홍빛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누구라도 고향집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다.



다시 마을 입구로 돌아왔다. 제천으로 가야할 시간 때문에 그냥 휑하니 겉만 보고 온 것이 못내 아쉽다.

 


여기서 성산동 고분군이나 독용산성도 그리 멀지 않은데.. 아쉬운 것이 어디 하나 둘인가...



2016년 5월16일. 세종대왕 17왕자 태실을 답사하고 돌아가는 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