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2 . 경주 남산(慶州 南山) 용장사 삼층석탑-마애여래좌상-설잠교-신선암-칠불암-산정호수-삼릉

鄕香 2011. 11. 13. 16:45

 

이어지는 여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용장사 삼층석탑-마애여래좌상-삼좌석조여래좌상-용장사지-설잠교-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남산리 칠불암 마애삼존불.사방불-모전삼층석탑-산정호수-용장마을"

 

<망산 / 望山>

옛날 경주의 이름은 '서라벌(徐羅伐)' 또는 '새벌"이라 했으며 새벌은 동이 터서 솟아오른 햇님이 가장 먼저 비춰주는 광명에 찬 땅이라는 뜻으로 아침 햇빛이 새벌을 비추고 따스한 햇살에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가 아름답고 온갖 곡식과 열매가 풍성하여 언제나 복된 웃음으로 가득 찬 평화로운 땅이었습니다. 이 평화로운 땅에 어느 날 두 사람이 찾아 왔습니다. 한 사람은 검붉은 얼굴에 강한 근육이 울퉁불퉁 한 男神이었고, 또 한 사람은 갸름한 얼굴에 반짝 반짝 빛나는 눈동자, 웃음이 예쁜 아름다운 女神이었습니다. 두 신은 아름다운 새벌을 둘러보고 "야! 우리가 살 땅은 이곳이구나! "하고 외쳤고, 이 소리는 너무나 우렁차 새벌의 들판을 진동하였습니다. 이때 개울가에서 빨래하던 처녀가 진동하는 소리에 놀라 소리 나는 곳을 처다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산 같이 큰 두 남녀가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처녀는 겁에 질려 "산 봐라! " 하고 소리 지르고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 산 같이 큰 사람 봐라!"라고 해야 할 말을 급한 나머지 "산 봐라!"하고 외쳤던 것입니다. 갑자기 발아래에서 들려오는 외마디 소리에 두 신도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발을 멈추었는데 그만 왠 일 인지 다시는 발을 옮길 수 없었습니다. 두 신은 그 자리에 굳어 움직일 수 없는 산이 되었는데 소원대로 이곳 아름답고 기름진 새벌에서 영원히 살게 된 것입니다. 남산은 기암괴석이 울퉁불퉁하고 강하게 생긴 南山이 되었고, 여신은 남산 서쪽에 솟아있는 부드럽고 포근한 望山이 되었다고 전해져옵니다, (참고문헌 : 경주시誌)

 

 

안개비 내리는 낙엽 깔린 경주 남산 산책길은 기암괴석과 마애불을 감상하는 것도 즐겁지만 이렇듯 인적 없는 호젓한 길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 반가사유상처럼 나를 버리고 무상무념으로 오로지 자연과 하나 되어 있어도 없고 없어도 있는 스스로를 느껴 볼 수 있을 것 같아 참 좋습니다.  

 

 

평일의 오전, 나뭇잎이 울긋불긋 丹風으로 물든 경주 남산의 오솔길은 아름답고 그 호젓함에 누구라도 시인이 될 수 있는 사색의 길이었습니다. 길따라 가노라면 옛 신라인들의 영화로운 숨결이 스민 흔적들이 발길을 멈추게 합니다.

 

 

 

지금 시각은 11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지도에서 하단 삼릉을 출발하여 바둑바위 금오봉을 거쳐 현재 용장사 옛터 못미처 삼층석탑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설잠교까지의 구간은 바위가 많은 가파른 내림 길입니다. 아래 용장골과 겹겹산을 바라보니 온갖 시름 저 산마루에 뜬구름처럼 바람에 씻겨나가고 마음과 가슴에 저 허공처럼 담긴 것 없습니다.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 南山 茸長寺谷 三層石塔> 보물 제186호

용장사는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이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쓰며 머물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현재 몇 군데의 석축(石築)이 남아 있어 절터였음을 짐작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용장사(茸長寺)의 법당 터보다 높은 곳에 세워진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자연 암반을 다듬어 아래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면마다 기둥새김 셋이 있는 위쪽 기단을 설치하여 산 전체를 기단으로 여기도록 고안되었습니다.  층마다 몸돌 하나에 지붕돌 하나씩 3층으로 쌓았는데, 지붕돌과 몸돌을 별도의 석재로 조성하였습니다. 1층 몸돌은 상당히 높은 편이고 2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지붕돌은 밑면의 층급받침이 4단이고 처마는 직선을 이루다가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들려 있습니다. 윗부분이 없어진 탑의 높이는 4.5m 밖에 되지 않지만, 하늘에 맞닿을 듯이 높게 보여 자연과의 조화되어 돋보이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바위 위에 세운 석탑으로서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힙니다.

 

 

아득한 구름 위 하늘나라 부처님 세계에 우뚝 솟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 용장사 탑은 해발 약 400m의 높고 큰 바위산을 기단으로 삼아 건축한 삼층석탑입니다. 하층 기단인 바위산이 8만유순의 높은 수미산이라면 바위산 정상은 사천왕(四天王)이요 첫째 기단은 도리천(도利天)이 되고 그 위로 층층이 쌓은 옥신은 하늘나라 부처님 세계를 나타낸 것입니다.

높이 5m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작은 탑이지만 암반 자체를 하층기단으로 삼아 자연과 조형물이 일체가 되어 있어 계곡에서 올려다보면 하늘을 배경으로 부처님 세계에 우뚝 솟은 감격스런 탑입니다. 맑고 깨끗한 부처님 세계를 그리는 조상들의 신앙과 정열에 감탄 하고 저절로 머리 숙여집니다. 이 탑은 9세기경 신라 말기의 탑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제 저 아래 계곡에 설치되어 있을 설잠교에서 다시 이 탑을 올려다 볼 작정입니다.

 

 

<비파계곡(琵琶溪谷> 전설

이 계곡에는 네 곳에 절터가 있고 4기의 석탑지가 남아 있는데 그 모양이 특이할 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전해오는 재미있는 전설이 숨어 있는 뜻 깊은 골짜기입니다. 

신라 32대 효소왕(孝昭王)6년(697년) 동쪽 교외에 망덕사라는 절을 세우고 낙성식을 올리게 되었는데 임금님이 친히 행차하여 공양을 올렸습니다. 그 때 차림이 누추하고 못생긴 스님이 와서 임금님께 청하기를 "저도 재에 참석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임금님은 마음이 언짢았지만 맨 끝에 앉아 참석하라고 허락 하였습니다. 재를 마치고 임금님은 스님을 불러 조롱하는 말투로 말 하였습니다. "비구는 어디에 사는가?"  "예, 저는 남산 비파암에 삽니다."고 대답하자 임금님은 "돌아가거든 임금이 친히 불공하는 재에 참석했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시며 스님을 비웃듯이 바라보자, 스님은 웃으면서 "예, 잘 알겠습니다 임금님께서도 돌아가시거든 진신석가(眞身釋迦)를 공양했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하고 말을 마치자 몸을 솟구쳐 구름을 타고 남쪽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임금님은 깜짝 놀라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스님을 부르며 허겁지겁 산에 올라가 그가 날아간 하늘을 향해 수없이 절을 하였고, 스님이 사라져 버리자 신하들을 보내 진신석가를 찾아 모셔 오도록 하였습니다. 신하들은 비파골 안 삼성곡(三聖谷)이라는 곳에 이르러 지팡이와 바리때가 바위 위에 있는 것을 발견하였으나 진신석가 부처님은 바리때와 지팡이만 남겨두고 바위 속으로 숨어버린 뒤였습니다. 신하들은 돌아와서 그 사실을 임금님께 말씀드렸고 효소왕은 자신을 뉘우치고 비파암 아래 석가사(釋迦寺)를 세웠고 진신석가가 숨어버린 바위위에는 불무사(佛無寺)를 지어 바리때와 지팡이를 두 절에 나뉘어 모셨다고 합니다.

 

 

<남산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 南山 茸長寺址 磨崖如來坐像> 보물 제913호

용장사는 조선 세조 때 김시습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은 곳입니다. 이곳 능선 위에 용장사터 3층석탑이 있고 이 마애불 바로 앞에는 삼륜대좌불(三輪臺座佛)이 있습니다.

이 불상은 자연 암벽을 이용하여 조각되었는데, 머리 둘레의 두광(頭光)과 몸 둘레의 신광(身光)은 2줄의 선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얼굴은 풍만하고 머리에는 나선형(螺線形) 머리카락을 표현하였으며, 귀는 눈에서 목까지 상당히 길게 표현하였습니다. 목에는 3개의 선으로 표현한 삼도(三道)가 뚜렷합니다. 옷의 주름선은 얇고 촘촘한 평형선으로 섬세하며 오른쪽 어깨와 왼쪽 어깨를 동시에 걸쳤습니다. 가슴부분에도 역시 속웃을 비스듬한 모양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왼쪽 어깨 바깥부분에 글씨가 있는데 "태평 2년 8월(太平二年八月)"에 무엇인가를 하였다는 내용인데, 마멸이 심해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조각수법으로 보아 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남산 용장사곡 마애여래좌상 / 南山 茸長寺谷 石造如來坐像> 보물 제187호

이 불상은 용장사터에 있는 미륵장육상(彌勒丈六像)으로 추정되는 석불 좌상입니다. 삼륜대좌 위에 모셔진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1932년 일본인들에 의해 복원된 것으로 머리 부분은 없어졌습니다.

손과 몸체 일부가 남아 있는데 대좌에 비해서 불상은 작은 편입니다. 목에는 뚜렷한 삼도(三道)가 있고 어깨는 다소 좁은 편이나 당당함을 잃지 않고 있으며, 좌측 어깨에는 매듭지어진 가사 끈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 석불은 특이한 둥근 형태 대좌 뿐 아니라 석불 자체의 사실적 표현이 작품의 격을 높여줍니다. 제작 시기는 조각양식으로 보아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됩니다.

용장사는 신라 유가종(瑜伽宗)의 대덕 태현(太賢)이 주지로 있었으며 매월당 김시습이 은거하며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집필한 곳으로도 유명한 사찰입니다.  (부처을 정면으로 한 모습)

 

 

자연석 바위 윗면에 둥근 원반처럼 돋을 새김으로 臺를 마련하고 그 위에 함지박을 포게덮은 형태의 원통형의 기둥돌을 올리고 그 위에 원반형의 뚜껑모양의 돌(蓋石)을 올렸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두 번을 반복적으로 더 마련하여 마치 탑처럼 보입니다. 마지막 3번째 뚜껑 모양의 돌 테두리에는 복련(複蓮)을 돋을 새김하여 대좌(臺座)를 표현하였고 그 위에 다시 하나의 돌에 연좌(蓮座)와 부처를 붙여 조각하였습니다. 1.2단의 지붕돌에는 아무런 무늬가 없습니다. 3딘의 대좌 위에 다시 대좌와 일체된 부처를 조성해서 올린 예는 특이한 예입니다. 이와 비슷한 원반형의 탑을 전남 화순군에 있는 운주사에서 볼 수 있습니다.

 

 

탑 모양의 좌대에 안치한 석조여래좌상과 우측 암벽에 마애여래좌상이 보입니다.

 

 

<남산 용장사 터 / 南山 茸長寺址>

금오봉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가장 큰 봉우리를 주산(主山)으로 삼아 용장사 절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용장사(茸長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고 신라, 조선시대의 유물들이 함께 출토되어 천 년 전의 역사가 최근까지 이어진 유서 깊은 절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거대한 돌로 쌓은 축대들은 이 절의 규모가 얼마나 컸던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앞을 내다보면 은적골 절터와 삼각산이 발아래 보이고, 멀리 고위산이 드높게 보입니다. 건물터로 추정되는 이곳에서 동북방향으로 바라보면 위쪽에 삼륜대좌불과 마애여래좌상 등이 있으며 그 정상에는 삼층석탑이 우둑 솟아 마치 도솔천을 연상케 합니다. 용장사는 통일신라시대 대현스님이 법상종을 개창했던 절이며, 조선시대 대학자이자 스님인 김시습이 머물던 곳입니다. 김시습은 단종이 폐위되자 세상을 버리고 출가하여 이곳에 머물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5편의 이야기를 짓고 금오산의 이름을 빌어 '금오신화'라 하였습니다.

 

 

<남산 용장사곡 설잠교 / 雪岑橋>

신라시대 용장사가 있었다 하여 이 골짜기를 용장골이라 불러 왔다고 합니다.

용장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으며, 조선 초(1465-1470)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면서 금오산실을 짓고 "유금오록(遊金鰲錄)"에 155수의 시를 남겼고, 특히 우리나라 최초로 '금호신화'라는 한문소설을 지은 곳이며, 속세를 떠나 산승(山僧)으로 있으며 단종(端宗)임금에 대한 변함없는 충절로 북향화(北向花)를 심었던 곳입니다. 유서 깊은 용장골에 다리를 놓으며 매월당 김시습을 기려 설잠교(雪岑橋)라 하였습니다.  

 《김시습(金時習1435-1493년)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또는 동봉(東峯), 법호는 설잠(雪岑), 관향은 강릉 입니다.》

 

 

이 설잠교에서 용장마을로 하산치 않고 다시 고위봉 방향의 이영재(嶺)로 향했습니다. 사방불이 있는 칠불암으로 가기 위해서 입니다.

시각은 12시40분 점심 대신 간단한 비상식품만 지녔기에 그냥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이영재까지는 1Km 정도의 오름 길입니다.

 

 

설잠교에서 바위봉우리에 우득 솟은 삼층석탑(보물 제186호)을 올려다보는 감동을 느끼려 했으나 막상 설잠교에 이르러보니 울창한 수림에 가려 볼 수가 없네요.    

 

 

설잠교에서 이영재로 가는 길과 산정호수로 가는 갈림길에서 어디로 가야 칠불암으로 어느 길로 가야할 지 몰라서 한 참을 망서리 다가 이영재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산정호수로 갔다면 1km 정도의 직선 거리였습니다, 이영재로 올라가는 바람에 가파른 오름으로 2km를 걸었습니다.  

   

 

조릿대가 키를 넘는 좁은 길을 가노라니 몸에 스치는 조릿대가 서걱서걱 ..

  

 

터널 같은 조릿대 밭을 벗어나니 바로 능선마루에 이정표가 맞아줍니다. 금오봉에서 설잠교로 내려와서 이리 오지 않고 바로 등성이 길로 올 수도 있었네요. 고위봉 방향으로 가면 도중에 칠불암이겠습니다.  

 

 

심산유곡이 따로 없습니다. 바위도 나무들도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좋은 기운을 뿜어주니 내 몸도 마음도 절로 즐겁고 기운이 솟아납니다.

 

 

바위도 많고 나무도 많고 아기자기한 길이 지루함 없이 재미가 쏠쏠 합니다.

 

 

 

남산을 오르다 보면 수많은 절벽과 바위가 있는데 이처럼 바위가 보일 적마다 나도 모르게 무엇이라도 보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무심히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자연이 다가서서 이리보고 저리 보며 세심하게 살펴보게 됩니다. 그렇도록 남산은 야외 박물관처럼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는 곳입니다.

 

 

남산이라는 이름처럼 흐린 날임에도 환한 기운이 감돌고 동네 야산처럼 낯설지 않은 느낌이 들만큼 정겨움이 나무에서 바위에서 오솔길에서 배어나는 상큼하게 기분 좋은 산입니다. 

 

 

가끔 바위봉우리에 올라서면 온 몸을 거침없이 내보여주는 산..

 

 

신령들이 놀던 공깃돌 같네요.

 

 

칠불암까지의 거리가 이제 얼마남지 않았네요.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 南山 神仙庵 磨崖菩薩半迦像> 보물 제199호

이 불상은 칠불암(七佛庵) 위에 곧바로 선 절벽 면에 새겨져 있어 마치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듯이 보이는데, 머리는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쓰고 있어 보살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얼굴은 풍만하고, 오른손에는 꽃가지를 들고 왼손은 가슴까지 들어 올려서 설법하는 모양을 표현하였습니다. 팔각형으로 보이는 臺座 아래로 옷이 흘러내리고, 오른쪽 다리는 아래로 내려놓은 자세입니다. 발은 연꽃 위에 있으며, 이처럼 유희좌(遊戱坐)를 표현하였음은 드문 예입니다. 그 아래에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불상 높이는 1.4m이며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보입니다. 《유희좌(遊戱坐): 결가부좌의 자세에서 한쪽 다리를 풀어 대좌 밑으로 내린 자세를 말합니다.》

 

 

 

 

이 불상들은 경주 남산 봉화골의 정상 가까이 위치한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과 사방불(四方佛)로서 '칠불암 마애석불'이라 불립니다. 삼존불의 가운데에 있는 본존불은 앉아 있는 모습으로 미소가 가득 담긴 양감있는 얼굴과 풍만하고 당당한 자세를 통해 자비로운 부처님의 힘을 들어내고 있습니다.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는 옷은 몸에 그대로 밀착되어 굴곡이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 대고 있는 모습입니다.

보살상(菩薩像)이 본존을 향하고 있는 것이나 가슴이 길고 다리가 짧게 조각된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애삼존불 앞에 사방석(四方石) 각 네 면에 각각 부처를 돋을새김으로 모셔 놓았습니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표현방식입니다.

 

 

사방불 뒤 마애삼존불상에서 우측의 보살상의 자태를 좀 보세요. 요즘 지구촌을 들석이게 하는 K-Pop club의 ' 비틀림의 율동처럼 매우 고혹적인 몸매입니다. 이런 자태의 모습은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陵으로 추정되고 있는 쾌릉 앞 석상에서도 볼 수 있는습니다.  

 

 

 

 사각형의 바위 네 면에 각각 부처를 돋을새김으로 표현한 사방불은 모두 본존으로 연꽃이 핀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인데 각기 방향에 따라 손 모양을 다르게 하고 있습니다.

 

 

 

 

칠불암을 나와 삼층석탑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입니다.  

 

 

<모전삼층석탑 / 模塼三層石塔>

칠불암에서 산정호수 가는 길가 80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이 탑은 기단석을 전돌모양으로 쌓고 지붕(蓋石:덮개석)도 네모진 전돌로 쌓아 올릴 것처럼 보이는 수법으로 조각되어 모전탑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하나의 돌을 모전탑 모양으로 축조한 탑은 흔치 않습니다.  

 

 

이렇게 낭만이 깔린 길을 걸어가니 마음은 낙엽이되고 '구르몽'이 됩니다.

 

 

용장마을로 가는 길로 들어섭니다.

 

 

솔잎 싱그럽고 낙엽 깔린 붉은 황톳길 포근함으로 맞아주니 더없는 편함을 느낍니다. 

 

 

<산정호수>

이영재(嶺)와 산정호수로 갈리는 길에서 이영재로 올라가기를 잘 한 것 같습니다. 좀은 지쳐가는 몸에 빠른 길로 목적지를 갈 수 있으니까요.

 

 

<산정호수> 산봉우리 근처에 이런 호수가 있다는 것이 신비롭습니다.

 

 

등성이 길이 사내의 길이라면 계곡을 끼고 가는 길은 여인의 길입니다. 陰陽의 이치를 차치하더라도 계곡은 아기자기한 여자의 맛이 있고 등성이길은 탁 트인 호쾌함과 시원한 사내의 맛이 있지요.

 

 

호젓한 오솔길이어서 사색할 수 있고..

 

 

그리운 시냇가에 앙증스런 폭포 퐁퐁 노래하니 즐겁고..

 

 

아까 올라갈 때 이 갈림길에서 이영재로 힘들게 돌아서 갔지만 칠불암을 보고는 산 봉우리를 넘어 내려가야 이영재인데, 산봉우리를 오르기 전에 샛길로 내려오니 산정호수를 거쳐 바로 이자리가 됩니다. 길을 모르면 헤매게 되고 고생이지만, 오늘은 두 길을 모두 체험했으니 행복합니다.

 

 

다시 설잠교 인근에 다달았네요. '설잠雪岑'은 매월당 김시습의 法號입니다.

 

 

<용장계 / 茸長溪>

용장이란 말은 신라시대의 사찰인 용장사가 있던 계곡이라는 데서 붙여진 명칭이라고 합니다. 남산의 50여개의 많은 골짜기 중 하나인 용장골의 계곡의 길이가 약 3km 되는 남산에서 가장 크고 깊은 골짜기로 산에서 흐르는 물이 깨끗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는 이곳은 금호신화의 저자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던 곳으로 현재 22개소의 절터가 확인되고 있습니다.

 

 

<용장계곡 중심지>

 

 

수목도 다양하고 아기자기한 바위도 많고 물 또한 맑으니 그 어느 산 못지않게 아름다운 곳에 문화재도 많아 기쁨이 배가되는 다시 오고 싶은 명승지라 하겠습니다.

 

 

 

이 징검다리를 마지막으로 오늘은 안녕..

 

 

 

이곳에 도착하시면 마을로 내려가기 전에 옆 길가 집에라도 가셔서 회비빔밥집을 여쭈어 찾아서 꼭 한 그릇 드시길 권합니다.  맛과 질적으로 참 유명한 집입니다. 오후 2시면 끝날 때가 많습니다.

 

 

삼릉을 들머리로 시작해서 이곳 용장마을에 도착, 남산 탐방을 마칩니다.

차를 삼릉주차장(주차료 종일 2천원)에 주차하였기에 용장마을에서 이곳 삼릉주차장까지 경주시내버스(요금1500원)를 이용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2011년 11월 7일 - 鄕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