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청령포 / 淸泠浦 (영월)

鄕香 2014. 6. 11. 14:03

단종의 이름은 홍위(弘暐), 세종대왕의 장손이며 문종과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딸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아들로 세종23년(1441년)7월23일 탄생하였다. 세종 30년(1448년)에 왕세손(王世孫)에 책봉되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그 후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경복궁 천추전(千秋殿)에서 승하하자 그 뒤를 이어 12세의 어린 나이로 1452년 5월18일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조선왕조 제 6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이곳 청령포는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상왕으로 있다가 그 다음해인 1457년(세조3년)에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상왕복위의 움직임이 김질에 의해 사전에 누설됨으로써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첨지중추원사 어득해가 거느리는 군졸50인의 호위를 받으며 원주 주천을 거쳐 처음으로 유배(流配)되었던 곳입니다. 동.남.북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은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절벽으로 막혀 있어서,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유배지로 적합한 곳입니다. 단종은 이 적막한 곳에서 외부와 두절된 유배생활을 했으며, 당시에는 이곳에 거처할 수 있는 집이 있어 호장 엄흥도는 밤이면 남몰래 이곳을 찾아 문안을 드렸다고 전합니다. 단종은 1457년 6월28일부터 두 달동안 이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그 해 여름에 홍수로 청룡포가 범람하여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영월 동헌의 객사인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겨서 유배 생활을 하였습니다. 1726년(영조2년)에는 단종의 유배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는 금표비(禁標碑)를 세웠고, 1763년(영조39년)9월에는 영조가 칠필로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라는 비문을 써서 단종이 살던 집터에 비를 세우고 비각을건립하였습니다. 2,000년 4월에는 단종이 거처하던 곳에 정면5칸, 측면 2칸반 규모의 겹처마에 팔작지붕 형식으로 기와집을 복원하였고 부속건물로 정면5칸, 측면 1칸 반의 규모로 홑처마에 우진각 형식의 초가집을 건립하였습니다. (명승 제50호)

 

 

<청령포 전경 / 淸泠浦 全景>

 

 

<청령포 안내도 / 案內圖>

① 단종어소(端宗御所) ② 단묘재본부시유자비(端廟在本府時遺址) ③ 관음송(觀音松) ④ 금표비(禁標碑) ⑤ 망향탑(望鄕塔) ⑥ 노산대(魯山臺)

 

 단종 어소 앞에는 서기 2,000년 당시 영월군수 김태수의 다음과 같은 어소낙성고유축문이 게시되어 있었습니다. 글이 하도 애절하고 충절이 깃들여 있어 읽는 동안 내내 눈시울을 아니 적실 수가 없었습니다.

 

 

 

단종이 머물었던 어소(御所)와 부속건물의 모습

 

 

<시종들이 거처하는 초가>

 

 

단칸방, 이야기만 들어 봤지 이렇게 보기는 처음입니다. 방 셋, 부엌 하나, 그리고 광 하나, 이렇게 정면 5칸을 5등분으로 똑같이 나눠으니 단칸방이 맞지요. 정사각형이니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 누워도 성인 하나 누울 수 있는 기럭지입니다. 에구 갑갑했을 것 같아요. 

 

 

(시녀의 침실 1)

(시녀의 침실 2)

<침모의 방>

<찬간>

 

(초가는 방3개, 찬간, 광 모두 5개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단종 유배지/端宗流配址>

이곳은 단종 임금이 유배되어 거처하던 집입니다. 시종들이 거처하던 초가와는 담장 하나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2,000년 4월에는 단종이 단종이 거처하던 옛 터에 복원한 이 집은 정면5칸, 측면 2칸반 규모의 겹처마에 팔작지붕 형식으로 기와집을 복원하였습니다.

  

 

단종이 머물던 본채와 '단묘재본부시유지'비각.

 

 

<단종어소/端宗御所>

당시의  승정원일기에 기록대로 2,000년 4월에 재현한 기와집으로 단종이 머물던 곳입니다. 이 집을 재현하기 앞서 1763년(영조39년) 9월에 영조가 칠필로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단종이 이곳에 계실 때의 옛터이다."라는 비문을 써서 단종이 살던 집터에 비를 세워 보존하게 했던 비와 비각이 앞 마당에 있습니다. 어소에는 당시 단종이 머물던 본채와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행랑채가 있으며 밀납인형으로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지방 선비가 단종을 알현하는 모습입니다. 건물 가운데는 대청마루가 넓직하게 자리하고 대청 우측은 사랑처럼 단종이 거처하는 곳이고 좌측은 시녀(宮女)가 거처하는 침소입니다.

 

 

선비가 알현하는 윗방에는 단종이  서안(書案)을 앞에 놓고 앉아 있습니다.

 

 

대청마루 좌측입니다. 3개의 방이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시녀의 침실)

(단종의 침실)

 

대청마루에 관람객들이 걸터앉아 쉬고 있는 모습입니다.

 

 

<단묘재본부시유지비 / 端廟在本府時遺址碑>

 1457년 6월22일 조선왕조 제6대 임금이신 단종대왕께서 왕위를 찬탈 당하고 노산군(魯山君)으로 降封되어 流配되어 계셨던 곳으로 당시 이곳에 단종대왕 거처(居處)인 어소(御所)가 있었으나 소실(消失)되고 영조39년(1763년)에 이 비를 세워 어소위치(御所位置)를 전하고 있습니다.  

 

 

전면과 측면이 각 1칸인 비각안에, 1단의 화강석 기단비좌(基壇碑座)에 앉힌 높이 162cm  오석으로 된 비신(碑身)의 앞면에는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단종이 이곳에 계실 때의 옛터이다."라고 음각되었고, 후면에는 "세황명숭정무진기원후삼계미계추 체경서영원영수석 지명 청령포(歲皇明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秋 涕敬書令原營竪石 地名 淸泠浦)/영조39년 계미년 가을 울면서 받들어 쓰고, 어명에 의하여 원주감영에서 세웠다. 지명은 청령포이다."라고 음각되어 있는 비가 보존되고 있습니다.

 

 

 

어소를 둘러보고 관음송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어소 담장 밖에 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기이하게도 단종이 계신 곳을 향하여 엎드려 절을 올리는 형국을 하고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청령포의 모든 소나무들이 동에 있던 서에 있던 어느 방향에 있던 모두 어가(御家)를 향해 굽어 있어 단종 임금께 禮를 올리는 형국입니다.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는 어소가 이렇게 스산해 보이는데, 당시 어린 임금은 얼마나 무섭고 고적하셨을까..

 

 

<관음송 / 觀音松>

높이 30m, 가슴높이의 둘레가 5m, 지상1.2m 높이에서 두 가지로 갈라졌고, 갈라진 두 가지의 밑 둘레는 각각 3.3m와 3m인 이 소나무의 나이는 확실치는 않으나, 조선왕조 제6대 임금 단종(端宗1441~1457)이 유배생활을 할 때 이 나무의 갈라진 가지 사이에 앉아서 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어서 약 60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소나무를 관음송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나무가 단종의 유배 당시 모습을 보았다하여 볼관(觀), 때로는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뜻에서(音)字를 써 觀音松이라 한다고 합니다. (천연기념물 제349호)

 

 

두 가지 마다 중간에 이처럼 다른 가지를 감싸듯 뒤틀어져 있습니다.

 

 

또 다른 가지의 중간 높이의 모습입니다. 용틀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기이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는 같은 높이에 기이로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관음송, 얼마나 높고 큰 지 나무전체를 한번에 담기도 어렵네요.

 


<망향탑 / 望鄕塔>

청령포 서쪽 절벽인 六六峯과 노산대 사이에 있는 돌탑으로 어린 단종이 이곳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근심속에서도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입니다. 당시 애절했을 단종의 심경을 헤아리게 합니다.

 

 

 망향탑에서 내려다보이는 마을입니다. 어린 단종이 이 마을를 내려다 보았을텐데, 그 심경이 어떠했겠습니까 굴뚝에 흰 연기 모락모락 피어 오르고 희미한 등잔불 아래 오손도손한 서민의 화목한 모습에서 부러움에 또 얼마나 눈물을 흘렸을까 싶습니다. 한창 어린 나이에..

 

 

노산대로 가기 위해 내려가려고 하는데 이 망향대로 올라오는 많은 사람에 잠시 기다리며..

 

 

<노산대 / 魯山臺>

단종이 왕위를 세조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있다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청령포로 유배된 후 해질 무렵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던 곳이라 하여 노산대라 부르고 있는 작은 바위 봉우리 위에 새겨진 '魯山臺'입니다. 

 

 

노산대 위에는 단종의 혼령처럼 구름 한 점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노산대 위에서 바라본 풍경입니다.

 

 

(2016년 10월23일 촬영)



 

 

<금표비 / 禁標碑>

단종 임금께서 1457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유배되어 계시던 이곳을 보존하기 위하여 일반 백성들의 출입과 행동을 제한하기 위하여 영조 2년(1726년)에 세운 비석입니다. 뒷면에 "동서 삼백척, 남북 사백구십척 차후 니생역재당금숭정구십구년/東西 三百尺 南北 四百九十尺 此後 泥生亦在當禁崇禎九十九年"이라 음각되어 있는데, 이 뜻은 '동서로300척, 남북으로 490척과 이후에 진흙이 쌓여 생기는 곳도 또한 금지하는데 해당된다. 숭정99년'이라는 내용으로 당시 단종에게도 이와 같은 제약(制約)이있었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淸泠浦禁標)

 

(숭정구십구년병오십월 일입 / 崇禎九十九年丙午十月 日立)

 

 

 

(동서 삼백척, 남북 사백구십척 차후 니생역재당금 / 東西 三百尺 南北 四百九十尺 此後 泥生亦在當禁)

 

 

 금표를 마지막으로 단종 임금의 슬픔을 담고 흐르는 저 강을 건너 단종 임금이 영면해 계시는 장릉(莊陵)으로 떠납니다.

  

 

강을 건너 둔덕에 서서 돌아보니, 해는 중천에서 하얗게 부서져 내리고 수많은 이들 그 따갑게 찌르는 햇살도 아랑곳없이 단종애사를 가슴으로 느끼고자 줄을 잇네. 금부도사 왕방연은 단종께 사약을 진어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 가눌길 없어 청령포를 바라보며 시를 읊었다지요.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욿어 밤길 예 놋다."

 

 

2014년 6월7일 <鄕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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