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1.경주 남산(慶州 南山)삼릉입구-상선암-바둑바위-상사바위-금오봉

鄕香 2011. 11. 11. 13:50

 

2박 3일 일정으로 경주유적을 둘러보기 위해 나섰는데, 하늘은 검은 구름이 가리고 가랑비마저 간간이 내리는 날씨입니다. 

이곳 경주로 내려오는 도중 팔공산 석굴암과 은해사를 들려오느라고 경주에 도착하니 저녁 무렵, 예약된 보문단지 켄싱턴리조트에 짐을 풀고 이튼 날 아침 일찍이 남산을 둘러보기 위해 삼릉코스입구에 도착하였습니다. 

 

 

<배리 삼릉 / 拜里 三陵>

이곳에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제53대 신덕왕(神德王),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있어 삼릉이라 부릅니다.

1.아달라왕(재위154-184)은 백제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자 친히 군사를 출동하여 전장에 나아갔다. 그러나 백제가 화친을 요청하자 포로를 석방하였다. 왜(倭)에서는 사신을 보내왔다. 능의 크기는 밑 둘레 58m, 높이 5.4m, 지름 18m입니다.

 

2.신덕왕(박경휘/재위912-917) 효공왕이 자손이 없이 죽자 백성들이 헌강왕(憲康王)의 사위인 박경휘(신덕왕)를 추대하였다. 견훤(甄萱)과 궁예(弓裔)의 침입이 있어 싸움에 진력하였습니다. 능의 크기는 밑 둘레61m, 높이 5.8m, 지름 18m입니다. 

 

3.경명왕(박승영/재위 917-924)은 신덕왕의 아들로 고려 태조 왕건과 손을 잡고 견훤의 대야성(大耶城) 공격을 물리쳤다, 중국 후당(後唐)과 외교를 맺으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 둘레 50m, 높이 4.5m, 지름 16m 입니다.  

 

 

  삼릉 주변의 소나무들이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향기로운 솔잎 냄새에 가슴이 트이고 머리가 맑아지니 오늘 하루 일정이 가뿐하고 즐겁겠습니다.

 

 

삼릉을 둘러보고 나니 삼릉코스의 들머리로 이어집니다. 안개가 자욱하고 기후가 음습하여 상큼함은 없지만 산행하기에는 지장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곳 남산은 신라의 왕도였던 경주의 남쪽에 솟아있는 금오산(金鰲山)과 고위산(高位山) 두 봉우리를 비롯하여 도당산 . 양산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모두 남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산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지만, 동서로 가르지른 길이가 약 4km, 남북의 길이는 대략 8km에 40여 계곡이 있고 곳곳에 수많은 佛跡이 산재되어 있어 사적 제311호로 지정된 곳으로, 여러 전설과 설화들이 깃들어 있습니다. 신라 건국전설이 깃든 나정(蘿井), 신라왕실의 애환이 서린 포석정터, 김시습이 거처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었다고 하는 용장사터(茸長寺址) 등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한 이후 남산은 부처가 머무는 영산으로 신성시되어 많은 사찰과 탑이 건립되고 불상이 조성되었습니다. 현재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122여 개소의 절터, 57여 개소의 석불, 64여기의 석탑이 산재하고 있어 야외박물관으로 불려지고 있으며, 2000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마치 나무들이 내리는 안개의 촉촉함을 즐기는 양 춤을 추듯이 율동감이 느껴집니다.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 磨崖觀音菩薩像>

삼릉코스 들머리에서 계곡을 따라 200여 m 정도 들어가니 좌측 산 중턱 돌기둥처럼 생긴 암벽에 돋을새김 되어 있습니다. 풍만하지만 잘 다듬어진 얼굴에 보일 듯 말듯 비치는 미소가 무척이나 아름답습니다. 머리위에는 삼면보관(寶冠)을 썼는데, 앞에 작은 불상이 조각되어 있어 이 불상이 관음보살임을 말해 줍니다. 입술에는 붉은 색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연꽃으로 된 대좌 위에 서 있는데, 목걸이를 하고 허리 아래로 흘러내린 옷자락(法衣)은 양 다리에 각각 U자 모양으로 드리워져 있습니다. 왼손은 정병(靜甁) 을 들고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올려 손가락을 꼬부려 밖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細部)

 

상선암을 거쳐 금오봉으로 가는 길로 들어섰습니다.

 

 

오늘 산행은 금오봉으로 해서 용장사지를 보고 설장교를 지나 이영재(嶺)를 거쳐 칠불암을 목표로 합니다. 안개를 동반한 이슬비가 안내판을 적시고 있습니다.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 三陵溪谷 線刻六尊佛>

남산에서는 드물게 선각으로 된 여섯 분의 불상이 두 개의 바위 면에 새겨져 있습니다.

 

 

안쪽 바위 면 가운데 본존이신 석가모니불이 오른 어깨에만 법의를 걸치고 연꽃좌(蓮花臺座)에 앉아 있습니다. 머리 둘레에 두광(頭光)만 새기고 몸둘레의 신광(身光)은 새기지 않았으며, 왼손은 무릎에 얹고 오른손을 들어올린 모습입니다. 그 좌우에는 연꽃 대좌에 두광만 조각되고 방울 3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한 협시보살 두 분이 서 있습니다. 보통 이 세분을 석가삼존이라 부릅니다. 

 

 

 

앞쪽 바위면 가운데 본존이 서고 좌우의 보살은 꿇어앉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본존은 연꽃 위에 서서 왼손은 아래에, 오른손은 위에서 서로 마주보게 하고 두광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좌우의 보살상은 웃옷을 벗고 한쪽 무릎을 새운 모습입니다. 손에는 꽃쟁반을 받쳐 들고 있는데, 두광만 조각되었으며 목에는 구슬 2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하였습니다. 이를 아미타삼존이라고 합니다. 오른쪽 암벽 위에는 당시 이들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법당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선각여래삼존불을 답사하고 다시 이정표 있는 곳으로 돌아와 금오봉 방향으로 발을 옮깁니다.

 

 

<삼릉계곡 석불좌상 / 三陵溪谷 石佛坐像> 보물 제666호

남산 삼릉계곡 중간능선에 자리하고 있는 이 불상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맺고 연꽃좌 위에 결가부좌한 석불좌상입니다. 불두와 불신이 따로 제작하여 결합한 불상입니다. 얼굴과 광배 등이 파손이 심했던 것을 경주시의 의뢰로 뺨과 코, 입, 광배 등 대부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복원하였습니다.

 

 

불상의 몸은 당당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신체 표현에 가사(袈裟)는 오른쪽 어깨는 노출시킨 채 왼쪽 어깨에만 걸쳤는데, 이 가사는 얇게 몸에 밀착하여 신체의 윤곽 등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강이에서 발목으로 옷 주름이 비스듬히 흐르고 있습니다. 광배는 간결하면서도 섬세하게 새겨진 화염문(火焰紋)과 당초문(唐草紋) 등으로 보아 우수한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연꽃좌(蓮花座)는 상대(上臺)에 앙련(仰蓮)을 3단으로 새겼는데, 꽃잎 안에 다시 꽃잎을 새겼습니다. 팔각의 중대(中臺)에는 面마다 안상(眼象)을 두었으나, 하대(下臺)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습니다. 

 

 

이 불상은 풍만하면서 당당하고 안정감 있는 신체표현, 대좌와 광배의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조각수법, 몸에 밀착시켜 입은 얇은 가사, 발목으로 흐르는 옷주름 등으로 보아 석굴암 본존불상에서 완성된 통일신라시대 조각의 양식과 수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므로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상선암>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 三陵溪谷 磨厓釋迦如來坐像>

이 불상은 경주 남산의 북쪽 금오산(金鰲山)에서 북서쪽으로 뻗어 내리다가 작은 봉우리를 형성한 바둑바위의 남쪽 중턱에 위치해 있습니다. 자연 암반을 파내어 광배(光背)로 삼았는데 깎아내다가 그만둔 듯 거칠며, 높이 7m로 냉골(三陵溪谷)에서는 가장 큰 불상으로 남산의 북쪽봉우리인 금오산을 向하여 앉아 있습니다.

 

 

이 불상의 머리는 거의 입체불에 가깝고, 그 아래는 線刻으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풍만한 얼굴에 눈썹은 둥굴고 눈은 반쯤 뜨고 입은 굳게 다물었습니다. 민머리에 턱은 주름이 지고 귀는 어깨까지 큼직합니다. 법의는 어깨에 걸쳐져 있으며 가슴부분의 벌어진 옷 사이로 속옷의 매듭이 보입니다. 오른손은 엄지와 둘째, 셋째 손가락을 굽혀 가슴에 올렸고 왼손은 무릎에 얹었습니다.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양 다리의 발 표현과 연꽃대좌가 아주 특이합니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동쪽에서 본 불상의 모습)

 

(서쪽에서 본 불상의 모습)

 

마애석가여래상을 답사하고 다시 금오산 방향으로 ..

 

 

<금송정 / 琴訟亭>

금송정은 이곳 금오산에 있던 정자였는데 경덕왕 때 음악가 옥보고(玉寶高)가 거문고를 타며 즐기던 곳이라고 합니다. 금송정이 있었다는 이곳 냉골 바위산은 그 모습이 괴상하고 거대한 바위 더미로 밑에서 쳐다보면 정상은 구름이 걸린 듯 드높아 보입니다. 옆의 금오산봉우리 방향에 우뚝 솟은 바위 봉우리는 상사암(想思岩)이라고 합니다. 옥보고는 이곳 금송정에서 바위들과 솔잎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소리와 파란하늘에 흘러가는 흰 구름을 벗 삼아 거문고를 뜯으며 세상 시름을 잊었다고 합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

 

 

 

(상사암으로 가는 길)

 

 

오밀조밀한 모양으로 이루어진 바윗길 오르고 내려가는 재미로 힘든 줄도 모릅니다.

 

 

<바둑바위>

자욱한 안개에 싸여 있는 흰 바위봉우리가 금송정이 있는 바둑바위 입니다.

 

 

<상사바위 / 想思岩>

" 상사바위는 금오산에 있다. 그 크기가 백여 발이나 되는데, 그 생김새가 가파르게 솟아 있어 오르기가 어렵다. 상사병에 걸린 사람들은 이 바위를 위하고 빌면 병이 낫는다." "산아당(産兒堂)은 금오산에 있는데 아기를 낳는 모습을 돌에 새겨놓았다, 신라 때 아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빌던 곳이라 전하는데 가위와 칼자국이 남아 있다."   위의 글은 〔동경잡기〕에 실려 있는 상사바위에 대한 기록입니다.

 

(서쪽에서 본 상사바위 전경)

 

상사바위 윗면

 

(산아당 / 産兒堂)

상사바위는 높이가 약 13m, 길이가 약 25m 가량 되는 큰 바위로 바위 중간쯤에 가로 파인 틈에 돌을 던져 그 곳에 얹히면 소원이 이루어지고 던진 돌이 떨어지면 바위신이 뜻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상사바위의 남쪽 편에 아기를 낳는 듯이 갈라진 바위인 "산아당"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산아당 細部)

 

 

(북쪽에서 본 상사바위 일부)

 

<상사암/想思岩>

상사바위는 높이가 약 13m, 길이가 약 25m 가량 되는 큰 바위로 이 바위를 서편에서 보면 냉골 여울에 뿌리 내리고 수십미터 높이로 솟아오른 뾰족탑(尖塔)처럼 보이고 동쪽에서 보면 산등성이 위에 직사각형으로 육중하게 솟아 있어 염라대왕의 궁전을 연상시키는 험상궂은 모양입니다. 바위 중간 쯤에 가로 파인 틈에 돌을 던져 그 곳에 얹히면 소원이 이루어지고 던진 돌이 떨어지면 바위신이 뜻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상사바위의 남쪽편에 아기를 낳는 뜻한 모양새로 갈라진 바위인 "산아당"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인적 없는 금오산봉우리에는 안개비만 촉촉이 내리고 이정표는 말없이 다음 길목을 손짓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금오산(金鰲山)

이름은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아도화상[阿道和尙 : 고구려 출신 승려로 신라 미추왕2년(263년)에 신라에 들어와 불교를 전한 승려로 신라 십성(十聖)의 한사람]이 저녁놀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을 짓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그러나 까마귀烏가 아닌 자라鰲가 쓰이게 되었는지 그 까닭은 알 수가 없네요. 

 

 

용장사로 이어집니다. 고맙습니다.

2011년 11월 7일 - 鄕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