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朝鮮後期)에는 선면(扇面)에 그림 그리기를 즐긴 양 정선(鄭敾 1676~1759)· 이인상(李麟祥 1710~1760)· 김홍도(金弘道 1745~1806이후) 등 여러 대가(大家)들이 부채에 그린 그림들이 다수 전해옵니다. 조선에 있어서 부채는 선비들의 지물(持物)로서 늘 휴대하고 다녔으니 이를 접선을 장식하는 선추 또한 다양합니다. 조선말기 화단에 이르면 부채그림만 모아 화첩(畵帖)이나 병풍을 꾸미기도 했으니 여러 종류의 부채들을 망라하여 그려진 부채에도 다양한 화풍을 그려 매우 화사한 형태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 그림은 강세황의 유일한 墨紙金泥山水圖입니다. 검은 종이 바탕에 금분으로 그려 별스러운 느낌을 주는데 화풍은 元代의 黃公望과 倪贊을 따르고 있습니다. 近景으로는 몇 그루의 나무와 정자 및 작은 어선을 그렸고, 中景으로는 강을 그렸습니다. 근경과 중경은 披麻皴으로 처리하여 부드러움을 더하고, 화면 우측의 정자는 비어 있어 예찬식의 禪氣가 퍼져 있는데, 저녁 낙조에 어부가 포구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먼 경치는 금분으로 발라 마치 저녁 햇빛에 반짝이듯 합니다. 안정된 구도와 필치를 통해 강세황의 문인화풍을 잘 들어내 주는 佳作입니다. 화면 우상부에는 7언시가 4행으로 적혀 있고 말미에는 '豹菴'이라 款署하고, '光之'의 陰刻方印이 있습니다.
강세황은 집안 선조들과 임금의 두터운 관계로 영·정조에게 상당한 배려를 받았습니다. 1763년 영조가 그가 서화를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심이 좋지 않아서 천한 기술이라고 업신여길 사람이 있을 터이니 다시는 그림 잘 그린다는 말을 하지 말라"라고 말하자, 이에 감격하여 이때부터 거의 20년 동안 붓을 놓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1773년 영조의 배려로 61세의 나이에 처음 벼슬길에 올랐으며, 1776년 기구과(耆耉科), 1778년(정조 2)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수석합격하여 관계(官階)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습니다. 그뒤 영릉참봉·사포별제(司圃別提)·병조참의·한성판윤 등을 두루 거쳤고, 1784년 천추부사(千秋副使)로 북경에 갔을 때 덕보(德保)·박명(博明)·김간(金簡) 등 당시 중국 지식인들과 접촉하면서 자신의 문화적인 면모와 긍지를 발휘했으며, 1790년 78세에 지중추(知中樞)가 되었습니다.
「 丹靑萬木秋風老 金翠千峯落照開 - 豹菴」
(붉고 푸른 오만 나무 갈바람에 시들고 석양빛 봉우리마다 황금빛이 피어나네. - 표암)
표암강세황필산수도(豹菴姜世晃筆金泥山水圖)
朝鮮18世紀 / 姜世晃 1713 ~1791 / 墨紙金泥 /縱 22.3 × 橫 56 cm /高麗大學校博物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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