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충주 미륵리사지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鄕香 2014. 5. 28. 10:43

 

 『中原彌勒里寺址』(사적제317호)

미륵사지는 미륵석불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석굴사원 터로 백두대간 월악산줄기에 동쪽으로 하늘재, 서쪽의 지릅재 사이의 분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 이전까지 남북의 중요한 길목에 있어 불교사찰의 역할뿐만 아니라 군사 경제적으로도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미륵리 석굴은 거대한 돌을 이용해 석벽을 쌓은 후 불상을 모셨으며, 위에 목조건물이 있었던 자취가 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1970년대 말부터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미륵당초(彌勒堂草)" . "미륵당(彌勒堂)". "원주(院主)" . "명창 3년 대원사 주지 승 원명(明昌三年大院寺住持僧元明)"라고 새겨진 기와들이 발굴된 점으로 볼 때 절 이름은 '彌勒大院'으로 연대를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추정합니다. 석불입상(보물 제96호)과 석등(유형문화재제19호)) · 5층 석탑(보물 제95호)이 일직선상으로 北向을 한 단 탑식 가람배치를 보여 주며, 다른 절과 달리 이처럼 북쪽을 향해 절터가 전개되고 있는 것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고구려 땅을 회복하겠다는 의지의 상징으로 추정해 봅니다. 사각석등, 돌거북, 당간지주, 3층 석탑 등 중요한 문화적 유물의 규모로 보아 큰 절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또한 전설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함을 슬퍼해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이곳에서 석굴을 조성하고 석불을 세워 누이인 덕주공주가 송계계곡 남향한 산자락 암벽에 새긴 덕주사의 마애불과 서로 마주 보게 했다는 애절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미륵寺址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절터이며, 석굴사원으로서 방식은 다르지만 석굴암을 모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좌측은 '미륵대원지'이고, 우측은 "미륵리사지"입니다.>

 

 < 미륵사지 / 彌勒里寺址 >

 

 

커다란 석조에 약수가 넘쳐흐릅니다. 한 바가지 가득 담아 마시니 그 정갈하고 시원함에 오장이 즐겁다고 야단법석입니다. 꼬르륵~^^

 

 

「구형비대석(龜形碑臺石)」(충북 유형문화재 제269호) 

사찰의 남북 종축선縱軸線에서 약간 좌측(동쪽)에 위치하여 북향하고 있는 길이 605cm, 높이 180cm의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거북모양 비석 받침돌입니다. 귀부의 背面은 거북등의 육각무늬를 생략하였으며 좌측 어깨 부분에 작은 거북 두 마리가 기어오르는 형태를 陽刻하였고, 앞쪽의 발은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나 형식화 되었습니다. 귀부의 등에는 碑座가 있으나 비신을 세울 수 있는 정도는 아니어서 실제 비가 존재했는지는 의문이며 수차례 발굴조사 결과 비신을 찾지 못했음을 볼 때 원래 石碑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미완성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작은 새끼거북 두 마리가 기어오르는 모양이 돋을새김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표 아래,

 

 

 

 

 여러 형태의 주춧돌들이 사찰의 옛 모습을 엿보이고 있습니다.

 

 

《미륵리 사각석등》

사각의 지대석 위에 8蓮花葉座 상면 가운데에 사각의 홈을 파고, 한 면에  陰線刻으로 연봉우리를 새긴 사각의 간주석을 끼워 세우고 그 위에 연화문이 새겨진 사각의 상대석을 그리고 4개의 圓柱을 네 모퉁이 세우고 4각의 옥개석을 두고 그위에 엮시 4각의 상륜부 받침을 두었으나 보주는 보이지 않습니다. 세련된 단아한 아름다움이 돋보입니다.

 

 

《彌勒里石燈(有形文化財第19號)》

석불입상과 5층 석탑 사이에 있는 이 석등은 준수한 맛과 균형미가 빼어난 석등입니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엎어 놓은 연꽃이 새겨진 받침돌(覆蓮臺)이 있으며 그 위의 간주석(竿柱石)은 아무런 무늬가 없는 8각형의 돌기둥으로, 상대석에는 위로 향한 연꽃(仰蓮)을 조각하였습니다. 위로는 등을 설치했던 팔각형의 화사석이 있는데 사면에 화창이 있고, 화사석 위에는 8각의 지붕돌(屋蓋石)과 상륜부 받침을 두고 연꽃 봉오리 모양의 보주를 조각하였습니다.

 

 

석등의 남쪽 화창을 통해보면 5층 석탑에 서린 정성과 염원이 오롯이 보이고,

석등의 북쪽에서 화창을 들여다보면 미륵불의 오묘한 미소가 속세의 情을 녹여냅니다.

 

 

석등 정면의 화창을 통해서 彌勒佛像의 얼굴을 담아 보았습니다.

 

 

석등 앞에 정면으로 서서 석등의 火窓을 보면 미륵불의 밝고 환한 얼굴과 알듯 모를듯이 짓는 미묘한 미소까지 화창 안에 담긴 듯이 보입니다.

 

 

 

 「彌勒里石佛立像」(보물제96호) 미륵리석불입상은 이 절터의 主尊佛로 특이하게도 북쪽을 향해 서 있으며, 본래 石窟式 법당을 이루고 있었으나, 석굴의 목조 건축물이 불탄 후 석축만 남게 되었습니다. 석불의 표정이나 신체 등의 조각솜씨는 불상 및 절터의 규모 및 석굴에서 풍기는 웅장함과는 달리 아주 소박한 편입니다. 다른 부분에 비하여 유달리 흰 얼굴은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며, 불상의 거대한 원통형 몸매, 소박한 조각솜씨, 머리의 갓(보개), 엉성한 옷주름 표현 등을 볼 때 고려초기 충청도 지방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륵불과 돌을 쌓아 조성한 Π자 형태의 석굴,  Π자형 위에는 누각의 지붕 형태로 덮어 그 안에 미륵보살을 안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기쁨, 슬픔, 애증.. 우리네 모든 七情이 하나의 고요로움으로 녹아 내립니다. 

모든 번민의 마음을 온화로운 평온으로 용해시키고도 남을 저 은은하게 풍기는 얼굴의 미소, 그 모습이 바로 慈悲아닌가 싶습니다. 

 

 

끝도 없을 하늘처럼, 사람의 마음 또한 그 척도를 알 수 없기에, 그 안에 수많은 갈등이 하나로 융해되어 하나의 미묘한 미소로 미륵불의 얼굴에 피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오묘함으로... 

 

 

 

 미륵불을 감싸듯 쌓은 석벽 사이에 일정한 간격으로 마련되어 있는 감실(龕室)의 모습입니다. 감실 안에 있던 부처상을 새긴 돌이 밖으로 노출된 모습입니다.

  

 

많은 龕室들은 오랜 세월에 형태만 남았고, 감실 안에 모셨던 불상들은 부서지고, 흩어지고, 없어지고, 어쩌다 살아남은 이 부처는 얼굴이 깨진 채 감실 밖으로 나앉아 천년 세월의 사연을 반짝이는 햇살에 담아주고 있습니다. 

 

 

 「中原彌勒里寺址石造菩薩倚像」

장방형의 塊石 표면에 尊像을 부조했는데 사각형의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입니다. 왼발은 수직으로 내리고 있으며 오른발은 왼쪽다리 뒤쪽으로 구부렸습니다. 머리에는 寶冠을 쓴 것처럼 보이며 冠裝飾은 양귀를 싸고 어깨까지 흘러내렸습니다. 목에는 三道가 있으며 法衣는 右肩偏袒인 듯하며 오른손은 팔꿈치를 밖으로 벌려 손목을 몸으로 향하여손바닥을 복부에 대고 있습니다. 왼손은 팔꿈치를 밖으로 벌리면서 위로 쳐들어 목 아래에서 법의 자락을 살짝 잡은 듯이 보입니다. 이 尊像은 본래 석굴 내부 龕室에 삽입하였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高 95cm, 厚 50cm, 幅 68cm

 

 

「彌勒里五層石塔」

삼국시대부터 고려 말까지 남북을 이어주는 주요 교통로인 계림령에 위치한 미륵리사지에 석불입상 . 석등 . 오층석탑이 북쪽을 향해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높이 6m의 석탑으로 그 자리에 있던 바위로 받침돌과 1층 기단을 만든 후 몸돌을 올려놓았습니다. 바위 안쪽을 파내어 만든 기단 면석 한 면이 직각을 이루지 못하고 일그러져 있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일반적인 탑의 모습과 비교할 때 지붕돌의 너비가 몸돌에 비해 아주 좁으며 각 부분의 조성기법이 형식적이고 각 층의 체감비율도 고루지 못해 투박하고 둔중한 느낌을 줍니다. 미륵대원지와 함께 마의태자와 관계가 있다고 전해지나 확실치 않습니다.

  

 

堂竿礎石과 蓮花文裝石이 이 옛절의 규모와 웅대함을 엿보게합니다.

 

 

"공기돌 바위"

미륵리사지 석등 오른편 개울 건너에 있는 이 공기돌 바위는 자연적인 바위에 약간의 人工이 가미 된 바위의 생긴 모양이 거북이와 비슷하여 거북바위라 불리워지고 있으며, 정상부분에 좁은 폭으로 길게 홈을 파서 그 홈을 따라 바위 밑 부분까지 물이 잘 빠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바위 위에 올려져 있는 직경 1m 가량의 둥근돌(공일명, 공기돌)은 고구려 平原王의 사위이자 평강공주의 夫君인 溫達將軍이 신라군과 싸우기 위하여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이 공기돌로 힘자랑을 하였다고 하여 온달장군의 공기돌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 彌勒大院址』

"중원 미륵리사지"의 창건 후에 지리적 여건과 驛院制度의 정비로 동쪽에 별도로 역의 기능을 담당하는 院을 세우고 「미륵대원」이라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三國遺史」에 "彌勒大院鷄立嶺東嶺也"라 한 기록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 院址는 계립령(지금의 하늘재) 길과 연관되어 고려 초기 설치되어 운영되다가 조선시대에 조령(鳥嶺:일명 새재)에 관방시설(關防施設)이 완비되면서 이곳 院址는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해 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건물 터에 대한 조사결과 2차에 걸친 중수(重修)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건물 터는 '回'字形의 구조로 가운데에는 말을 묶어 둔 마방(馬房)시설을 두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주변의 건물 터는 나그네 숙소 및 관리인이 기거했던 건물 터의 구조가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사찰과 원터의 기능이 같이 이루어진 고려초기 중요한 유적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삼층석탑이 있는 하늘재 위치에서 바라 본 大院址의 전경입니다.)

 

 

 (입구에서 하늘재 쪽을 향해 바라 본 대원터의 전경입니다)

 

 

「中原彌勒里三層石塔」(충북 유형문화재 제33호)

신라 탑의 양식을 따른 고려시대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일반형의 석탑으로, 장중한 2중 기단 위에 3층의 탑 몸돌 부분을 형성하고 그 위에 노반을 얹어 놓고 있습니다. 매우 안정감을 주며,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을 하고 있는 신라시대 정형화된 양식을 잘 따르고 있습니다. 미륵대원지의 동쪽 200m 지점 위의 밭둑에 있는데, 탑을 세운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으나 비보사탑설(도선국사에 의해 제기된 이론)에 의해 땅기운이 약한 곳을 보강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북쪽에서 본 3층석탑 모양>

 

<북서쪽에서 본 3층석탑 모양>

 

<동쪽에서 본 3층석탑 모양>

 

 

 " 미륵리불두(彌勒里佛頭)" (市鄕土遺跡 第6號 .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

이 불두는 미륵리 삼층석탑에서 하늘재 방향으로 30m 위치하는 곳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화강암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입매는 일자형으로 보이며 입도 일자형으로 다소 작게 표현되었고 입술 윤곽선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코와 입 사이에는 사실적으로 음각의 주름선이 나타나 있고 귀는 길며 코 끝은 오독하지 않고 다소 편평하게 처리하였습니다. 일찌기 머리 부분만 남아 있는 것을 상체 부분을 새로 만들어 그 위에 원래의 머리를 올려 붙인 것으로 생각이 되는 이 불두는 미완성의 석불로 추정되며 고려시대 지방 불상양식을 살필 수 있는 문화재입니다. ( 高 138cm, 最大幅 118cm, )

 

 

하늘재로 오르는 길목을 지켜보고 있는 미완성의 頭像

 

 

 

이 바윗돌은 "미륵리사지" 로 들어서기 전의 월악산국립공원미륵리관리소 주차장 마당 끝편에 있는 지붕모양의 바윗돌인데, 바위돌 앞에 비석 2개가 나란히 서있습니다.

 

 

碑文을 자세히 보니"故 彌勒里區長을 지낸 李敎性과 그 부인 金氏의 碑石인데 글씨가 일부 풍화로 마모되고 아랫부분의 글씨는 땅에 묻혀 있어 읽을 수가 없습니다.

 

 

墓碑의 형색을 갖춘 것으로 보아 이 바윗돌 아래를 파고 夫婦合葬을 한 墓로 추정되며 碑石의 碑文으로 보아 일제강점기에 세운 것으로 보여 집니다.

 

 

송계계곡의 한 마을입니다. 월악산 주봉이 바라보이는 마을 앞 꽃밭이 매우 향기롭습니다. 

   

 

2010/10/6 충주 월악산 미륵사지에서, <鄕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