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흥법사지 / 興法寺址(원주)

鄕香 2014. 5. 16. 07:47

원주 지정면 안창리 영봉산(靈鳳山) 아랫자락에 있는 흥법사가 언제 처음 세웠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연국사 영준(寂然國師 英俊)이 932년(고려 태조 15년)에 이 곳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이 곳에 있었던 진공대사탑비에서 진공대사(眞空大師)가 940년(태조23년)에 이 곳에서 돌아가셨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미 신라말에 거대한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절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조선시대까지 절과 진공대사탑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1693년(조선 숙종19년) 이 곳에 도천서원(陶川書院)을 건립하였다가 1871년에 폐지하였다. 이 절은 1탑식 절 배치를 하고 있으며, 유물로는 흥법사지 3층석탑과 보물 제463호인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眞空大師塔碑)의 귀부(龜趺)와 이수(螭首)가 있다. 건물터로는 탑의 앞인 서쪽에 절의 중심 건물인 금당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생과 여러 건물터가 주변에 있고, 절의 북동쪽 살기슭에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간 진공대사탑을 모셨던 자리가 남아 있다. 이 절은 고려 태조가 흥법선원(興法禪院)을 만들어 진공대사에게 교화를 맡기자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인근의 부론면 정산리 거돈사, 여주 고달사 등과 다불어 고려 전반기의 선종계(禪宗系) 절로서 큰 역활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興法寺址案內文에서> 

 

 

금당이 있었을 법한 자리에 농가가 자리하고 있어 자세히 접해 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흥법사 진공대사 탑과 석관/興法寺 眞空大師塔 . 石棺>

이 승탑(僧塔)은 신라 신덕왕(神德王)과 고려 태조(太祖)의 왕사(王師)를 지낸 진공대사 충담(眞空大師 忠湛 869~940)의 묘탑으로서 진공대사의 입적(入寂)과 함께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는 이 승탑의 탑신은 팔각 집 모양을 기본 평면으로 하고 있지만, 기단 중대석은 원통형 북(鼓) 모양에 구름과 용무늬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어 이채롭습니다. 또한 이 탑과 함께 발견된 석관도 있어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 석관은 그 길이로 보아 시신 매장용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다비식 후 뼈를 담은 것으로 볼 수는 있겠습니다.

 

 

팔각의 노반을 올린 팔각의 기와지붕에 각모서리마다 귀꽃을 돋아 올린 지붕돌(蓋石) 아래 팔각의 몸돌(塔身)에는 모서리마다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고 두 곳에 잠글 쇠가 표현된 문을 새겨져 있습니다.

 

 

 팔각을 이룬 하대석에는 안상을 아래에 새기고 그 위에 연판문대(蓮瓣文臺)를 돌린 위의 원형몸체에는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상을 역동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진공대사 석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스님의 사리를 모신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보물 제365호)과 석관입니다. 신라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신라 말기의 퇴화된 작품에 비하여 고려초기의 패기 넘치는 우수한 작품입니다. 

 

 

<진공대사탑비 / 眞空大師塔碑>

이 비석은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지에 있던 신라말 고승인 진공대사의 탑비 중 파손된 비석의 일부로 진공대사 충담(釋忠湛, 869~940)을 기리며 세운 비석입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서화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비석의 아랫면입니다.

 

 

 

 비석의 글은 진공대사를 깊이 존경하던 고려 태조(王建 재위 918~943)가 지었고, 글씨는 최광윤(崔光胤)이 중국 唐나라 태종(太宗598~649)의 행서를 집자(集字)하여 만들었습니다. 뒷면에는 고려 태조에게 올렸던 진공대사의 글(表)이 구양순(歐陽詢)의 해서체로 새겨져 있습니다. 당 태종은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행서에 뛰어났습니다. (唐태종의 글씨를 모아(集字)한 글씨) 

 

 

 

 

<진공대사탑비(眞空大師塔碑)의 귀부(龜趺) 및 이수(螭首)> 보물 463호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지에 있는 이 유물은 신라말 고승인 진공대사의 탑비 중 파손된 비석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고 다만 비석 받침돌인 귀부와 비석의 머릿돌(螭首)만 남아 있습니다. 진공대사는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고려 태조의 왕사가 되었고, 940년(태조23년)에 돌아 가시자 태조 왕건이 직접 비문을 지었다고 합니다. 글씨는 당나라 태종의 글씨를 가려 뽑아 새긴 것으로 왕희지체(王羲之體)입니다.

 

<이수/螭首>

비의 덮개 부분인 이수(螭首)의 앞면 중앙에는 전서체로 '진공대사(眞空大師)'라고 새겨 놓았으며, 이 글을 중심으로 사방의 구름무늬 속에 상하 좌우로 얽힌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노려보고 있습니다. 옆면의 용도 하늘을 향해 움직일 듯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어 당시의 조각 예술의 높은 수준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귀부(龜趺 : 비 받침돌)는 짧은 목에 비늘을 새긴 용의 모습으로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머리 위의 네모난 구멍에는 뿔을 따로 조각하여 꽂은 것으로 보입니다.

 

 

<귀부/龜趺>

거북의 등에는 인근에 있는 거돈사지 원공국사승묘탑비의 귀부와는 달리 육각형 귀갑문 안에 전면 어깨 좌우로 한 개씩의 만(卍)자를 새겼고 나머지 전체의 육각형 속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놓았습니다. 네 발은 받침돌을 힘차게 딛고 있습니다.

 

 

뒷모습입니다. 이중으로 된 육각형의 귀갑문(龜甲文) 안에는 앞쪽 양 어깨에 만(卍)자 문이 하나 씩 있고 모두 연꽃무늬를 새겼습니다.

 

 

<흥법사지 삼층석탑 / 興法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464호)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에 있는 높이 3.2m 정도의 이 탑은 2중 기단(基壇) 위에 3층의 몸체(塔身)를 갖춘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탑의 모습입니다. 1층 기단에는 기둥을 새기지 않은 대신 안상(眼象:기단석 면에 팔면의 오금곡선으로 안쪽을 파낸 모양을 말함)을 새기고, 그 안에 땅으로부터 꽃이 솟아나는 모양을 조각하여 고려시대의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2층 기단의 면은 여러장의 넓은 돌로 만들었으며, 모서리기둥과 버팀기둥이 새겨져 있습니자. 기단의 갑석(甲石 : 뚜껑처럼 덮은 板石)위에 탑의 몸돌과 만나는 부분은 3단으로 꺾어 놓았고, 탑의 몸돌은 한 면에 2개의 모서리기둥을 새겨 놓았습니다. 몸돌의 폭과 탑 몸체의 높이가 기단에 비해 지나치게 줄어 탑의 윗부분이 빈약한 느낌이 듭니다. 탑의 지붕돌(塔蓋石)은 윗부분이 두껍고 추녀끝을 약간 치켜올려 놓았으며 처마의 받침은 4단으로 꺾어 놓았습니다. 탑위의 장식물로는 노반(露盤 : 탑의 꼭대기 층에 있는 네모난 지붕모양의 장식)과 복발(覆鉢 : 노반 위쪽에 엎어논 주발 모양의 장식)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 탑에서 유일한 문양이라고 할 수 있는 기단의 안상(眼象)입니다.

 

 

2014년 5월6일 <鄕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