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경주 쾌릉 (慶州 掛陵 / 史積 第26號)

鄕香 2011. 11. 19. 12:38

 

<괘릉 / 掛陵>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 17에 위치하며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 김경신)을 모신 곳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밑둘레 70m, 지름21.9m, 높이 7.7m, 능의 둘레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돋을새김 되어 있는 호석(護石)이 돌려져 있고 그 주위로 돌난간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이 무덤은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본받았으나 둘레석 . 십이지신상, 난간, 석물 등 모든 면에서 신라 능묘 중 가장 완비된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조각수법도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괘릉'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덤의 구덩이를 팔 때 물이 괴어 널(棺)을 걸어(掛) 묻었다는 전설에 따른 것입니다. 왕은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라는 제도를 두어 인재를 뽑았으며 김제(金堤)에 위치한 벽골제(碧骨堤)를 고치기도(改築) 하였습니다. 봉분에서 약간 떨어져 좌우에 화표석,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과 돌사자(石獅子)를 마주보게 세웠으며, 무인석은 서역인(西域人)의 얼굴 모습이어서 눈길을 끕니다.

 

 

(호석 십이지신 가운데 뱀 / 護石 十二支神 中 巳)

 

(호석 십이지신 가운데 원숭이 / 護石 十二支神 中 申)

 

(호석 십이지신 가운데 말 / 護石 十二支神 中 午)

 

 

<무인석 / 武人石>

 

 

이 무인석은 괴량감(塊量感)과 아울러 박진감 넘치는 율동감과 그 얼굴에 서역인(西域人)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통일신라가 서역과도 활발한 문물교류를 하였음을 보여줍니다.

 

 

<문인석 / 文人石>

의복의 표현이나 얼굴 모양이 중국 진시황릉에서 발굴되고 있는 토용의 모습과 흡사한 것으로 보아 당시 제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 김경신) 때 외국과 무역교류가 활발했음을 엿보입니다.

 

 

1쌍의 문인석도 그 늠름한 모습이 다른 능묘의 문인석에서는 볼 수 없는 강건함과 이국적인 면모가 인상적입니다.

 

 

<돌사자 / 石獅子>

 

 

2마리씩 나누어 마주보고 있는 돌사자는 동남쪽과 서북쪽의 것이 정면을 지키고, 서남쪽과 동북쪽의 것은 각각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려 남쪽과 북쪽을 지키게 하는 기발한 배치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네 마리의 사자는 모두 자신감 넘치는 웃음을 머금고 있으며, 특히 북쪽을 지키는 사자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냅니다.

 

 

<괘릉 석상 및 석주(掛陵 石像.石柱一括)>

 괘릉은 통일신라시대의 왕릉 가운데 가장 발달한 능묘양식을 갖추고 있으며, 주변의 석물 배치나 조성기법도 훌륭합니다. 왕릉 입구에는 남쪽으로부터 좌,우측에 화표석(華表石), 무인석(武人石), 문인석(文人石) 있고 돌사자 4마리가 좌우로 2마리씩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들 석물들은 동서로 약 28m의 거리를 두고 마주보고 있습니다.

 

 

이들 석조물들은 괘릉 봉토 주위의 12지신상과 더불어 8세기 말 신라인의 문화적 독창성과 예술적 감각을 응변하여 주는 걸작입니다.

 

 

고맙습니다. 2011년 11월8일  - 鄕仁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