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조선 회화(繪畵)

석당 이유신 필 산수도(石塘李維新筆山水圖)

鄕香 2010. 2. 4. 13:15

 

자는 사윤(士潤), 호는 석당(石塘). 가계와 행적 등이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1799년(정조 23) 이인문(李寅文)·유한지(兪漢芝)·홍의영(洪儀泳)과 함께 김득신(金得臣)의 〈대양일출도 大洋日出圖〉를 감상했습니다. 유재건(劉在建)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따르면 "그림을 잘 그렸고, 괴석을 좋아했으며, 어느해 정초에 신위(申緯)의 집에 세배를 갔다가 그곳에서 돌을 얻고 기뻐했는데 그때 이미 백발의 노인이었다."고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신위보다 나이가 위였지만 신분상으로는 낮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또한 문예에 뛰어났으나 지체가 변변치 못한 인물들의 전기를 모은 〈이향견문록〉에 실렸던 점으로 보아 중인이나 평민 출신의 문인화가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산수화로서 축축하게 번진 윤필(潤筆)로 다듬어진 간략한 형태와 밝고 투명하게 선염된 고운 담채가 신선한 느낌을 줍니다. 그의 이러한 화풍은 조선 말기의 이색적인 화풍과 상통된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이 그림도 그와 같은 이유신의 전형적인 산수화로서 전경에는 크고 다양한 수종들과 그 아래에는 빈 정자를 배치하였고, 중경의 물을 건너 원산이 비교적 크게 부각되었습니다. 전체 구도는 元代 화가 예찬(倪瓚)에서 비롯되어 후대에 크게 유행한 것을 대체로 방(倣)하였습니다. 위쪽 상단에는 "방북원필의(倣北苑筆意) 석당(石塘)" 이라는 畵題와 款署가 있어 그가 중국 오대 남당(南唐)의 산수화가 동원(董源)의 필의를 따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관서에 이어 '이유신사윤인(李維新士潤印)' 이라는 白文方印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유작으로 개인 소장의 〈포동춘지도 浦洞春池圖〉·〈가헌관매도 可軒觀梅圖〉·〈귤헌납량도 橘軒納凉圖〉·〈행정추상도 杏亭秋賞圖〉·〈양류로주도 楊柳鷺舟圖〉·〈추경산수도〉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운산도 雲山圖〉, 호암미술관 소장의 〈영모합경도 翎毛合景圖〉 등이 전해집니다.

 

 

 

석당이유신필산수도(石塘李維新筆山水圖)

朝鮮18世紀 後半 / 趙熙龍 1797~1859 / 紙本淡彩 /縱 28.5× 橫 42 cm /高麗大學校博物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