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경주 불국사 (慶州 佛國寺)

鄕香 2011. 11. 15. 14:11

 

곤히 자고 일어나니 07시20분입니다. 어제 온종일 경주 남산을 오르락내리락 한 여파인가 봅니다. 어느 노랫말처럼'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가 아니라 세상모르고 깊은 잠에 빠졌었습니다. 창밖을 보니 날씨는 여전히 운무에 쌓여 해는 벗어나질 못하고 구름은 안개비를 내리고 있습니다. 집을 떠나던 그저께부터 연일 맑은 하늘은 오리무중입니다. 끓여 먹을 수 있는 리조트지만 현지 상권에 조금이나마 도움도 주고 색다른 먹을거리도 음미할 양으로 달랑 몸만 왔기에 어디선가 해장국이라도 먹을 양으로 잠자리를 나섰습니다. 오늘은 불국사와 시가지를 돌아볼 심산입니다. 

<보문단지 골프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켄싱턴리조트에서>

 

 

 불국사는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이듬해인 528년, 법흥왕의 어머니 영재(迎帝)부인과 왕비 기윤(己尹)부인에 의해 법류사(法流寺) 또는 불국사(佛國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그후 574년에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只召)부인에 의해 첫번째 중창을 하였으며, 이때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의 두 부처님을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670년에는 무설전을 지었으며, 681년에는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석가모니불상과 미륵(彌勒), 갈라(羯羅)의 두 보살상, 그리고 가섭과 아난의 두 제자상이 완성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때까지 비로전, 극락전, 대웅전, 무설전 등이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10년(751년)에 재상 김대성(金大城)이 발원하여 두 번째 중창이 시작되었으나, 김대성이 공사를 다 마치지 못하고 죽은 774년 혜공왕(惠恭王) 10년에 완성되어 대가람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선조(宣祖)26년(1593년) 왜구의 침략(壬辰倭亂)으로 왜구에 의해 목조건물은 모두 소실되고 금동불상과 석조물만 남게 되었으나, 1612년 좌우 경루(經樓)와 범종각(梵鐘閣), 남행랑(南行廊) 등이 복구되었고, 1630년에는 자하문(紫霞門)이 중수되었으며, 1648년에는 무설전이 복구되었고, 1659년에는 대웅전이 다시 세웠졌다. 이 밖에도 동서 행랑(東西行廊)과 중행랑(中行廊), 그리고 안양문(安養門), 극락전, 비로전, 관음전, 나한전, 시왕전, 조사전 등이 1700년 중엽까지 중건. 중창되어 가람의 모습을 간신히 갖추게 되었으나 그 이후 가람은 퇴락을 거듭하여 옛모습을 잃었으나 1969년부터 1973년에 걸쳐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 경루, 회랑 등을 유지(遺址)에 중건하고, 대운전, 범영루, 자하문, 석단(石壇) 등을 중수하여 오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동서 길이 90여m 되는 석축과 청운교(靑雲橋).백운교(白雲橋)위에 자하문(紫霞門).대웅전(大雄殿).무설전(無說殿)이 남북으로 놓였고, 석가탑(釋迦塔).다보탑(多寶塔)이 서있습니다. 그 서쪽에 연화교(蓮花橋).칠보교(七寶橋),안양문(安養門)과 여래좌상(如來坐像).금동아미타불(金銅阿彌陀佛)을 모신 극락전(極樂殿)이 있고, 무설전 뒤편에는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舍那佛坐像)을 모신 비로전(毘盧殿)과 관음전(觀音殿)이 있다. 불국사는 1995년에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숲이 아름답고 호젓한 경내의 산책길이 흐린 날씨임에도 상쾌함을 줍니다.

 

 

 이곳은 아직도 붉은 단풍잎이 늦가을을 붉게 태우며 열정을 사르고 있습니다.

 

 

불국사의 옛 당간주입니다. 사찰의 종파나 또는 큰 법회나 행사가 있을 때 알리기 위한 깃발을 올려다는 시설물입니다.. 깃대는 사라지고 장중한 당간주 만 우뚝 솟아 있습니다.  

 

 

 <안양문 / 安養門>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전(極樂殿)으로 통하는 중문(中門)으로서 연화교와 칠보교를 올라오면 이 문으로부터 아미타 부처님의 세계인 극락정토(極樂淨土)가 전개됩니다. 門의 이름 안양은 극락의 다른 이름입니다.

 

 

 

 

 

 <연화교(蓮花橋) . 칠보교(七寶橋) > 국보 제22호

아래사진은 서쪽 극락전(極樂殿) 앞의 안양문(安養門)으로 올라가는 석교(石橋)입니다,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창한 750년경 석단(石壇)과 함께 축조되었습니다. 2단으로 되어 있으며, 아래 석교는 연화교(蓮花橋), 위 석교는 칠보교(七寶橋)입니다. 연화교는 계단이 10단, 칠보교는 7단입니다. 이 계단을 올라 안양문에 이르면 그곳으로부터 극락정토(極樂淨土)입니다.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닌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로 연화교에는 동쪽의 청운교와 같이 규모는 작으나 무지개문의 통로가 있으며, 이는 극락세계를 향하는 범부의 희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연화교 계단 윗면에는 연꽃잎을 새겼으며, 위의 칠보교는 계단에는 아무런 무늬가 없습니다. 이 석교 역시 동쪽의 청운. 백운교와 한가지로 우리나라 무지개문(虹霓門)의 시원(始源)형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석교의 돌난간은 1973년 불국사 복원공사 때 복원된 것입니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전체 17계단으로 , 아래에는 층계마다 윗면에 연꽃잎이 새겨진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아무런 문양이 없는 7계단의 칠보교가 놓여 있습니다. 연화교는 높이 2.31m, 너비 1.48m이며, 칠보교는 높이 4.06m, 너비 1.16m입니다.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에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내 보이고 있어 불국사의 조형에 조화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연화교(蓮花橋) 계단 윗면에 연꽃잎 문양이 음각(陰刻)된 모습입니다.

 

 

<불국사/佛國寺>

불국사는 남쪽을 향하고 있는 가람입니다. 극락전으로 들어서는 안양문은 서편에 위치하고, 대웅전으로 들어서는 자하문은 동편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극락전은 서편에 대웅전은 동편에 위치하며 남쪽을 향해 나란히 있습니다.

이 절을 처음 세울 당시에는 낭떠러지 였을 곳에 돌을 쌓아 올리고 이 돌 층층대(階段)을 지었을 것입니다. 이 돌계단은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위아래로 각각 둘씩이니 모두 네 개이며 위 계단과 아래 계단이 이어지는 곳에는 발코니 모양의 네모난 다리 상판이 되고 그 밑에 아치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지금의 잔디밭 자리에 깊은 연못을 팠고 아치 밑에 맑은 물이 흐르며 그림배(畵船)가 드나들었다 하니 돌계단을 다리라고 한 옛 이름의 유래이겠습니다. 네 개의 돌계단의 이름은, 동쪽 아래의 것은 청운교 위의 것은 백운교요, 서쪽 아래 것은 연화교, 위의 것은 칠보교라 합니다.  *그림배: 작은 배에 연꽃 등의 그림으로 장식한 배로 추측*

 

 

<자하문.청운교,백운교 /紫霞門 .靑雲橋,白雲橋>

 

자하문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시는 대웅전(大雄殿)으로 통하는 중문(中門)이며, 청운교.백운교를 올라오면 이 門으로부터 부처님의 나라가 전개됩니다. 자하문은 부처님 몸에서 비추는 자금광(紫金光)이 안개처럼 서린 문이라는 뜻입니다.

대웅전 앞의 자하문으로 올라가는 다리로서, 아래 석교는 청운교, 위 석교는 백운교입니다. 청운교의 계단은 17단, 백운교의 계단은 16단입니다. 이 계단을 올라 자하문에 이르면 그곳으로부터 부처님 나라가 전개됩니다. 청운교에는 무지개문(虹霓門)의 통로가 있습니다. 이는 부처님의 나라를 향하는 범부의 희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계단을 특별히 다리라고 이름한 것은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는 것을 상징해서 일컫은 말입니다.

 

 

 

 <무지개문(虹霓門)> 세부 모양.

우리나라 무지개다리 시원(始源)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 이 다리는 1686과 1715년 두 차례에 걸쳐 중수(重修)되었고 1973년 불국사 복원 때 없어졌던 난간을 맞추어 옛 모습을 복원하였습니다.

 

 

 <석단 / 石壇>

두 단의 돌기둥과 돌띠, 그리고 거대한 자연석을 쌓아서 이루어진 이 석단은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창(重創)한 750년경에 축조(築造)하였습니다. 그 뒤 2-3차례 보수하였으나 원형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며 돌 또한 750년 당시의 돌 그대로입니다. 불국사 경내(境內)는 이 석단을 기준으로 위와 아래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아래는 범부(凡夫)의 세계를, 위는 부처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범부의 세계에서 부처님 나라에 이르기 위해서는 석단의 좌우에 있는 연화교(蓮花橋)와 칠보교(七寶橋)를 통하거나 청운교(靑雲橋)와 백운교(白雲橋)를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공 하지 않은 자연석을 그 생김에 따라 맞추어 쌓고 그 위에 덮은 판석의 밑면을 쌓은 자연석 생김대로 깎아 맞춘 그 솜씨에, 그 미적 감각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다보탑 / 多寶塔>

이 탑은 일반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과는 다른 특이한 형태로 정식 명칭은 '다보여래상주증명탑(多寶如來常住證明塔)'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법화경을 說하는 곳에 나타난 다보여래(多寶如來)가 그 내용을 증명하기 위하여 보탑(寶塔)안에 두 부처님이 자리를 나누어 함께 앉는 것을 설한 법화경의 교설을 조형을 통하여 나타낸 탑, 따라서 이 탑의 구성에 있어서 불교의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4면의 정방형 기단은 불교의 기본교리인 사성제(四聖諦)를 상징하며, 그 기단으로 오르는 네 개의 돌계단이 각각 10단으로 되는 것은 불교의 실천을 설한 십신(十信)과 십주(十住)와 십행(十行), 십회향(十回向)을 표시합니다. 탑의 기단 위에 방을 이중으로 한 것은 다보여래와 석가모니불이 자리를 나누어 앉는 것을 뜻함과 동시에 보신불(報身佛)인 다보여래와 화신불(化身佛)인 석가모니불이 둘이 아님을 나타낸 것입니다. 또한 사면의 계단을 오른 기단 위에 네 마리 돌사자(石獅子)가 있는 것은, 그곳이 불법(佛法)을 사자후(獅子吼)하는 사자좌(獅子座)임을 뜻합니다. 그리고 탑신부(塔身部)의 상부 구조가 8각으로 되어 있는 것은 팔정도(八正道)를 뜻합니다. 우리나라 석탑 구조의 기본형을 따라 기단부(基壇部), 탑신부(塔身部), 상륜부(相輪部)로 이루어졌으나 탑신이 4층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며, 두공(枓栱)을 쌓아 올려 목조 건물을 연상케 합니다.

 

 

750년경 다보탑이 건립된 이후 1902년까지는 돌사자 4구(軀)가 4면의 기단 위에 있는 것이 확인되었으나, 1925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서 탑이 전면 해체 보수되었을 때는 온전했을 돌사자 3구가 이미 없어졌다고 합니다. 두 마리는 동경 모 요리점에 들어갔다 하나 숨겨 놓아 사실 여부를 알 수 없고 한 마리는 영국 런던에 있는데, 찾아가려면 고액을 내라고 한답니다. 해체 보수 당시 탑 안에서는 금동 불상 2구를 비롯하여 수많은 유물도 발견되었으나 이 또한 지금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전무하며, 해체 보수에 관한 기록 또한 남기지 않았습니다. 일명 칠보탑(七寶塔)이라고도 합니다. 우리 문화재를 수탈해 간 나쁜 일본사람들..

이 돌사자의 형상을 볼 때 쾌릉의 돌사자와 흡사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동시대의 석공의 솜씨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쾌릉의 돌사자像>  

 

 

이 다보탑은 사각형 기단의 네 면에 계단을 설치하고, 중앙에 4각형 돌기둥을 세우고 교차되는 받침을 얹어 탑의 지붕돌을 받치게 하였고 각각의 기단의 돌계단 위에 네 마리의 돌사자를 놓았으며, 지붕돌 위에 4각형의 난간을 만들고 안에 팔각형 몸부분을 조성했으며, 그 위에 팔각 난간을 돌리고 그 안에 8개의 대나무 마디모양의 돌기둥을 돌려 16잎의 팔각 연꽃돌을 받치고 있으며, 연꽃돌 위에는 8의 기둥머리 모양의 받침이 팔각 지붕돌을 받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탑으로 조성한 예는 다른 불교국가에는 없다고 합니다. 높이 10.34m의 이 탑은 경덕왕 10년(751년)에 재상 김대성이 왕의 명을 받들어 불국사를 중창할 때 석가탑(釋迦塔)과 함께 건립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석가탑 / 釋迦塔>

 

 이 석탑은 2층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우고, 그 위에 상륜부(相輪部)를 올린 일반적인 석탑의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단에 12개의 기둥 형태를 조각한 수법과 탑의 제 1층 옥신(屋) 네 모퉁이에 기둥 모양을 조각한 수법, 그리고 옥개석(屋蓋石)의 네 귀가직선을 이루고 있는 것이 다른 탑과 다른 점입니다. 지금의 상륜부는 남아 있던 노반(露盤) . 복발(覆鉢) . 앙화(仰花) 위에 실상사(實相寺) 삼층석탑의 상륜부를 본떠서 1973년 불국사 복원 때 복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탑 주위에 새겨진 여덟 송이의 연꽃은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 또는 팔방연화좌대(八方蓮花座臺)라고 하는데, 이는 팔부신중(八部神衆) 혹은 팔부보살(八部菩薩)이 안치되었던 곳이라 추측하고 있으며, 이 같이 탑의 구역을 짓고 있는 것도 이 탑의 특이한 점입니다. 

1966년 해체 보수할 때 탑신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과 사리장엄구 등 28종 70여 점의 문화재가 발견되어 일괄해서 국보 제12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석가탑 앞의 연화대)

 

이 탑의 공식 명칭은 불국사삼층석탑(佛國寺三層石塔)이고, 정식 명칭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說法塔)으로 "법화경(法華經)"의 다보여래와 석가여래가 나란히 앉아 설법하고 증명한다는 데서 연유합니다. 석가탑이라고 한 것은 다보탑에 대칭(對稱)되는 호칭입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부처님의 세계에서는 석가모니불이 상주(常住)하면서 설법을 하고, 다보여래가 또한 상주하면서 그 설법을 증명한다는 구상이 두 탑(다보탑과 석가탑)을 대웅전 앞에 동서로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높이 10.40m인 이 탑은 750년경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창할 때 다보탑과 함께 세웠다고 합니다. 또한 석가탑을 무영탑(無影塔 :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하는데, 그 연유는 이렇습니다.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젊은 석공(石工) 아사달(阿斯達)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阿斯女)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영지)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습니다.

 

《석가탑의 설화》

백제에서 온 젊은 석수 아사달은 두 탑 다보탑과 석가탑 중 석가탑을 맡아 짓기로 되었다. 예술 감각이 뛰어난 젊은 가슴의 열정은 고국에 남은 두고 온 사랑하는 아내도 잊어버리고 오직 맡은 석가탑을 완성하기 위하여 침식도 잊고 세월 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오직 석가탑을 세우는 일에 혼신을 바치었다. 덧없는 세월은 어느덧 몇 해가 흘러오고 흘러갔다. 머나먼 타국에 남편을 보내고 외롭게 세월을 보내던 그의 아내 아사녀는 동쪽으로 흘러가는 구름에 안타까운 심정을 붙이다 못하여 남편을 찾아 신라로 건너오게 되었다. 머나먼 길에 무거운 다리를 끌고 불국사 문 앞까지 찾아 왔으나 큰 공역을 마치기도 전이요 더러운 여인의 몸으로 신성한 절 문 안에 들어서지 못한다 하여 거절을 당하고 맙니다. 절문을 지키던 사람도 거절은 하였으나 그 정상에 동정이 들어 아사녀에게 이르기를, "여기서 가까운 곳에 큰 못이 있는데 그 맑은 물속에는 시방 짓는 절의 그림자가 뚜렷이 비치리니 그대 남편이 맡아 짓는 석가탑의 그림자도 응당 거기 비치리라. 그림자를 보아 役事가 끝나거든 다시 찾아오라."하였다. 아사녀는 그 말대로 그 못가에 가서 전심전력으로 절 모습을 들여다보며 한시바삐 석가탑의 그림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달빛에 흐르는 구름 조각에도 그녀는 얼마나 석가탑의 그림자로 속았을가,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해가 바뀌도록 지리하고도 조마조마한 찰나, 그 찰나를 지내는 동안 절 모양이 뚜렷이 비치고 가고 오는 사람의 그림자도 비치건마는 오직 자기 남편이 맡은 석가탑의 그림자는 찾으려야 찾을 길이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멀리멀리 찾아왔다는 소식을 뒤늦게야 들은 아사달은 밤낮을 잊고 마침내 역사를 마치고 창황히 못가로 뛰어 왔건마는 아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일 아무리 못속을 들여다보아도 석가탑의 그림자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는 데 실망한 그의 아내는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그만 못 가운데 몸을 던진 까닭이다. 그는 망연히 물속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아내의 이름을 불렀으랴, 그러나 찰랑찰랑하는 물소리만 귓가에 스칠 뿐,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이슬 내리는 새벽, 달빛 솟는 저녁에도 그는 못가를 돌고 또 돌며 사랑하는 아내를 그리며 찾았다. 오늘도 못가를 돌 때에 그는 문득 못 옆 물가에 사람의 그림자가 아련히 나타났다. "아 저기 있구나!" 하며 그는 이 그림자를 향해 뛰어 들었다. 그러나 벌린 그의 팔 안에 안긴 것은 아내가 아니요 사람도 아닌 사람만한 바위덩이다. 그는 바위를 잡은 찰나에 문득 제 눈앞에 나타난 아내의 모양을 길이길이 잊지 않으려고 그 바위를 새기기 시작하였다. 제 환상에 떠오른 사랑하는 아내의 모양은 다시금 거룩한 부처님의 모양으로 변하였다. 아사달은 예술로 죽은 아내를 살리고 아울러 부처님에까지 천도하려 한 것이다. 이 조각이 완성되면서 자기 역시 못 가운데 몸을 던지어 아내의 뒤를 따랐다.

 

 

<사리탑 / 舍利塔> 보물 제61호

이 사리탑은 불국사 강당 뒤쪽에 있는데 외형이 석등과 비슷합니다. 불국사의 사적記에 의하면 여덟 조사(祖師)의 사리를 모신 광학부도(光學浮屠)가 있다고 했는데 바로 이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5)의 왕비의 법명이 광학이고, 헌강왕이 죽은 뒤 출가하여 광학 또는 수원(秀圓)이라 하였으므로 헌강왕비의 부도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그것은 극락전 뒤에 유지(遺址)가 남아 있는 광학장강실(光學藏講室)과도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탑신이 배가 부른 원통형의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고 신라시대 석조 부도의 전형적 양식인 8각원당형(八角圓堂形)에서 벗어나 특이한 형태를 보여주는 것과 전체적인 조형과 조각수법으로 보아서 신라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도 추정됩니다. 높이 2m6cm의 이 사리탑은 1905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33년 회수되어 다시 세워진 것입니다.

 

 

네모난 지대석에는 창 모양의 안상(眼象)을 조각하고 그 안에 꽃을 조각하였습니다. 8각형의 하대석(下臺石)에 큼직한 연꽃 8잎을 구성하고 장고 모양의 중대석(中臺石)에는 구름 문양을 조각하였습니다. 상대석은 아랫면에 9잎의 연꽃을 조각하여 안에 원형을, 그리고 윗면에는 연밥을 조각하였습니다. 원통형의 탑신에는 장식이 있는 기둥을 세워 네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각 면에는 얕게 조각된 불상을 모시는 감실(龕室)을 만들어 위쪽에 장막을 드리우고 그 안에 부처(佛).보살(菩薩).신장(神將)을 조각하였습니다. 기와지붕을 본뜬 지붕돌 안쪽(아랫면)에는 연꽃을 조각하였고 상부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없어졌습니다. 

 <복연좌에 앉아 있는 부처상>

 

<합장하고 있는 보살입상>

 

<오른 손에 금강저를 쥐고 서 있는 神將 >

 

<복연좌에 앉아 있는 부처>

 

<사리탑 全身>

 

 

<대웅전 / 大雄殿>

석가모니부처(釋迦牟尼佛)님을 모신 법당이며, 대웅(大雄)은 석가모니불의 덕이 큰 것을 표현하는 덕호(德號)입니다. 수미단(須彌壇) 가운데 안치되어 있는 목각(木刻)의 석가모니불상 좌우에는 목각의 미륵보살(彌勒菩薩)상과 갈라보살(羯羅菩薩)상이 협시(脇侍)하고 있고, 그 좌우에는 흙으로 빚은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의 두 제자상(弟子像)이 모셔져 있습니다. 미륵보살(彌勒菩薩)은 미래의 부처님이며, 갈라보살(羯羅菩薩)은 과거의 부처님입니다. 이는 과거.현재.미래의 삼세(三世)부처님이 불국사라고 하는 부처님 세계에 함께 계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석가상(釋迦像)과 두 보살상(彌勒菩薩 . 羯羅菩薩) 그리고 두 제자像 (가섭 . 아난 迦葉 . 阿難)의 복장기(腹藏記)에 의하면 이 5구(五軀)의 상(像)은 681년에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1593년 임진왜란 당시 대웅전이 소실(燒失)되었을 때, 함께 불에 탓을 가능성이 있고, 그렇다면 다섯 구의 상은 1659년 대웅전을 중건할 때 새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1730년과 1769년에 각각 도금(鍍金)을 하였습니다. 대웅전은 681년 4월 8일 낙성(落成)되었으며1436년-1470년 . 1564년에 중건하였고, 1765년에 중창하였으며 현존하는 건물은 이때 세워진 것입니다. 통일신라시대 쌓은 기단 위에 정면5칸, 측면 5칸에 다포계(多包系)의 팔작(八作)지붕 건물이며, 내고주(內高柱)와 뒷면 고주 사이에는 후불벽(後佛壁)을 설치하여 벽화(壁畵)를 그렸습니다. 조선 후기 불전(佛殿) 건축의 대표적 건물입니다.

 

 

 

(대웅전 안의 석가모니 불상과 두 협시보살상)

 

 

 

<무설전 / 無說殿>

경론(經論)을 강설(講說)하는 강당입니다. 말로써 경론을 강설하는 곳임에도 무설(無說)이라고 한 것은 진리의 본질과 불교의 깊은 뜻이 언어수단으로써는 도달할 수 없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임을 역설한 것입니다. 670년경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이곳에서 최초로 강의를 한 곳으로  창건 이후 여러 차례 중건 중수를 거쳐 1973년 복원하였습니다. 건축양식은 조선후기에 속합니다.

 

 

(무설전 영산화상도)

 

 

<지장보살 김교각 스님.地藏菩薩 金喬覺>

김교각 스님은 서기 697년 신라 제 33대 성덕대왕의 아들로 태어나서 24세에 출가하여 바다를 건너 당나라에 갔습니다. 스님은 처음에 중국 각지를 유향하시다가 구화산에 이르러 수려한 풍광에 매료되어 초당(草堂)을 짓고 초인적인 수행을 하였습니다.

구화산의 주인이며, 이 지역의 토호인 민양화의 아들이 산에서 길을 잃고 사경을 헤매다가 스님의 도움으로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답니다. 민양화가 스님을 찾아 답례를 하고자 필요한 것을 물으니, 스님께서 중생을 이익 되게 할 절을 짓고자 하니 가사크기 만큼의 땅을 시주해 달라 하였습니다. 이에 민양화가 승락하여 스님이 가사를 펴니 구화산99개 봉우리를 모두 덮어 버렸습니다. 놀란 민양화가 스님께 귀의하여 구화산을 시주했다는 일화는 김교각 스님의 법력이 대단했음을 말해줍니다. 스님은 구화산에서 최초로 화성사라는 절을 창건하시고 중생구제에 전력하셨으며,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당시 모든 사람에게 추앙되었습니다.

사서에 의하면 김교각 스님을 친견하려 대중이 하루에 천명을 넘었으며, 그 행렬이 산 밑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스님은 서기 794년 수행의 자세로 입적하시니 세납 99세였습니다. 시간은 3년이 지나도 얼굴과 살갗은 살아있는 듯 향 내음이 가득하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구화산 남대에 등신불을 모시고 그 위에 법당을 지으니, 육신보전(肉身寶殿)이 바로 그 것입니다.

이로부터 구화산은 중국의 대표적인 지장도량이 되었으며, 김교각 스님은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오늘 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생전에 언제 고국에 돌아가시느냐고 여쭈니 스님은 "1,300년 후에 다시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1997년 스님의 탄신 1,300주년을 기념해 스님의 탄생지인 경주에 구화산 화성사로부터 기증 받은 등상(等像)을 불국사 무설전에 모시게 되어서, 스님의 유언대로 다시 고국에 돌아왔으며, 지장보살의 자비를 펼치려고 우리에게 다가 온 것입니다. 불국사는 김교각 스님의 등상을 봉안함으로써 지장보살의 화신과 원력이 깃든 진정한 지장신앙의 도량이라 하겠습니다.

 

(교각 지장보살상 / 喬覺 地藏菩薩像)

 

무설전에는 태국불상이 봉안되었는데, 이는 태국 국왕 탄신 80주년을 기념하여 세계의 평화를 기원하는 뜻에서 2009년 1월30일에 태국 왕실 사원인 에메랄드사원 대법당에서 세계불교도우의회(WFB)에 가입된 19개국에 불상을 기증하기 위하여 세계 불교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불상봉헌식을 성대히 개최하였으며, 이날 봉헌식에는 불국사주지스님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불상을 기증받아서 2009년 5월24일에 불국사 무설전에서 태국스님과 WFB총재 등이 참석하여 봉안하게 되었습니다.

 

(태국 불상)

무설전 왼쪽 안 벽가에 봉안된 것을 먼 위치의 우측 열린 문으로 담았으나 전내가 어둠고 기둥이 가려 화상이 좋지 않습니다.

 

(이 무설전 사진은 책에서 복사한 것입니다.)

 

 

<비로전 / 毘盧殿> 중문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을 모신 법당입니다. 751년경 18칸으로 건립되었으며, 1593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60년에 중건하였고 현재의 건물은 1973년 불국사 복원 당시 신라 때의 기단과 초석 위에 세웠습니다. 건축 양식은 조선 후기에 속합니다.

 

 

비로자나부처(毘盧舍那佛)님은 화엄세계(華嚴世界)의 본존불(本尊佛)로서 부처의 지혜가 태양과 같이 밝고 광대무변함을 상징합니다.

이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은 국보 제26호로 8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입니다. 당시의 탁월한 주조(鑄造)기술을 보여주는 이 불상의 높이는 1m77cm입니다. 원래는 광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무설전 뒤 전경)

 

 

<극락전 / 極樂殿> 중문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모시는 법당입니다. 이 법당은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창한 750년경 6칸으로 건립되었으나  1593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린 것을 1750년에 중창에 중창하고 1925년에 중수하였습니다. 건축양식은 조선 후기의 다포계이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이 건물은 안에 높은 기둥 네 개를 세웠고, 안쪽 두 기둥 사이에는 후불벽(後佛壁)을 세워 벽화(壁畵)를 그렸습니다. 본래의 벽화는 1514년에 중수한 기록이 있고, 지금의 후불벽화는 1973년 중건 때 조성한 것입니다. 극락전에서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세 줄로 된 16단의 계단이 있으며, 이 48개의 계단은 아미타부처님의 48대원(大願)을 표현합니다.

극락전 앞 석등(長明燈)이 단아하면서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장명등은 부처님의 자비와 광명을 중생들에게 밝혀주는 등불이지요. 대웅전 앞 석등과 그 모양이 똑 같아 동시에 제작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미타 부처님의 세계는 극락정토(極樂淨土)이므로 법당 이름을 극락전이라고 합니다. 이 법당에 모셔져 있는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은 국보 제27호로 8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입니다.  당시의 탁월한 주조(鑄造)기술을 보여주는 이 불상의 높이는 1m77cm로 본래는 광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관음전 / 觀音殿>

관음전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중문으로 관음전 지붕 위 둥근 탑이 보입니다.

 

관음전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모신 법당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이승에서 고난받는 중생의 소리를 눈으로 보고, 그 고난으로부터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입니다. 이와 같은 관음보살의 신앙은 대표적인 민간 신앙의 하나입니다.

원래 이 법당에는 992년 전단향목(檀香木)으로 만든 관음보살상이 안치되어 있었으며, 1674년과 1701년 그리고 1796년에 각각 개금(改金)을 하였기에 이로써 임진왜란의 병화(兵火)에 관음전이 불에 탈 때도 관음상은 안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의 관음전과 관음입상은 1973년 불국사 복원 때 조성된 것입니다.  조선 초기(1400년경) 건축양식입니다.

 

 

(관음전 내의 관음입상과 후불탱화)

 

<나한전 / 羅漢殿>

부처님의 제자상을 모신 곳으로 열여섯 분을 모셨으므로 16나한전 또는 16응진전(十六應眞殿)이라고도 합니다.

 

 

1593년 왜구의 침략으로 타 버린 뒤 1647년에 나한상을 조성하고 전각을 세웠으며, 1760년 중창 불사 때 현재의 곳으로 옮겼으며 1973년에 중수하였습니다.

 

 

( 나한전 내부의 부처님과 협시보살 그리고 16 나한 )

 

 

<범영루 / 泛影樓>

 이 범영루는 750년경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창할 때 건립하였고 1593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것을 1612년과 1688년에 각각 중건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973년 불국사 복원 때 정면 1칸, 측면 2칸, 3층의 옛모습 그대로 중건한 것입니다.

 

 

 

범영루에 지금은 법고(法鼓)가 매달려 있으나 원래는 범종각(梵鐘閣)으로써 범영루는 범종각의 이름입니다. 누각의 모양을 하였으므로 루(樓)라 하였고 범영(泛影)은 범종의 소리를 그림자에 비유하여 범종의 소리가 온 누리에 번져서 넘치는 것을 형용한 말입니다.

최초의 이름은 수미범종각(須彌梵鐘閣)이라고 합니다. 이는 수미산(須彌山) 모양의 팔각(八角)정상에 108명이 앉을 수 있도록 누를 짓고 아래는 오장간(五丈竿)을 세울 수 있도록 설계하였으므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수미산은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고 그 정상은 욕계(欲界)33천의 위입니다.108이라는 숫자는 인간의 번뇌를 통틀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수미범종각이란 이름은 소리가 33천의 온 세상에 울려퍼져 인간의 모든 번뇌를 씻어 없애주는 것을 뜻합니다.

 

 

<좌경루 / 左經樓>

 경(經)을 수장(收藏)했던 누각으로 추측됩니다. 1593년 왜구의 침략으로 소실(燒失)된 뒤 1612년과 1690년에 중건 하였으나, 1904년경 무너진 것을 1973년에 복원하여 목어(木魚)와 운판(雲板)을 설치하였습니다.

 

 

원래 목어(木魚)는 고사(庫司)의 방 앞이나 식당에 걸어 놓고 행자(行者)를 부를 때 두들기는 명고(鳴鼓)로, 뒤에 가서 경(經)을 독송할 때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은 수중(水中)의 중생에게 불법을 전하는 법구(法具)입니다. 특히 선원(禪院)에서는 물고기가 눈을 뜨고 있는 점을 들어 수행자가 항상 깨어 있기를 촉구하는 뜻을 지닙니다. 목어(木魚), 법고(金鼓), 범종(銅鐘), 운판(雲板)과 함께 불전사물(佛殿四物)의 하나입니다.

 

 

 운판(雲板) 본래는 선원에서 식당이나 부엌에 걸어 놓고 식사 때를 알리기 위해 치는 기구(器具)였으나 지금은 하늘을 나는 중생에게 불법을 전하기 위해서 칩니다.

 

 

<범종각 / 梵鐘閣>

범종은 법구사물(法具四物) 중의 하나로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도구이며, 시간을 알리거나 공양과 예배를 알리는 기구입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754년(경덕왕13년)에 무게 약 50만톤의 거대한 종을 만들었다고 전하는데 현재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통일신라 범종은 국내에 5구, 일본에 6구가 알려져 있습니다. 국내의 것 중 완전한 형태를 갖춘 것은 3구에 불과하며 일본에 건너간 것 중 현재는 4구만이 남아있습니다.

신라의 종은 구경이 평균 65cm이며, 종신은 김칫독을 엎어 놓은 것 같은 형태로 약간 비대칭으로 이루어져 종을 치면 맥놀이 현상이 생겨 맑은 소리를 오랫동안 지속시킬 수가 있습니다. 종의 꼭대기에는 예외 없이 용뉴(龍鈕)와 음통(音筒)을 가지고 있는데, 음통은 내부가 관통되어 종신과 통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는 중국 일본의 범종에서 찾아볼 수 없는 한국 종의 특징입니다. 또 종신에 천인상(天人像)이 들어가는 것도 통일신라 종의 특징입니다. 당좌(撞座 : 종을 치는 자리)의 수도 모두 2개로 고정되어 있고, 종신 전체 가운데 아래에서 1/3되는 부분에 자리 잡고 있는데, 시대가 내려갈수록 그 위치가 내려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통일신라 범종은 용뉴에서부터 종신의 각 부분에 이르기까지 통일신라 금속공예의 모든 분야가 총 집합된 결정체이며 문양의 다양성, 율동적이고 질감 있는 표현, 조각의 화려함 등에서 당대 최고의 불교예술작품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범종의 천판(天板)에는 한 마리의 용으로 뉴(鈕)를 두고 그 옆에 음통(音筒)이 마련되어 있으며 종신(鐘身) 상부에는 두 점선을 일정한 간격으로 돌린 상대(上帶)를 돌려는데, 그 두 점선 사이 칸 안에 연당초문을 돋을무늬로 채우고 그 아래 상대와 같은 대(帶)로 사방위에 네 개의 정방형의 연곽(蓮廓)을 마련하고 각각 그 안에 9개의 꽃잎 가운데 유두(乳頭)모양의 꼭지 둔 연뢰(蓮蕾)를 두었습니다. 또한 종신 허리 부분에는 비천인상 4개를 유곽과 일직선을 이루는 곳에 돋을 문양으로 배치하였고 그 사이 두 곳에 연꽃문양의 당좌(撞座)를 표현하였으며, 종구(鐘口)에는 상대(上帶)처럼 하대(下帶)를 두었는데 문양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전체적인 형태는 국보29호로 지정된 771년에 만든  "성덕대왕신종" 일명 '에밀레종'(높이333.cm)을 모방해서 만든 근세의 작품입니다.

   

 

 

丹風 참 예쁘네요.

 

 

<천왕문 / 天王門>

四天王門안에는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모셔 놓고 있습니다.

천상계(天上界)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천왕천(四天王天)에 살면서 제석천왕의 지시에 따라 사천왕천의 동서남북 지역을 관장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지요. 그래서 사바 속세와 경계지간 가까운 곳에 마련한 것이지요. 천상의 수문장이라고 보면 될까요.

따라서 저는 지금 천상(無量壽殿)구경 다 하고 다시 속세로 가는 것입니다.

 

 

불법과 세계를 지키는 사천왕을 봉안한 문으로써 가람(伽藍)의 삼문(三門)중의 하나입니다.

비파를 지니고 있는 신(神)은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持國天王),  손에 칼을 쥐고 있는 신(神)은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입니다.

 

 

서쪽을 지키는 신(神)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용(龍)을 쥐고 있고, 북쪽을 지키는 신(神) 다문천왕(多聞天王)은 탑(塔)을 들고 있습니다.

 

 

 <반야연지/般若蓮池>

연못의 이름을 '반야'라고 한 것은 진흙 속에서 핀 연꽃이 진흙에 물들지 않고 청정한 것을 지혜(般若)에 비유한 것입니다.

 

 

무지개 색깔만큼이나 형형색색 아름답습니다. 남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의 빛깔도 이리 곱고 아름답다면 지상이 곧 낙원이고 천당이겠지요. .

 

 

반야(般若)의 의미도 좋지만, 참으로 이처럼 아름다운 연못에서 어찌 흙탕물 같은 심성이 솟을 수가 있겠어요. 눈이 선한 사람의 마음이 곱듯.. 

 

 

<반송/蟠松>

반송(蟠松)이란 이름의 이 소나무는 참으로 기기묘묘하게 틀어지고 눕듯이 지면으로 퍼져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불국사 일주문/佛國寺 一柱門>

 

 

 

<붙이는 말>

이 일주문을 나서므로 인해 불국사를 윤곽이나마 주마간산(走馬看山)처럼 보았다고 하겠습니다. 건물 하나 만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족히 일주일도 부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불국사에서 감명 깊었던 것은 석단(石壇)이었습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자연처럼 아늑하고 자연스럽던 인위적인 조형미, 자연을 이용할 줄 아는 선조들의 조급하지 않고, 참으로 조잡하지도 않으며 넉넉하고 편함이 스민 숨결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자연스러움이 무엇인지를 실현해 보인 그런 솜씨를 빗은 마음이 바로 불심(佛心)이 아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2011년 11월 7일 - 鄕仁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