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악산/月岳山>
웅장하고 오르기 난해한 월악산 영봉과 그 주변의 한 풍경입니다.
<용하구곡>
<용하구곡>
월악산 동편 깊은 골짜기에 펼쳐진 계곡으로 , 수문동 폭포, 수곡용담, 관폭대, 청벽대, 선미대, 수룡담, 활래당, 강서대, 수렴선대를 일러 '용하구곡'이라고 한답니다.
여릿한 빗줄기가 계곡의 수면에 동그라미 무늬를 그리고 있습니다.
송계계곡으로 가는 길의 용하구곡 언저리의 풍경입니다. 농작물, 소나무 숲, 그리고 산이 三段의 층을 이루고 있습니다.
산골짜기가 가파르고 험요하고 사철 마르지 않는 물이 흐르는 긴 계곡과 풍부한 수량, 풍부한 임산자원, 영호남을 오가는 주요한 교통로에 위치한 덕주산성은 피난처로 적합한 지리적 조건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려사」등 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덕주산성은 백제의 옛 성(B.C18~A.D660)으로 전해지는 古城으로 신라 말 덕주공주의 피난처이자 덕주사를 창건한 곳이며, 또한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바치러 갈 때 머물었던 곳입니다.
고려 고종43년(1256년)몽고의 침입으로 충주사람들이 이곳으로 난을 피해 왔는데, 월악산신(山神)의 도움으로 몽고군이 공격을 포기하고 물러간 산성이라고도 전합니다. 둘레는 약 15km가 넘으며 4개의 곽을 이루고 있는 특이한 산성으로 충청지역의 최대규모의 차단성(遮斷性) 역활을 하는 산성이었습니다.
<덕주산성 북문>
남문 아래 너른 공터(건물지로 추정됨)에는 옛 주춧돌과 석재들이 널려 있습니다. 돌 마다 일련의 고유번호가 부착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복원을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새로 마련한 석재들도 보입니다.
남문에서 산으로 쌓아 올린 성곽의 모습입니다. 크기가 제각각인 석재들로 천년 세월의 풍파를 견뎌낼 정도로 이렇게 견고하고 정교하게 쌓았다는 것에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송계계곡 상류 쪽에 위치한 덕주산성 북문입니다. 계곡과 지방도로를 가로 질러 막아선 듯 쌓은 城입니다. 한쪽은 깎아지른 절벽(망폭대)에 계곡에 물이 흐르는 자연으로 이뤄진 천혜의 조건을 이용하고, 다른 한 쪽은 돌로 쌓은 성입니다. 물줄기를 막은 제방처럼 산과 산 사이의 계곡과 길을 막아 성을 쌓아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엄청난 인력을 동원하여 오로지 망치와 정(釘)하나로 이 토록 엄청난 성을 쌓은 것에 숙연해 집니다.
가파른 산인만큼 가파른 각도만큼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단을 두어 쌓았는데, 단의 높이가 키를 잽니다. 산의 각도와 단의 높이는 정비례됩니다.
높은 단을 기어오르다시피 대략 170m정도 城을 타고 오르니 편마암으로 이루어진 절벽이 보이고 거기서 城도 멈췄습니다.
성이 끝나는 여기서부터는 천혜의 절벽이 성벽을 대신해서 그 역활을 해주고 있습니다.
성벽이 끝나는 성벽에서 허리를 펴고 올라온 방향으로 돌아서니 월악산의 봉우리들이 첩첩산중을 이루고 있습니다.
골짜기에 맨땅과 집같은 형체가 보입니다.
사진기의 렌즈를 통해 줌으로 보니 골짜기에 덕주사가 어렴풋이 보이고 그 앞에 있을 덕주산성 북문은 나무에 가려 볼 수가 없었습니다.
밑을 내려다보니 나무사이로 남문이 빼곰히 얼굴을 디밀고 있습니다.
城을 밟고 내려오다 도중에 서서 내려다보니 남문 너머로 망폭대가 위용을 보이고 있습니다.
올라갔던 성벽의 측면 모습입니다. 천년의 세월에도 이렇듯 그 견고하기가 비길 데가 없습니다.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이 시대에 쌓았다면 과연 얼마나 견뎠을까 고도의 기술로 세운 다리며 건축물들이 붕괴되고 침몰하고 무너지는 요즘의 실태를 생각하니 더욱 옛 선인들의 슬기와 성실함이 그립고 아쉽습니다.
성문루 문밖으로 성벽이 산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남문 문루 내부 모습입니다. 성벽과 사이를 두고 마루를 깔았습니다. 우측으로 망폭대가 보이고, 좌측으로는 쌓은 성벽이 산마루턱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덕주산성/德周山城>남문 문루에서 내려다본 문루 앞의 모습입니다.
<덕주산성 남문/德周山城 南門>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충청북도 기념물 제35호.
남문 남쪽 측면입니다.
<망폭대/望瀑臺>
이 망폭대는 송계8경 중 하나로 제2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기암과 고무서리 계곡을 굽이도는 맑은 물이 어우러진 절벽으로 신라시대에 축조한 덕주산성의 안쪽 맥이 이어져 있어 더욱 특이한 느낌을 줍니다. 절벽위에 있는 노송(老松)은 속리산에 있는 정이품송(正二品松)을 닮았다 해서 정삼품송(正三品松)이라고 한답니다. 송계8경은, 월악산 영봉, 월광폭포,자연대,수경대, 학소대, 망폭대, 와룡대, 팔랑소, 등 입니다.
(망폭대 上面)
(망폭대 下面)
망폭대 옆 절벽입니다.
<덕주산성 북문/德周山城 北門>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충청북도 기념물 제35호.
충청북도 한수면 월악산 송계계곡을 따라 가는 도로를 가로질러 축성된 덕주산성은 마의태자 누이 덕주공주의 이름에서 유래합니다. 송계계곡을 끼고 길을 따라 가면 하늘재와 지릅재에 이르게 되는데 그 하늘재와 지릅재 사이 아래 옛 절터 미륵사지는 마의태자가 덕주사에 덕주공주를 남겨두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잠시 머물며 창건한 절이라고 전합니다. 그 미륵사지에는 마의태자가 세웠다는 미륵불이 있는데, 이 미륵불은 덕주사에 두고온 공주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공주의 안녕을 빌며 세웠다고 합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덕주산성 남문 안 골짜기의 덕주사 뒤 절벽에는 덕주공주가 오라버니인 마의태자를 그리며 불사했다는 마애불이 있습니다. 그 마애불과 미륵사지의 미륵불은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덕주공주는 마의태자의 안녕을 빌고 마의태자는 두고 떠나는 덕주공주의 안녕을 바라며 서로 마주보는 위치로 세운 것이라고 전하니, 그 정경을 생각하자니 가슴이 뭉클합니다. 이별은 누구의 사연이든 언제나 눈시울을 적시게 합니다. 참고로 일전에 영봉에 오를 때 담았던 마애불 사진과 미륵사지의 미륵불 사진을 보탭니다.
이번에는 덕주산성만 둘러봤는데, 이야기를 쓰다보니 덕주공주와 마의태자 이야기에 이르러 2011년 이른 봄에 월악산 산행할 때 찍은 마애불 사진을 참고로 올렸습니다. 덕주공주가 오라버니인 마의태자를 생각하며 새겼다 하니 마의태자를 닮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마애불 전신 / 磨崖佛 全身>2011년 3월27일 11시07분 촬영.
월악산 영봉 가는 길에, 마애불과 주변 풍경 / 2011년 3월27일 11시07분 촬영.
충주 <미륵대원지/彌勒大院址>(사적 제317호)
이 절터는 동쪽의 하늘재와 서쪽의 지릅재 사이의 분지에 있는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존속하며 남북의 중요한 길목에서 불교사찰의 역활 뿐만 아니라 군사,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역활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안내문에 의하면 1970년대 말부터 3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 졌는데 미륵당(彌勒堂), 미륵당초(彌勒堂草) 등 글자가 새겨져 있는 기와가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 일대가 미륵리라는 지명으로 불리는 것으로 볼 때 석굴사원의 이름은 미륵대원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寺域內의 석불, 석등, 석탑, 당간지주, 돌거북 등 많은 유물이 남아 있어 고려시대의 화려했던 절의 모습을 전하고 있으며 특히 석불을 둘러싼 Π형 석실 벽에 일정한 간격으로 감실을 마련하고 그 안에 돌로 조각한 부처와 보살을 넣어 모셔는데 몽고의 침략으로 절이 불타면서 파손되고 유실되었으나 지금도 파손된 것이나마 일부 남아 있었습니다.
보일듯 말듯 짓는 미소, 그 의미를 내 알듯 모를 듯 하네.
몸에는 오랜 풍화로 이끼와 세월의 더케가 검버섯처럼 끼었건만, 얼굴과 목은 분장이라도 한 듯 새색시처럼 뽀얗고, 내려 감으셨는지, 가늘게 뜨셨는지 알 수 없는 눈은 중생의 미래를 위한 깊은 묵상과 참선을 보이는 듯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함을 슬퍼해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이곳에서 석굴을 조성하고 석불을 세워 누이인 덕주공주가 송계계곡으로 남향한 암벽에 새긴 덕주사의 마애불과 서로 마주 보게 했다는 애절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미륵리寺址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절터이며, 석굴사원으로서 방식은 다르지만 석굴암을 모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학소대/鶴巢臺>
月岳山 깊은 골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 감도는 곳으로 절벽을 따라 긴 덕주산성이 자리 잡고 있는 덕주산성 동문 옆 산성과 아우러진 이 암벽은 학소대입니다. 위 망월대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 곳입니다. 덕주사 불경소리가 은은히 울려퍼지고 옛부터 학이 서식하고 있는 곳으로 전해져 옵니다. 학소대라는 이름은 바위 절벽위의 모양이 학의 둥지 같다하여 붙여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애불로 가는 길목인 이곳에 앉아 고요한 정적에 잠겨드니 신라의 천년사직의 비운이 비치듯 떠오릅니다.
<덕주산성의 선돌>
덕주산성 북문과 성벽 사이에 선돌이 있습니다. 이 선돌은 거석문화의 일종으로, 본시 국가가 형성되기 전 후의 선사시대나 청동기시대 또는 원삼국 시대부터 마을 입구나 신성시하는 곳에 세웠던 입석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와 유사한 모습을 지닌 돌입니다.
<선돌/立石>
북문 옆 도로와 계곡 사이에 세워진 이 선돌은, 누가, 언제, 왜, 세웠는지 전해지는 바가 없습니다.
덕주사와 마애불로 가는 길과 계곡의 모습입니다. 덕주사는 이 자리에서 200m 정도 위에 있고, 마애불은 1.6km 정도 오르면 있습니다.
천연의 자연으로 빗어진 돌을 그대로 그냥 척척 쌓았을 뿐인데, 천년 세월을 견디고 있습니다.
<덕주산성/德周山城>충청북도 기념물 제35호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소재)
이 산성은 월악산의 남쪽 기슭에 있는 상덕주사를 중심으로 하여 그 외곽을 여러 겹으로 둘러쌓은 돌로 쌓은 산성(石築山城)입니다. 상덕주사의 외곽을 둘러 싼 上城 (내성으로 제1곽), 하덕주사를 감싼 中城(일명 동문주변 제2곽)과 그 외곽으로 下城(제3곽)이 있으며, 송계 계곡인 월천의 남쪽을 막아 쌓은 남문과, 북쪽의 북문을 이루는 관문형식의 외곽성(제4곽)등 네 겹으로 이루어진 매우 견고하고 큰 규모의 석성입니다.
고려 고종 때 몽고의 침입시 월악대왕의 가호와 월악신사 등과 관련한 항몽의 유적지이기도 하며 조선 중종 때 내성을 축성하고,
임진왜란 때에도 역활을 하였으며, 조선 말기에는 명성황후와의 관련이 있는 등 역사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역활을 하였던 대표적인 사적입니다. 북문의 문루를 복원하였으며, 최근에 남문과 성벽도 일부 보수 하였고 문루 주변지도 정비 중이 었습니다.
德周樓 현판이 걸려 있는 북문 중간에는 2개의 수구가 돌출되어 있습니다. 비가 오면(雨期) 누각 위에 빗물이 고이지 않도록 배수하는 곳으로 석재로 조각되었고 물이 나오도록 구멍이 뚫렸습니다. 대다수의 궁궐 문에서는 용머리(龍頭)나 해태모양으로 조각하였습니다.
덕주산성 북문 누각 현판. '德周樓'
<덕주산성 북문 출입구>
아취형 출구 안 바닥에는 6개의 주초석이 보관되고 있습니다. 주변에 딩굴고 있던 것을 모아 놓은 것으로 봅니다.
가공하지 않은 자연절벽에 붙여 세운 덕주산성 북문.
<덕주산성 북문 덕주루/德周山城 北門 德周樓>
복원한 것이지만, 남문의 문루와 그 형태가 같습니다.
학소대 아래 덕주산성 성벽입니다.
<덕주사 쪽에서 본 북문> 지금은 도로로 인하여 문루와 성벽이 단절되었지만, 원래는 길이 난 곳에 성벽이 우뚝 가로 막고 있었겠지요.
문루 위에서 바라본 가파른 산 정상으로 이어진 산성의 모습입니다.
산성 안쪽의 성벽모습입니다.
덕주산성의 배치도 입니다.
월악산의 모습, 제천으로 가는 길에 바라본 월봉
2014년 5월24일 <鄕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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