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조선 회화(繪畵)

자하 신위 필 묵죽도(紫霞申緯筆墨竹圖 )

鄕香 2010. 2. 3. 20:50

 

신위(申緯)의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한수(漢叟), 호는 자하(紫霞). 1799년(정조 23)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리었고 14세 때 正祖가 그를 불러 크게 칭찬하였으며, 1799년 알성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는데, 10여 년 간 한직(閑職)에 머물거나 파직·복직을 되풀이하는 등 기복이 많았습니다. 그후 도승지 . 이조참판 · 병조참판을 지냈으며, 당시 국내외의 저명한 예술가 . 학자와 폭넓은 교유를 했습니다. 1812년(순조 12) 중국에 가서 옹방강(翁方綱)을 비롯한 그곳의 학자들을 만나고 돌아온 이후 그 전에 쓴 자신의 시들을 다 태워버렸습니다. 시에 있어서는 우리나라 시인과 그 작품을 7언절구의 형식으로 논평한 일종의 논시시(論詩詩) 〈동인논시절구 東人論詩絶句〉, 시조를 한역한 〈소악부 小樂府〉, 그리고 판소리 연행을 한시화한 〈관극절구 觀劇絶句〉 등의 작품이 유명합니다. 이외에도 중국 신운설(神韻說)의 대표적인 인물인 왕사정(王士禎)의 〈추류시 秋柳詩〉를 본떠 지은 〈후추류시 後秋柳詩〉, 그의 시작품 속에는 애국 애족적인 정신이 잘 나타나 국산품 애용, 양반 배척, 서얼의 차별대우 철폐, 당쟁의 배격 화폐개혁 등 현실적 문제를 제시하였습니다. 그의 시는 전(前)시대에 활약했던 이서구(李書九) 등의 시풍을 계승하면서 한말 4대가인 강위·황현·이건창·김택영 등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에 있어서는 묵죽(墨竹)에 특히 능하여 이정·유덕장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꼽힙니다. 그의 대나무 그림은 강세황에게 큰 영향을 받았는데, 단아한 기품과 우아한 아름다움이 특징입니다. 그는 남종화의 기법을 이어받아 추사파 화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방대도 訪戴圖〉·〈묵죽도 墨竹圖〉가 있습니다. 그의 화풍은 아들 명준(命準)과 명연(命衍)에게 이어졌으며, 그의 서풍(書風)은 기름지고 윤기 있는 청나라의 새로운 풍조를 받아들여 한국의 습기(習氣)와 속기(俗氣)에서 벗어났다고 평해집니다. 문집으로 시 4,000여 수를 수록한 〈경수당집 警修堂集〉(16책 85권)이 전하며, 당시(唐詩) 가운데 화의(畵意)가 풍부한 작품만을 뽑아 편집한 〈당시화의 唐詩畵意〉가 있고, 그밖에 김택영이 중국에서 간행한 〈신자하시집 申紫霞詩集〉(2책)이 있습니다. 자하 신위는 19세기 전반에 시(詩)·서(書)·화(畵)의 3절(三絶)로 유명했던 문인이며, 시에 있어서는 김택영이 조선 제일의 대가라고 칭할 만큼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군자의 인품에 비유되는 대나무는 문인 사대부의 이상을 표현하기에 알맞은 소재여서 예로부터 많이 그려졌습니다. 날카롭고 속도감이 있는 필선으로 힘차게 그렸던 조선 중기의 문인화가 이정(李霆1541~1622)의 묵죽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화가 개개인의 성품을 반영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양식으로 발달하였는데, 그 중 신위의 묵죽은 선비의 내면세계를 표출하듯 부드럽고 온화한 화풍을 보입니다.

이 작품은 전형적인 죽석도로 커다란 바위를 중심으로 자라는 몇 구루의 대나무를 묘사한 것입니다. 부드러운 담묵을 主調로 한 바위에는 몇 군데 농묵의 점으로 강조하였고, 대나무잎 역시 농묵과 담묵의 대조로 화면에 변화와 활기를 불어넣도록 하였습니다. 허ㅣ면 상단 오른쪽에 '紫霞山樵'라는 관서가 있으며 '紫霞' '蘇齋墨緣'의 朱文方印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단에는 "後學石雲朴箕陽鑒正"이라는 글과 '朴箕陽印'이라는 白文方印이 있습니다.

 

 

    

 

 

묵죽도도 (墨竹圖 )

朝鮮19世紀 / 申緯 1769 ~1845 / 紙本淡彩 /縱 160 × 橫 47 cm /高麗大學校博物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