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경주 낭산 선덕여왕릉 (慶州 狼山 善德女王陵)

鄕香 2011. 11. 19. 18:52

 

<新羅 善德女王陵> 史蹟 第182號

경주시 낭산(狼山)의 남쪽 능선 중턱에 위치한 이 능은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 김덕만)이 모셔진 곳이다.

밑 둘레 74m, 높이 6.8m, 지름 24m 되는 이 능의 겉모양은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형태이며 아랫부분에는 능을 보호하기 위한 2-3단의 자연석으로 쌓은 석축이 있다. 선덕여왕은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덕만(德曼)이며 진평왕의 장녀로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그를 왕위에 추대하고,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를 올렸다고 한다. 즉, 선덕여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성골’이라고 하는 특수한 왕족의식이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즉위하던 해인 632년에 대신 을제(乙祭)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하고, 전국에 관원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진휼(賑恤)하였으며, 633년에는 주군(州郡)의 조세를 일년간 면제해주는 등 일련의 시책으로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634년에 분황사(芬皇寺)를, 635년에는 영묘사(靈廟寺)를 세웠으며, 대외적으로는 634년에 인평(仁平)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중고왕실의 자주성을 견지하려고 하였다. 다만 즉위 이래 거의 매년 당나라에 대해 조공사신을 파견함으로써 당나라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고구려, 백제의 신라에 대한 공격이 빈번해짐에 따라 당나라와 연합함으로써 국가를 보존하려는 자구책의 일환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신라는 642년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을 본격적으로 받았다. 이 해에 신라는 백제의 의자왕의 침공을 받아 서쪽 변경에 있는 40여성을 공취당하였으며, 신라의 한강 방면 거점인 당항성(黨項城:지금의 南陽)도 고구려·백제의 침공을 받았다. 또한 백제장군 윤충(允忠)의 침공으로 낙동강방면의 거점인 대야성(大耶城:지금의 陜川)이 함락당하였다. 이와같은 국가적 위기에 직면한 선덕여왕은 김유신(金庾信)을 압량주(押梁州:지금의 慶山) 군주(軍主)에 임명하여 백제의 공격을 방어하는 한편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 무렵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자장(慈藏)의 건의에 따라 호국불교의 상징인 황룡사9층탑(皇龍寺九層塔)을 축조하기도 하였다. 신라의 구원요청에 접한 당태종은 신라 사신에게 여왕이 통치하기 때문에 양국의 침범을 받게 되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한편 고구려에 대해서는 644년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적 견제를 가하였으나 이는 연개소문(淵蓋蘇文)에 의해 거부되고 말았다. 그런데 당태종에 의해서 지적되었던 여왕통치의 문제점은 신라 정계에 파문을 일으켜 647년 정월에는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 진골 귀족들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것을 구실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는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에 의해 진압되었다. 여왕은 이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재위 16년 만에 죽으니 시호(諡號)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狼山)에 장사지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上大等考(李基白, 新羅政治社會史硏究, 1974).
新羅 奈勿王系의 血緣意識(李基東,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郎徒, 韓國硏究院, 1980).
新羅政治體制の變遷過程(井上秀雄, 古代史講座4卷, 東京學生社, 1962).

<능 앞면 모습>

 

<善德王陵>

조선시대에 세웠을 이 비석 上部에 가로(橫)로 '신라'를 예서(隸書)로 각석하고 그 밑에 세로(縱)로 '善德王陵'이라고 새겨져 있다.

선덕여왕은 신라의 역대 세 분 여왕 중에 최초의 여왕으로 첨성대(瞻星臺)를 만들고, 분황사(芬皇寺)를 창건하였으며, 황룡사(皇龍寺)9층 목탑을 건립하는 등 신라건축의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내가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利天)에 장사지내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낭산 남쪽이라고 말하였다. 그날에 이르니 왕이 과연 세상을 떠났는데, 여러 신하들이 낭산(狼山) 양지에 장사지냈다. 30여년이 지난 문무대왕(文武大王)19년(679년)에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처음 건립하였다. 불경에 말하기를 사천왕천(四天王天)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므로, 그제야 선덕여왕의 신령하고 성(聖)스러움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능 뒷면 모습>

 

<경주 낭산/慶州 狼山>

 

 경주 낭산(狼山)은 남북으로 길게 누에고치처럼 누워 양쪽에 각각 봉우리를 이루었다. 산허리는 잘록하며 높이는 108m로 그다지 높지 않은 부드러운 능선을 이루고 있다. 옛 부터 서라벌의 진산으로 불리며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겼다. 신라 실성왕(實聖王)12년(413년)에는 구름이 일어 누각같이 보이면서 오랫동안 향기가 피어올랐다. 나라에서는 하늘에서 신령이 내려와 노니는 것으로 여기고, 그 후로는 나무도 베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산자락에는 거문고의 명인 백결(百結) 선생이 살았으며, 문창후 최치원(文昌侯 崔致遠)이 공부하던 독서당(讀書堂)이 있다. 남쪽 능선에는 선덕여왕의 능이 있고, 그 아래쪽에는 호국 사찰로 알려진 신라 향가의 현장 사천왕사터(四天王寺址)가 있다. 동북쪽에는 황복사 터(皇福寺址)와 삼층석탑이 있으며, 서쪽 중턱에는 낭산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이 있고, 그 주변에 문무왕의 화장터로 여겨지는 능지탑(陵只塔) 등이 남아 있다.

 

 

2011년 11월 8일 - 鄕仁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