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조선 역대 왕릉

「추존 왕릉」덕종(의경세자)敬陵·원종(정원군)章陵·진종(효장세자)永陵·장조(사도세자)隆陵·문조(효명세자)綏陵」

鄕香 2009. 7. 4. 09:58

《경릉(敬陵)》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 30-1 서오릉 내

덕종(德宗 追尊王) · 소혜왕후(昭惠王后)

 

경릉(敬陵)은 덕종(德宗,1438-1457)과 왕비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1437-1504)의 陵이다. 덕종(의경세자)은 조선 제 7대 임금 世祖의 맏아들로 태어나 세조가 단종을 겁박(劫迫)하여 왕위를 찬탈한 후 의경세자가 되었으나, 2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1457) 뒤에 그의 아들 成宗이 왕위에 오르면서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소혜왕후 한씨는 西原府院君 韓確의 따님으로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1455) 세자빈이 되어 月山大君과 成宗 형제를 낳으셨다.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추존하여 소혜왕후가 되셨다. 燕山君 10년(1504) 68세로 돌아가셨다. 특히 불경에 조예가 깊었으며, 부녀자의 예의범절에 관하여 쓴 內訓이라는 저술을 남기셨다. 

 

 

〈덕종대왕경릉·소혜왕후우강 표비 德宗大王敬陵·昭惠王后右岡 表碑〉 (앞면 글)

 

朝鮮國

德宗大王敬陵

昭惠王后祔右岡

 

〈비 앞글 풀이 글〉

조선국 덕종대왕 경릉, 소혜왕후를 오른쪽 언덕에 모심.

 

 

〈덕종대왕경릉·소혜왕후우강 표비 德宗大王敬陵·昭惠王后右岡 表碑〉 (뒷면 글)

德宗懷簡宣肅恭顯溫文 懿敬大王  皇明正統三年戊午九月十五日誕生乙丑初封桃源君景泰六年乙亥冊封  王世子天順元年丁丑九月二日昇遐十一月二十四日葬于高陽東蜂峴艮坐之原壽二十  諡懿敬  成宗卽位後成化七年辛卯追尊爲  王  皇朝賜諡懷簡

 

妃仁粹徽肅明懿昭惠王后韓氏  三月十二日誕生景泰六年乙亥冊封粹嬪   德宗追崇時尊爲  王妃弘治十七年甲子四月二十七日昇遐五月葬于  大王陵右岡癸坐之原  (王后誕降不書年只書月日而九月八日誤以 三月十二日書刻故勤依 璿源世系書以丁巳九月八日)  崇禎紀元後一百二十八年乙亥二月 日立 

 

〈덕종대왕경릉·소혜왕후우강 표비〉 (풀이 글)

덕종 회간 선숙공현온문의경대왕께서는 세종20년, 무오년 (1438, 명나라 정통3년) 9월15일에 탄생하시고 을축년(세종27년, 1445)에 처음 도원군에 봉해지셨고 1450년(문종 즉위년)에 한씨(소혜왕후)와 혼인하셨다. 세조1년, 을해년(단종3년, 1455, 경태 6년) 왕세자에 책봉되셨고, 정축년(세조3년, 1457, 천순 원년) 9월2일 세상을 떠나시어 그 해 11월24일에 고양 동쪽 봉현의 간좌(북동에서 남서방향) 언덕에 모셨다. 나이(壽限) 20세이시고 시호는 의경이시다.

아드님 성종이 왕위에 오르신 후 신묘년(성종2년, 1471, 성화 7년)에 왕으로 추존되시고 황조(명나라)에서 '회간'이라는 시호를 받으셨다. 

 

왕비 인수 휘숙명의 소혜왕후 한씨께서는 (세종19년,1437)丁巳년 3월12일에 탄생하셨고 1450년(문종 즉위년)에 당시 도원군이던 덕종과 혼인하셨다. 세조1년 (1455,경태 6년)을해년에 수빈에 책봉되시고, 예종(시동생)이 돌아가시자 (아들 성종이 왕위에 오른 후) 남편 의경세자가 왕(덕종)으로 추존되실 때 왕비(왕대비)로 책봉되셨다. 갑자년, 연산군10년(1504, 홍치17년) 4월27일 세상을 떠나서 (같은 해) 5월에 대왕릉 오른쪽 산줄기 계좌(북북동에서 남남서 방향) 언덕에 모셨다.

〔왕후의 탄생년도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다만 월 일만 쓰여 있는데 이 또한 원래 월 일인 9월8일이 아닌 3월12일로 쓰여 있다. 그러므로 '선원세계'를 근거로 하여 정사년(1437) 9 월8일로 다시 적는다.〕

영조 31년 을해년 (1755년, 명나라 숭정기원후128년)2월에 표석을 세우다. 

 

 

〈소혜왕후 / 昭惠王后〉 능침 정경.

 

 

경릉은 추존되신 덕종(德宗1438-1457, 의경세자)과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1437-1504)의 능이다. 덕종은 세조의 맏아들로 왕세자에 책봉되셨으나, 20세에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 세조가 의경세자(懿敬世子) 시호를 내렸다. 이후 둘째 아들 자을산군(乽山君)이 왕(성종)이 된 후 세자의 몸으로 세상을 떠난 형(의경세자)을 덕종으로 추존하였다.

소혜왕후 한씨는 세자빈에 책봉되셨으나 남편 의경세자(덕종)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세조는 수빈(粹嬪)의 시호를 내렸다. 그 후 둘째 아드님(성종)이 왕위에 오르신 후 인수대비(仁粹大妃)에 책봉되셨다. 일반적으로 왕릉은 정자각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 왕의 능, 오른쪽에 왕후의 능을 조성하는데, 이와 달리 경릉은 반대로 오른쪽에 덕종을 모셨다. 이는 아마도 세상을 떠날 때 신분의 차이 즉 덕종은 왕세자 신분으로 돌아가셨고, 소혜왕후는 대왕대비의 신분일 때 돌아가셨기에, 그런 까닭이겠다. 또한 신분의 차이로 인해 덕종의 능은 묘의 형태로 조성되었으나, 소혜왕후의 능은 왕릉의 형태로 조성 된 사실도 그러한 例이겠다. 

 

                      ↙ 인수대비의 능,                        의경세자(덕종)

2009년 6월 21일,  2023년 3월27일  - 鄕 -

 

 

《장릉章陵》 〈원종 (定逺君)〉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산141-1

장릉은 추존된 원종(定逺君 1580-1619)과 인헌왕후 구씨(仁獻王后 具氏 1578-1619)의 능이다. 원종은 조선 제 14대 왕 선조(宣祖)와 인빈 김씨(仁嬪 金氏) 사이에서 태어난 庶子로 셋째 아들이다. 선조 20년(1587) 정원군(定逺君)에 봉해 졌고 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신 공으로 호성공신에 이름을 올렸다. 광해군 11년(1619)에 나이 40세로 세상을 떠났다. 왕 광해군15년(1623) 정원군의 첫째 아들 능양군(인조)이 반정(쿠테타)으로 임금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를 강탈한 후 바로 자신의 정통성을 세우려고 이미 죽은 아비를 왕으로 추존하려고 설치다가 대신들의 반대로 대원군으로 올렸다가 10년 만에 원종으로 추존하였다. 조선시대 덕흥대원군, 정원대원군, 전계대원군, 흥선대원군 등이  있었지만 왕으로 추존된 건 정원대원군이 처음이다. 인조(능양군)는 반정으로 왕위를 강탈한 만큼 뒷배가 절실했기에 끈질기게 아비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존한 것이겠다.

 

인헌왕후 구씨(仁獻王后 具氏 1578-1619)는 능안부원군 구사맹의 딸로 선조 23년(1590) 정원군의 부인이 되어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에 봉해졌다 정원군과 사이에 3남 (능양군, 능원대군, 능창대군)을 낳았다. 1623년, 반정 수괴가 된 큰아들 능양군(인조)이 쿠테타를 일으켜 왕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 후 계운궁(啓運宮)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으로 높였으며, 1624년(인조4년) 세상을 떠났다. 이후 1626년 계운궁이던 구씨가 세상을 떠나자 김포 성산에 무덤을 만들고 육경원(毓慶園)이라 하였고, 이때 원래의 정원대원군 묘도 원으로 지위를 높여 흥경원(興慶園)이라 하였다. 1627년(인조 5년) 흥경원과 육경원을 합쳐 현재의 자리에 옮기고 흥경원이라 하였다. 1632년(인조10년) 인조(능양군)는 왕위를 찬탈한지 10년 만에 숙원이던 아비 정원대원군과 어미 연주부부인 구씨를 원종과 인헌왕후로 추존하고 따라서 흥경원은 장릉(章陵)이 되었다. 원에서 능으로 승격되면서 봉분에 호석이 둘려졌고 난간석은 없으나 문무인석 등 석물들을 세웠다. 

 

 

제향을 지내는 정자각과 비각과 능을 돌보는 수복의 거처인 수복방(守僕房)이 보인다. 

 

 

〈원종대왕장릉비각元宗大王章陵碑閣〉

비각은 능 주인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나 표석을 세워둔 곳이다. 

 

 

〈원종대왕장릉비문元宗大王章陵碑文〉 (앞면前面)

 

朝鮮國

元宗大王章陵 

仁獻王后祔左

 

〈비 앞글 풀이 글〉

조선국 원종대왕 장릉, 인헌왕후를 왼쪽에 모심

 

 

〈碑陰記〉 (뒷면 글)

 

元宗恭良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萬曆八年庚辰六月二十二日誕生己未十二月二十九日昇遐 庚申二月葬于楊州?塲里 天啓七年丁卯八月二十七日移葬于金浦郡後岡子之原壽四十 丁亥初封定逺君 仁祖卽位追封 大原君崇德五年壬申又追崇爲  王  皇朝賜諡恭良

妃敬懿貞靖仁獻王后具氏萬曆六年戊寅四月十七日誕生  天啓六年丙寅正月十四日昇遐 五月十八日葬與  大王陵同原 壽四十九 庚寅初封郡夫人  仁祖卽位進號府夫人 崇禎紀元後一百二十六年立 

 

〈비음기碑陰記〉 (뒷면 풀이 글)

원종공량경덕인헌정목장효대왕은 만력 8년(명나라 신종8년,1580년,선조13년) 경진년에 6월22일 태어나고 을미년(광해임금11년(1619) 12월29일 세상을 떠났다. 경신년(광해임금12년,1620) 2월 양주 ?장리(금곡리)에 장사지냈다. 천계7년(명나라 희종7년,1627)정묘년 8월27일 김포군관청 뒷산 언덕 남쪽 자리로 옮겨 장사지냈다.나이 40세이다. 정해년(1587,선조20년) 처음으로 정원군에 봉해지고 계해년(癸亥年1623) 능양군이 인조로 왕위를 차지하면서 대원군에 추봉되었다가 청나라 숭덕 5년(경진년1640,인조18년)에 또 왕으로 높였다. 중국 청나라 황제로부터 '공량'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비경의정정인원왕후구씨는 만력 6년(명나라 신종6년,1578,선조11년) 무인년 4월17일 태어나서 천계 6년(명나라 희종6년,1626)병인년 정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5월18일 원종과 같은 자리에 장사드렸다. 나이는 49세이다. 경인년(선조23년,1590년)에 처음으로 군부인(郡夫人)에 봉해졌고, 아들 능양군(인조)이 왕위를 차지하면서 부부인(府夫人)으로 높여졌다.  숭정기원후(명나라 의종1년) 126년(영조30년,1754,갑술년) 세우다. 

 

원종(정원군) 비석에는 초장지를 ?장리(?塲里)로 새겨져 있는데, 인터넷에 올라온 원종의 초장지는 금곡동으로 기술하고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육경원 비석 받침돌〉

인조의 어머니 連珠府夫人 具氏(추존 인헌왕후)가 인조4년(1626)에 승하하자 무덤의 이름을 육경원(毓慶園)이라 하고 이곳 김포에 예장하였다. 다음해 인조5년(1627)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추존 元宗)의 무덤 흥경원(興慶園)을 양주 곡천리 현 남양주 금곡동에서 육경원으로 옮겨와 두 원을 합하여 흥경원으로 하였다. 인조10년(1632)에 흥경원을 장릉으로 격상시키면서 종전에 있던 석물들 중 사용하지 않게된 일부를 능 좌측 언덕에 묻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육경원의 비석 바침돌이 지상으로 노출되어 (2007년)이 자리에 옮겨서 보관하고 있다. 

 

 

〈정자각丁字閣〉

祭享을 지내는 전각으로 제물을 진설陳設(차림)하고제례를 드리는 집이다.

위에서 보면 건물이 한자의  '丁' 字 모양과 같다하여 정자각이라 부른다. 정자각 동쪽과 서쪽에 오르는 층계가 있는데 이는 원래 제례의식이 동쪽으로 진입하여 서쪽으로 내려가는 동입서출(東入西出)로 진행됨에 따른 것이다.

 

 

〈원종대왕 · 인원왕후 장릉〉 (元宗大王 · 仁獻王后 章陵) 情景 

봉분에 호석을 둘렀고 난간석은 없다 

 

 

김포 지명 유래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형제가 길을 가다가 황금 두 덩어리를 얻어서 나누어 가지고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동생이 갑자기 형을 시기하는 마음이 일어나자 황금이 좋은 물건이 아니라 판단하여 강에 던졌다. 형이 그 이유를 묻고 자신 또한 황금을 강에 던졌다'는 이야기에 따라 투금포 즉, 금을 던진 포구라 한 데서 비롯돼 김포라 명명됐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김포는 강화도와 사이를 두고 흐르는 염화와 한강하구에 이르는 수많은 포구(浦口)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도 배제할 수 없겠다. 예전에는 김포하면 많은 포구와 넓은 평야가 떠올랐는 데, 1939년 일제강점기에 비행장이 건설되고 1949년 한미협정에 따라 김포비행장이 운영 됨에 따라 '비행장 하면 김포, 김포하면 비행장'이 터오르는 현실이 되었듯이 이곳 장릉에 탐방와서 몇 시간을 보내는 동안 시간마다 여러 종류와 비행기와 여러 항공사의 상징적 심벌이 그려진 비행기를 볼 수 있었다.

 

 

장릉 능침 측면

 

 

〈문·무인석 文·武人石〉

 

 

봉분에 호석(護石)이 둘려져 있고 난간석과 석양과 석호는 없다. 

 

 

곡장 뒤에서 바라본 능침 정경,

 

 

〈수복방守僕房〉

수릉관(守陵官 능을 지키는 관리) 또는 수복(守僕 : 능의 잡다한 일을 하던 일종의 관노비)이 거처하던 곳. 

 

 

〈재실齋室〉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제향을 준비하는 재실이다. 재실은 왕릉의 수호와 관리를 위하여 능참봉이 상주하던 곳으로 제례시에는 제관들이 머물면서 제향에 관련된 전반적인 준비를 하던 공간이다.  

능참봉의 집무실인 재실, 향과 축문을 보관하던 안향청(安香廳), 제기(祭器)를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와 그 외 부속 공간인 행랑(行廊) 등을 갖추었다.

 

2022년 10월26일 -鄕香-

 

《영릉(永陵)》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 4-1 공순영릉 내 

진종(眞宗1719-1728)은 영조와 정빈 이씨 사이의 아드님으로 1724년(영조 즉위년)에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지셨고 이듬해(1725) 왕세자로 책봉되셨다. 그러나 10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고 효장세자(孝章世子)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후에 이복동생 사도세자(莊祖)가 세상을 떠난 후 그 아드님 정조가 영조의 命으로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셨고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효장세자는 진종(眞宗)으로 추존되셨다. 대한제국 융희 2년(순종황제 2년, 1908년) 에 다시 황제로 추존되셨다.

효순황후 조씨(孝純皇后 趙氏1715-1751)께서는 풍릉부원군 조문명의 따님으로 영조3년(1727년) 왕세자빈이 되셨으나 남편 효장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 왕비가 되지 못하셨다. 이후 현빈(賢嬪)으로 불리시다가 37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정조 즉위 이후 효순왕후로 추존되셨고, 대한제국 융희 2년(순종황제 2년, 1908년) 에 다시 황후로 추존되셨다. 

 

 

영릉(永陵)은 처음에 효장세자묘로 조성되었으므로 병풍석, 난간석, 무인석 등이 생략된 간소한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왕(진종)과 황제로 추존될 때마다 표석을 새로 세웠기 때문에 영릉에는 3개의 표석이 남아 있는데, 첫 번째는 효장세자묘, 두 번째는 진종대왕 영릉, 세 번째는 진종소황제 영릉,의 표석이다.

위쪽 작은 비각은 효장세자비각, 아래 큰 비각은 진종대왕 표비와 진종소황제 표비가 세워져 있다. 

 

 

〈효장세자묘 표석 孝章世子墓 表石〉 (앞면 글)

 

朝鮮國

孝章世子墓

孝純賢嬪祔左

 

〈비 앞글 풀이 글〉

조선국 효장세자묘, 효순현빈을 왼쪽에 모심

 

 

〈효장세자묘 표석 孝章世子墓 表石〉 (뒷면 글)

孝章世子 崇禎紀元後九十二年己亥(肅宗四十五年)二月十五日誕生  乙巳冊封  戊申十一月十六日卒

己酉正月二十六日葬于坡州順陵左崗乙坐之原(外則卯坐)在東宮四年壽十歲

 

孝純賢嬪 趙氏 乙未十二月十四日誕生 丁未冊嬪 乙卯諡號賢嬪 辛未十一月十四日卒 壬申正月二十二日祔(內乙外卯)壽三十七

 

〈효장세자묘 표석 孝章世子墓 表石〉 (역문 譯文)

효장세자는 숭정기원후 92년(기해년 숙종45년, 1719) 2월15일에 탄생하시어 을사년(1725)에 세자로 책봉되셨다. 무신년(1728) 11월16일에 세상을 떠나 기유년(1729) 1월26일 파주 순릉(성종의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의 능) 왼쪽 산등성이 을좌(외형은 묘좌) 언덕에 모셨다. 동궁(세자)의 자리에 4년 계셨고 나이 10세이셨다. 

 

효순현빈 조씨는 을미년(숙종41년, 1715) 12월14일에 태어나시고 정미년(영조3년,1727)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셨고, 을묘년(영조 11년,1735)에 현빈(賢嬪)의 시호(왕이 내려 준 호칭)를 받으셨다. 신미년(영조 27년, 1751) 11월14일 세상을 떠나 임신년(영조28년,1752) 1월22일에 효장세자묘에 봉분을 달리하여 함께 모셨다.(내형은 을좌이고 외형은 묘좌) 나이 37세이셨다. 

 

 

〈진종대왕영릉 표석  眞宗大王永陵 表石〉 (앞면 글)

 

     朝 鮮 國

眞 宗 大 王 永 陵

孝 純 王 后 祔 左

 

〈비 앞글 풀이 글〉

조선국 진종대왕 영릉, 효순왕후를 왼쪽에 모심

 

 

〈진종대왕영릉 표석  眞宗大王永陵 表石〉 (뒷면 글)

眞宗溫良睿明哲文孝章大王 崇禎紀元後九十二年己亥二月十五日誕生 甲辰封敬義君 乙巳冊封王世子 戊申十一月十六日昇遐春秋十 贈諡孝章 己酉正月二十六日葬于坡州順陵左崗乙坐之原 甲申命小子爲嗣 丙申賜號承統世子 小子卽位 遵英廟遺敎追尊爲王 

妃 徽貞賢淑孝純王后 趙氏 乙未十二月十四日誕生 丁未冊封世子嬪 乙卯賜號賢嬪 辛未十一月十四日昇遐春秋三十七 壬申正月二十二日祔 贈諡孝純 丙申追尊爲王后  小子卽阼之九年乙巳 月 日 謹書幷篆

 

〈진종대왕영릉 표석  眞宗大王永陵 表石〉 (譯文 풀이 글)

진종 온량예명철문효장대왕은 숭정기원후 92년(기해년 1719)2월15일에 탄생하시어 갑진년(1724)에 경의군에 봉해 지셨고 이듬해 을사년(1725)에 왕세자로 책봉되셨다. 무신년(1728) 11월16일 나이 10세로 승하하여 효장의 시호를 올렸다. 기유년(1729) 1월26일에 파주 순릉(성종의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의 능) 왼쪽 산등성이 을좌 언덕에 모셨다. 갑신년(1764)에 소자(정조)는 (진종)후사로 명을 받았다. 병신년(1776)에 진종은 사호(왕이 내려준 호칭) 승통세자를 받으셨고, 소자(정조)가 즉위한 후 영묘(영조)의 남기신 글(遺敎)에 따라 왕으로 추존하였다.

왕비 휘정 현숙 효순왕후 조씨는 을미년(1715) 12월14일에 탄생하시어 정미년(1727)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시었고 을묘년(1735)에 현빈이라 사호(賜號:왕이 내려준 호칭)를 받으셨다. 신미년(1751) 11월14일 37세로 승하하여 임신년(1752) 1월22일 (효장세자와) 함께 모셨다. '효순'이라 시호를 올렸으며 병신년(1776)에 왕후로 추존하였다. 소자(정조)가 즉위한 후 9년 (을사년,1785)에 전액과 함께 삼가 글을 쓰다. 

 

 

〈진종소황제영릉 표석  眞宗昭皇帝永陵 表石〉 (앞면 글)

 

       大韓  

   眞宗昭皇帝永陵

   孝純昭皇后祔左

 

〈비 앞글 풀이 글〉

대한 진종소황제 영릉, 효순소황후를 왼쪽에 모심

 

 

〈진종소황제영릉 표석 음기  眞宗昭皇帝永陵 表石〉 陰記(뒷면 글)

眞宗 溫良睿明哲文孝章昭皇帝 肅宗己亥二月十五日誕生 景宗甲辰封敬義君 英祖乙巳冊封王世子 戊申十一月十六日昇遐 贈諡孝章 己酉正月二十六日葬于坡州順陵左崗乙坐之原 壽十 丙申賜號承統世子 正祖卽位 因英廟遺敎追尊爲王 隆熙二年戊申七月追尊爲昭皇帝

后 徽貞賢淑孝純昭皇后 趙氏 肅宗乙未十二月十四日誕生 丁未冊封世子嬪 乙卯賜號賢嬪 辛未十一月十四日昇遐 贈諡孝純 壬申正月二十二日葬同原 壽三十七  正祖卽位 追尊爲王后 隆熙二年戊申七月追尊爲昭皇后 

隆熙二年 月 日

 

〈진종소황제영릉 표석  眞宗昭皇帝永陵 表石〉 陰記 (뒷면 풀이 글) 

진종 온량예명철문효장소황제는 숙종 기해년(1719) 2월15일에 탄생하시여 경종 갑진년(1724)에 경의군에 봉해 지셨고 영조 을사년(1725)에 왕세자에 책봉되셨다. 무신년(1728) 11월16일에 세상을 떠나 효장의 시호를 올렸다. 기유년(1729) 1월26일에 파주 순릉(성종의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 왼쪽 산등성이 을좌 언덕에 장사지냈다. 나이는 10세이시다.

후 휘정 현숙 효순소황후 조씨는 숙종 을미년(1715) 12월14일에 탄생하여 정미년(1727)에 세자빈에 책봉되시고 을묘년(1735) 현빈의 시호를 받으셨다. 신미년(1751) 11월14일 돌아가셔서 효순 시호를 올려드리고, 임신년(1752) 1월22일 진종과 함께 모셨다. 나이는 37세이시다. 정조가 즉위한 후 왕후로 추존되셨고 융희2년(무신년, 1908) 7월에 소황후로 추존되셨다.  융희2년(순종2년,1908) 월 일.

 

 

진종소황제 · 효순소황후 능침과 정자각,

 

丁字閣은 祭享을 지내는 전각으로 제물을 진설陳設(차림)하고제례를 드리는 집이다.

위에서 보면 건물이 한자의  '丁' 字 모양과 같다하여 정자각이라 부른다. 정자각 동쪽과 서쪽에 오르는 층계가 있는데 이는 원래 제례의식이 동쪽으로 진입하여 서쪽으로 내려가는 동입서출(東入西出)로 진행됨에 따른 것이다.

 

2023년 3월17일  -鄕-

 

 

《융릉 / 隆陵》 경기도 화성시 태안면 안녕리 1-1 융건릉 내

영조38년 (1762년) 임오년에 장조(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나시자 현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에 무덤을 만들고 이름을 수은묘(垂恩墓)라 하였다. 정조 즉위 후에는 수은묘를 높여 영우원(永祐園)이라 하셨다. 정조13년(기유년, 1789) 정조께서는 아버지의 무덤을 현재의 자리인 화산(華山)으로 옮겨 새로 조성하고 이름을 현륭원(顯隆園)으로 바꾸셨다. 정조께서는 명을 내려 현륭원을 특별히 격을 높여 조성하여 봉분에는 모란과 연꽃을 조각한 병풍석을 두르고 문·무인석도 설치하셨다. 순조15년(을해년,1815) 헌경황후가 세상을 떠나시자 이듬해 현륭원에 합장하셨고 광무3년(기해년, 1899) 원을 능으로 높여 지금의 융릉이 되었다. 

 

 

〈정자각丁字閣〉

祭享을 지내는 전각으로 제물을 진설陳設(차림)하고제례를 드리는 집이다.

위에서 보면 건물이 한자의  '丁' 字 모양과 같다하여 정자각이라 부른다. 정자각 동쪽과 서쪽에 오르는 층계가 있는데 이는 원래 제례의식이 동쪽으로 진입하여 서쪽으로 내려가는 동입서출(東入西出)로 진행됨에 따른 것이다.

 

 

정조의 아버지(사도세자) 장조(壯祖1735-1762)는 영조(英祖)와 영빈 이씨의 아드님으로 영조11년(을묘년,1735)에 1월20일에 탄생하셨다. 그 이듬해 영조12년 (병진년, 1736) 왕세자로 책봉되셨고 15세 때인 영조25년(기사년,1749)부터 영조를 대신해 정사를 돌보셨다. 그러나 아버지 영조와의 불화로 병을 얻었고, 노론 세력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등 문제가 거듭된 끝에 영조 38년(임오년,1762)왕세자의 신분으로 폐위되어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나셨다. 그 후 영조는 아들의 왕세자 신분을 회복시켜 사도세자(思悼世子)라는 시호(諡號)를 내리셨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장헌세자(莊獻世子)라는 칭호를 올리셨으며, 대한제국 선포 후 광무3년(고종황제, 1899) 장종대왕(莊宗大王) 으로 추존되셨다가 곧이어 다시 황제로 추존되어 묘호를 장조라 하였다.

 

 

헌경황후 홍씨(獻敬皇后 洪氏 1735-1815)는 영풍부원군 홍봉한의 따님으로 영조20년(1744)왕세자빈에 책봉되셨다. 남편인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난 후 혜빈(惠嬪)에 봉해지셨고,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시자 혜경궁(惠慶宮) 칭호를 받으셨다. 남편(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회고록(한중록)을 직접 쓰셨다.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 헌경왕후로 추존되셨다가 곧이어 다시 황후로 추존되셨다.

 

 

측면으로 바라본 석물들의 정경,

 

 

봉분은 병풍석을 둘렸고 난간석은 없다.

 

 

〈장조 융릉 표비각/莊祖 隆陵 表碑閣〉

비각은 능 주인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나 표석을 세워둔 곳이다. 

 

 

〈현륭원 표석/顯隆園 表石〉

현륭원 표석은 정조13년(1789) 양주 배봉산에 있던 영우원을 지금의 자리로 옮긴 후 원의 이름을 현륭원으로 바꾸고 세운 표석이다.

 

〈현륭원 표비석/顯隆園 表碑石〉 (앞글)

 

조선국                             朝鮮國

사도장헌세자 현륭원   思悼壯獻世子 顯隆園

 

〈비 앞글 풀이 글〉

조선국 사도장헌세자 현륭원에 모심

 

 

〈현륭원 표비석 음기/顯隆園 表碑石 陰記〉 (뒷면글)

思悼綏德敦慶弘仁景祉莊獻世子崇禎紀元後一百八年乙卯正月二十一日誕生 初封元子丙辰冊封王世子己巳受命代理壬午閏五月二十一日薨逝壽 二十八 贈諡思悼七月二十三日葬于楊州南中梁浦拜峯山甲坐之原 小子嗣服之年丙申追上諡莊獻園號永祐癸卯追上 尊號綏德敦慶 甲辰加上尊號弘仁景祉己酉十月初七日遷奉于水原華山癸坐之原改 園號顯隆  

 

〈현륭원 표비문 /顯隆園 表碑文〉 (역문/譯文)

사도 수덕돈경 홍인경지 장헌세자는 숭정기원후 108년(영조11년, 1735) 을묘년 1월21일에 태어나셨다. 처음 원자에 봉해지셨고, 이듬해(영조12년,1736)인 병진년에 왕세자로 잭봉되셨으며, 영조25년 (기사년,1749)에 대리청정의 명을 받으셨고 임오년(1762) 윤 5월21일에 훙서하셨다. 나이는 28세이셨다. 영조는 시호를 추증하여 사도세자라 하였고, 같은 해(임오년, 1762) 7월23일에 양주 남중량포 배봉산(현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배봉산) 갑좌(동북동) 언덕에 장사지냈다. 소자(정조)가 왕위에 오른 해(병신, 1776)에 추존하여 시호를 장헌세자, 원호를 영우원이라 올렸고, 계묘년(1783)에 존호를 '수덕돈경' 이라 올렸으며, 갑진년(1784)에 존호를 '홍인경지'라 올렸다. 기유년(1789) 10월7일에 수원 화산의 계좌(북북동) 언덕으로 무덤을 옮기고 원호를 현륭원으로 고쳤다. 

 

 

〈륭릉 표석/隆陵 表石〉

융륭 표석은 광무3년(1899) 장헌세자를 장조의황제로 추존한 후 이듬해에 현륭원 표석 옆에 새로 세운 표석이다. 

 

〈융릉 표비문/隆陵 表碑文〉 (앞면 글)

 

대한                         大韓   

장조의황제 융릉      莊祖懿皇帝 隆陵

헌경의황후 부좌      獻敬懿皇后 祔左

 

〈비 앞글 풀이 글〉

대한 장조의황제 융릉, 현경의황후를 왼쪽에 모심.

 

 

〈융릉 표비문/隆陵 表碑文〉 (뒷면 글)

莊祖思悼綏德敦慶弘仁景祉章倫隆範基命彰休贊元憲誠啓祥顯熙神文桓武 莊獻廣孝懿皇帝  表隨之石  正祖宣皇帝所親書也乙卯追上 尊號章倫隆範基命彰休 哲宗乙卯追上 尊號贊元憲誠啓祥顯熙光武三年己亥十月追尊位 王上 諡神文桓武莊獻廣孝 上 廟號 莊宗封 陵爲 隆陵同年十一月追尊恭上 諡號曰 懿皇帝 廟號曰 莊祖 

后孝康慈禧貞宣徽穆裕靖仁哲啓聖獻敬懿皇后洪氏開國三百四十四年乙卯六月十八日 誕生甲子冊封 世子嬪壬午賜號 惠嬪 正祖卽位進宮號惠慶 純祖乙亥十二月十五日 昇遐壽八十一丙子三月三日葬于水原 顯隆園同封而祔左 哲宗乙卯追上 尊號裕靖 光武三年己亥十月追尊爲 王后上 徽號仁哲啓聖上 諡號獻敬同年十一月追尊恭上 諡號曰 懿皇后今又立石于原表之次敬書前面與追記庸伸小子之微忱焉   光武四年 月 日

 

〈융릉 표비문/隆陵 表碑文〉 (표비뒷글 풀이 글 / 陰記 譯文)

장조 사도 수덕돈경 홍인경지 장륜융범기명창휴찬원헌성계상현희 신문환무장헌광효의황제의 (원래)표석은 정조선황제께서 직접 쓰신 것이다. 을묘년(정조19년, 1795)에 존호를 '장륜융범기명창휴'라 올렸고, 철종 을묘년(철종6년,1855)에 존호를 '찬원헌성계상현희'라 올렸다. 광무3년(기해년, 1899)10월에 왕으로 추존하여 시호를 '신무환무장헌광효', 묘호를 '장종' 능호를 '융릉'이라 올렸다. 같은 해 11월에 추존하여 공손히 시호를 '의황제', 묘호를 '장조'라 올렸다. 

후 효강 자희 전선 휘목 유정 인철계성 헌경의황후 홍씨는 개국 344년(을묘년,1735) 6월18일에 탄생하시여 갑자년(1744)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셨고 임오년(1762)에 '혜빈' 칭호를 받으셨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시자 궁호를 '혜경'으로 올리셨고, 순조 을해년(1815) 12월15일에 돌아가셨다. 나이 81세이시다. 병자년(1816) 3월3일에 수원 현륭원 동봉(합장)으로 왼쪽에 장사지냈다. 철종 을묘년(1855)에 존호를 '유정'이라 올렸고, 광무 3년(기해년, 1899) 10월에 왕후라 추존하여 휘호를 '인철계성', 시호를 현경왕후로 올렸다. 같은 해 11월에 추존하여 공손히 시호를 의황후라 올렸다. 이번에 또 원래의 표석(정조 13년, 1789 세움) 다음으로 표석을 세워 전면과 추기(추가한 내용)를 공경히 써서 소자(고종)의 작은 정성을 표한다. 광무 4년(1900) 월 일

 

 

〈수복방守僕房〉

수릉관(守陵官 능을 지키는 관리) 또는 수복(守僕 : 능의 잡다한 일을 하던 일종의 관노비)이 거처하던 곳. 

 

 

〈곤신지/坤申池〉

 

 

곤신지는 정조13년(1789) 현륭원(융릉)이 현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긴 후 이듬해에 조성한 원형의 연못이다. 조선 왕릉 중 드물게 연못을 원형으로 조성한 곳으로 '용의 여의주'의 형상이라고 한다. 이 연못은 남서 방향으로, 이 자리는 융릉의 생방(生方: 수자리용어로, 능·묘자리에서 처음 보이는 물을 지칭함.)이기 때문에 연못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금천교를 앞에 두고 담은 壯祖 隆陵 정경,

 

2023년5월17일   - 鄕香 -

 

 

《수릉 / 綏陵》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 2-1 동구릉 내 

수릉(綏陵) 은 조선 제 23대 순조(純祖)의 맏아들인 文祖와 그 妃 神貞皇后 趙氏의 릉이다. 文祖는 순조27년(1809)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나 순조12년(1812) 왕세자가 되셨다. 순조27년(1827)순조의 令으로 19세에 왕권을 대행하였으나 3년 뒤에 22세로 창덕궁 희정당에서 돌아가셨다. 이 후 아드님 헌종이 왕위에 오른 후 익종(翼宗)이라 추존하셨다. 光武3년(1899)에 다시 문조황제(文祖皇帝)로 추존되셨다. 

신정황후 조씨(神貞皇后 趙氏 1808-1890)는 豊恩府原君 조만영(趙萬永)의 따님으로 순조19년(1819)12세에 왕세자빈이 되셨고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른 후 왕대비가 되셨다. 1863년 철종이 자식없이 세상을 떠나자 고종을 양자로 입양하여 왕위에 올린 후 수렴청정을 하셨다. 고종27년(1890)에 83세로 경복궁 흥복전에서 돌아가셨다. 光武 3년(1899)에 신정황후로 추존되셨다. 

처음 효명세자의 무덤인 연경묘(延慶墓)는 현재의 의릉(경종) 근처에 조성되었고 

 

 

〈추존 익종(현종 父)대왕 수릉 표비〉 (앞글)

 

    조선국                    朝鮮國

익종대왕수릉         益宗大王綏陵

신정왕후부좌         神貞王后祔坐 

 

〈비 앞글 풀이 글〉

조선국 익종대왕 수릉, 신정왕후를 왼쪽에 모심.

 

〈추존 익종(현종 父)대왕 수릉 표비〉 (뒷글)

益宗 體元贊化錫極定明 聖憲英哲睿誠淵敬 隆德純功篤休弘慶 洪運盛烈宣光濬祥 堯欽舜恭禹勤湯正 啓天建統神勳肅模 乾大坤厚廣業永祚 莊義彰倫行健配寧 基泰垂裕熙範昌禧 立經亨道成獻昭章 敦文顯武仁懿孝明大王 崇禎紀元後一百八十二年己巳八月九日 誕生壬申冊封 王世子丁丑入學丁亥 聽政庚寅五月六日昇遐八月四日 葬于楊州天藏山酉坐原在 東宮十九年春秋二十二 賜諡孝明 廟號文祜 墓曰延慶甲午 憲宗卽位追尊位 王上 諡敦文顯武仁懿上 廟號 翼宗封 陵位綬陵丙午閏五月二十日遷封于楊州龍馬峯下癸坐原戊申追上 尊號體元贊化錫極定明 哲宗癸丑追上 尊號聖憲英哲睿誠淵敬乙卯八月二十六日 遷奉于 健元陵左岡壬坐之原小子嗣服之三年丙寅追上 尊號隆德純功篤休弘慶丁卯追上 尊號洪運盛烈宣光濬祥己巳追上 尊號追上 尊號堯欽舜恭禹勤湯正乙亥定  世室追上 尊號啓天建統神勳肅模丁丑追上 尊號乾大坤厚廣業永祚己卯追上 尊號莊義彰倫行健配寧癸米追上 尊號基泰垂裕熙範昌禧丁亥追上 尊號立經亨道成獻昭章

妃孝裕獻聖宣敬正仁慈惠弘德純化文光元成淑烈明粹協天隆穆壽寧禧康顯定徽安欽倫洪慶泰運昌福熙祥景勳哲範神貞王后趙氏 崇禎記元後一百八十一年戊辰十二月六日 誕生己卯冊封 世子嬪甲午 憲宗卽位尊位 王大妃 哲宗丁巳進號 大王大妃癸亥小子嗣服 垂簾同聽政丙寅 特命撤簾庚寅四月十七日昇遐八月三十日 祔葬于 綏陵而同封壽八十三嗚呼前面與陰記小子泣血敬撰幷書    崇禎記元後二百六十三年 月 日  

 

〈추존 익종(현종 父)대왕 수릉 표비〉 (뒷글 풀이 글)

익종체원찬화석극정명 성헌영철예성연경 융덕순공독휴홍경 홍운성렬선광준상 요흠순공우근탕정 계천건통신훈숙모 건대곤후광업영조 장의창윤행건배령 기태수유희범창희 입경형도성헌소장 돈문현무인의효명대왕은 기사년(1809,숭정기원후182년) 8월9일에 탄생하여 임신년(순조12년,1812)에 왕세자로 책봉되셨다. 정축년(순조17년,1817)에 입학한 후 정해년(순조27년, 1827)에 부왕(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하시다가 경인년(순조30년,1830) 5월6일에 승하하여 같은 해 8월4일 양주(현 서울) 천장산 서쪽 방향(酉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왕세자로 계신지 19년 나이22세, 시호는 '효명', 사당 이름은 '문호', 묘의 이름은 '영경'이라 하였다.

갑오년(1834)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으로 추존하여 시호를 '돈문현무인의(효명)', 묘호를 '익종', 능의 이름을 '수릉'이라고 올렸다. 병오년(1846) 윤5월20일 양주 용마봉(현 서울) 아래 계좌(북북동에서 남남서 방향)언덕으로 능을 옮겼고, 무신년(헌종14년,1848)에 존호를 '체원찬화석극정명'으로 올렸다. 철종 계축년(1853)에 존호를 '성헌영철예성연경'으로 올렸고, 을묘년(1855) 8월26일에 건원릉 왼쪽 산기슭의 임좌(북북서에서 남남동 방향) 언덕으로 능을 옮겼다. 소자(고종)가 왕위에 오른 후 3년 병인년(1866)에 존호를 '융덕순공독휴홍경'을, 정묘년(1867)에 '홍운성렬선광준상'을, 기사년(1869) '요흠순공우근탕정'으로 올렸다. 을해년(1875)에 세실(世室:종묘에 신주를 모시는 방법으로 정전에 있던 신주를 영녕전으로 모시지 않고 계속해서 신주를 정전에 모실 수 있음 )로 정한 후 존호를 '계천건통신훈숙모'로, 정축년(1877) '건대곤후광업영조'를, 기묘년(1879)에 '장의창윤행건배령'을, 계미년(1883)에 ' 기태수유희범창희'를, 경해년(1887)에 '입경형도성헌소장'으로 올렸다.

왕비 효유헌성선경정인자혜홍덕순화문광원성숙렬명수협천융목수령희강현정의안흠윤홍경태운창복희상경훈철범신정왕후 조씨는 무진년(1808, 숭정 기원후 181년)12월6일에 탄생하여 기묘년(1819)에 세자빈에 책봉되셨다. 갑오년(1834)에 헌종이 왕위에 오르시자 왕대비에 오르셨고, 철종 정사년(1857)에 대왕대비에 오르셨다. 계해년(1863) 소자(고종)가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하시다가 병인년(1866)에 특명으로 철염하셨다. 경인년(1890) 4월17일에 승하하시어 같은 해 8월30일에 수릉에 합장으로 장사지냈다. 나이는83세이셨다. 오호라! 표석의 앞면과 음기(뒷면 글)를 소자(고종)가 피눈물을 흘리며 공경히 지은 후 아울러 쓰다.

1890년 (숭정 기원후 263년) 월 일  

 

 

〈추존 문조익황제(현종 父)수릉 표비〉 (앞글) 

 

    대한                      大韓  

문조익황제수릉    文祖翼皇帝綏陵

신정익황후부우    神貞翼皇后祔右

 

〈비문 앞글 풀이 글〉

 문조익황제 수릉, 신정익황후를 오른쪽에 모심.

 

〈추존 문조익황제(현종 父)수릉 표비〉 (뒷글) 

 

文祖體元贊化錫極定明 聖憲英哲睿誠淵敬 隆德純功篤休弘慶 洪運盛烈宣光濬祥 堯欽舜恭禹勤湯正 啓天建統神勳肅模 乾大坤厚廣業永祚 莊義彰倫行健配寧 基泰垂裕熙範昌禧 立經亨道成獻昭章 致中達和繼曆協紀剛粹景穆峻惠衍祉宏猷愼徽綏緖佑福敦文顯武仁懿孝明翼皇帝 小子嗣服之二十七年庚寅追上 尊號致中達和繼曆協紀壬辰追上 尊號剛粹景穆峻惠衍祉光武三年己亥十一月追存恭上 諡號曰 翼皇帝 廟號曰 文祖壬寅追上 尊號宏猷愼徽綏緖佑福

 

后孝裕憲聖宣敬正仁慈惠弘德純化文光元成肅烈明粹協天隆穆壽寧禧康顯定徽安欽倫洪慶泰運昌福熙祥懿模睿憲敦章啓祉景勳哲範神貞翼皇后趙氏 小子嗣服之二十七年庚寅追上 尊號懿模壬辰追上 尊號睿憲敦章光武三年己亥十一月追尊恭上 諡號曰 翼皇后壬寅追上 尊號啓祉表隧之石朕小子敬撰幷書而今又立石于原表之次敬書前面與追記庸伸小子之微忱焉  光武六年 月 日

 

「풀이 글」

문조체원찬화석극정명 성헌영철예성연경 융덕순공독휴홍경 홍운성렬선광준상 요흠순공우근탕정 계천건통신훈숙모 건대곤후광업영조 장의창윤행건배녕 기태수유희범창희 입경형도성헌소장 치중달화계역협기 강수경목준혜연지 굉유신휘수서우복 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는 소자(고종)가 왕위에 오른 후 27년(경인년,1890)에 존호를 '치중달화계역협기', 임진년에 '강수경목준혜연지'로 올렸다. 광무 3년(기해년,1899) 11월에 삼가 시호를 익황제, 묘호를 '문조'로 추존하였고 임인년(1902)에 존호를 '굉유신휘수서우복'으로 올렸다.

 

황후효유헌성선경정인자혜홍덕순화문광원성숙렬명수협천융목수녕희강현정휘안흠륜홍경태운창복희상 의모 예헌 돈장 계지경훈철범 신정익황후 조씨는 소자(고종)가 왕위에 오른 후 27년(경인년,1890)에 존호를 '의모', 임진년(1892)에 '예헌 돈장'으로 올렸다. 광무 3년(기해년,1899) 11월에 삼가 시호를 '익황후'로 추존하였고, 임인년(1902)에 존호를 '계지'로 올렸다. 표수지석(표석)은 짐(황제를 지칭)인 소자(고종)가 공경히 지은후 아울러 썼다. 또 원래의 표석에 이어서 비석을 세우고 공경히 전면(앞면)의 글과 추가된 내용을 써 소자(고종)의 작은 정성을 더한다.     광무 6년(1902) 월 일  

 

 

〈추존 문조익황제(현종 父)수릉 표비각〉

비각은 능 주인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나 표석을 세워둔 곳이다. 

 

 

〈문조익황제 · 신정익황후 수릉 합장 봉분   文祖翼皇帝 · 神貞翼皇后 綏陵 合葬 封墳

 

 

곡장(曲墻) 뒤에서 바라본 문조익황제 · 신정익황후 수릉 합장 봉분

 

수릉 정경,(綏陵 情景)  경기 구리시 동구릉 내  

 

2009년 6월28일과 2023년 3월17일에   - 鄕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