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덕주사/德周寺 (제천 월악산 덕주골)

鄕香 2014. 5. 31. 13:39

 

<덕주사/德周寺>

덕주사는 신라 제26대 임금인 진평왕(眞平王 재위579~632)9년 창건 당시에는 월형산 월악사(月兄山 月岳寺)였는데, 신라 마지막 임금 제56대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 .이름은 김 부(金傅)>이 천년사직을 고려 왕건에게 바친 뒤 경순왕의 제1녀 였던 덕주공주(德周公主)가 높이 15m의 큰 바위에 마애미륵불(磨崖彌勒佛)(보물406호)을 조성하고 신라의 재건을 염원하면서부터 산의 이름을 월악산(月岳山), 절의 이름은 덕주사(德周寺), 골짜기를 덕주골로 부르게 되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래의 덕주사는 동편 계곡으로 1.5km 올라간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마애불 주변의 '상덕주사'와 현재의 절(덕주사)이 있는 위치의 옆에 '하덕주사'가 있었습니다. 현재 상덕주사가 있던 자리에는 마애미륵불, 우공탑, 삼층석탑 그리고 극락전과 요사채가 있던 터만 남아 있습니다. 상덕주사는 1951년 12월 한국전쟁(6.25)중 전화로 소실되었으며 석축만 옛 규모를 짐작케 하고 있습니다. 하덕주사는 어느 때 절이 소실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절 입구에 있는 남근석을 보면 이곳이 남아선호 신앙이 깃들었던 토속 신앙지 였음을 알 수 있으며, 3m나 되는 탑, 기단석, 부도, 연꽃무늬 석등, 기와편 등이 절터 였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대불정주범자비/大佛頂呪梵字碑> (충북 유형문화재 제231호)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산1

이 비석은 1988년 2월에 월광사지(月光寺址) 입구의 논둑에서 발견된 것으로 비문이 인도(印度)의 산스크리트(Sanskrit)를 표기한 옛 글자인 범자(梵字)로 새겨졌습니다. 비문은 모두 11행이며 첫 줄에 '대불정주(大佛頂呪)'라 음각된 한자로 시작되고, 나머지 약105자는 모두 범자로 되어 있습니다.  

 

 

 글자는 육안으로 식별하기가 쉽지 않지만, 어렴풋이 보이기는 합니다. 덕주사에 의하면, 내용은 고려 후기 성행하던 수능엄경(首愣嚴經)에 있는 능엄주(愣嚴呪)를 새겨 넣은 것으로 불교수행의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고, 그 실천과정은 어떠해야 하며, 수행자의 위상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비석의 능엄주는 제7권에 나오는 다라니(多羅尼)로서 모든 마군(魔軍)과 외도(外道)를 항복받고 고통 받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황해도 해주의 대불정다라니당(大佛頂呪多羅尼幢) 등 몇 점의 범자비(梵字碑)가 있는데, 남한 지역에서는 이것이 유일합니다. 자연석 화강암에 높이 161cm 너비163cm의 크기입니다.

 

 

맞배지붕에 비막이 되어 있는 대불정주범자비각(大佛頂呪梵字碑閣)의 모습은 작지만 엄숙한 기운이 풍깁니다.

 

 

<덕주사 경내>

 

 

<산신각/山神閣>

예로부터 하늘과 땅의 좋은 기운들을 서로 잇는다는 월악산 영봉(靈峰), 그 중턱에 자리한 신라 때 창건된 고찰 덕주사, 산을 신성시하고 그 신령함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만상의 생명력이 모여 새로운 세계인 천상의 신선계를 탄생시키는 곳으로 믿었습니다. 그로 인해 한 도(道)를 이룬 곳이 산신각입니다. 산신숭배에 대한 기록은 중국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 '그들(우리나라 삼한을 가리킴)의 풍속은 산천을 존중하며 법에게 제사드리며 그서울 신으로 섬긴다.'하였고, 제왕웅기(帝王韻記)와 본기(本紀), 삼국유사 등에 환웅은 하늘에서 태백산 신단수(神壇樹)아래로 내려와 神市를 세웠으며 그의 아들 단군왕검(檀君王儉)은 아사달에서 山神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니, 산신숭배는 단군설화에서부터 시작하여 민중종교로 뿌리깊게 내린 민간신앙입니다. 불교가 이땅에 전래되어 대승적 차원으로 산신신앙을 하나의 정신으로 불교에 수용하여 체계적인 산신신앙이 되었음을 전국의 모든 사찰에 봉안된 산신과 산신의례(山神儀禮) 등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초기에는 산신도가 형성되지 못하여 문자화된 위패(位牌)나神牌를 모시는 산령각(山靈閣)만 있었으나, 단기4130년(1797)전후에 산신도(女子)를 봉안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우리 민족은 산신을 마을의 안녕과 생명을 보호하며 길흉화복(吉凶禍福)을 관장하는 신으로 숭배하다가 사찰내에 호법선신(護法善神)과 일반대중들의 외호신으로 받들어 지고 있습니다.

 

 

큰 바위 틈새를 이용하여 그 안에 산신像을 한 장의 돌판에 새겨 놓은 이 산신각은 단기4326년(1993) 영봉의 맥을 따라 자연스런 신품으로 조화를 이룬 터에 성일화상(性一和尙)이 가로 180cm, 세로 210cm의 화강암에 산신도(山神圖)를 양각하여 봉안하여 월악산 영봉의 산신이 이곳에 안주해 참배자의 염원을 섭수(攝收)하게 되었다.고 안내문은 전합니다.

 

 

<경내/境內>

 

 

<대웅보전/大雄寶殿>

현재의 이 대웅보전은 옛 '하덕주사(下德周寺)'가 수재의 위험이 있어 1996년 性一和尙이 현재의 높은 지대에 새로이 절터를 마련하여 전면 5칸, 측면 3칸의 52평, 외 5포 내9포의 건물 양식으로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전각 안에는 삼존불이 계시는데, 중앙에 법신불로 부처님의 眞身이며 자성으로 청정법계의 진여인 실상의 법을 시현한 자성불입니다. 오른편 부처님은 보신불로 과거 원력수행의 한량없는 과보로 나타난 만덕이 원만한 불신이며 화신불 또는 응화신이라고도 하며, 왼편 부처님은 중생을 위해 갖가지 모습으로 변화해 구제하는 불신이며, 전각내부후면에 1536불이 봉안되어있다고 사찰측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덕주사 경내>

 

 

<범종각/梵鐘閣>

대부분의 사찰에는 불전사물(佛殿四物)로 불리는 북(鼓), 어고(魚鼓), 운판(雲版), 범종(梵鐘)이 공유하는 범종각이 있습니다. 덕주사의 범종각에는 범종만을 둔 글자그대로인 범종만 있습니다. 어떤 규정이나 법식의 문제가 아닌 불타 버린 옛 고찰인 덕주사의 명맥을 잇고자 새로 시작하는 불사의 경제적 여건에 있음이라 보겠습니다.  

 

<관음전/觀音殿>

옛 하덕주사가 있던 터로 지금은 관음전이 들어앉아 있습니다. 이 관음전 앞에 남근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남근석/男根石>

이 남근석

덕주사가 자리한 월악산은 소백산과 속리산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월악산의 정상을 영봉(靈峰)이라 부르는데, 우리나라 산중 정상을 영봉이라고 부르는 것은 백두산과 월악산 두 곳 뿐입니다. 덕주사 뒷편 수산리 쪽으로 바라보면 누워 있는 여자의 얼굴 모습과 닮은 형태입니다. 예로부터 해(日)를 양(陽), 달(月)을 음(陰)이라 했으며 사람에 있어서는 陽은 남자, 陰은 여자로 보았습니다. 이 산이 여자의 모습을 한 산이라 해서 월악산(月岳山)이라고 이름한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또한 월악산이 풍수학으로 볼 때, 음기(陰氣)가 왕성한 산이기에 옛 선조들은 월악산의 땅기운(陰氣)을 누르고 음양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이곳에 남근석을 세운것 같습니다. 월악산 덕주사 터 앞의 전해져 오는 남근석은 3개로서 크기가 길고 하나는 작은데 그 중 하나는 가운데가 부러진 형태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한 예(例)로 경상북도 안동을 안고도는 영남산맥중 한곳에는 뒷산이 여근형(女根形)이라하여 그 왕성한 음기를 중화시키고자 그 여근산과 대치하는 곳에 세개의 남근석을 세웠는데, 이 風水石柱들은 풍수상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덕주사의 남근석이 처음에는 월악산의 음기를 중화고자 세워졌으나 세월이 지나며, 아들을 바라는 사람이나, 또는 소망과 행운을 기원하는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발전하였음을 없어진 남근석 윗부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옛부터 우리 조상들은 삶과 죽음을 이원화시키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生은 有限하고 우주의 모든 질서는 그 유한과 무한, 음과 양, 빛과 어둠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조상들은 그 모든 것들 속에서  영원과 불변의 진리를 체득했으며 여기에서 탄생되어진 것이 제의(除儀)였고, 어떤 매개체를 통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구원을 추구 했으며 그것이 민간에 전승되어 구원의 형태로 내려왔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대상물에다 고사와 행복을 기구(祈求)하며 풀이를 했습니다. 우리가 드물게 마을어귀에서 볼 수 있는 장승의 괴기스런 표정이나 이곳 덕주사에 있는 남근석 등이 바로 생과 삶 그리고 윤회의 사상을 체득한 조상의 얼이 응축된 상징이라 하겠습니다.

 

 

상덕주사터로 가기 전의 골짜기의 모습입니다.

 

 

 <월악산 안내게시판>

 

 

<마애불 역사>

덕주골 좌측 월악산 오르는 중턱에 있는 '마애불'에는 덕주공주가 오빠 마의태자와 함께 망국의 恨을 달래며 덕주사를 짓고 아버지 경순왕을 그리워했다는 전설이 담겨져 있습니다. 경순왕이 왕건에게 나라를 넘기자 이를 반대하여 경주를 떠난 마의태자 일행은 신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병사를 양병하고자 금강산으로 길을 가던 중 문경군 마성면(하늘재)에 이르러 마의태자의 꿈속에서 관음보살이 말하기를 "이곳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西天에 이르는 큰 터가 있을 것이다. 그 곳에 불사를 하고 석불을 세우고,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영봉을 골라 마애불을 조성하여 만백성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을 잊지말라."고 하였다.  일행은 그 장소를 찾아 석불 입상을 세우고, 북두칠성의 별빛이 한껏 비추는 최고봉 아래에 마애불을 조각하여 8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게 되었으니 그곳이 바로 덕주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