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공주 · 양효공 묘 (貞懿公主 · 良孝公墓》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63-1에 위치하는 이 묘는 世宗大王의 둘째딸 정의공주(貞懿公主 : ?~ 1477)와 夫君 양효공 안맹담(良孝公 安孟聃 : 1415 ~1462)를 합장한 곳이다. 이 묘역의 봉분은 쌍분이고 신도비, 묘표 2기, 상석 2기, 문인석 2쌍 3단 계체석 등의 석물이 남아 있다. 양호공의 본관은 竹山으로 함길도 도관찰출척사 안망지(安望之)의 아드님이시다. 1428년(세종10년)에 14세의 나이로 세종의 둘째 따님 정의공주와 결혼하였는데 부부의 금슬이 매우 좋았다고 전한다. 세종은 그에게 한강 가운데 있는 저자도(楮子島)와 낙천정(樂天亭)을 하사하셨다. 그는 초서를 잘 써서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고 음악과 의학에도 통달하셨다. 묘역의 묘표 2기는 쌍분 앞에 있어 정의공주가 왼쪽에 합장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466년(세조 12) 묘소 동남쪽 아래에 신도비를 세웠는데, 정인지(鄭麟趾)가 비문을 지었고, 안맹담의 4남 안빈세(安貧世)가 비문과 전액의 글씨를 쓰셨다. 碑는 이수(蛦首), 비신(碑身), 귀부(龜趺)로 되어 있다. (서울지방문화재 제50호)
《정인지가 비문을 지은 신도비》
비문은 전서로 쓴 양효안공묘비(良孝安公墓碑)라는 머릿글만 보인다.
정의공주 묘
양효공 안맹담의 묘
두 분 쌍분을 보니 생전에 금슬 좋으셨다는 듯이 나란히 소담하고 다정스러운 모습이다.
《대빈묘(大嬪墓)》
서오릉내에 위치하는 대빈묘는 조선 제19대 숙종(肅宗)의 후궁인 희빈(禧嬪)장씨(張氏, ?-1701)의 묘이다. 숙종은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는데 숙종 14년(1688)에 궁녀 장소의(張昭儀)에게서 왕자 윤[昀, 경종(景宗)]을 얻으셨다. 이듬해 윤을 세자로 책봉하고 장소의에게 희빈(정일품)이라는 품계를 내리셨다. 그 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가 폐위되셨고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되셨다. 그러나 5년 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누명을 벗은 인현왕후가 왕비로 복위되면서 다시 희빈이 되셨다. 이후 인현왕후를 무고한 죄목으로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리셨다. 경종이 왕위에 오른 후 옥산부대빈으로 추존되어 묘를 대빈묘라 했다, 원래 경기도 구리 인창동에 조성되었다가 숙종45년(1719) 지금의 광주 문형리로 옮겼고, 1969년 6월에 이곳(서오릉) 으로 옮겼졌다.
2009년 9월 촬영 사진.
《유명조선국옥산부대빈지묘(有明朝鮮國玉山府大嬪之墓)》
희빈 장씨는 1659년(효종 10년) 정 9품 사역원 봉사로 재임하던 역관 장형의 딸로 태어나셨다. 본관은 인동(仁同), 어릴 때 이름은 옥정이다. 어머니 윤씨는 조사석의 처갓집 여종이었는데, 장형의 본처 고씨에게서 맏아들 장희식을 얻었고, 그녀가 요절하자 윤씨와 재혼하여 1남 2녀를 얻었다. 9살 많은 언니와 오빠 장희재 뒤에 태어난 막내가 장옥정이었다.
옥정은 어머니가 천민이었으므로 모계를 따르는 종모법에 따라 역시 천민 신분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특했던 그녀는 어머니에게 결코 천민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녀가 10살이었던 현종10년(1669년) 1월 12일에 아버지 장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숙부 장현이 형의 가족을 거두어 보살펴 주었다.
인동 장씨는 조선 대대로 역관의 명가였다. 《통문관지》에 따르면 장희빈의 조부 장응인은 문필에 능하고 중국말을 잘해서 벼슬이 정3품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그의 뒤를 이어 20여 명의 역관이 나왔는데, 사역원 수석합격자도 7명이나 되었다. 당시 역관들은 사행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장현 역시 나라안의 큰 부자(國中巨富)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막대한 재력을 갖추었고, 효종 대에는 정 2품 자헌대부를 제수 받기까지 했다.
숙종의 치세는 치열한 당쟁의 와중에 국정안정과 왕권신장을 노리는 임금의 잦은 환국정치로 인해 정국이 요동쳤다. 그 과정에서 숙종의 여인 인현왕후 민씨와 장 희빈, 최 숙빈의 뒤얽힌 관계는 영조 대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두 차례의 전란으로 인해 신분질서가 크게 흔들리고 중인계급의 성장과 상업의 발달로 인해 새로운 패러다임이 시작되고 있던 그 시기에, 장희빈은 중인 역관의 딸이자 천민이라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국모의 자리에 올랐던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그녀의 비극적인 삶은 남인과 서인의 치열한 정쟁 속에서 안정기에 접어든 청나라와의 관계 개선, 천재지변으로 인한 국가위기를 극복해야 했던 숙종 시대의 엄중한 상황과 굳게 맞물려있다. 하지만 역사는 이런 복합적인 정국을 무시한 채 장희빈을 그저 어진 조강지처를 음해하고 온갖 궁중에서 음모와 암투를 야기한 요부로 매도하고 있다. (다음백과)
《순창원(順昌園)》
조선 제 13대 명종의 맏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 1551-1563)와 공회빈(恭懷嬪)윤씨(尹氏)의 묘소이다. 순회세자는 명종과 인순왕후의 아드님으로 명종 12년(1557)에 세자가 되셨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13세에 돌아가셨다. 공회빈 윤씨(恭懷嬪 尹氏1552?-1592)는 윤옥(尹玉)의 따님으로 명종13년(1561) 왕세자빈에 책종되셨고 순회세자가 세상을 떠난 후 덕빈(德嬪)이라 불리셨다. 선조 25년(1592)3월3일 돌아가셨는데, 장례를 준비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궁궐 후원에 임시로 묻었다. 그러나 왜란 중 궁궐의 화재로 시신을 찾지 못하여 신주를 만들어 순회세자묘에 함께 모셨다. 순회묘는 고종7년(1870) 순창원으로 이름을 고쳤다. 서오능에 위치하고 있다.
《수경원(綏慶園)》 (사도세자 생모)
고양시 덕양구 서오능내에 있는 수경원은 조선 제21대 영조(英祖)의 후궁(後宮)인 영빈(暎嬪)이씨(李氏)의 묘소이다. 영빈 이씨(暎嬪 李氏1696-1764)는 이유번의 따님으로 숙종27년(1701) 궁녀가 되셨다가 영조2년(1726년) 영조의 후궁이 되어 영조6년(1730) 영빈(映嬪)에 책봉되셨다. 정조대왕의 친할머니시다.
영조 11년(1735)에 사도세자(思悼世子/장조(莊祖)로 추존)와 6명의 옹주(翁主)를 낳으셨고, 영조 40년(1764)에 69세로 돌아가셨다. 수경원은 처음 의열묘(義烈墓)라는 이름으로 현 서대문구 신촌 연세대학교 교정에 조성되었고 정조 12년(1788)선희묘(宣禧墓)로 이름이 비뀌었다. 대한제국 선포 후 광무3년(1899)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황제의 생모 지위에 맞게 墓를 園으로 높여 이름을 수경원이라 하였다.1968년 6월에 이 곳으로 옮겨졌다.
2023년 3월14일 -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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