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경주 대능원(大陵院) 왕들의 정원

鄕香 2011. 11. 20. 18:28

 

 <경주 황남리 고분군(慶州 皇南里 古墳群)史蹟 第40號>경주시 황남동53

경주시 황남동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신라초기의 무덤들로 일부는 대능원 구역 안에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붙여진 일련번호 90~114, 151~155호로 명명된 무덤들로 둥굴게 흙을 쌓아올린 30기의 무덤입니다. 큰 무덤은 돌무지 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고 주변에는 봉분이 없어진 작은 무덤이 있습니다. 이 대능원 안에는 전 미추왕릉(傳 味鄒王陵)을 비롯하여 천마총(天馬塚)과 황남대총(皇南大塚) 등이 있습니다. 특히 날개달린 말 그림이 있는 말안장 드리개가 발굴되어 천마총(天馬塚)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무덤은 밑 둘레 157m, 지름 47m, 높이 12.7m로 금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나온 왕릉으로서 내부를 공개하고 있습니다. 

 

 

 

<미추왕릉(味鄒王陵)史蹟175號>

이 능은 신라 제13대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재위 262~284)의 능으로, 대나무가 병사로 변하여 적군을 물리쳤다는 전설에 따라 '죽현릉(竹現陵)이라고도 합니다. 미추왕은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이며,미조(未祖, 未照) 혹은 미고(未古), 미소(未召)라고도 하며 미추의 계보는 알지(閼智)에서부터 비롯하여, 알지 → 세한(勢漢, 熱漢) → 아도(阿道) → 수류(首留) → 욱보(郁甫) → 구도(仇道) → 미추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문무왕릉비문을 비롯한 금석문(金石文)자료에는 김씨(金氏)왕실의 시조를 성한(星漢, 聖漢)이라 하여, 이를 세한으로 보는 설과 반대의 설이 있어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미추의 조상으로 역사에 나타나는 인물은 아버지인 구도로서 그는 8대 아달라이사금에서부터 9대 벌휴이사금 때까지 활약한 인물이며, 263년에 갈문왕(葛文王)으로 추봉(追封)되었습니다. 구도는 이칠(伊柒) 갈문왕의 딸인 술례부인(述禮夫人, 혹은 生乎) 박씨(朴氏)와 혼인하였고, 그의 딸인 옥모부인(玉帽夫人)은 골정(骨正) 갈문왕과 혼인하였습니다. 미추이사금의 비(妃)는 조분이사금의 딸인 광명부인(光明夫人)으로, 결국 그는 조분이사금의 사위라는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던 것입니다. 백제가 봉산성(烽山城:지금의 榮州?)·괴곡성(塊谷城) 등을 쳐들어왔다는《삼국사기》의 기사가 있는데,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볼 것인가는 학자에 따라 견해가 다릅니다. 재위 23년에 죽으니 대릉(大陵, 竹現陵이라고도 함.)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14대 유례이사금 14년 이서고국(伊西古國: 지금의 淸道)이 금성(金城)을 쳐들어왔을 때 귀에 대나무잎을 꽂은 죽엽군(竹葉軍)이 갑자기 신라군을 도와 이들을 물리친 일이 있는데, 이들 병사들이 돌아간 곳을 찾아보니 죽현릉 위에 대나무잎이 쌓여 있어 선왕(先王)의 음덕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여러 차례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고 농업을 장려하였습니다. 능(陵)의 높이 12.4m, 지름 56.7m로 둥글게 흙을 쌓은 형태이며, 경주시내 평지고분 가운데에서도 대형분에 속합니다. 내부구조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韓國古代社會硏究(金哲埈, 知識産業社, 1975) . 韓國家族의 史 的 硏究(李光奎, 一志社, 1977).
新羅始祖系譜の構成(木下禮仁, 朝鮮史硏究會論文集 2, 1966).
古代祭政と穀靈信仰(三品彰英, 三品彰英論文集 5, 平凡社, 1973).

 

 

커다란 무덤 옆에 아담한 봉분 하나, 왕족 어린이의 무덤인가보다 온 사랑과 축복을 받았을 몸이 피워 보지도 못한 꿈은 봉분의 정수리에 큰 나무로 표출하는 듯 하고, 그 앞에 선 백일홍(배롱나무)은 무희의 혼백인가 기묘한 절지의 몸짓으로 위안인양 춤사위를 보이고 있다.

 

 

 

자연 속에 주검이 수용되는 것에 나 절로 마음의 때 벗고 자연이고 싶어라, 북망산이 어딘고 하니 바로 이곳 자연품속 아닌가..

 

 

고대 왕들의 무덤들이 늘어서 있는 곳, 잔디로 덮인 부드러운 곡선의 구릉과 온갖 예쁜 색으로 치장한 운치 있는 나무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사잇길로 들어서니 뿌연 하늘에 물들어 침식되었던 마음이 저 고운 단풍과 포근함을 주는 금빛 잔디로 덮인 구릉의 유려한 선처럼 마음조차 밝고 유연하게 부드러워집니다. 일상의 무언가를 자연으로 이끄는 사색에 젖어드는 일탈...

 

 

한 시대를 장식했을 저 무덤의 주인은 누구일까! 발굴조사라도 하고 싶네. 하지만, 아무리 과학적 준비된 발굴이라도 결과는 훼손일 수밖에 없고 문화는 보존을 원칙으로 하나니...

 

 

잔디에 떨어져 널린 은행잎이 황금빛으로 반짝입니다.

 

 

 무덤의 한 면이 대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세월이 얼마인데, 대숲인들 안 생길까!

 

 

고려청자의 다완(茶盌)이라도 엎어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여인의 예쁜 젖무덤 같기도 한 봉분.. 그 뒤에 또 있네..

 

 

단풍나무 아래 잔디를 노랑으로 물든 은행잎이 덮였네. 보이는 것이 잔디인지, 은행잎 인지, 혼란스럽네.

 

 

 저 낙엽 깔린 고운 곳에 앉아 천년 왕조에 잠겨보고 싶네.

 

 

<천마총(天馬塚)>

이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나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돌무지 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그 규모나 출토된 유물의 성격으로 보아 왕릉이라는 것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구조는 평지 위에 나무널(木棺)과 껴묻거리(副葬品)상자를 놓고, 그 바깥에 나무로 짠 덧널(木廓)을 설치하여 돌덩이를 쌓고 흙으로 덮었습니다. 1973년 발굴조사 했을 때 금관을 비롯하여 유물 11,500여 점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 말 그림(天馬圖)이 그려진 말다래(障泥)가 나와서 '천마총'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황남대총 쌍분(皇南大塚 雙墳)>

황남대총은 1973년~1975년까지 발굴조사 되었는데, 남북길이 120m, 동서길이 80m, 높이 23m의 거대한 쌍무덤으로 남쪽 무덤에서는 금동관과 남자의 뼈 일부 및 많은 유물이 나왔으며, 북쪽 무덤에서는 금관과 부인대(夫人帶)라는 글씨가 있는 은팔찌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남쪽 무덤의 주인은 남자, 북쪽 무덤의 주인은 여자로, 부부의 무덤을 붙여 만든 것으로 추정하며 어느 여왕과 부군의 무덤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앙상한 나무 한 그루의 멋진 절지(折枝)가 뿌연 하늘의 공간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어떤 그림쟁이도 이 나무 한 그루에 못 미치리.. 

 

 

 보아서 즐겁고, 즐거워 행복을 느끼게 하는 나무들.. 늘 주는 건 기쁨이구나! 그러고도 모자라 죽어서도 우리 일상의 도구되고 온 몸 불 살라 온기(溫氣)를 주느냐..  

 

 

단단하고 거무죽죽한 가지에서 어찌 저리 고운 것을 피어 낼까!  사람들은 온갖 좋은 곡식, 양분 먹고 피워내는 것은 시기와 이기심 뿐 인데...

 

 

아름다운 것이 좋더냐?  자연으로 떨어져 이룬 고움이 흐트러질라..

 

 

고맙습니다. 

2011년11월 8일 - 鄕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