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경주 (慶州 史蹟地帶) 탈해왕능-첨성대-계림-석빙고-월성곽

鄕香 2011. 11. 20. 13:32

<경주 동부 사적지대 사적 161호(慶州 東部 史蹟地帶)>

이곳 황남동 일대는 東西로는 안압지(雁鴨池)에서부터 교동까지, 南北으로는 월성(月城) 남쪽의 남천에서 현재 고분공원 앞 첨성로에 이르는 광대한 사적지 입니다. 신라왕경(新羅王京)의 중심부였기 때문에 월성. 안압지, 첨성대. 계림 등의 중요한 사적이 많을 뿐만 아니라, 내물왕(奈勿王陵)을 비롯한 수십 기의 古新羅 古墳이 완전한 형태로 밀집되어 있는 곳입니다. 또한 이곳 땅속에는 봉토가 없어진 많은 고분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이 지역은 경주에서도 신라의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 하겠습니다.

 

 

세 개의 무덤이 보는 방향에 따라 나란히 또는 일직선으로 다정스런 아늑함을 풍기고 있습니다. 한 시대를 추스렸을 저 무덤의 인물들은 무덤의 크기 만큼이나 후대에 무한한 의문을 남기며 그윽한 여운으로 세월을 흘립니다. 

이 일대에는 황남동, 황오동,  인왕동에는 4~5세기에 걸쳐 조성된 고분군이 384,000㎡에 적석목곽분과 목곽묘, 석곽묘 등 150여기의 고분이 분포해 있습니다. 이 고분의 피장자는 신라 중앙 지배층의 일부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피장자의 신원을 알 수 있는 것은 그 신분에 따라 능陵, 원園, 묘墓로 구분 짓고, 주인을 알 수 없을 때는 총塚 . 분墳 으로 부릅니다.

 

 

<첨성대(瞻星臺)國寶 第31號>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때 세운 첨성대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관측대입니다. 화강석을 다듬어 조성한 기단(基壇) 위에 27단의 석단(石段)을 원통형의 곡선(曲線)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에 긴 돌(長大石)로 우물 정(井)字形으로 2단으로 축조하여 정상 주에 관측기를 올려놓고 춘하추동 24절기를 별을 통해 천문을 살필 수 있도록 시설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祭壇으로 사용되었다는 이견도 있습니다. 

정남(正南)쪽의 석단에는 아래로부터 제13단과 제15단 사이에 네모난 출입구가 있어 내부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있고, 이 출입구 아랫부분 양쪽에는 사다리를 걸쳐 오르내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곳을 통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크기는 밑면의 지름 대략 5 m, 높이 9.4 m이며 지대석 한 변의 길이는 5.35 m입니다. 직선과 곡선이 잘 어우러진 안정감 있는 건축물입니다. 

 

 

 

(출입구를 정면으로 볼 때 그 옆면 )

 

(출입구 뒷면)

 

<계림(鷄林)史蹟19號>

숲은 무엇인가 감춘 비밀스런 느낌을 주는 곳이 듯이 경주 교동에 위치한 이 숲은 신라 탄생의 역사를 간직한 곳으로 첨성대와 월성 사이에 위치하며,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金閼智)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 유서 깊은 곳입니다. 신라 탈해왕(脫解王) 때 호공(瓠公)이 이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가까이 가 보니 나뭇가지에 금으로 된 함(金櫃)이 빛을 내며 걸려 있었답니다. 이 사실을 임금께 아뢰어 왕이 몸소 숲에 가서 금궤를 내려서 뚜껑을 열자 궤 속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 하여 성(姓)을 김(金),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그 후손이 신라 제 13대 미추왕이 되었습니다. 본래 시림(始林), 구림(鳩林)이라 하던 이 숲을 계림(鷄林)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경내의 이 비각은 조선 순조(純祖) 3년(1803년)에 세워진 것으로 안의 비석에는 김알지 탄생에 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문이 잠글쇠로 굳게 잠겨있어 확인 할 수는 없었습니다.    

 

 

비각을 두른 담장 문 사이 틈으로 찍은 비각의 모습입니다.

 

 

 계림(鷄林)과 이 일대 월성(月城)은 서기101년 신라 5대 파사왕(婆娑王)때 축성을 시작하여 왕궁을 옮기고 멸망할 때까지 800여 년간 왕궁으로 자리해온 만큼 많은 전설과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는 신라역사의 산실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사적 16호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인 월성은 경주 신라도읍지가 한 눈에 보이며 넓은 터에 경관도 좋아 왕궁으로서의 입지가 빼어난 곳입니다. 총 면적 20,7528㎡에 성내 면적 10,8524㎡이르며 그 형태가 반달처럼 생겨 반월성(半月城)이라고도 불렸습니다. 幅은 동서 860m, 남북 250m에 전체 둘레 2400m이며, 성벽의 높이는 대체로 10~20m 정도 였을 것으로 봅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여러 문헌에 의하면 월성에는 왕이 정사를 열든 남당, 신하의 아침인사를 받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조원전, 삼궁을 관할하던 내성, 숭례전, 왕실의 물품을 보관하는 내황전, 망은루, 월상루 같은 여러 門樓가 있었으나 지금은 석빙고만 남아 있습니다. 

  

 

<경주 석빙고(慶州 石氷庫) / 寶物 第66號>경주시 인왕동446-1

월성(月城) 안의 북쪽 성곽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는 길이 19m, 너비 6m, 높이 5.45m의 돌방(石室)은 직사각형으로 만들어 졌는데 약 1000개의 돌이 쓰였고 천장 외부는 봉토한 것으로 마치 석실분(石室墳)의 형상입니다. 무지개(虹霓)모양으로 만든 천장에는 공기 구멍 3개가 있고, 바닥은 물이 빠질 수 있도록 홈을 파서 비스듬하게 만들었습니다. 석빙고 위에 굴뚝처럼 생긴 공기 구멍 3개가 보입니다. 출입구는 남쪽에 있고 계단을 통해서 출입하게 되어 있습니다.

옆에 있는 석비(石碑)에는 "경주부윤 조명겸(趙明謙)이 얼음 창고를 돌로 만들었다가 3년 만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각서(刻書)되어 있습니다. 현재 석빙고 서쪽으로 약 100m 되는 곳에 옛 석빙고 터가 있습니다.

 

 

(석빙고 정면 입구 위에 새겨있는 글씨)

여러 개의 사각형의 돌로 기둥을 쌓고 그 위에 크고 넓은 한 장의 판석을 올려 덮고 그 면에 石氷庫 라고 새겼습니다. 

 

 

석빙고 이맛돌에 " 숭정기원후재신유추팔월이기개축(崇禎紀元後再辛酉秋八月移基改築)"이라는 글이 새겨져있습니다.

이 글에 의하면 영조 17년(1741년)에 옮겨 세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석빙고 안의 모습입니다. 무지개(虹霓)모양으로 만든 천장에는 공기 구멍 3개를 앞 중간 끝 부분에 두었고, 바닥은 물이 빠질 수 있도록 홈을 파서 비스듬하게 만들었습니다.

 

 

(석빙고 정면 입니다.)

 

 

<월성(月城)사적 제16호>경주시 인왕동 387-1 

신라시대에 궁궐이 있었던 곳으로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하여 "신월성(新月城), 또는 월성(月城)"이라 불렸으며, 임금이 사는 성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성의 형태가 반달같이 생겼다고 조선 시대부터 반월성(反月城)이라 불려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성을 쌓기 전에는 호공(瓠公)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석탈해(昔脫解)가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듯고 석탈해를 사위로 삼았으며, 신라 제4대 왕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해옵니다. 그 후 파사왕(婆娑王)22년(101년)에 여기에 성을 쌓고 옮긴 다음부터 역대 왕이 이 월성에 살게 되었습니다. 남쪽으로는 자연적으로 이룬 절벽에 남천이 흘러 자연적인 방어 시설이 되었고, 동쪽. 북쪽. 서쪽으로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넓은도랑(垓子)을 팠습니다. 남문, 북문, 인화문 등과 임해전(臨海殿)으로 통하던 임해문이 있었으며, 지금은 모두 없어져 황량하지만 그 밖에 많은 부속 건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곳을 발굴조사를 거쳐 복원할 필요를 느낍니다.

 

(무너저 흐트러진 월성곽벽(月城廓壁))

 

처녀의 젖무덤만큼이나 선이 아름다운 다섯 陵이 일렬횡대(橫帶) 로 있는 것이 아니라 V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다섯 무덤 중 가운데 앞의 무덤이 탈해왕능입니다.

탈해王(이사금)의 성은 석씨(昔氏). 토해(吐解)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다파나국(多婆那國)의 왕, 용성국(龍城國)의 함달파왕(含達婆王), 혹은 완하국(琓夏國)의 함달왕(含達王) 등이라는 여러가지 전설이 있다. 어머니는 여국왕(女國王)의 딸 또는 적녀국왕(積女國王)의 딸이라고 한다. 왕비는 남해차차웅의 딸 아효(阿孝·阿尼, 또는 남해차차웅의 누이동생 阿老)부인이다.

부왕(父王)이 비(妃)를 맞아 임신 7년 만에 큰 알〔卵〕을 낳자, 왕은 좋지 못한 일이라 하여 버리게 하였다. 이에 보물과 함께 비단에 싸서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보냈다. 궤짝에 실린 탈해는 금관가야를 거쳐 계림(鷄林)동쪽 아진포(阿珍浦)에 이르렀다. 이때 한 노파에 의하여 건져지고 길러졌다. 그리하여 고기잡이로써 생업을 하며 양모(養母)를 공양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탈해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공부를 시켜, 학문과 지리에 두루 통달하게 되었다.

당시 이름난 신하인 호공(瓠公)의 집터(뒤에 月城이 됨.)가 좋음을 보고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에 묻어놓고는 자기의 집이라 우기니 관가에서는 주장하는 근거를 요구하였다. 이에 자신은 본래 대장장이〔冶匠〕였으니 땅을 파서 조사하자고 하여, 과연 숫돌과 숯이 나오자 탈해가 승소(勝訴)하여 그 집을 차지하였다.

이같은 내용의 설화에서, 첫째 탈해집단이 경주 동해변에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은 그가 죽은 뒤 동악신(東岳神)으로 봉사(奉祠)되었음에서도 확인된다. 둘째는 석씨부족이 어로를 주요생활수단으로 하였지만, 이미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적어도 철을 다루는 능력이 왕위계승에까지 연결되는 강점의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탈해는 서기 8년에 왕의 사위가 되고, 서기 10년에는 대보(大輔)의 자리에 올랐으며, 유리이사금의 즉위시에 이미 왕위계승의 물망에 올랐지만, 유리이사금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먼저 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으며, 유리이사금이 탈해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탈해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해차차웅의 사위이니 결국 박씨집단(朴氏集團)의 일원이라는 동속개념(同屬槪念)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또, 철을 이용한 군사력 및 거기에 따르는 실질적인 정치실력파의 등장으로 박씨족과 석씨족이 연맹하였으며, 이것은 왕실세력의 폭을 넓혔다고 본다.

서기 58년 호공을 대보로 삼고, 서기 64년 백제군이 와산(蛙山), 구양(狗壤)의 두 성을 비롯하여 이후 4, 5회 공격해왔다.

서기 65년(삼국유사에는 60년) 시림(始林)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확인시켜보니, 금궤(金櫃)가 나무에 걸려 있고 그 아래 흰 닭이 있어, 궤를 열어보자 용모가 단정한 아이를 얻었는데, 이가 김알지(金閼智)이다. 왕은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고치고 이를 국호로 삼았다.

서기 67년 박씨의 인척(姻戚)으로서 주, 군(州郡)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주주(州主), 군주(郡主)라 이름하였다.

서기 77년에는 가야의 군사와 황산진(黃山津)에서 싸웠다. 죽은 뒤, 성북(城北)의 양정(壤井) 언덕에 장사지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韓國古代社會硏究(金哲埈, 知識産業社, 1975) . 韓國家族의 史的 硏究(李光奎, 一志社, 1977)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李鍾旭, 嶺南大學校出版部, 1980) . 三韓의 國家形成 上(千寬宇, 韓國學報 2, 1970)

 

 

여인의 젖무덤처럼 두 개의 봉긋한 무덤 사이에 무수하게 헤쳐 나간 나뭇가지가 한 폭의 그림처럼 너무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월성과 천마총 사이 첨성로에 줄지어 서있는 가로수가 곱게 물들어 여행자들의 마음을 설렘과 기쁨을 줍니다.  

 

 

고맙습니다.

 2011년 11월 8일 - 鄕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