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거돈사지 / 居頓寺址 (원주)

鄕香 2014. 5. 9. 11:18

저는 꼭짓점을 믿습니다. 그 것이 불교의 깨달음을 통한 부처님이든 기독교의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이든,

토속신앙의 수많은 神像을 통한, 수신 . 산신 . 당신 . 옥황상제 이든 , 모든 신앙의 신을 믿습니다. 

이 모든 신앙의 표현의 방법과 과정이야 다르지만, 그 꼭짓점에 이르면 하느님이시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나 길은 달라도 삶을 위한 행위라는 점에서 한가지이듯이 말입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아니더라도 남의 가정을 방문 했을 때 우리가 갖춰야 하는 예법과 그 댁의 가풍을 존중하고 지키듯이 저는 기원함에 있어서 절에 가면 부처의 자비를 통해 합장을 하며, 교회에 가면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두 손을 모으며. 조상님께 성묘를 가면 낳아 키워주신 은혜에 감사의 절을 올리며, 나의 하느님께 기원의 절을 올립니다.(1번은 조상께 고마움을, 1번은 꼭지점께 기원을, 반절은 물러감의 예로..)

토속 신전에 가면 그 신상의 본질을 통해 합장을 하며 나의 하느님께 경배합니다. 그 모든 의미는 하늘에 계신 꼭짓점, 하느님이시니까요. 이렇듯이 믿는다는 것은 절차나 길(路)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지요. 하지만, 더욱 생생하게 하느님을 뵐 수 있는 곳은 교회당도 절간도 당집도 아닌 풀 한 포기 작은 곤충에서 나름대로 살아가는 신묘한 구조의 특성과 습성을 볼 때, 자연의 오묘한 섭리에서 하느님의 존재와 전능하심을 보고 깨달음을 갖습니다. 이것이 내가 자연을 찾는 이유라면 이유입니다. 오늘은 탑을 통해 나의 하느님을 뵙는 날이기에...

 

현계산을 사이에 두고 거돈사지와 법천사지가 있습니다. 좌측 큰 느티나무 옆 이정표가 가리키는 산길로 4.3km 가면 이 사지에 버금가는 유서 깊은 古刹址인 법천사지로 갈 수 있습니다. 나지막한 산(현계산)을 사이에 두고 이렇게 큰 대찰이 어쩌다 나란히 흥망성쇠를 함께 했는지.. 

 

 

거돈사 입구 계단 옆 축대 모서리에는 천년세월의 거친풍파 모진 비바람을 묵묵히 지켜본 거대한 느티나무가 고찰의 흥망성쇠를 타래 풀듯 올올이 바람에 실려 보내고 있었습니다.

 

 

무엇으로 이 나무의 기묘하고 엄청난 사연을 대변할 수 있을까! 오지게 살아도 한 백년 살 내가, 천년세월의 수많은 사연과 역사를 품고 있을 이 나무를 감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느티나무 높이20m, 나무둘레 720m 수령 천년,)

 

그 옛날 쌓은 이 엄청난 축대가 城廓도 아니고 일개 古刹의 축대라는 대서 믿음의 엄청난 힘을 본다. 당시대의 인적, 문명, 과학을 어림해 볼 때, 이 또한 하늘의 능력이리니..

 

 

거돈사는 현재 남아있는 1기의 3층석탑으로 미루어볼 때 신라시대에 처음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1탑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는 절터에는 높은 축대 위에 중문을 세운 자리가 있으며 그 뒤로 금당터, 강당터 순으로 남아 있습니다.

 

천년세월에 헤일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염원을 구원했을까 그러나 지금은 그 흔적도 보이질 않네. 그 모두가 無像이고 자연일 뿐이지만, 저 하늘을 향해 정성을 모아 쌓은 기원(塔)을 통해 나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하느님께 기도드립니다. 매사의 기쁨이나 슬픔에 고마움을..

 

 

축대 위 중문터에서 바라본 천년의 느티나무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현계산 기슭 아늑한 골짜기를 끼워 차고 펼쳐진 너른 곳에 위치한 옛 절터, 거돈사지(居頓寺址) .

안내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발굴조사 결과 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처음 지어져 고려 초기에 확장 보수되어 조선 전기까지 유지된 것으로 밝혀졌다. 절터에는 중문터, 탑, 금당터, 강단터, 승방터, 회랑 등이 확인되었는데, 금당의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2층 건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문지 북쪽의 3층석탑(보물제750호)은 처음 세워질 때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데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탑의 동쪽에는 원공국사 지종(930~1018년)을 위한 원공국사승묘탑비(보물 제78호)가 있는데 1025년 최충이 문장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 탑비와 함께 원공국사승묘탑(보물 제190호)이라 불리는 부도가 있었는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옮겨져 있다. 거돈사는 고려 초 불교계의 중심이었던 법안종(선가 5종의 하나)의 주요 사찰이었지만, 고려 중기에 들어서며 천태종이 유행하면서 천태종 사찰로 흡수되었다. 거돈사는 신라말 고려초의 절터로서 보기 드문 일탑식 가람으로 주목되는 곳이다. (사적 제168호/면적25,339㎡)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189번지

  

 

<거돈사지 삼층석탑 / 居頓寺址 三層石塔 > 보물 제 750호

2중 기단 위에 3층으로 탑을 세웠는데 전형적인 신라 3층석탑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로 사각형의 축대를 쌓고 그 안에 흙을 채우고 그 위에 탑을 세운 점은 특이합니다. 탑이 땅과 닿는 부분인 지대석(地臺石)은 4개의 크고 긴 돌로 만들었고, 그 위의 2단으로 구성된 기단부는 위 아래층 모두 모서리기둥 2개와 버팀기둥 1개를 새겨 놓았습니다. 탑의 몸돌(塔身) 면에는 별다른 장식 없이 모서리기둥만 새겨 놓았으며 각 층의 처마 받침은 5단으로 표현되었고 풍경을 달았을 것으로 보이는 구멍이 있는 탑의 추녀 끝은 약간 솟아 올라 날렵함을 느끼게 합니다. 탑 위 상륜부는 노반(露盤/탑 꼭대기 층에 있는 네모난 지붕 모양의 장식)과 복발(覆鉢/바리때를 엎어 놓은 모양의 장식)이 남아 있으며 전체적으로 2 .3층 몸돌의 높이가 1층에 비하여 1/3로 줄어 있는  등 폭과 높이가 줄어가는 비율이 적어 매우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탑은 통일신라 후기의 탑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신라에서 고려로 전환되는 과도기적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손을 모아 안녕과 福을 이 탑 꼭대기에 모아 부처를 통해 하늘에 염원했을까 폐사지를 돌아보는 이 마음에 그 들의 염원은 오늘도 탑 주변을 감돌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탑 앞에 마련되어 있는 배례석 상면에는 돋을새김의 연화문이 있고 상면 아래 면에는 안상(眼象 / 음각으로 파낸 연꽃 모양의 측면 무늬)이 새겨져 있습니다.

 

 

<금당터/金堂址>

금당은 절의 중심 건물을 뜻합니다. 이 금당터는 전면 6칸, 측면 5칸으로 되어 있고 이 안에는 2m 정도 높이의 화강암으로 만든 부처님을 모시던 대좌(臺座)가 있는데, 둘레에 새겨졌을 복련 등 문양은 파괴되었습니다. 금당의 오른쪽과 뒤로는 석축을 쌓고 건물을 지었던 흔적이 있습니다.

 

 

2m 높이의 이 불대좌는 처철하게 파괴되었지만, 그 규모로 보아 모셔졌던 부처의 像 크기를 능히 가름할 수 있겠습니다.  

   

 

금당의 주춧돌입니다.

 

 

금당 뒤편의 계단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는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 보물 제190호 

 이 승묘탑은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거돈사 터에 있던 원공국사 지종(圓空國師 智宗930~1018)의 묘탑(墓塔)입니다.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승탑 형식을 이어받아 단정하고 균형 잡힌 팔각의 형태로 상층 탑신부 면에는 사천왕을 하층 탑신부 면에 팔부중상을 새겼습니다. 탑신 정면 문 위에 탑 이름을 새긴 점과 탑신에 꽃띠(花文帶) 장식을 한 것 등은 고려시대에 들어서 새롭게 시도된 방식입니다.

 

<앞 면>

 

<연판문대좌와 팔부중>

 

 

상층부의 지붕 모양의 덮개석(蓋石)과 사천왕

 

 

<뒷면>

원공국사승묘탑은 부도(浮屠)의 일반형식인 8각형의 3개의 받침돌과 몸돌(塔身)지붕돌(屋蓋石) 그리고 보개(寶蓋)로 되어 있으며 높이는 2.68cm로 알맞은 비례에 중후한 품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팔각대좌에는 팔면에 안상(眼象)을 새겼고 아래 몸돌(塔身)에는 8부신장상(神將像)이 양각되었으며 위의 몸돌(塔身)에는 사천왕이 양각되어 있습니다. 또한 지붕돌(屋蓋石)은 서까래와 기왓골이 정교하며 각 모서리마다 귀꽃이 솟아 있으며 귀꽃이 마련된 보개와 특이하게 표현된 연봉우리의 보주가 품격을 더합니다. 이렇듯  전체적인 탑의 문양이나 새겨진 조각이 화려하고 장엄하여 보물 제19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승묘탑의 지대석의 문양인 안상과 탑비의 귀부(龜趺) 등에 마련된 비대(碑臺)에 새긴 안상의 모양과 조각 수법이 같아 동시대 한 석수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    

거돈사지 의 정수리라 할 수 있는 안 끝 언덕 위인 이곳은 거돈사지가 한 눈에 들어오는 위치로 고려초의 고승으로 거돈사에서 입적한 원공국사의 유골을 모셨던 원공국사승묘탑(圓空國師勝妙塔)이 있었던 자리입니다. 원탑에 안치된 주인공 원공국사 지종(圓空國師 智宗930~1018)은 고려 태조13년(930년)에 출생하여 현종 4년(1013년)에 왕사가 되었으며, 현종9년(1018년) 89세의 나이로 거돈사에서 입적한 고려초의 고승입니다.  

 

 

<원공국사승묘탑(圓空國師勝妙塔)> 재현품>

본래의 원공국사승묘탑은 일제 강점기에 서울 일본인 집으로 가져갔던 것을 해방후인 1948년 경복궁으로 옮겨 놓았고 지금은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에 원주시에서 2006년 12월13일부터 2007년 11월21일까지 國, 道, 市費 2억원을 들여 중요무형문화재 120호 석장(石匠) 이재순으로 하여금 재현품을 제작하여 본 자리에 세웠습니다. 

 

 

원공국사승묘탑(圓空國師勝妙塔) 再現品을 세워 놓은 앞에서 내려다본 거돈사지(居頓寺址) 의 모습입니다. 하나의 탑과 금당터의 불대좌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원공국사승묘탑지을 내려와서 돌아보니 회랑이 있던 축대가 보입니다. 이렇게 단을 이룬 축대가 7단을 이루고 있습니다.

 

 

거돈사 우측 끝머리에 있는 원공국사승묘탑비를 향해 발길을 옮기다가 측면으로 바라본 3층석탑과 금당터입니다.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碑)보물 제78호

거돈사지 동쪽에 위치한 이 탑비는 원공국사의 생전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1025년(고려 현종16년)에 건립되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신라 양식으로 보이나 세부적인 기법과 모습은 고려시대의 양식을 따랐습니다. 거북모양의 비석 받침대인 귀부(龜趺)는 꽉 다문 입에 용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으며 양쪽 귀가 물고기 비늘 같이 되어 있습니다. 등의 바탕무늬로는 거북등 무늬인 육각형 안에 卍자와 연꽃무늬를 교대로 넣었고 등 중앙에는 비석을 받치기 위한 비몸 받침을 만들고 귀부 면석에 팔면의 오금곡선으로 안쪽을 파낸 안상(眼象)을 새겼습니다. 지붕인 이수(螭首)는 구름 위에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다투고 있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새겨 넣었습니다. 비석의 글은 최충(崔沖)이 지었고, 글씨는 구양순체로 김거웅(金巨雄)이 썼는데, 뛰어난 글씨체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비석의 위와 아래에는 인동무늬와 당초무늬를 넣었습니다. 이 비의 내용에 따르면 원공국사는 8세에 출가하여 955년(고려 광종6년)에 오월국(吳越國)으로 유학한 뒤 그 곳에서 불교를 강의 하였으며, 귀국한 후에는 역대 왕들이 그를 숭상하여 대선사, 왕사 등으로 모셨다고 합니다.

 

 

     <이수/螭首>

     구름 위에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다투고 있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새겨 넣었습니다.

 

 

<귀부의 머리 /龜趺 頭 >

 귀부의 얼굴을 보니 입을 앙 물고 이를 드러낸 채 눈을 부릅뜬 모습이 마치 비석이 무거워 끙 하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습니다. 이런 표현을 연출한 석수는 원공대사의 품격이 무거웠을까, 아님 비신(碑身)의 크기가 버거웠을까!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익살스러움이 엿보입니다. 

 

 

     <귀부 동쪽 측면/龜趺右側面>

     용의 얼굴에 귀는 산양의 뿔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귀부 동쪽 측면/龜趺左側面>

       거북 등에 마련된 비석 받침면에 팔면의 오금곡선으로 안쪽을 파낸 안상(眼象)을 새겼습니다.

 

 

     <귀부 뒷면 / 龜趺後面> 귀부의 육각형 구갑무늬 안에는 卍자와 꽃무늬(花文)가 교차적으로 양각되어 있습니다.

 

 

<거돈사 원공국승효탑비문/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碑文>

대사의 성은 이(李)씨 이름은 지종(智宗), 자는 신측(神則) 전주(全州)출신이다. 아버지는 행순(行順), 어머니는 김(金)씨다. 신라 경순왕(敬順王)4년(930년)에 태어나 8세 때에 사나사(舍那寺)의 스님 홍범삼장(弘梵三藏)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되었으나 홍범이 우리나라를 떠났기에 때문에 다시 광화사(廣化寺) 경철(景哲)스님에게서 배우고 고려 정종(定宗)1년(946년)17세 때에 영통사(靈通寺)에서 계(戒)를 받고 광종(光宗)4년(953년)에 회양산(褱陽山) 혜초(蕙超)의 문화에서 공부를 하고 뒤에 승려에게 실시하는 선과(禪科)에 합격하였다. 광종은 중국의 문화를 대량으로 도입하여 모든 제도를 개혁하였는데, 그 당시 중국에 유학하여 승려들이 많이 있었다. 대사는 유학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았으나 증진대사(證眞大師)가 꿈에 나타나 유학을 권하는 바람에 마음을 바꾸어 바다를 건너 오월(吳越)에 들어가서 영명사(永明寺)에 들려 수선사(守禪師)를 만나고 다시 국청사(國淸寺)의 정광대사(淨光大師)를 찾아가서 대정혜론(大定慧論)과 천태교의(天台敎儀)를 배웠다. 광종19년(968년)에 승통(僧統)찬영()과 천태현재(天台顯宰) 임식(任植) 등의 요청에 의하여 그 곳 전교원(傳喬院)에서대정혜론(大定蕙論)과 법화경(法華經)을 강의하고 광종21년에 본국에 돌아왔다. 광종은 대사를 맞이하여 금광선원(金光禪院)에 머물게 하고 중대사(重大師)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대사는 경종(景宗) 때에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다. 성종(成宗)때에 적석사(積石寺)로 옮기고 임금 앞에서 강설을 개진하였다. 목종(穆宗) 때에 선사에 임명되고 불은사(佛恩寺) 호국사(護國寺) 외제석원(外帝釋院)의 주지를 동시에 맡았다. 현종(顯宗)은 대사를 대선사(大禪師)에 임명하였고 다시 뒤에 왕사(王師)에 봉 하였다. 현종9년(1018년) 4월에 원주 현계산 거돈사에 은퇴하여 그달 17일에 팔십구세로입적하였다. 현종(顯宗)은 국사(國師)로 추증하고 시호(試號)는 원공(圓空) 탄의 명칭은 승묘(勝妙)라 하였다. 대사의 범호(梵號)는 여러번 추가되어 '혜월광천편조지각지만원묵적연보화(慧月光天遍照至覺智滿圓默寂然普化)라 하였다.

원비 고려 현종(顯宗)16년(1025) 글  상서이부낭중(尙書吏部郞中) 최충(崔沖), 글씨 예빈승(禮賓丞) 김거웅(金巨雄)

위 비문 해독은 1981년 10월 지금은 고인이 되신 한학자 임창순(任昌淳) 선생이 역술하였습니다.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碑) 를 뒤로 하고 다음 행선지인 법천사지(法泉寺址)로 발길을 옮깁니다.

 

 

<정산저수지 방죽>

정산저수지는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 우측에 위치합니다.

 

 

2014년 5월6일 <鄕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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