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미륵산, 미륵불, 경천묘 / 彌勒山 . 彌勒佛 . 敬天廟 (원주)

鄕香 2014. 5. 29. 15:00

옛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바치고 돌아오는 길에 두루 명산들을 둘러보다가 이곳 용화산(미륵산)의 수려한 산세에 마음이 끌려 정상의 거대한 바위 절벽에 미륵불을 조성하고 그 아래 학수사(황산사)를 세웠다는 미륵산을 산행하고 미륵불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코스는 미륵산 쉼터- 경순왕의 영정을 모신 경천묘(100m)-황산사터(학수사지 900m정도)-미륵불(300m)-미륵봉(100m)미륵불바위정상-미륵산 정상(1km)-원점회귀, 왕복4km에 3시간30분 정도 소요됩니다.  

 

미륵산은 원주시 남쪽, 충주시 소태면과 경계를 이루는 해발 689m의 산으로 정선의 실경산수 한 폭을 연상케 하는 정상부근에 동쪽을 향해 높이 48척의 초대형 미륵불상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미륵불상은 신라의 56대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초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나무 숲과 참나무 군락이 하늘을 가려 상큼한 공기에 시원한 그늘로 이어진 오름이 결코 만만치 않지만, 그리 힘들지도 않습니다. 다만 미륵불이 있는 정상에서 삼층석탑이 있는 옛 절터인 황산사터까지 골짜기로 내려오는 길은 가파르고 험하여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외에도 미륵산은 경상남도 통영의 미륵산과 전라북도 익산의 미륵산이 있습니다.

 

 

 

 

<경천묘/敬天廟> (원주시 향토유적 1호)

 

신라 제56대 경순왕<(敬順王?~935)재위 927~935> 부(傅)는, 927년 포석정에서 놀이하던 경애왕이 경주를 점령한 견훤에게 살해되고 견훤의 옹립으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931년 왕건이 경순왕을 알현하여 수 십일을 머물었는데 그는 부하들에게질서와 규율을 지키게 하니 수도의 아녀자들은 '전본의 견훤이 왔을 때에는 늑대와 범을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자력으로 나라가 다시 일어날 수 없을 만큼 국력이 쇄약하고 중앙귀족간에 왕권 쟁취에만 혈안이 되어 있고 지방세력인 호족들의 반란으로 통치력이 점차 약화되어 있는 지경에 이르렀음에 935년 경순왕은 신라 천년사직의 문화보존을 위해 고려에 나라를 넘겨 줄 것을 신하들과 논의 하고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왕건에게 항복하는 국서를 전하게 하였습니다. 경순왕은 아들이 둘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마의태자(麻衣太子)이고 막내아들은 범공(梵空)입니다.이 때 마의태자는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범공은 머리를 깎고 화엄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습니다. 경순왕이 신하를 거느리고 고려에 귀의할 때 향거(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리를 이었다고 합니다. 고려에 항복한 뒤 경순왕은 왕건의 큰딸 낙랑공주와 다시 결혼하였습니다. 왕건은 경순왕을 정승공(正承公)으로 봉했는데 그 지위는 태자의 위였습니다. 왕건은 또 그에게 녹(祿) 1,000석을 주고 그의 시종과 원장(員將)을 모두 등용하였으며, 신라를 고쳐 경주라 하고 그의 식읍(食邑)으로 주었으며, 그를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삼았습니다. 경순왕은 신라를 고려에 평화적으로 넘겨준 뒤 명산을 두루 다니다가 이곳 용화산(龍華山)의 빼어남을 보고 그 정상에 올라 미륵불상을 조성하고, 그 아래에 학수사(鶴樹寺)와 고자암(高自庵)을 세웠다고 전합니다. 경순왕이 돌아가시자 왕을 추종하던 신하와 불자들이 고자암에 영정(影幀)을 모시고 제사를 받든 것이 영정각(影幀閣)의 시발이었습니다. 고려 중세에 전각(殿閣)은 무너지고 인적도 끊어졌다가 조선 초에 목은 이색(牧隱 李穡) . 양촌(陽村) . 권근(權近) 등에 의해 전각이 중수 되었고, 그후 조선 숙종 때 원주목사 김필진(金必振)이 새로 화상(畵像)을 그리고 다시 전각을 지어 모셨으나 화재를 당했고, 영조 때 재건되면서 임금이 영정각의 명칭을 '경천묘(敬天廟)'로 하사(下賜)하였습니다. 그후 경천묘는 소실되어 버렸으나, 경순왕이 머물렀던 유래에 따라 이곳의 지명이 귀래면(貴來面)이라 불리어지게 된 점과 무고한 신라인들의 생명을 보전하고 신라문화를 지켜낸 왕의 충정을 기리고자 원주시는 2006년 9월 이곳 미륵산 아래에 경천묘를 복원하였습니다.

 

 

 

 <경천묘 조형도>

 

 

 

 

(경천문/敬天門)

경천묘(敬天廟)로 들어가는 첫 번째의 문입니다.

 

 

<신문/神門>

경천문을 들어서 10개의 돌계단 위에 있는 중문(神門)으로 이 문을 지나면 영정을 모신 사당(敬天廟)입니다.

 

 

<경천묘/敬天廟>

신라의 마지막 임금 제56대 경순왕의 영정을 모신 사당입니다.

 

 

 

정문 격인 경천문 안 우측에 있는 건물로 館舍입니다.

 

 

 

미륵산으로 오르는 길목에서 돌아다본 경천묘의 모습입니다.

 

 

 

미륵산으로 오르는 초입의 들머리입니다.

 

 

 

미륵산 정상까지 1.8km임을 이정표가 암시해 줍니다.

 

 

 

구비구비 돌아오르는 등산로는 현충일로 휴일이건만, 호젓하기만 합니다.

  

 

 

이제 겨우 들머리를 벗어났을 뿐인데, 앞서가던 친구가 힘들어 합니다. 직장 일로 그 동안 산행할 여유가 없었던 효과를 보는 셈인데, 이리 말하는 저도 입장이 같기는 매 일반이어서 어느새 온 몸에 힘이 들어갑니다.

  

 

 

오르는 오솔길 옆에 돌담을 두른 부도 한 쌍이 있습니다. 호기심 많은 철부지가 그냥 지나치질 못하고 들여다 봅니다. 부도 형식을 눈여겨 보니 고려 중기의 부도형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학서당/鶴西堂>

팔각으로 이루어진 것을 모를 둥글린 것에 연화문을 새긴 연화대(蓮花臺)위에 하나로 된 돌로 깎은 타원의 몸체의 앞면을 평편하게 깎아내고 '鶴西堂' 세 글자를 새겼고 그 몸체 위에 연꽃봉우리 모양을 구현했습니다. 경순왕이 이 산 중턱 어딘가에 세웠다는 학수사(鶴樹寺)의 학(鶴)자와 연관성을 보이는 듯한 인상을 주는 당호(堂號)에 눈길이 갑니다.   

 

 

 

<서응당/西應堂>

문양 없는 팔각대좌(八角臺座)에 타원을 이룬 몸체 위에 엎어 놓은 주발(覆鉢) 모양의 보주가 있는 부도로, 몸체 정면에 '서응당(西應堂)'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옆에 있는 '鶴西堂' 부도와 같은 '西'자를 쓰고 있고, 한 곳에 있는 것에 흥미를 끕니다. "학수사' 서쪽의 당, '학서당' 그 학서당에 응(應), 즉 학서당과 뜻을 같이한다." 이렇게 연관시켜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즉 '학서당'과 '서응당'이라는 당호의 주인은 학수사(鶴樹寺)를 세운 경순왕을 추종(追從)한 것일까요?

 

 

 

다시 마애미륵불이 있는 큰 바위 절벽을 향해 발길을 옮깁니다.  

 

 

 

발길이 뜸한 산길은 호젓하고 산새들의 맑고 고운 노래만 고요한 산 속의 숨결처럼 들립니다.

 

 

 

제법 넓은 길이 나온다 싶은데, 주변에 잡목이 없고 돌을 쌓아 만든 계단이 나타납니다.

 

 

 

<주포리 삼층석탑/周浦里 三層石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2호

원주시 귀래면 주포리 산 중턱에 위치한 높이 280cm의 이 석탑은 신라 경애왕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황산사(黃山寺)터에 흩어져 있던 것을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탑은 기단부가 없으며 자연 암반 위에 넓게 깎은 2장의 돌과 그 위에 2단의 굄돌을 놓고, 3층의 석탑을 세웠습니다. 탑의 몸돌에 비해 지붕돌이 지나치게 두꺼운 불안정한 모습을 하고 있어 고려시대 지방사회의 민간신앙 대상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안내문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신라에서 후삼국이라는 불안한 정세를 거친 점을 미루어 볼 때 그 정세의 여파가 미친 영향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석탑 뒤에 두 가지가 특이한 모양을 이루고 있는 나무입니다.

 

 

 

석탑은 보호철책이 둘러져 있고 그 안에 팔각의 석주와 돌 조각 한 점이 함께 보존되고 있습니다.

 

 

 

탑 옆에 있는 용도가 불분명한 대석(臺石)에다 이 지방사적지와 관계된는 사람들이 대석과는 연관성 없는 용의 입 모양의 조각물을 보관 차원에서 석탑 보호철책 안 이 대석위에 올려놓은 모습입니다. 이 조각물은 불전에 오르는 계단 난간이나 건물 석축에 끼워 장식적 효과를 가지는 조각품으로 추정됩니다.

 

 

 

이 팔각의 석주는 석등의 간주석(竿柱石)으로 보입니다. 그 위에 누군가 주변에서 주워 올려놓은 토기편(土器片)이 있기에 자세히 보니 갈색은 작은 그릇의 굽조각이고 검은 색의 토기는 신라토기에서 흔히 보이는 원인문(圓印文)이 일정하게 압인(押印)되어 있고 안쪽에 그릇 위에 걸쳐지는 테가 있어 그릇 뚜껑(蓋)의 깨진 한 부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깊은 산중 중턱 이 곳에 옛 절터의 흔적들이 세월을 초연한 듯 머물고 있습니다.

 

 

 

 미륵을 모신 미륵당 앞 너른 마당이었을 이 자리에는 석물들의 몇몇 잔해만 덩그러니 남아 자리를 보전하고 있습니다.

 

 

 

마당 윗쪽에 자리하고 있는 축대 위에 근접하기 조차 망서려지는 스산한 기운을 품은 천막이 한 채 을씨년스럽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문틈새로 사진기의 렌즈를 들이 밀고 어둠의 장막속 같은 안을 향해 셔터를 지그시 누르고 돌아와 올린 모습입니다. 짐작은 했지만, 막상 화면을 올려보니 역시 미륵보살의 불단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다시 마애미륵불이 있는 바위를 향해 옛 절터를 뒤로 하고 산으로 오릅니다.

 

 

 

첫 오름의 철조계단이 보입니다.

 

 

 

가파른 암반에 걸쳐진 계단 또한 가파릅니다. 어느새 땀이 옷을 흠뻑 적십니다.

 

 

 

잠시 계단에 서서 무거운 다리를 잊을 양으로 먼 산의 시원한 풍경을 시각을 통해 온 몸의 고단함을 치유합니다.

 

 

 

밧줄에 의지도 해가며 지루할 새 없는 어려움을 덜어봅니다.

 

 

 

반복되듯이 또 철조계단을 오르고, 가파른 바윗길을 가노라면 힘들게 오르는 일도 한 점 바람에 시원해지는 상쾌함, 이 또한 지나가리라.

 

 

 

얼추 등성이에 올랐다 싶어 철조계단 옆을 보니 큰 바위가 우뚝 솟아 앞을 막고 있습니다.

 

 

 

꺽정이의 눈처럼 부리부리한 눈에 주먹같이 큰 코와 외계인처럼 크게 솟은 귀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 미래의 부처님의 얼굴은 경순왕의 얼굴을 조각한 것이라고 전해 온답니다.

 

 

 

미륵산이라는 이름은 미륵불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생각됩니다. 경순왕의 장녀 덕주공주(德周公主)가 지금의 월악산 골짜기에 높이 15m의 큰 바위에 마애미륵불(磨崖彌勒佛)(보물406호)을 조성하여 신라의 재건을 염원하면서부터 그로 인하여 산의 이름을 월악산(月岳山), 절의 이름은 덕주사(德周寺), 골짜기를 덕주골로 부르게 되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 기록되어 있음)하며,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미륵사지의 미륵불은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함을 슬퍼해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이곳에서 석굴을 조성하고 미륵불을 세웠는데, 이후 이 일대가 미륵리가 되었듯이 (누이인 덕주공주가 송계계곡에서 남향한 암벽에 새긴 덕주사의 마애불과 서로 마주 보게 했다는 애절한 이야기가 있음) '경순왕도 이곳 원주 용화산(龍華山)정상부근 암벽에 미륵불을 조성하여 이곳  용화산(龍華山)도 미륵산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런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세 사람이 모두 미륵불을 조성한 것에 우연의 일치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지요. 경순왕의 따님이신 덕주공주는 제천시 월악산 중턱 암벽에 미륵불을 조성하여 그 일대가 덕주산이며 덕주골이 되었고, 경순왕의 큰 아드님이신 마의태자는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미륵불을 세움으로 그 일대가 미륵리라는 지명이 되었으며, 아버지 경순왕이 조성한 이곳 미륵불로 인해 용화산은 미륵산이 되었습니다. 경순왕과 그의 아들과 딸이 명산(名山) 길지(吉地)에 모두 내세(來世)의 구원의 부처인 미륵불을 조성하여 망국의 한을 달래며 후세를 기약한 것은 아닌지...

  

 

 

<마애미륵불좌상/磨崖彌勒佛坐像>

거대한 암벽면에 얼굴은 돋을새김(淨彫)으로, 몸체는 선각(線刻)으로 조각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높이10m의 마애미륵좌상입니다. 얼굴은 신체에 비해 큰 편인데 네모난 얼굴에 눈이 수평으로 길며 코와 입이 큼직하게 표현되었습니다. 몸은 음각으로 새겼는데, 마모와 탈락이 심하여 구체적인 옷의 형태(天衣)나 손(手印)을 알아보기는 어렵습니다. 부처가 앉아 있는 자리(臺座)는 꽃잎의 끝이 위로 향한 연꽃 모양의 앙련좌(仰蓮座)인데 양쪽 끝부분만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폭이 넓은 큰 코에 눈과 입이 투박하고 전체적으로 토속성이 짙은 얼굴 모습은 고려시대 돌조각에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이며, 현재 강원도에는 이처럼 암벽면을 깎아 만든 거대한 마애상의 유래가 매우 드문 예로 그 의미가 크다 하겠습니다.  

 

 

 

정면으로 올려다본 모습.

 

 

 

부처는 크게 현세의 석가모니불, 미래의 미륵불, 과거의 제화갈라보살이 계시며, 미륵불은 보살의 몸으로 도솔천(兜率天)에서 머물다가 미래에 석가모니불에 이어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의 부처입니다. 대승 불교(大乘佛敎)의 대표적 보살 가운데 하나입니다.    

대승불교는, 널리 인간 전체를 구제하여 부처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불교의 한 교파를 이릅니다.

 

 

 

미륵불의 머리가 새겨진 바위 바로 위의 모습으로 바위윗면에 길이 약1m 정도의 길이로 반듯하게 깎아 내었는데, 머리 부분을 눈이나 비를 막아주는 차양을 설치한 흔적으로 보이며 좀 떨어져 바깥으로 기둥을 끼워 세울 수 있는 큰 구멍이 2개 작은 구멍이 6개가 뚫려 있습니다.

 

 

 

 

미륵불이 암각된 바위 정수리(차양 시설물을 설치한 자리)에 등산객들이 올라서서 있습니다. 사진기를 들이대니 의문의 시선을 보냅니다.

 

 

 

절벽 아래를 보면서..

 

 

 

이 암봉우리를 넘어 미륵산 정상으로 갑니다.

 

 

 

미륵산 정상으로 가는 길에는 이런 너덜겅들이 쌓여 있는 곳이 두어 곳 있습니다.

 

 

 

건강한 여러 종류의 참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는 다른 樹種은 보이지 않습니다.

 

 

 

굴참나무의 싱싱하고 무늬도 아름다운 樹皮입니다.

 

 

 

정상, 대부분의 산봉우리에는 헬리콥터장이 자리를 같이 합니다.

 

 

 

힘들고 무더위에 땀으로 옷이 흠뻑 젖어도 그 모두 우리 삶의 일상이기에 기쁨이고 즐거울 수 있음이요 행복입니다.

 

 

 

사방의 신선계를 두루 보고 만끽하며 아름다운 자연의 한 일부로서의 행복을 심호흡으로 가득 채우고 다시 오던 길로 들어섭니다.

 

 

 

저 신선한 나무들의 품속으로 들어서면 나도 녹색의 평안으로 한 가지가 되리..

 

 

 

많은 이들의 흔적이 나풀거리고 있습니다. 자연은 흔적을 원치 않습니다. 그 어떤 흔적도 자연에게는 상처일 뿐입니다.

 

 

 

너덜겅이 쌓인 길은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며 가는 듯한 경쾌함에 즐겁습니다.

 

 

 

누가 행복한 전당과 고통의 지옥이 하늘에 있고 극락에 있다고 했나요. 모든 행복, 모든 불행은 내 마음과 이 세상에 있는 것임을.. 지금 바라보고 있는 곳은 仙界랍니다. 이 풍경에 마음이 빠지니 내 마음 선계에서 고요를 벗하고 있을 뿐입니다.

 

 

 

잡목이 없는 큰 나무 숲이 나오면 여러 풍경을 볼 수 있어 눈이 즐겁고 눈이 즐거우니 마음이 행복합니다.

 

 

 

이곳은 미륵불이 있는 우측 계곡으로 들어서는 곳입니다. 오를 때와는 달리 계곡을 끼고 내려갑니다.

 

 

 

가파르고 험한 길입니다. 이곳을 오시는 분은 이 계곡을 피하시길 바랍니다. 경험이 부족한 분은 위험할 수 있겠습니다.

 

 

 

내려온 곳을 돌아다보니 아득합니다.

 

 

 

어려운 곳은 어려운 대로 수월한 곳은 수월한 대로 피할 수 없는 행로라면 그 자체를 즐기십시오. 그 모든 여로는 단 한번의 기회입니다. 고통과 기쁨은 언제나 내 곁에 있는 것, 마음 갖기에 따라 인생은 즐겁고 행복할 수 있는 천국이요, 극락입니다.

 

 

 

누구나 즐거울 수 있는 미륵산에서 나 또한 오로시 즐거울 수 있었음을 손을 모아 고마움으로 자연에 감사드립니다.

 

 

 

2014년 6월7일 <鄕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