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고달사지/高達寺址(여주)

鄕香 2014. 5. 16. 23:24

드넓은 벌판에 융성했을 고달사(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11) 그 자리에 오늘 와보니 대단했던 흔적들 두 서넛만 휑뎅그렁하니 말뚝처럼 서있고 모래 덮인 그  황량함에 세월의 덧없음을 본다. 며칠 전 휴일을 택해 왔다가 일정관계로 미처 둘러보지 못한 곳을 보기 위해 사진기와 물통 과일 약간 넣은 작은 륙색 걸쳐 메고 전철로 양평까지 와서 다시 자전거로 30여km를 달려 고달사지에 왔습니다.   

 

 

 

<고달사지 / 高達寺址 > (사적 제382호)

혜목산(慧目山)기슭에 자리한 고달사(高達寺)는 신라 경덕왕23년(764년)에 건립된 것으로 전합니다. 이 절은 고려 초기에 국가가 관장하는 3대 선원(禪院)가운데 하나로서 왕실의 보호를 받은 중요한 사찰이었습니다. 975년 세워진 원종대사 탑비(元宗大師 塔碑)에 의하면 당시에는 고달원(高達院) 또는 고달선원(高達禪院)으로 불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조(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 고달사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까지는 번창했으나, 1799년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폐사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조선 중기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1637) 중에 소실되어 폐사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 / 驪州 高達寺址 石造臺座> (보물 제8호)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20-5번지에 위치에 있는 이 석조대좌는 불상은 없어진 채 페허에 대좌만 덩그런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한 4각 대좌로 조각이 명쾌한 솜씨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대좌는 장방형의 석재를 상 · 중 · 하대로 나누어 만들어진 것으로 겹쳐놓은 사각대좌(方形臺座)입니다. 위에 있는 대(上臺)는 앙련(仰蓮:하늘을 향해 핀 蓮)을 시원스럽게 조각했고, 가운대 대(中臺)는 4면에 모두 하나의 큼직한 안상(眼象:무늬를 파낸 수법 측면으로 본 연꽃 모양새)을 음각했는데, 솜씨가 명쾌하며, 아래 대(下臺)에는 위에 있는 대에 표현된 앙련과 같은 수법의 연꽃을 복련(覆蓮:연꽃을 엎어 놓은 모양새)으로 새기고 그 아래에 각 면마다 4개의 안상도 새겨 놓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방형의 중첩과 연꽃과 안상무늬의 교체를 명쾌하고 산뜻한 조각솜씨로 조화시킨 크기나 문양에서 경쾌하고 시원스러운 맛에서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는 대작이라 하겠습니다 

 

 

 

 

<고달사지 승탑 / 高達寺址 僧塔> 국보 제4호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년)에 처음 건립되어 고려 광종 대 이후 한때 전성기를 누렸으나 지금은 폐사되고 터만 남아 몇몇 유물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팔각원당형의 고달사지 부도는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섬세하고 화려한 고려시대의 부도 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부도의 하대석에는 팔각의 각 면에 안상(眼象:원형이나 장방형의 곡선을 새겨서 우묵하게 파낸 조각의 일종)이 새겨져 있고 그 위에 연꽃이 조각되었으며, 중대석에는 구름과 함께 거북 용이 웅장하고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어 이 부도의 특성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상대석에는 연촉이 표현되어 있고, 그 위의 몸돌에는 8각의 면마다 모서리 기둥(隅柱)이 새겨져 있으며 그 사이 마다 자물쇠 문양(門扉)과 영창(映窓)이 각기 상대를 이루며 표현되어 있고 그 사이 면에 사천왕상이 4면을 차지 하고 있습니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만들어 졌는데 추녀 끝에 꽃무늬(귀꽃)가 조각되어 있고 추녀 밑 3단을 이룬 윗면에는 이 승탑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천상(飛天像)이 몸을 숨기듯이 새겨져 있습니다. 상륜부에는 복발(覆鉢:엎어 놓은 주발 모양)과 보개가 올려져 있습니다. 이 고달사지 부도는 전체적인 조각수법으로 보아 같은 절터에 남아 있는 원종대사탑(977년 건립 추정)보다 앞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측>

 

 

<좌측>

 

 

 

浮屠, 石燈 地臺石, 石盤.

 

 

 

<고달사지 부도 / 高達寺址 浮屠>국보 제4호

 

340cm 높이의 이 부도는 8각원당형으로 팔각지대석 위에 2단의 8각 굄대 위에 2개의 안상이 새겨진 하대석 내부 중앙에 귀꽃 모양을 양각하였습니다. 하대석 윗면에는 내림연꽃이 조각되었습니다. 중대석에 용머라형 거북을 중심으로 4마리의 용과 구름무늬가 부조되었는데 용머리 부분이나 구름에 싸인 용의 몸체표현은 새김이 깊고 생동감이 있습니다.

모서리 기둥(隅柱) 을 모각하고 문짝 모양과 사천왕상을 얕게 돋을 새김한 것은 당시 부도의 일반적인 양식입니다. 옥개석은 비교적 두껍고 지붕 윗면에는 8개의 우동선이 도드라졌고 추녀 끝에 높은 귀꽃이 장식되었습니다.

옥개석 정상부에 내림연꽃으로 상륜부와 연결지었습니다. 현재 상륜부에는 복발과 8각의 옥개석 모양의 보개석만 남아 있습니다.

 

 

 

<석등지대석과 석반>

石盤은 측면 4곳에 안상을 새겼고 상면에는 무늬가 없으며, 석반 앞의 팔각형의 판석은 석등을 올려 놓았던 지대석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러 예를 들 수 있지만, 가까운 여주 신륵사의 보제존자 나옹선사의 부도 앞에 석등이 있는 것도 한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승탑 탑신의 앞면의 거북의 머리 모습입니다. 머리 위에는 직사각의 구멍이 있는데, 용의 뿔을 따로 조각해 끼웠던 구멍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본시 용의 머리는 낙타의 머리로 형상화 한 것이나 여기서는 주둥이가 뭉뚝하니 사자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용은 9가지의 동물의 특수한 부분을 조합하여 형상화 한 것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낙타의 머리, 사슴의 뿔, 소의 귀, 뱀의 목, 토끼의 눈, 배(腹)는 큰 조개, 잉어의 비늘, 호랑이 다리, 매의 발톱 등 입니다. 이처럼 여러 동물들의 장점을 모두 갖추고 어마어마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최고의 권력자인 왕을 상징하는 동물로 여겼습니다. 왕의 얼굴을 용안, 왕이 앉는 의자를 용상, 왕의 옷은 용포, 왕의 눈물은 용루, 즉 용의 눈물이라는 표현입니다. 이처럼 옛 사람들은 용을 최상의 상서로운 동물로 여겼습니다. 용(龍)은 12띠를 상징하는 동물 중에 유일하게 인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로서 극대화 하였으며 옛 사람들은 용을 신비롭고 신성한 동물로, 비와 바람을 부리며 복을 가져오고 재앙을 물리쳐주는 수호신으로 여겼습니다.

 

 

 

석반(石盤) 앞에 있는 팔각의 판석으로 팔각 석등의 지대석으로 추정됩니다. 크기는 직경104cm, 한 변의 길이 44cm입니다.

 

 

 

탑신부의 前面입니다. 거북의 얼굴은 용의 형상이고 목에는 부처의 목처럼 삼도가 표현되어 있고 앞발톱은 세정하고 힘이 있으며 탑신을 받치고 있는 8개의 꽃잎(花葉脣)으로 이루어진 복련대(覆蓮臺)는 한 변의 길이가76.5cm 이며 무늬가 큼직하지만 섬세하고 정교한 맛과 준수함이 있습니다.

 

 

 

좌측면의 탑신부의 모습입니다. 여의주를 입에 문 용과 서기를 뿜어내는 용이 각기 발 하나 씩 뻗어 함께 화염에 싸인 보주를 받들고 있습니다.

 

 

 

탑신부의 우측 입니다. 좌측과 같은 형국이지만, 다만 두 마리의 용이 모두 서기(瑞氣)를 뿜어내고 있는 것이 다릅니다. 탑신부(용무늬의 상하)의 팔각의 한 면의 길이는 64cm입니다.

 

 

 

탑신부의 뒷면 입니다. 각 면에 2개의 안상이 새겨진 팔각의 한 면의 길이는 84cm이며 두 마리의 용이 꼬리를 서로 꼬아 온 몸으로 거북의 등 위 탑 전체를 지탱하기 위해 혼신을 다해 받들고 있는 형국이라 하겠습니다. 삼단을 둔 기단 위의 팔각의 받침대의 한변의 길이가 132cm입니다.

 

 

 

팔면체의 塔身과 귀꽃이 돋아있는 蓋石 그 위에 구슬 모양에 종횡으로 띠 무늬가 표현된 탑신 위에 蓋石(지붕돌)과 같은 모양의 귀꽃이 장식된 작은 지붕돌(蓋石)이 있으며 그 위에 상륜부가 올려져 있습니다.

 

 

 

팔면체의 탑신부 정면에는 잠글쇠가 달린 문이 있고 옆 면인 좌우 면에 사천왕이 조각되었으며, 좌 우측 면에는 窓이 조각되었고, 뒷면은 앞면과 같이 잠글쇠 달린 문이 조각되고 좌우 양면은 각각 사천왕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前面>

 

 

<右側正面>

우측 정면으로 창틀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正後面>

뒤 정면으로 앞면과 같은 모습으로 문과 잠을쇠가 표현되었습니다.

 

 

 

<左側正面>

좌측 정면으로 우측 정면처럼 창틀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천왕상/四天王像>

각 사방의 측면에는 사천왕상이 한 분씩 양각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천왕상의 좌우에는 창(窓)과 잠글쇠가 걸린 문(門)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팔각지붕 앞 정면 지붕돌 아래 면/蓋石底部面>

  탑신에 잠을쇠가 표현된 앞 정면 위 팔면으로 이루어진 지붕돌(蓋石) 밑 면에는 구름무늬(雲文)가 양각되어 있습니다.  

 

 

 

<팔각지붕 앞 좌측면 지붕돌 아래 면/蓋石底面> 앞 좌측 덮개석 밑 문양 비천상 / 前左側蓋石底面文樣 飛天像

 탑신에 사천왕상이 표현된 좌 측면 위 팔면으로 이루어진 지붕돌(蓋石) 밑 면에는 비천상(飛天像)이 양각되어 있습니다.

  

 

 

<팔각지붕 앞 우측면 지붕돌 아래 면/蓋石底面>

 앞 우측 문양 비천상 / 前右側文樣 飛天像

 탑신에 사천왕상이 표현된 우측면 위 팔면으로 이루어진 지붕돌(蓋石) 밑 면에도 좌측처럼 왼손에 보상화를 든 비천상(飛天像)이 양각되어 있습니다.

 

 

 

<팔각지붕 좌측면 지붕돌 아래 면/蓋石底面>

 정좌측 구름무늬 / 正左側 雲文樣 / 탑신 정좌측 창틀이 새겨진 위치 위의 지붕돌(蓋石) 밑면(底面)에는 구름무늬(雲文)이 양각되어 있습니다.

 

 

 

<팔각지붕 뒤우측면 지붕돌 아래 면/蓋石底面>

 뒤 우측 문양 비천상 / 後右側文樣 飛天像. (수리된 부분이 얼굴 쪽)

 탑신 뒤 측면에 사천왕상이 표현된 위 팔면으로 이루어진 지붕돌(蓋石) 밑 면에도 비천상(飛天像)이 양각되어 있습니다. 덮개석이 갈라 쪼개지면서 얼굴과 몸 부분의 파실로 수리된 곳에 시멘트가 빗물에 용해되면서 흘러 웅고되어 용태를 알아볼 수없습니다.

 

 

 

<팔각지붕 좌측면 지붕돌 아래 면/蓋石底面>

 정우측 구름무늬 / 正右側 雲文樣

 탑신 정우측(正右側) 창틀이 새겨진 위치 면 위의 지붕돌(蓋石) 밑면(底面)에는 구름무늬(雲文)가 양각되어 있지만 풍화로 그 형체가 희미합니다.

 

 

 

<팔각지붕 뒤좌측면 지붕돌 아래 면 문양 비천상 / 蓋石底後左側文樣 飛天像 (수리된 부분이 얼굴 쪽)

 탑신 뒤 좌측면에 사천왕상이 표현된 위에 팔면으로 이루어진 지붕돌(蓋石) 밑 면에도 비천상(飛天像)이 양각되어 있습니다. 뒤 우측면처럼 덮개석이 갈라 쪼개지면서 얼굴과 몸 부분의 파실로 수리된 곳은 용태를 알아볼 수 없으며 천의 자락 부분도 풍화로 부식되어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팔각지붕 뒤 정면 지붕돌 아래 면/蓋石正後底面>

 뒤 정면 구름문양  / 後正面 雲文樣

 

뒤 정면으로 앞면과 같은 모습으로 구름무늬(雲文)가 양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보상화를 손에 든 비천상은 그 신비로움을 감추기라도 할 양 추녀 밑에 숨어 있습니다. 이 비천상의 요염한 자태와 천의 자락에 표현된 사랑표를 보자고 백리 길을 한 숨에 달려왔지요. 그런데 정신머리 전당잡힌 친구들이 이 고운 자태에 분칠도 아니고 먹칠을 하다니..

 

 

 

위의 비천상이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악기를 들고 있는 주악비천상일까! 손에 쥔 물건의 끝을 보면 연꽃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대의 굵기로 보아 연꽃을 모체로한 이상화 된 보상화일 것입니다.   

아래의 비천상은 긴 대만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퉁소가 아닐까! 그렇다면, 주악비천상이 아닌가 ... 

 

 

 

마치 비행물체를 보는 양 그 빼어난 자태에 이끌려 이 달만 두  번을 찾아 온 곳입니다. 금방이라도 날아 오를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팔각에 날개처럼 솟아오른 귀꽃이 너무 매력적입니다.

 

 

 

아래 큰 개석의 귀꽃

 

 

 

귀꽃의 무늬를 보고도 모르겠네, 그저 떠오르는 것은 연봉우리 밖에..

 

 

작은 덮개의 귀꽃도 그 모양새는 큰 것과 같은 모양입니다. 그 옛날 정 하나로 어쩜! 이리 쪼아 올렸을까! 정을 대고 망치로 한 대 치면 옆에처럼 목이 부러져 나갈 것만 같은데...

 

 

 

승탑 앞 지면위에 팔각판석이 있고 조금 떨어져 石盤이 있으며, 좀 거리를 두고 좌우로 왕릉(王陵)의 문·무인석을 세워 놓은 것처럼 승려(僧)의 형태로 추측되는 돌이 서로 마주하여 세워져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석물을 부도 앞에 세운 것은 어느 사찰에서도 볼 수 없던 특이한 예입니다.

 

 

 

이 석물은 사각의 돌에 모를 죽여 세운 것으로 머리 모양에 목을 표현했고 팔을 접어 복부에 손을 모아 겹친 형태는 마치 승려가 읍손을 올리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고달사지 승탑에서 내려오는 길이자, 원종대사탑에서 승탑으로 올라가는 길인 계단입니다.

 

 

 

<고달사지 원종대사혜진탑 / 高達寺址 元宗大師慧眞塔>보물 제7호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 제 4대 임금인 광종 때까지 활동한 원종대사(元宗大師 869~958)의 부도입니다. 원종대사 탑비의 비문에 의하여 977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부도는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팔각원당형 부도로 2.5m 높이에 4장의 돌로 이루어진 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대석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중대석에는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린 거북의 좌우로 두 마리, 거북 뒤 양편에 두 마리 모두 4마리의 용과 수많은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상대석의 아래쪽에도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위쪽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한 1단의 받침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팔각형으로 이루어진 탑신부의 각 면에는 자물쇠 문양(門扉)과 사천왕상이 서로 하나 건너로 조각되어 있고, 지붕돌 끝에는 꽃무늬(귀꽃)가 오똑 돋아 모습으로 새겨졌습니다. 상륜부에는 꽃무늬가 조각된 복발(覆鉢)위에 작은 보개(寶蓋)와 보주(寶珠)가 올려져 있습니다. 

 

 

 

얼굴을 우측으로 돌린 거북을 중심으로 좌측과 우측에서 용이 侍衛하는 것 같기도 하고 탑을 잘 등지고 가라고 견마잡이 하듯 護衛하는 것인지 아무튼 흥미롭습니다.

  

 

 

우측면에는 구름 속에 꿈뜰거리는 용의 몸통이 보이다가 구름 속으로 사리지고, 다시 보입니다.

 

 

 

좌측면 또한 우측과 다름이 없습니다.

 

 

 

중대의 팔면 연화좌와 하대의 사각 연화좌 사이 거북과 용 구름이 새겨진 탑신의 후면(後面) 입니다. 수많은 구름에 둘려싸인 두 마리의 용이 각기 한 손을 뻗어 함께 여의주를 받들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있습니다.

 

 

 

상륜부 아래 밑에 꽃무늬가 표현된 팔면체의 노반과 개석은 모서리 끝에 귀꽃이 돋아 있고, 팔각의 탑신(몸돌)에 사천왕상이 1면 건너로 새겨져 있음이 보입니다. 

 

 

 

지붕돌(蓋石)의 밑바닥입니다. 구름 무늬가 있습니다.

 

 

 

각진 양 구분선에는 누군가 탁본을 뜬 먹으로 인하여 꽃무늬 띠가 선명합니다. 그 안에는 비천상(飛天像)이 돋을새김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머리부분이 확실치 않습니다.

 

 

 

탑 뒷쪽 덮개석 밑면입니다. 다른 방향의 무늬와 달리 두 손을 모은 자세의 비천상의 얼굴이 뚜렷이 보입니다.

 

 

 

상륜부 아래 팔면체의 노반과 개석은 모서리 끝에 같은 모양에 같은 문양의 귀꽃이 돋아 있고, 팔각의 탑신(몸돌)에 사천왕상이 1면 건너로 새겨져 있음이 보입니다.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 高達寺址 元宗大師塔碑>보물 제6호

이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는 혜목산고달선원국사원종대사지비(慧目山高達禪院國師元宗大師之碑)를 받쳤던 귀부와 비신석 위에 얹혔던 이수 입니다. 비는 일찌기 무너져 신석(腎石)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진열되어 있으며 이곳 고달선원 절터에는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습니다.

비문에 의하면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新羅 景文王) 9년(869년)13세에 출가하여 상주(尙州) 공산 삼랑사(公山 三郞寺)에서 융제선사(融蹄禪師)에게 師事하였으며 22세에 양주 삼각산 장의사(陽州 三角山 藏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23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서주 동성현 적주산(舒州 桐城縣 寂住山)에서 자선화상(子禪和尙)에게 사사하였으며 경명왕(景明王) 5년(921년)에 귀국하여 봉림사(鳳林寺)에 거주하였습니다. 그 후 광주(光州) 천왕사(天王寺)에서 고려 광종 9년(958년)에 90세로 입적하니 왕이 애도하여 원종대사 혜진(元宗大師 慧眞)이라 추시(追施)하고 진영일정(眞影一幀)을 그리게 하였으며 대사 입적 후 17년에 비가 세워졌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귀부(龜趺) 위 비좌(碑座)에 이수(螭首)를 올려 놓았던 것을 이수를 따로 옮겨 훼손 방지를 위해 흰 천으로 싸놓았습니다.   

 

 

 

 

 

<혜목산고달선원국사원종대사비 / 慧目山高達禪院國師元宗大師碑>

 

 

 

이 귀부는 거대한 단일석으로 조성하였으며 6각 귀갑무늬가 장식되어 있고 등에 장방형의 비좌(碑座)는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는 연화좌 위에 새겨놓았습니다. 네 다리와 손톱끝의 조형은 사실적이며 예리하나 귀두의 얼굴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용형(龍形)입니다. 이수는 구름과 용무늬로 장식되어 있으며 정상에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어 보주가 꽃혔던 흔적으로 추측됩니다.

(이 사진은 귀부와 이수를 떼어 놓기 전의 사진입니다.)

 

 

 

 

 

<귀부 뒷면>

 

 

 

인근에 있는 또 다른 귀부의 모습으로 머리와 비좌의 일부가 파손 되었습니다.

 

 

 

사실적으로 조각된 거북의 발톱에서도 장인의 심혈을 느낍니다. 

 

 

 

<고달사지 석조 / 高達寺址 石槽>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7호

길이 321cm, 폭149cm, 높이98cm 규모의 이 석조는 고달사지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것으로 일부 파손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좋은 편입니다. 하나의 돌에서 만들어낸 것으로 평면이 긴 사각형으로 표면은 고르게 다듬어졌으며 전체적으로 정연하면서도 정교한 모습입니다. 각 면의 모서리부분은 각을 죽여 부드럽게 곡선(弧形)으로 다듬어 세심한 부분까지 관심을 가지고 만들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내부에서도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밑부분에서 내벽과 바닥이 만나는 모서리 부분을 각을 두지 않고 부드럽게 둥굴렸으며 석조바닥 중간 한쪽 면 모서리에 배수를 위한 지름 7.5cm의 원형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배수 후 물이 남지 않도록 배수구를 중점으로 바닥의 높이를 미세하게 낮추었습니다. 이러한 기능적 측면이외에도 주목되는 것은 모서리를 처리한 장식 수법인데, 모서리 바깥면 중간에 1단의 굴곡을 두었으며, 상면 모서리에는 안쪽으로 연꽃잎이 살짝 말려들어가는 듯한 양감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 했으며, 상면으로 약 2cm 정도의 귀접이를 해주어 장식적인 기교가 돋보이고 있습니다.  이처럼 석조의 모서리부분을 화형으로 치석(治石)한 경우는 보기 드문 예에 속합니다. 이 석조는 전체적인 치석 수법과 고달사지의 연혁 등을 고려할 때 고려 전기에서도 이른 시기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와 같이 이 석조는 경기도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조성시기도 빠른 편에 속하여 학술적으로도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높습니다. 또한 현존하는 석조들과 비교해도 우수한 석조(石造) 기술과 장식 기법을 보이고 있어 예술적으로도 뛰어난 석조(石槽)로 판단되며 나아가 당시 고달사의 연혁이나 위상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유물입니다.

 

 

 

다음은 석조(石水槽)가 발굴된 지역의 발굴조감도와 추정된 설명입니다.

여러 건물지로 둘러싸인 원(院)과 서쪽의 여러 요사채를 외부로부터 차단해 주는 역활을 하는 동쪽을 바라보고(東向) 앉은 건물지로 북어칸에 수조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건물지의 크기는 정면 4칸 측면(기둥간 거리 4.3~4.6cm) 1칸(柱間거리5.5cm)이며, 이 건물지는 구들 및 수조가 놓인 실, 물품을 보관하는 광 등 각기 다른 용도로 구성된 생활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곧, 이 건물지의 어칸과 좌퇴칸에는 방형으로 구획된 아궁이와 "ㄷ"자형 1줄 고래 흔적이 발견되었고, 좌측 협칸 가운데에는 석조와 물을 끊이는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작은 구들 시설이 설치되어 있고, 우측 협칸에는 우물마루를 설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탄화목재와 함께 그 상면 소토층에서 천자와 도기, 흑유완, 철정, 배목, 고리, 국화쇠 등 많은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건물지는 구들이 놓인 2칸의 실(室)과 1칸의 창고건물(庫堂)이 어우러진 이채로운 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석조는 대개 승려들이 물을 담아 두거나 곡물을 씻을 때 사용하거나 중심공간에 진입하는 부분에 놓여 부처님 앞에 나갈 때 손을 씻거나 입을 행궈 몸을 청결히 하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실제오 석조는 그 기능상 요사체와 종종 연관지어 이야기되며, 여러 절터(寺址)에서 발견된 석조는 그 크기나 위치가 제각각이지만 이처럼 건물지 안에서 발견되기는 드문 예입니다.

    

<고달사지 전경 / 高達寺址 全景> 

 

 

 

09시13분에 고달사에 도착하여 둘러보고 길을 나서니 여양 사거리에 도착하였습니다. 시각은 10시51분, 여기서 자전거를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양동으로 갈까요? 여주로 갈까요? 아니문 용문으로 갈까요? 이리가나 저리가나 길은 하나인데, 가다가 꽃 있으면 꽃도 보며 시골 정취에 취해 가노라면 100리 인들 멀겠습니까! 사는 거 머 있습니까! 그리 사는 거지요. '하여가'가 아니더라도, 이리 가면 어떻고 저리 가면 어떻고, 또 머물면 어떻겠습니까? 시름 가니 좋고, 세월 가니 좋지요. 자전거야 이제 그만 길 가자 가다 때가 되면 해장국이나 한 그릇 먹자구나! ㅎㅎ

   

 

위의 고달사지의 사진들을 올리다보니 무언가 미흡한 감이 있었는데, 다름아닌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고달사 쌍사자 석등이었습니다. 해서 이어서 게시한 유물은 중앙박물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고달사지에 있던 보물 '쌍사자 석등'입니다.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高達寺址 雙獅子 石燈〉보물 제8호

두 마리의 사자가 불발기집(火舍石)을 받치고 있는 매우 특이한 형태의 석등입니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러한 형태의 석등이 등장하지만, 이 고달사 쌍사자 석등은 다른 쌍사자 석등과 달리 웅크린 사자가 불발기집을 받치고 있어 이채롭습니다. 이 석등은 고달사가 우리나라 3대 선원의 하나인 고달원(高達院)으로 명성을 떨치던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1959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되어 현재까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우측>

갈기털에 문양이 역동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정면>

사자 두 마리가 정면을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 경고를 하는 형상입니다. 안상이 새겨진 두 개로 맞춘 대석에 올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안상(眼象)이라 함은 코끼리의 눈과 같이 생겼다는 뜻에서 나온 용어로 이를 안상문(眼象紋)이라 하며 여의두문(如意頭紋)과 더불어 쓰이는 문양으로서 주로 탑(塔) 받침돌에 시문되는불교적 문양입니다. 또한 검소함을 드러내 보이자 하는 소반이나 사랑방 가구 등에 흔히 쓰이던 문양입니다.  

 

 

 

<쌍사자 하대석 좌측>

방형의 대좌와 하나로 조각되었고 여백은 구름과 서기로 채웠으며, 복련무늬의 팔각을 이룬 개석형태의 받침대가 올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복련(覆蓮)이란 연꽃을 엎어 놓은 형태를 말합니다.

   

 

 

뒷면은 올려붙인 꼬리와 서기의 문양으로 채웠습니다. 서기(瑞氣)는 상서로운 기운을 말합니다.

 

 

<등신부 전면/燈身部 前面>

등신부는 하나로 이루어지 돌을 조각한 것으로 가운데 전을 두어 상하를 구분짓고 형상을 알 수 없는 문양과 보상화무늬를 새겼으며 육각을 이루고 있습니다.

보상화무늬(寶相華 紋)는, 연꽃과 모란을 모체로 하여 장식을 가하고 꽃잎을 층층이 중첩시켜 화려한 색채를 부가한 이상화된 꽃이요, 예술적으로 가공된 꽃으로 불교문양 가운데 특유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등신부 좌측면/燈身部 左側面>

불밝기창을 받치고 있는 팔각의 대석은 하단에 2단의 턱을 두었으며 앙련을 새긴 위에 평편한 면을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앙련(仰蓮)은 위로 향해 꽃 핀 연꽃을 말합니다.   

 

 

<화창/火窓>

팔각의 화창은 사방위로 내었으며 각 모서리에 우주가 표현되었고 창틀도 조각되어 있습니다. 개석은 3단의 운두가 마련된 하단에 팔각지붕형태이며 기와는 표현이 없고 위에 복련의 문양이 양각되었으며 상륜부가 올려져있었을 자리만 보입니다.

여기에서 우주(宇柱)는 모서리에 돋을 새김으로 표현된 기둥을 말합니다.

 

 

2014년 5월에 <鄕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