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마당넓은집' (옥천)

鄕香 2014. 5. 8. 00:21

따사로운 봄볕에 이끌려 파란하늘가 흰 구름 따라 찾아온 옥천의 고 육영수 영부인의 생가는 정기휴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린이날을 맞아 아이들과 모처럼 찾아왔다 굳게 닫힌 행랑채 딸린 솟을대문 사이 틈새로 안을 기웃거리다 발길을 돌립니다. 내 역시 별 수 있나요. 돌아설 수밖에.. 시각을 보니 정오가 한 시각이나 지났기에 옥천의 음식 맛이라도 보고 가기 위해 돌아섰습니다.  

 

 

안내문에 의하면, 이 가옥은 육영수 여사가 1925년에 태어나 1950년 박정희 대통령과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으며 흔히 "교동집(校洞宅)"이라 불려졌던 옥천지역의 명문가였다고 합니다. 1600년대부터 삼정승(金 정승, 宋 정승, 閔 정승)이 살았던 집으로 1894년에 전형적인 충청도지역 상류주택의 양식으로 축조되었으며, 그 이후 1918년 육 여사의 부친 종관(鍾寬)씨가 매입하여 건물의 기단을 높여 개축하였는데 각기 독립된 아랫집, 큰집, 윗집, 사당영역으로 구획하고 담장, 협문, 부속건물로 적절히 배치하였던 것을, 1969년 본래의 모습과 다른 현대식 가옥으로 개축하여 사용되어오다 오랫동안 방치하여 퇴락되었고 1999년 철거되었으나, 2002년 4월26일 이 생가터가 충청북도 기념물 제123호로 지정되어 2004년 12월 안채 복원공사를 시작으로 수차례의 발굴과 자문회의 등 고증을 거쳐 2010년 5월 안채, 사랑채, 위채, 아래채, 사당 등 건물 13동과 부대시설의 복원공사를 완료하였다고 합니다. 육영수 여사는 어린이를 위한 육영재단을 설립하고 양지회(陽地會) 등 각종 단체를 조직하여 자선봉사활동을 하였으며 대통령의 훌륭한 내조자이자 자애로운 한국의 어머니로서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분입니다.

 

 

건물 뒤 높은 지대에서 들여다본 일부분 입니다.

 

 

 

< 음식점 / 『마당 넓은 집』>

시인 정지용 생가에서 6~7십m 정도 이웃한 곳에 비록 담장도 곁채도 다 헐어 없어졌지만, 옛날 옥천고을에서 한 행세 하던 양반이 살았음 즉한 반듯한 큰 기와집 한 채(안채건물)에 음식점 같지 않은 한옥이 넓은 마당을 겸비하고 있어 주차하기 좋아 들어섰습니다. 곁채와 담장을 헐어낸 부산물인 와당이 전시물인양 빼곡히 쌓여 옛 위풍 당당했을 모습을 가히 짐작케 합니다.

  

 

안 마당에 들어서니 온갖 잡동사니가 여기저기 쌓였는데 놀라운 것은 큰 독들과 사발이 수북히 쌓여 있어 이 집의 옛 영화를 가히 짐작할만 하더이다.

 

 

안 대청 벽에는 여기저기 똑 같은 필체의 액자들이 빈틈없이 걸렸는데, 구입해 걸어논 것은 아닌것 같고 주인이 서예에 일가견이 있는 분인 것 같습니다. 

 

 

내가 식사를 했던 방에는 교복차림의 여학생들이 선생님과 함께 찍은 오래된 기념사진이 액자로 걸려있어 내 젊은 날의 소상을 보는 듯이 눈길을 끕니다. 사진 속 우리시대의 교복차림이 나를 옛 학창시절로 끌어들여 그립고 아쉬운 회상에 젖게 합니다.   

  

 

故 육영수 영부인께서 옥천여고 선생님으로 계실 때 제자들과 함께한 사진도 있었습니다. 이 음식점 여주인이 사진속의 한 사람으로 육영수 여사의 제자였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듭니다. 창문을 통해 스며든 햇빛이 액자유리에 반사되어 사진 상태가 선명치 못합니다.  

 

 

두부나 황태전골도 있지만, 둘이서 먹기에는 그 양이 많아 친구와 나는 새싹비빔밥과 비빔밥을 주문했습니다. 이내 큼직한 놋쇠발우에 담겨 나온 비빔밥과 찬이 정갈하고 맛깔스런 솜씨가 한 눈에 보이는 듯 깔끔합니다.

 

 

친구가 시킨 새싹비빔밥은 초록빛, 보랏빛, 노랑, 빨강의 싱싱한 새싹이 풍성하여 보는 눈동자도 힐링되는 느낌에 온 몸이 산듯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특히나 내 좋아하는 빛깔인 자줏빛의 묵은 그 색깔이 너무 고와 그만 그 빛깔에 이끌려 풍덩 빠지고 말았습니다. 

 

 

내가 시킨 비빔밥은 그대로 활짝 핀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색깔의 한 송이 국화 꽃이었습니다.

  

 

식사를 남김없이 맛있게 한 후 건물을 둘러쌓은 풍물들에 이끌려 건물 뒤 곁까지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이 많은 사발을 보니 이 댁의 옛 살림살이의 규모를 가히 짐작이 갑니다. 사발들은 일제강점기 때에 생산된 것이 대부분으로 주종을 이룹니다.

멍에, 타작기, 채, 술독, 구공탄난로, 됫박, 그 밑에 자배기, 그 안에 멍석 짤 때 줄을 잡아주는 도구(백자로 만든 것), 맷돌, 쇠절구 등 근대의 민속품들이 앞뜰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앞뜰에 이어 뒤뜰에도 장독이 널려 있습니다. 구석 한쪽에 궤(軌)도 있군요.

 

 

석발기와 작은 항아리들 그리고 큰 접시들이 그대로 쌓여 있습니다.

 

 

1950년대에 연탄이 나오기 전 주로 땔감을 나무에 의존하던 시절 산에 나무가 없이 민둥산이 되었지요. 그래서 생긴 것이 제재소에서 나온 톱밥이 땔감으로 등장하여 사용하던 시절 따라서 생긴 것이 이 풍구였습니다. 또 톱밥을 땔감으로 사용하기 위해 풍구의 짝을 이루는 도구가 있는데, 긴 쇠통(鐵筒)에 끝은 복주머니처럼 생긴 윗면에 여러 개의 구멍이 있는 부분을 아궁이 안에 넣고 그 위에 마른 잔 나뭇가지나 낙엽 또는 폐지를 올려놓고 불을 지핀 다음 톱밥을 손으로 한 움큼씩 그 불 위에 뿌려가며 쇠통 입구에 풍구를 대고 돌려 바람을 불어 넣으면 파란 불꽃이 피어올라 가마솥에 밥이나 국이 끓고 온돌이 따끈따끈하게 달아오르던 추억이 떠오른다. 또 나 왕십리693번지에 살 때 톱밥에 숫가루와 진흙을 정당히 섞어 반죽해서 주먹손으로 뭉쳐 놓았다가 마른 후 풍로에 넣고 불을 붙여 숫처럼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 때도 풍구를 사용했다.  

 

 

이 풍구는 위의 풍구보다 나중에 나온 당시 신제품이지요.

 

 

비빔밥을 맛있게 먹고 잠시나마 옛 풍물로 그리운 옛 시절도 되돌아 보고 다시 떠납니다. 괴산으로..

 

 

괴산의 한 야산에서 한 끼 먹을 취나물도 뜯고 ..

 

 

할미꽃들의 합창도 바람결에 들으며 하루를 마칩니다.

 

 

2014년 5월5일 옥천, <鄕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