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법천사지/法泉寺址 (원주)

鄕香 2014. 5. 12. 11:16

 

<법천사지 당간지주/法泉寺址幢竿支柱>

당간지주는 사찰의 입구나 뜰에 세우는 깃대(幢竿)를 지탱하기 위해 세운 두 개의 돌기둥이며 평상시에는 종파나 선문의 기를 달지만, 사찰의 의식이나, 행사가 있을 때 또는 부처 및 보살의 공덕을 기릴 때 그에 맞는 깃발도 올립니다. 

이 당간지주는 절터의 남쪽에 위치하며 그 높이가 무려 4m에 달하며, 그 크기에서도 능히 법천사의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 당간지주는 아무런 표식이나 문양은 없고 밑에서 위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고 윗부분이 바깥쪽으로 모를 깎아 둥글게 되어 있으며 안쪽으로 깃대를 고정시키기 위한 홈을 파 놓았습니다. 두 기둥 사이의 아래에는 깃대를 밑으로 꽂아 두기 위한 지름 66cm, 높이6cm정도의 받침돌을 8각의 형태로 다듬어 놓았습니다. 이 당간지주는 전체적으로 간결하고도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데 통일신라 말기내지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원주 법천사지 / 原州法泉寺址> (사적 제466호)

법천사는 고려 중기의 대표적인 법상종(法相宗)사찰로 명봉산(鳴鳳山)자락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곳에는 당간지주를 비롯하여 지광국사 현묘탑비 (智光國師玄妙塔碑)와 법당터 및 석탑의 일부 등이 남아 있으며, 주변에는 이 절터에서 나온 석재(石材)들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절터의 동편 산기슭에는 지광국사의 부도를 모셨던 탑전지(塔殿址)가 남아 있습니다. 본래의 부도는 서울 경복궁 내 광화문 좌측(서쪽)으로 옮겨져 있으나 탑비는 그대로 이곳에 남아 있습니다. 탑전지는 높게 쌓은 축대 위에 건물을 지었으며 왼쪽의 건물터 위에는 기둥을 받치던 돌인 주초석, 불상의 뒤를 장식하던 광배(光背), 계단 사이를 장식하던 대담하고 화려한 조각의 답도석(踏道石), 그리고 예배를 드리던 단(段)인 배례석(拜禮石), 석탑재 등 이곳에서 출토된 석재를 모아 놓았습니다. 이 절에 관하여 남아 있는 최초의 기록은 928년(경순왕2)으로 신라 하대에 이 지역의 대표적 사원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시대에는 무신정권 이전까지 법상종의 대표적인 사찰로 문벌귀족의 후원을 받아 번성한 사찰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10세기에서 12세기까지 관웅(寬雄), 지광국사, 정현(鼎賢), 덕겸(德謙), 관오(觀奧),각관(覺觀) 등 유명한 승려가 계셨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유방선(柳方善)이란 학자가 이곳에 머물며 제자를 가르쳤다고 하며, 이 때 한명회(韓明澮), 서거정(徐居正), 권람(權擥) 등이 그에게서 배웠다고 합니다. 허균(許筠)의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고 합니다.

 

 

 

 

 

당간지주로부터 대략 400m 정도 떨어진 부론면 법천리 산 자락에 위치하는 이곳은 건물이 있던 많은 축대가 남아 있으며 윗쪽에 지공대사의 현묘탑비와 여러 부재의 파편들이 있습니다. 자연석으로 쌓은 거돈사의 석축과 달리 잘 다듬은 돌로 쌓은 석축이 깔끔하고 단정합니다. 그 만큼 법천사는 창건 당시 임금의 지대한 관심과 국가차원에서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비 / 法泉寺 智光國師玄妙塔碑> 국보 제 59호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이 탑비는 고려 시대의 스님인 지광국사(智光國師 984~1067)의 사리를 모신 현묘탑(국보 제101호)을 세운 이후 1085년(고려 선종 2년)에 스님의 삶과 공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현묘탑 옆에 세운 비입니다. 비의 앞면에는 스님이 984년에 태어났고 이름은 원해린(元海麟)인 것과 16세(999)에 스님이 되어 승통, 왕사, 국사,의 칭호를 받고 84세(1067)에 이곳 법천사에서 돌아가신(入寂)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비의 뒷면에는 1,370여 명의 제자들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탑비는 거북모양의 받침돌(龜趺) 위에 비의 몸돌(碑身)을 세우고 머릿돌()올린 모습으로 전체높이는 4.55m입니다. 거북 등에 새겨진 '王' 자, 연꽃잎과 구름 속의 용이 조각된 왕관모양의 머릿돌, 그리고 비 몸돌 정면에 테두리형식으로 새겨진 연당초무늬, 측면에 새겨진 구름 용 등을 통하여 당시 조각예술의 훌륭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현묘탑은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일본인들이 몰래 일본으로 가져갔으나 이후 1915년에 되돌려 받아 현재는 경복궁내 왕궁박물관 옆 큰 느티나무 옆에 세워져 있습니다.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는 법천사지 옛 터에 훼손을 막기 위해 파란 비닐천으로 덮여 있습니다.

 

 

 

선각이 깊고 단칼에 도려내어 새긴 듯이 입체감 있는 조각에서 범접할 수 없는 엄숙함 마저 느끼게 합니다.

 

 

 

 부처의 대좌(臺座)나 탑의 받침돌의 일부였을 것으로 보이는 이 돌편에 새겨진 문양도 볼 수 없었던 무늬이나 보상화무늬가 아닐가 생각됩니다.

 

 

 

경복궁 안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있을 때 재직한 나는 현자를 보듯 정려한 현묘탑을 늘 보고 접했지만, 현묘탑비를 보기는 처음입니다. 현묘탑도 그랬지만 탑비를 보는 순간 그 조각의 뛰어남에 눈을 땔 수가 없었습니다. 돌을 마치 조각칼로 담숨에 파낸 것처럼 거침이 없고 선각이 깊고 뚜렷한 입체감에 놀라울 뿐입니다. 모든 건축물이 사라지고 몇몇 잔해만 딩굴고 있는 폐허된 사찰이지만 현묘탑비 하나 만으로도 이 절의 영화를 한 눈에 보는 듯합니다. 

비신(碑身)은 화강암과 달리 검은 오석이어서 천년 세월에도 글씨가 선명합니다. 또한 비신의 측면에 여의주를 두고 구름 사이로 두 마리의 용이 상하에서 용틀림하는 모습에는 세밀하게 비늘까지 섬세함을 보였습니다.

 

 

 

 

 

           

 

지광국사는 이곳 원주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사미계를 받고 스님이 되어 왕사, 국사가 되어 왕과 같은 지위를 누리다가 이곳에서 입적하였으며 여러 왕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특히 문종은 자신의 넷째아들을 지광국사에 보내 불법에 귀의케 하였으니 그가 곧 왕자의 몸으로 스님이 되어 천태종을 창시한 '대각국사 의천' 입니다. 그래서 였을까 법천사의 탑비는 원주의 삼대 사찰로 꼽히는 거돈사, 흥법사의 그 어느 탑비보다도 구성미와 화려함, 세밀함에서 격조가 높습니다. 탑비 외에도 석물의 문양 새김 또한 다른 사찰과는 비할바없이 섬세하고 아름답습니다. 이러한 시설물들의 정성과 세심함을 볼 때 왕실의 전격적인 지원이 있었음을 느끼게 합니다.

왕건이 개국하기 전인 지방호족 신분으로 있었을 때, 선종(禪宗)이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여 함께 고려를 건국하였으나 이후 지방호족이 정치적으로 걸림돌이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음에 광종은 왕권을 세우기 위해 호족을 탄압하였고 의도적으로 교종(敎宗)을 지원하였는데, 지광국사는 법상종계열이었으니 법천사지의 범상치 않은 석물의 품격이나 탑비의 문양 등을 통해 선종의 시대는 가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되었음을 공공연히 알린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지광국사현묘탑비 옆 현묘탑이 있던 자리로 보이는 곳에는 석탑의 부재, 배례석 광배, 주춧돌 답도석 등 조각난 석물들을 한데 모아 놓았는데 그 조각문양 또한 하트모양 등 다양하고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알 수 없는 문양들이 강렬한 느낌을 주는 굵은 선각으로 조각되어 근접할 수 없는 기품을 발산하고 있어 이 절이 남다름을 느끼게 합니다.          

 

 

 

탑비의 귀부에는 무거운 머리를 지탱하기에는 ㄱ자형으로 꺾인 가늘고 섬세한 목이 약하여 목을 보강하기 위해 받침대를 동시에 마련한 이런 수법은 그 어느 귀부에서도 볼 수 없었던 것임에 이채롭습니다. 버티기에 버거웠을 머리를 이렇게라도 밭쳐 주었기에 천년 세월이 흐른 지금 까지 지탱할 수 있었으리라 싶습니다.

 

 

 

등에는 이처럼 수많은 돌기 가운데 거북무늬인 육각 안에는 온통 王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거돈사의 원공대사현묘탑비 귀부에는 卍자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볼 때 같은 왕사를 지낸 것을 미루어 볼 때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왕사로서 임금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은 것을 느낄 수 있겠습니다.

 

 

 

비신 위에 올린 이수(螭首)는 누가 보아도 마치 왕관을 올려 놓은 느낌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밑부분의 연판문 위로 구름, 용, 영기문 등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무늬를 새겨넣고 네 귀퉁이의 귀꽃을 치미처럼 솟아 올리고 가운데 복련좌와 두 臺의 연화대를 알맞는 비중으로 올린 위에 연봉우리를 장식한 전체의 모습은 마치 영국왕의 크라운을 보는 뜻한 연출감을 느끼게합니다.

 

 

 

승묘탑비의 맞은편에 축대로 단을 높인 이곳은 승묘탑이 안치되어 있던 자리에는 이곳에 흩어져 있던 파손된 석재들을 모아 놓았는데 석재에 조각된 문양의 묘사와 새김 수법과 솜씨에서도 심혈을 쏟은 정성이 가득 보입니다. 그 어느 사찰에서도 볼 수 없던 둥근 면 네 곳에 하트모양의 무늬를 새긴 부도 형태의 돌, 마치 돌을 밀가루 반죽을 주무르듯이 조각한 계단에 장식되는 답도석(踏道石), 그리고 예배를 드리던 단(段)인 배례석(拜禮石), 등은 그 조각솜씨에서 특색 있는 사찰로서의 면모를 느낍니다. 

 

 

 

답도석(踏道石) 상면의 문양 모습입니다.  마치 돌을 떡 주무르듯 새겨진 모란당초문양이 범상치 않습니다.

 

 

 

승묘탑으로 오르는 계단에 장식되었던 답도석 측면의 문양입니다. 구름무늬나 물결무늬와 같은 문양으로 데두리에 띠를 두르고 그 안쪽에 눈동자 모양의 안상을 돌리고 같은 크기의 비늘편처럼 생긴 문양을 돌렸는데 하나같이 그 안에 용틀임하는 용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 法泉寺 智光國師 玄妙塔> 국보 제101호

 

경복궁내에 옮겨져 있는 원주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의 모습입니다.

지광국사현묘탑은 경복궁 옛 국립중앙박물관자리 옆 큰 느티나무 곁에 옮겨져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할 때 경복궁 박물관 뜰에 전시되어 있던 다른 탑들은 다 옮겼으나 지광국사현묘탑만은 옮기지 못했는데 이는 지광국사현묘탑이 심하게 파괴된 것을 맞추어 복원하여 세운 것이기 때문에 옮기다가 다시 무너지고 파손될 것을 우려하여 경복궁에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 法泉寺 智光國師 玄妙塔> 국보 제101호

 

이 승탑은 고려시대의 고승 지광국사(智光國師 984~1067)의 묘탑으로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사 터에 있던 것인데, 일본강점기인 1912년에 일본인이 몰래 일본으로 가져갔다가 발각이 되어 3년 후인 1915년에 되돌려 받아 경복궁에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탑의 받침대에 해당되는 기단부(基壇部)에는 여러 단을 두어 꽃, 상여, 신선, 장막 등을 장식하고 탑의 몸체에도 페르시아 풍의 창문을 내고 드림새 장식(垂裝飾)을 하였으며 지붕과 꼭대기도 불보살상(佛菩薩象), 봉황, 연꽃 등의 화려한 무늬로 장식되었습니다.  

이 승탑은 지광국사의 장례(葬禮)때 사리(舍利)를 운반하던 화려한 외국풍의 가마를 본떠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승탑은 고려시대에 들어서 과거의 전통에서 벗어나 새롭게 고안된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지광국사는 고려 전기(高麗 前期)의 이름난 고승으로 현종(顯宗) 임금과 문종 임금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는데, 특히 문종(文宗) 임금은 지광국사(智光國師)를 왕사(王師)로 삼았다가 훗날에는 국사(國師)로 임명하였습니다. 또한 문종은 자신의 넷째아들을 지광국사에 보내 불법에 귀의케 하였으니 그가 곧 왕자의 몸으로 스님이 되어 천태종을 창시한 '대각국사 의천' 입니다.

이 승탑은 선종(宣宗) 2년(1085)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상층부>

 

 

飛天人像

 

 

朱雀

 

 

 

 

 

 

 

 

 

 

 

문 옆에 페르시아풍의 창과 드림(垂繡)무늬가 보입니다.

 

 

 

탑의 여러 군데에 균열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탑이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지지 못한 이유입니다.

 

 

 

<하층 탑신부>

이 탑의 원본이었을 지광국사 사리를 옮겼을 것으로 생각되는 상여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菊花 . 寶相華 . 靈氣

 

眼象

 

 

 

 

 

 

현묘탑비가 있는 곳에서 내려다본 전경입니다. 좌측  농가 창고와 비닐하우스 있는 곳에 당간주가 있으니 앞에 보이는 마을과 전답 모두가 법천사 경내로 추정 됩니다. 우측 밭 일부는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진 가운데 길이 나 있어 길에서 이 건물지 축대만 보았을 때는 법천사의 옛 명성을 비춰 볼 때 사지의 크기가 실망스럽고 작아 보였지만, 여기 현묘탑비가 있는 자리에서 내려다본 전경에서 이제까지의 생각이 일시에 달라집니다. 법천사지 입구였을 당간주가 있는 곳과 법천사의 정수리라 할 수 있는 이 현묘탑비가 있는 곳과의 거리가 엄청나기 때문에 절의 옛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겠습니다.

   

 

 

2014년 5월 일 원주 법천사지 <鄕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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