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조선 역대 왕릉

조선국 제26대 고종, 명성황후 민씨(홍릉)/高宗, 明成皇后 閔氏(洪陵 )

鄕香 2009. 7. 4. 09:55

   《고종황제·명성황후 민씨 / 홍릉》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 홍유릉 내

 

홍릉은 조선 제26대 고종(高宗)과 황후인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1851-1895)를 합장한 릉이다. 高宗은 哲宗 3년(1852)에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셨다. 즉위 후 10년간은 흥선대원군이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셨다. 고종 10년(1873), 직접 정치를 하게 된 이후 문호를 개방하여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셨다. 그러나 그 정책은 동시에 외세의 간섭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이 후 일본의 강요로 순종에게 황제 위를 물려주었고, 1919년 1월 21일 67세로 덕수궁 함녕전에서 돌아가셨다. 명성황후 민씨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 의 따님으로 고종 3년(1866) 왕비가 되셨고, 고종 10년(1873) 고종의 친정의 계기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으나, 고종 32년(1895)친 러 정책에 불만을 품은 일본의 자객에 의해 피살되셨다.(乙未事變)

 

금천교 앞에서 바라본 홍릉 全景으로 앞에 금천교가 보이고 그 좌측에 수라간이 보인다.  중앙 좌측 건물은 재실이며, 다시 중앙  우측으로 홍살문이 보이고 우측 끝에 수복방이 보인다. 

 

금천교 앞에서 바라본 제실과 그 우측 홍릉 情景,

 

 

홍살문 앞에서 바라본 홍릉의 정경으로 왕릉과 황제릉은 제향(祭享)을 올리는 제향각의 구조가 다르고, 석물의 종류와 배치가 다르다. 

 

 

홍살문을 들어서면 통칭 參道로 불리는 香道와 御道가 寢殿까지 일직선으로 놓여 있고 참도 좌우로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2009년 7월2일촬영 사진)

 

침전(寢殿)

조선 제26대 고종황제의 신위를 모신 제전이다. 조선 역대 왕릉의 '丁 '字 모양의 丁字閣과 다르게 건물의 형식과 규모가 중국 황제 릉의 例를 따른 듯 一字形으로 基壇위에 날아오를 듯이 날렵한 팔작지붕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을 지었으며, 그 앞에 참도 양측에는 석물을 도열하듯 문인석, 무인석.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모양의 석물을 홍살문에 이르기까지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다. 조선 역대 왕릉의 모습과 다른 모습이다. 

 

 

침전(寢殿) 내부 정경,

 

 

침전 뒤에서 바라본 능침 모습이다. 둔덕은 마치  경주 신라 왕릉을 보는 느낌이다. 

 

 

신라 왕릉 같은 둔덕 정수리에 위치한 능침에는 삼면의 곡장 안에 12각으로 돌린 병풍석을 두른 봉분을 감아 돌린 12각의 난간석이 둘려져 있고 그 앞에 혼유석과 장명등 그리고 한 쌍의 망주석이 배치되어 있다.( 2023년4월17일 촬영)

 

 

능침에는 곡장 안에 봉분을 감싼 병풍석이 둘려져 있고 난간석을 돌렸으며 혼유석, 망주석 장명등이 있을 뿐이다. 왕릉과 다르게 문인석, 무인석, 석호, 석양 등은 모두 능침 아래 침전 앞에 배치되어 있다.

병풍석 면석에는 국화무늬가 새겨져 있다.(2009년7월2일 촬영)

 

 

능침 좌측  언덕 아래에 제정(祭井)이 있다. 

 

 

〈제정祭井〉

산릉제례에 사용할 물을 긷는 우물이다. 

 

 

〈고종황제 홍릉 표비각 高宗皇帝 洪陵 表碑閣〉

 

 

〈고종황제 홍릉 표비 高宗皇帝 洪陵 表碑〉 (앞면 글)

 

대한                        大 韓

고종태황제홍릉      高宗太皇帝洪陵 

명성태황후부좌      明成太皇后祔左

 

 

〈고종황제 홍릉 표비 高宗皇帝 洪陵 表碑〉 (후면)

아, 이 무슨 까닭인가?

황제의 비석에 마땅히 있어야할 음기(陰記)가 없다.

비후면 좌측에 한 줄 縱으로 (▥▥▥▥▥▥▥    ▥▥)괄호 안 모습처럼 내리 7개-- 2개를 이어지듯 깊고 매끄럽게 갈아낸 흔적이 있을 뿐 단 한 글자도 없다. 몇 글자나마 새겼던 것을 어떤 까닭으로 왜? 갈아버렸을까! 조선조 역대 왕릉의 표비를 빠짐없이 보았지만, 陰記 없는 例는 처음이다. 고종황제는 안개처럼 왔다가 안개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 황제이셨나! 아, 치욕의 日帝 36년!

 

 

새겼던 글자를 기계적으로 갈아낸 흔적, 옆으로 흔적을 보면 깊이가 1.5cm 정도로 깊다. 

 

침전(寢殿) 돌대(基壇)에서 내려다본 참도와 그 좌우에 시립해 있는 문·무관 石像과 동물들의 石像 

 

 

〈지당 地塘〉 

홍릉 조성할 당시 옛 모습 그대로인 이 시설은 배수를 위해 침전 앞에 지당을 조성하고 큰 비가 내릴 때에 빗물이 지당에 집수集水되어 아래 연지蓮池로 배출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단부에 연지와 연결된 배수구로 추정되는 구조물이 확인됩니다. 

 

 

되돌아 가는 길에 祭官들이 능을 찾아 왔을 때 절을 하는 판위版位 앞에서 바라본 정경으로 홍살문 뒤로 수복방이 보이고 정면 수림 사이로 홍릉 연지 가운데 둥근 섬이 보인다. 

 

〈홍릉 재실 洪陵齋室〉

이 건물은 대한제국의 고종황제高宗皇帝와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의 제향을 준비하는 곳이다. 재실은 왕릉의 수호와 관리를 위하여 陵參奉 등이 상주하던 곳이며 제례 시에는 제관들이 머물면서 제사에 관련한 모든 준비를 하던 곤간이다. 능참봉의 집무실인 재실,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安香廳, 祭器를 보관하는 祭器庫,제물을 준비하는 典祀廳과 그 외 부속 공간인 行廊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라간水剌間〉

王陵祭禮 올릴 때 제례음식을 데우거나 준비하던 곳.

 

 

〈수복방守僕房〉

수복방은 능에서 화재 또는부정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키는 수릉관(守陵官 능을 지키는 관리) 또는 수복(守僕 청소 등 능의 잡다한雜事일을 맡아 보던 일종의 관노비)이 거처하던 곳. 

 

 

〈홍릉 연지〉

고종황제께서 홍릉을 새로 조성할 때, 작은 연못을 연지로 크게 확장하여 공사한 것으로, 조선 시대 왕릉은 일반적으로 方形蓮池인 것에 비해서이 연지는 圓形蓮池로 조성한 것이 특징이다. 

 

 

동그란 연못 안에 동그란 섬 하나,  ◎ 이건 무슨 의미였을가?

 

2023년4월17일  -鄕香-

 

 

 

 

《高宗 皇帝의 國葬》

 

조선 왕조의 國葬은 임시기구인 都監의 주도 아래 昇遐하신 후 발인을 거쳐 왕의 관(梓宮)을 왕릉에 안치하고, 신주神主를 宗廟에 모심으로 끝난다. 약 70단계에 달하는 절차를 대략 3년에 걸쳐 진행하였다.

 

그러나 고종 황제의 장례는 조선총독부가 임시로 설치한 장의괘(葬儀掛)가 주도하였고, 대부분의 절차가 축소 변형되었으며, 장례 기간도 대폭 단축되었다. 또한 조선 국왕의 국장이 아닌 일본 친왕(親王)의 국장을 기본으로 하고 이에 조선의 관습을 더한다는 원칙으로 진행되었기에 일본 신도(神道)식 의례가 적용되었다. 

고종 황제의 국장은 500년 조선 왕조의 종말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기에 국내외의 큰 관심사가 되었다. 발인을 보기위해 상경한 지방민이 40만명에 달했으며, 국장 기간 내내 관련 기사가 끊임없이 보도되었고 이는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19년 1월21일 고종황제 승하 이후, 조선 각지에서 소복하고 덕수궁으로 몰려든 백성들과 대한문 앞에서 조문하며 절하고 통곡하는 백성들.. 참으로 일제치하의 가슴 아픈 치욕의 36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 비극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슬픈 역사를 다시없도록 너나없이 일치단결하여 투철한 국가안보의식으로 더욱 국력을 키우고 유사시 임전무퇴의 강력한 최강의 軍力을 갖춰야 합니다. 

 

小輿가 대한문을 나서 훈련원 식장으로 향하는 정경,

 

 竹杖 짚고 부축 받으며 장막을 나서는 순종 황제,

 

일본식 의식인 國葬式이 국장의 중심이 되면서 대여 행렬은 훈련원(남산 자락과 동대문 사이 을지로 5가 인근 )에 설치된 國葬式場으로 향한다.

 

전통 국장(國葬) 행렬에 쓰이는 제구(祭具)인 죽안마(竹鞍馬) 행렬.

 

高宗皇帝 대여大輿가 홍릉 침전 앞에 도착한 모습이다.

 

고종 황제의 용체를 모신 소여가 홍릉에 오르는 모습이다. 이때 청량리에 있던 홍릉(명성황후)을 남양주시 금곡으로 옮겨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함께 모셨다. 

2023년 5월1일  -鄕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