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릉을 참배하고 장릉 옆 40년 전통의 '장릉보리밥집"에서 들은 소문이 있어 없는 인내를 다 긁어모아 30분가량 기다리다 다시 기다린 시간이 억울해 30분을 더 기다려서야 비로서 빈상 앞에 앉아 다시 20여분을 보내고서야 푸짐하게 들여온 한 상, 들은 대로 잘 차린 보리밥을 맛있게 비벼먹고 일어서니 기다렸던 그 지루함 어디론가 말끔히 사라지더이다. 다시 38번 국도를 타고 한반도면 한반도마을로 가던 중에 '선돌'이라는 관광안내표지판을 보고 생각하기를 대체 어떤 대단한 선돌(立石)이기에 세워놓은 돌 하나를 도(江原道)에서 이렇게 관광차원으로 소개를 하나 싶으니 궁금증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들려보기로 했습니다. 선돌이란 선사시대에 마을 입구에 자신들의 부락임을 알리기 위해 세운 돌, 또는 신앙적 주술적 매개로 선사시대 사람들이 세운 돌이며 고인돌과 함께 우리나라의 거석문화의 주종을 이루는 유적입니다.
언덕진 계단에 올라서자 마자 보이는 것은 전망대와 나무 사이사이 많은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정경입니다.
장엄한 두 갈래의 우뚝 솟아있는 바위(높이70m)를 선돌이라 부르고 있어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ㅎㅎ 선돌이라 해서 나는 엉뚱한 선돌(立石 : 선사시대 인위로 세운 돌)만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강가 절애(絶崖)의 산자락 끝 前에 허리가 잘려나가듯이 떨어져 나가고 끝머리만 남아 뾰족이 선 바위봉우리에 잡목이 무성하여 온전히 바위만 있는 것보다는 운치가 있습니다. 선돌 머리위쪽에 먼 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산자락과 선돌 사이 틈을 통해 보이는 하얀 모래사장, 푸른 물이 흐르는 골짜기가 아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가을이면 단풍이 들어 더욱 아름답겠지요. 아래 흐르는 강을 이곳 사람들은 서강(西江)이라고 부릅니다.
옛 사람들은 이 선돌의 주변과 아우러진 풍경을 보고 이 바위를 일명 신선암(神仙岩)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듯이 이곳 전망시설 아래로 펼쳐진 두 갈래로 우뚝 솟아있는 장엄한 바위(선돌이라 불리고 있음)사이로 푸른 물과 층암절벽이 어우러져 조선시대 심사정(玄齋 沈師正)의 한 폭 산수화를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이 선돌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있습니다. 선돌아래 깊은 소(沼)에는 자라바위가 있는데, 선돌 아래동네 남애(南涯)마을에 장수가 태어나 적과의 싸움에서 패하자 이곳에서 투신하여 자라바위가 되었다고 하며 선돌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면 한 가지씩 꼭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도 빌었습니다. 사는 날까지 무탈하게 살다가 햇살 따사로운 어느 봄날, 향기처럼 사라지게 하여 주십사고...
조선시대 1820년(순조)에 영월부사를 지낸 홍이간(洪履簡1753~1827)과 뛰어난 문장가로서 풍류를 즐기던 오희상(吳熙常1763~1833), 홍직필(洪直弼1776~1852) 등 세사람이 구름에 싸인 선돌의 경관에 반하여 시(詩)를 읊으면서 선돌의 암벽에다 "운장벽(雲莊壁)"이라는 글자를 새겨놓고 붉은 옻칠(朱漆)을 한 것이 지금도 남아있다고 합니다.
현재의 38번국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선돌 밑으로 옛 신작로가 있었으며, 1905(고종42년)에 목탄차가 다닐 수 있도록 석축을 쌓아 확장하였는데 이 공사를 기념하기 위해 「光武九年李春和排路修勅乙巳二月1日」라고 자연석에 새겨진 비석이 남아 있다는데, 확인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광무9년 을사년이면 우리나라 대한제국期인 1905(광무 9)년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하여 강제로 소위 '을사보호조약'을 맺은 해이며, 36년간이나 이어졌던 일제강점기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영월군 방절리 산122번지)
고맙습니다.
2014년 6월7일 <鄕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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