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경주 김유신 묘(金庾信 將軍 墓)

鄕香 2011. 11. 21. 14:19

 

<김유신장군 묘(金庾信將軍 墓)사적제21호>

 

삼국사기 법흥왕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신라 법흥왕 19년(532년) 금관국의 왕 김구해(구형왕)는 왕비와 세 아들 노종, 무덕, 무력과 더불어 가야국의 많은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법흥왕이 예를 갖추어 대접하고 상등의 직위를 주었으며 금관국을 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이 중 구형왕(김구해)의 막내아들 무력武力은 신라의 장군으로 많은 공을 세웠고 그의 아들이 서현舒玄이고 서현의 아들이 김유신이다. 김유신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증손자이다.

 

 《흥무문/興武門》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松花山)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의 끝에 김유신장군의 묘가 위치해 있으며, 흙을 둥글게 쌓아 올렸다. 김유신은 금관가야(金官伽倻)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의 증손(曾孫)으로 15세에 화랑이 되었고, 무예와 지략이 뛰어나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앞장서서 지휘하였습니다. 신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7년(서기660년)에 나당 연합군(羅唐 聯合軍)이 결성되었을 때 신라군 총사령관이 되어 백제를 병합하였고, 이어 문무왕(文武王)8년(668년)에는 고구려를 병합하였으며, 한반도 전체를 복속시키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던 당나라 군사도 물리쳤다. 문무왕 때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이라는 관작(官爵)을 받았고, 뒷날 흥덕왕(興德王) 때에는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되었다.

 

 

능의 크기는 밑 둘레 50m, 지름 18m, 높이 5.3m이며, 능 밑 둘레에는 1.2m 높이의 십이지상(十二支像)을 새긴 보호석(保護石)이 둘러졌으며 다시 돌난간을 돌렸습니다.

 

 

김유신의 본관은 김해(金海),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소판(蘇判)·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을 역임한 서현(舒玄)이고, 어머니는 숙흘종(肅訖宗;葛文王 立宗의 아들)의 딸 만명(萬明)이다. 증조부는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仇衡王이라고도 함)이고, 조부는 신주도 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管)을 지낸 명장 김무력(金武力)이다. 가야계에 속한 그의 집안은 당시 권력의 중심에서 소외된 계층으로 분류되었다. 김유신은 609년(진평왕 31)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린 낭도(郎徒)를 이끌고 화랑정신을 길렀고, 여동생 문희가 김춘추(金春秋)와 혼인(척실)하여 중앙정계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611년과 이듬해 중악(中嶽)과 인박산(咽薄山)에서 삼국통일을 기원(祈願)하고 무술을 닦은 뒤 국선(國仙)이 되었다. 필사본 《화랑세기(花郞世紀)》에 따르면, 612년 미실의 손녀이자 하종공의 딸인 영모(令毛)와 혼인하였다고 하나, 학계에서는 《화랑세기》를 위서(僞書)로 간주하여 정설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655년에는 김춘추의 딸 지소(智炤)를 아내로 맞았다.

 

 

<묘비석(墓碑石)>

'신라태대각간김유신묘(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

 

 

 

<김유신장군 묘에 돌린 호석에 각방위에 따라 돌린 십이지신像>

 

(자 / 子)                                                                             (축/丑)

자시(子時) (24時)의 오후 23시~오전 1시 방향                     축시(丑時) (24時)의 오전1시~오전 3시 방향 

  

 

(인/寅)                                                                         (묘/卯)

인시(寅時) (24時)의 오전3시~오전 5시 방향.                    묘시(卯時) (24時)의 오전5시~오전 7시 방향. 

 

 

 

(진/辰)                                                                               (사/巳)

진시(寅時) (24時)의 오전7시~오전 9시 방향.                    사시(巳時) (24時)의 오전9시~오전 11시 방향. 

 

 

 

 

(오/午)                                                                           (미/未)

 

오시(午時) (24時)의 오전11시~오후 1시 방향.                    미시(未時) (24時)의 13시~15시 방향. 

 

 

 

 

(신/申)                                                                        (유/酉)

신시(申時) (24時)의 오후3시~17시 방향.                    유시(酉時) (24時)의 17시~19시 방향. 

 

 

 

(술/戌)                                                                       (해/亥)

술시(戌時) (24時)의 오후 7시~21시 방향.                   해시(亥時) (24時)의 오후9시~23시 방향. 

 

 

 

이 묘의 십이지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몸은 사람의 형체이고 머리는 동물의 모양입니다. 이 때의 십이지신상은 12간지 방향을 12지신이 각각의 해당 방위를 지키며 외부로부터 잡귀(雜鬼)의 침임을 막고 무덤을 보호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護石의 細部) 

 

김유신은 611년과 이듬해 중악(中嶽)과 인박산(咽薄山)에서 삼국통일을 기원(祈願)하고 무술을 닦은 뒤 국선(國仙)이 되었다. 필사본 《화랑세기(花郞世紀)》에 따르면, 612년 미실의 손녀이자 하종공의 딸인 영모(令毛)와 혼인하였다고 하나, 학계에서는 《화랑세기》를 위서(僞書)로 간주하여 정설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655년에는 김춘추의 딸 지소(智炤)를 아내로 맞았다. 629년(진평왕 51) 8월 이찬(伊) 임영리(任永里) 등이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할 때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때 적군의 역습을 받은 아군의 사기가 떨어져 싸움이 불리해지자 아버지 소판 서현에게 "제가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 하고 홀로 적진으로 돌진하여 적장의 머리를 베어 옴으로써 승리의 기틀을 잡아 대승을 거두게 하였다. 642년(선덕여왕 11) 압량주(押梁州;지금의 경북 경산시) 군주(軍主)가 되었고, 644년 소판 벼슬에 올랐다. 같은 해 9월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개성을 공격하여 승전하고 이듬해 1월에 개선하였다. 그런데 왕을 알현하기도 전에 매리포성(買利浦城;지금의 경남 거창)이 백제군의 맹공을 받고 있다는 파발에 곧장 상주(上州;지금의 경북 상주시) 장군이 되어 출전하여 크게 무찔렀다. 647년(선덕여왕 16) 1월에는 여왕을 폐하려고 난을 일으킨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의 반군을 토벌하였고, 10월 무산(茂山;무주) 등 3개 성을 공격해 온 백제군을 보병과 기병 1만으로써 크게 격파하였다. 이듬해 압량주 군주로서 백제에게 빼앗겼던 대량성(大梁城;지금의 경남 합천)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데 이어 악성(嶽城) 등 12개의 성을 빼앗았으며, 그 공으로 이찬 벼슬로 승진하고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이 되었다. 649년 8월에는 석토성(石吐城) 등 7개의 성을 공격해 온 백제의 장군 좌평(佐平) 은상(殷相)을 무찔렀다. 654년 3월 진덕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재상으로 있던 이찬 알천(閼川)과 의논하여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하니 그가 바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다. 이듬해 9월 백제의 도비천성(刀比川城;충북 영동군의 비봉산성)을 공략하였으며, 이때 백제왕의 문란한 정치를 보고 백제를 멸할 것을 왕에게 건의하였다. 660년(태종무열왕 7) 1월 상대등에 올랐고, 7월 신라 정예군 5만과 소정방(蘇定方)이 이끈 당나라군 13만이 연합하여 사비성(泗城)을 함락시켜 백제를 멸망시켰다. 661년(문무왕 1) 7월 나당 연합군과 함께 고구려를 정벌하러 가는 도중인 9월 옹산성(瓮山城;대전시 鷄足山城)에 있는 백제의 잔적(殘賊)을 토벌하고, 12월 당나라군의 군량미를 실어다 주었으나 당나라군의 철수로 고구려 정벌은 실패로 돌아갔다. 663년 8월 백제의 부흥군을 두솔성(豆率城;周留城)에서 대파하였고, 665년 당나라 고종으로부터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에 봉해졌다. 667년(문무왕 7) 왕을 따라 당나라군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11월 환군하였다. 이듬해 9월 나당 연합군으로 평양을 칠 때 연합군 대총관이 되었으나 왕명으로 금성에 남아 국방을 도맡았다. 고구려 정벌 직후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최고직위에 오른 후 당나라 군사를 축출하는 데 힘써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수복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져 놓았다. 673년(문무왕 13) 7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금산원(金山原;지금의 경북 경주시)에 장사지냈고, 835년(흥덕왕 10)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었으며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

 

<묘 뒷면>↓

 

2011년11월8일 - 鄕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