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장릉 /莊陵 (영월)

鄕香 2014. 6. 12. 15:33

『 자규시/子規詩 』  < 단종 / 端宗 >

 

"一自寃禽出帝宮, 孤身隻影碧山中, 假眠夜夜眠無假, 窮恨年年恨不窮, 聲斷曉岺殘月白, 血流春谷落花紅, 天聲尙未聞哀訴, 何奈愁人耳獨聽." 

'원통한 새 한 마리 궁중을 쫓겨나와, 외로운 몸 그림자마저 짝 잃고 푸른 산을 헤매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 못 이루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잊혀 지지 않는구나, 두견새 울음소리 그치고 새벽달은 밝은데, 봄 골짜기 앤 피 토하듯 붉은 꽃만 떨어진다. 하늘은 귀먹어서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서러운 이 몸의 귀만 홀로 밝아지는가."   연리실기술》<장릉지>에 수록된 단종의 시.

 

무엇이 열일곱 소년으로 하여금 이토록 피를 토해내듯 절절한 시를 남기게 한 것일까,

 

 

 

잠시 옛 기록에 따라 500여 년 전 영월로 돌아가 단종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늘 어린 손자를 등에 업고 궐안 뜰을 거닐며 이야기를 들려주던 할아버지 세종과의 추억도 떠오르고, 집현전 학사들에게 세자를 부탁한다는 유명을 남기고 비명에 간 아버지 문종의 인자한 얼굴도 떠오른다. 자신을 낳은 지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났다는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의 복위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사육신의 눈물도 생각난다. 무엇보다 유배 길에 청계천 영도교에서 생이별한 아내 정순왕후의 그리운 얼굴이 사무치게 보고 싶다. 그러나 단종은 살아서 영월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이미 체념했을지도 모른다. 숙부 세조의 서슬 퍼런 기운은 어린 그가 맞서기에는 너무나 높고 강한 것이었다.

죽음 앞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던 사육신의 마음을 잊을 수가 없다. 자신의 숙부에게 옥쇄를 내어줄 적에 애통함을 참지 못하고 연못에 뛰어들어 죽으려 했다는 박팽년(朴彭年)의 마음, 세조의 달콤한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끝끝내 단종을 향한 충정을 안고 간 성삼문(成三問)의 마음, 사육신이 끝내 지키려 했던 한 줄기 끓는 충정, 바로 단종을 향한 마음이다. 하지만 그랬던 이들이 모두 자신의 복위를 꾀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세간에는 국왕을 지키지 못하고 먼저 간 사육신의 애통함만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국의 왕으로서 신하들을 보듬지 못한 단종의 비통함 또한 그에 못지 않으리라. 더 이상은 자신으로 인해 피를 보고 싶지 않은 심정이야말로 단종이 마지막으로 품었던 단 한 가지 마음이 아니었을까, 약관에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험한 바람에 꺾여버린 꽃망울처럼, 그렇게 단종은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나이 불과 열일곱 이었다. <莊陵>

 

 

 

<박충원 낙촌비각 / 朴忠元 駱村碑閣>

조선 중종 때 문신 박충원(朴忠元)의 충신 됨을 후세에 알리고자 1973년에 세운 碑입니다. 비문에 의하면 충신 박충원은 중종 26년(1531)文科에 급제하였으며, 사후에 文景公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그는 중종11년(1516) 노산군묘를 찾으라는 어명에 의하여 찾아 치제하였으나 그 후 방치되었던 묘를 중종36년(1541) 영월군수로 부임한 박충원의 現夢에 의해 封築하고 奠物을 갖추고 제문을 지어 치제하였다고 합니다.

 

 

 

<문경공낙촌밀양박충원선생기적비 / 文景公駱村密陽朴忠元先生紀蹟碑>

 

 

 

 

 

<낙촌비각의 전경>

낙촌은 박충원의 호입니다. 이 비각은 장릉 입구에 들어서면 우측 장릉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장릉으로 바로 올라가는 목제계단입니다.

 

 

 

나무계단이 끝나고 수림이 덮인 길은 토사를 방지하기 위해 시멘트포장한 오솔길입니다. 50m 정도 걸어가면 바로 장릉에 이릅니다.

 

 

 

<장릉의 유래/莊陵 由來>

조선왕조 제6대 임금 단종대왕을 모신 능입니다.

세조2년(1456년) 6월 집현전 학사 성삼문, 박평년 등이 상왕복위사건(丙子獄事)으로 참형을 당하였으며, 이듬해 6월21일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되었고, 그 다음달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2개월 정도 기거하시던 중 홍수로 인하여 관풍헌으로 옮기셨다. 세조3년(1457년) 여섯째 삼촌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계책이 발각되자 노산군은 폐서인(廢庶人)이 되었고, 그해 10월24일 사사(屍死)되었는데 그때 春秋17세였습니다. 단종의 유해가 동강에 흘렀는데 영월호장 엄흥도가 "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달게 받겠다." (爲善被禍吾所甘心)는 충정으로 옥체를 수습하여 이곳에 밀장(密葬)하였다. 중종11년(1516) 노산묘를 찾으라는 왕명이 있었고, 중종36년(1541)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의 현몽에 따라 노산묘를 찾고 수축봉제(修築奉祭)하였다. 숙종 7년(1681년)에 大君에 추봉되고, 숙종24년(1698)에 추복(追復)하여 묘호(廟號)를 단종으로 하고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고 하였습니다. 단종이 승하하신지 241년 만에 왕실의 정례(定禮)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능상의 석물들은 추봉릉의 전례에 따라 후릉(厚陵)의 예를 본받아 행하라는 교지에 의하여 봉분주위에 석호(石虎)와 석양(石羊) 각각 한쌍씩 있고 봉분 앞에는 상석(床石/魂遊石)과 사각옥형(四角屋形)의 장명등(長明燈)이 있으며 능 양쪽에는 망주석(望柱石) 2기와 문인석 2기, 석마(石馬) 1쌍이 있습니다. 무인석은 없습니다. (실록에 근거) 

 

 

 

<망주석/望柱石>

망주석에 관한 의미는 여러 설이 있는데, 신체를 떠나 분리된 혼이 육신을 찾을 때 구분하는 역할로서의 표지석,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기능, 왕릉의 풍수적 생기를 흩어지지 않게 모으는 기능, 등의 이야기가 있으나 정립된 이론은 없습니다. 망주석 중간에는 세호(細虎)가 조각되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입니다. 세호는 처음엔 별다른 형태를 갖지 못하다가 점차 동물의 형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 의미와 용도에 관해서도 특별히 정립된 이론은 없습니다. 이 망주석의 형식은 전례에 따른 것이겠지만, 문양을 새긴 솜씨에서 석수장의 지극한 정성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섬세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영월 장릉의 망주석은 조선 왕릉 중 細虎가 없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호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풀 수 있는 답을 이 망주석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석양/石羊>

사악한 것을 물리치고 죽은 이의 명복을 비는 의미를 가지며. 능침 앞 좌우에 밖을 향해 배치되어 있습니다.  

 

 

 

<곡장/曲墻>

왕릉을 보호하기 위하여 전면을 제외한 양 옆과 뒷면을 돌려 쌓은 담을 이릅니다.

 

 

 

<석호/石虎>

 능침을 지키는 호랑이 모양의 수호신으로 석양과 함께 능침을 수호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밖을 지켜보는 형태로 곡장 안 능침 뒤 양편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단종대왕릉은 길을 45˚로 빗겨 있으며, 아래 정자각과는 90˚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역사의 한 장으로서만이 아닌 인간의 욕심이 미치는 그 파장의 슬픔을 교훈으로 삼길 바랍니다. 

 

 

 

왕릉으로 오르던 길이 아닌 홍살문이 있는 곳으로 바로 내려오는 길이 있습니다.

 

 

 

「단종어제자규사/端宗御製子規詞」

"月白夜蜀魂啾 舍愁情倚樓頭 爾啼悲我開苦 無爾聲無我愁 寄語世上苦勞人 愼莫登春三月子規樓. / 월백야촉혼추 사수정의루두 이제비아개고 무이성무아수 기어세상고노인 신막등춘삼월자규루." / 譯 '달밝은 밤 두견새 울 제 시름 못잊어 樓머리에 기대었노라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도다.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 없을 것을 세상에 근심 많은 분들에게 이르노니 부디 춘삼월 자규루에는 오르지 마오.' 丁未(1967)一月一日 成均館典學 鄭然邊 謹書. 寧越文化院長 安學模 奉○.

 

 

 

<장판옥/藏版屋>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충신 위(忠臣位) 32人, 선비(朝士位)186人, 환관과 군속(宦官軍奴)44人, 여인 위(女人位6人을 합하여 268인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입니다.

 

 

 

명단은 우측으로부터 안평대군(安平大君), 금성대군(錦城大君), 화의군(和義君), 한남군(漢南君), 영풍군(永豊君), 판중추원사(判中秋院使)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등으로 이어지며 왕자와 신분 순으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배식단/配食壇>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 위, 조야의 선비, 환자군노 위, 여인 위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매년 단종제향을 올린 후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입니다.  

 

 

 

<수복실/守僕室>

陵과 境內를 관리하는 능지기가 기거하던 곳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경비실과 같은 곳입니다. 이 건물은 영조9년(1733년)

에 정자각과 함께 건립된 것이라고 합니다.

 

 

 

<수복실 정면>

정자각 우측에 위치합니다.

 

 

 

<단종비각/端宗碑閣>

비석 앞면에는 "조선국단종대왕장릉/朝鮮國端宗大王莊陵"이라는 글이 음각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단종대왕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조9년(1733년) 어명으로 비와 비각, 정자각 그리고 수복실과 함께 건립되었습니다.

 

 

 

"朝鮮國端宗大王莊陵"

 

단종의 이름은 홍위(弘暐), 세종대왕의 장손이며 문종과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딸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아들로 세종23년(1441년)7월23일 탄생하였다. 세종 30년(1448년)에 왕세손(王世孫)에 책봉되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그 후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경복궁 천추전(千秋殿)에서 승하하자 그 뒤를 이어 12세의 어린 나이로 1452년 5월18일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하였다. 즉위에 즈음하여 나이가 어려 정치하는 일에 어두우니 모든 조처는 의정부와 육조가 서로 의논하여 시행할 것과, 승정원은 왕명출납을 맡고 있으므로 신하들의 사사는 보고하지 말도록 교서를 내렸다.

문종의 고명을 받은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이 측근에서 보좌하고, 집현전학사 출신인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신숙주(申叔舟), 이개, 유성원 등은 지난날 집현전에서 세종으로부터 보호를 부탁받았으므로 이들이 측근에서 협찬하였다.

이해 윤9월, 저녁 강의에서 《논어》를 강론할 때 왕이 ‘사무사(思無邪)’라는 문구의 뜻을 묻자 박팽년은 “생각하는 바가 간사함이 없는 마음이 바름을 이른 것이며, 마음이 바르게 되면 일마다 바르게 되는 것”이라 대답하였다. 10월 박팽년을 집현전부제학으로 삼았는데, 그의 학문이 정밀, 심오하여 경연에 강의할 때마다 자신의 배움에 깨달은 바가 많았으므로, 특별히 통정대부에 가자시켜 임명하였던 것이다. 이해 고려의 개국공신 배현경(裵玄慶),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 신숭겸(申崇謙)과, 유금필(庾黔弼), 서희(徐熙), 강감찬(姜邯贊), 윤관(尹瓘), 김부식(金富軾), 조충(趙沖), 김취려(金就礪), 김방경(金方慶), 안우(安祐), 김득배(金得培), 이방실(李芳實), 정몽주(鄭夢周) 등을 왕씨(王氏) 묘정(廟庭)에 종사(從祀)하도록 하였다. 1453년(단종 1)4월 경회루에 나가서 유생들을 친히 시험 보이고, 또 모화관에 가서 무과를 베풀었는데 권언(權躽) 등 40명이 뽑혔다. 온성과 함흥의 두 고을에 성을 쌓고, 나난(羅暖)·무산(茂山)의 두 성보(城堡)를 설치하였다. 악학제조 박연(朴堧)이 세종의 《어제악보 御製樂譜》를 인쇄, 반포하기를 청하니, 왕이 이를 허가하였다. 이 대신 황보 인, 김종서, 정분(鄭苯) 등을 불러 그들에게 자문하여 박중림(朴仲林)을 대사헌에 임명하였다. 이해 10월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권을 빼앗고자 자기 측근인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의 계책에 따라 무사를 거느리고 가서 좌의정 김종서는 그의 집에서 죽이고, 영의정 황보 인, 병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이조판서 민신(閔伸), 우찬성 이양(李穰) 등은 대궐에 불러와서 죽였다. 들의 죄명은 작은 아버지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추대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하였다는 것이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므로 일의 옳고 그름을 가리기도 전에 정권은 수양대군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요구에 따라 수양대군을 영의정으로 삼아 군국의 중대한 일을 모두 위임시켜 처리하게 하였다. , 당시 거사에 참가한 사람들을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인정하여 모두 공신의 칭호를 주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지칭한 난리의 장본인인 안평대군과 그 아들 우직(友直)은 조신들의 주청에 의하여 강화의 교동현(喬桐縣)에 이치(移置)되었다가 안평대군은 사사되고 우직은 진도로 옮겨 안치되었다. 일련의 조처는 왕의 의사가 무시된 집권자인 수양대군의 주변 인물들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다. 이해 하위지를 좌사간, 성삼문을 우사간, 이개를 집의, 유응부를 평안도도절제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정치의 실권을 잡게 된 수양대군은 지방에도 자기 세력을 심기 위하여 지방관을 교체시키던 중 이징옥(李澄玉)의 난을 겪기도 하였다. 편, 양성지(梁誠之)로 하여금 《조선도도 朝鮮都圖》, 《팔도각도 八道各圖》를 편찬하게 하였다. 1454년 정월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다. 이 달에 집현전 양성지가 《황극치평도 皇極治平圖》를 찬진하고, 3월 춘추관에서 《세종실록》을 찬진하였다. 5월 좌승지 박팽년이 경연에서 왕에게 안일과 태만을 경계하도록 진언하였는데, 이는 왕이 대궐 안에서 자주 활쏘기를 구경하면서 경연을 여려 차례 정지시켰기 때문이었다. 8월 각 도의 관찰사에게 유시하여 효자(孝子)·순손(順孫)·의부(義夫)·절부(節婦)와 공평, 청렴하고 현저히 공적이 있는 수령을 상세히 기록하여 알리도록 하였는데, 이는 그들을 발탁, 등용하여 권장하기 위해서이었다. 보루각(報漏閣)을 수리하고 《고려사》를 인쇄, 반포하였다. 12월 각 도의 관찰사에게 유시하여, 둔전(屯田)설치계획을 수립하여 알리도록 하였다. 1455년 윤6월 수양대군이 조정의 제신들과 의논하여 왕의 측근인 금성대군(錦城大君) 이하의 여러 종친·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각 지방에 유배시키기를 청하자,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따랐다. 이러한 급박한 주변정세에 단종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는, 상왕(上王)이 되어 수강궁(壽康宮)으로 옮겨 살았다. 1456년(세조 2)6월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복위사건의 주동인물은 지난날 집현전학사 출신인 몇몇 문신과 성승(成勝)과 유응부(兪應孚) 등 무신들이었다. 이들은 세종과 문종에게 특별한 은혜를 입었으며, 또 원손(元孫:端宗)을 보호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으므로 어린 상왕을 복위시키는 것은, 곧 이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이며 선비의 행할 의무이기도 하였다. 때 마침 명나라 사신을 창덕궁에 초대하여 연회하는 날, 그 자리에서 세조를 죽이고 측근 세력도 제거한 뒤 단종을 복위시키려 하였으나, 그 계획이 실행되기도 전에 동모자인 김질(金礩)의 고발에 의하여 결국 실패하고, 이 사건의 주동인물 중 많은 사람이 사형을 받게 되었다. 종은 이 사건이 있은 뒤 더욱 불안을 느끼고 있었는데, 조신 가운데 상왕도 이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서울에서 내쫓자는 주청이 있자, 1457년 6월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 영월에서 유폐생활을 하는 동안, 매양 관풍매죽루(觀風梅竹樓)에 올라 시를 지어 울적한 회포를 달래기도 하였다. 이해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노산군의 작은아버지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다시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봉되었다가 10월 마침내 죽음을 당하였다. 1681년(숙종 7)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 전 현감 신규(申奎)의 상소에 의하여 복위시키기로 결정되었다. 시호를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 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 敦孝大王)으로, 묘호를 단종으로 추증하고,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정자각/丁字閣>

단종대왕께 제향(祭享)을 오리는 곳으로 집의 모양이 丁字 모양이라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배위청(拜位廳)이라고 합니다. 배위청은 황제는 日字形으로 짓고 왕은 丁字形으로 건립합니다. 예로 홍유릉의 고종황제의 능을 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중국 황제들의 배위청은 모두 日字形으로 건축되었습니다.

 

 

 

정자각에 오를 때와 내려올 때는 동쪽으로 오르고 서쪽으로 내려오는 동입서출(東入西出)입니다.

 

 

 

<참도/參道>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폭 3m 정도로 돌을 깔아논 이 길은 2개의 길로 구분되었는데, 약간 높은 길은 神이 다니는 神道, 약간 낮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御道라고 합니다.  

 

 

 

 

 

 

 

<영천/靈泉>

장릉 서쪽에 방형의 담장에 둘려 있는 이 우물은 정조15년(1791년) 정조의 명으로 영월부사 박기정(朴基正)이 수축하여 한식 때 祭井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보통 때는 조금씩 샘물이 솟았으나 매년 한식 때 제향을 지낼 때에는 물이 많이 湧出하였다고 합니다. 깊이 1.5m정도에 하부는 화강석 돌담으로 둥글게 쌓여있고 상부는 정방형입니다.

 

 

 

영천의 외형

 

 

 

영천의 내부, 그 세월이 얼마인데, 아직도 우물은 티 한 점 없이 맑디맑으니 보는 내 가슴마저 저리네.

 

 

 

둔덕 위 장릉과 그 측면 아래 딸린 건물의 배치 모습.

 

 

 

<엄흥도 정여각 / 嚴興道 旌閭閣>

엄흥도의 충절(忠節)을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영조2년(1726년)에 세운 것입니다. 충신 엄흥도가 영월호장(寧越戶長)으로 있을 때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 유배되어 관풍헌(觀風獻)에서 1457년 10월24일 조정에서 내려진 사약을 받고 승하하여 그 옥체가 강물에 버려지자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암장하여 충신으로 추앙 받고 있습니다. 순조 33년(1833년)에 공조판서로 추증되었고 고종13년(1876년)에 충의공(忠毅公)이란 시호를 받았습니다.

 

 

 

<조선충신영월군호장증자헌대부공조판서..>

 

 

 

 

 

<장릉내 연못>

 

 

 

 

 

 

 

 

 

 

 

 

 

<재실/齋室>

이 건물은 능을 지키는 참봉(參奉) 한 사람과 수호군(守護軍) 9인이 기거하였으며 매년 단종제향을 지낼 때  제물(祭物)을 준비하고 祭器를 비롯한 각종 사용기구를 보관해 오던 곳입니다. 처음 건립연대는 1932년 경 중건 한 후 1997~1998년 재실지붕 및 배수로를 보수정비 하였습니다.

 

 

 

 

 

<참봉 정공수/參奉 鄭公壽>

재실 안마당 가운데 화단에 장릉을 보호 관리하는 참봉 정공수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참봉(參奉)이란, 조선시대, 여러 관아에 속했던 최말단직의 종구품 벼슬. 능(陵), 원(園), 종친부, 돈령부, 봉상시, 사옹원, 내의원, 군기시 등에 두었다. 능참봉은 비록 말단이지만 그 위세는 대단했다고 한다.

 

 

 

 

 

 

 

 

 

 

 

 

 

2014년6월7일 <鄕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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