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죽령과 순흥 벽화고분 (順興 邑內里 壁畵古墳)

鄕香 2009. 6. 7. 14:53

<죽령과 순흥 벽화고분 (順興 邑內里 壁畵古墳)>

삼국사기에 의하면 죽령고개길이 처음 열린 것은 "신라8대 아달라왕5년(158) 3월에 비로서 죽령길이 열리다"라고 했습니다.

'동지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신라의 죽죽(竹竹)이 죽령에 길을 개척하고 지쳐서 殉死하여 고갯마루에 죽죽을 제사하는 사당을 지었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또한 전설에는 옛날 어느 도승이 이 고개를 넘다가 너무 힘들어 짚고 가던 대지팡이를 꽃은 것이 살아났다 하여 죽령이라 했다'고도 전합니다. 

 

옛날 영동.영남지방 선비들이 과거보러 한양 가는데 넘는 큰 고개가 5재(嶺)가 있는데, 그 고개가 鳥嶺. 竹嶺. 梨花嶺. 秋風嶺. 二嶝嶺(박달재)으로 이를 모두 남한고개라 이릅니다. 그 고개마다 과거에 얼긴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령(鳥嶺)고개는 제1관문으로 주로 서원에서 수학한 세도있는 사대부집 선비들이 넘나들고 뒤(背景)도 든든하니 과거에 당연 合格,

그러나 파당에 휩쓸려 관운이 험난하고,

죽령(竹嶺)고개는 어려운 선비들이 선호하는 고개로,  合格이요. 생활이 어려웠던 만큼 피나는 노력으로 글공부에 전념을 했겠지요.

퇴계 이황선생이 과거보러 떠나던 날, 그 어머니가 반드시 죽령으로 넘어가라고 신신당부를 했답니다. 

합격한 그는 원만한 관운과 명망을 얻었던 것도 죽령을 넘어간 것과 무관치 않은 듯 싶습니다.    

이화령(梨花嶺)고개는 " 꽃에 취하고 한 잔 술에 취하다 보니 합격가능성이 반반이고, 

추풍령(秋風嶺)고개는 秋風落葉같이 떨어진다 해서 科客이 꺼리던 고개랍니다.

지금은 박달재로 불리는 이등령(二嶝嶺 또는 다릿재)고개는 합격은 이등분하여 반반이었을 것입니다. 박달도령도 그 半數에 끼어 낙방거사가 되어 금봉과 애절한 사연의 주인공이 된 후 이등령이 박달재가 된 것이지요.

 

 < 분홍색 개량한복을 입은 여인이 뒤차를 운전한 방물장수인데 멋쟁입니다.>

 

그 죽령고개에 오르고 보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방물장수입니다. 옛날 방물장수는 여자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팔러 다니던 행상. 주로 노파들이 이 행상을 하였다고 해서 아파(牙婆)라고도 합니다. 이들은 연지 분 머릿기름 등의 화장품을 비롯하여 거울 빗 비녀 등의 장식물과 반짇고리에서 패물에 이르는 잡다한 물건들을 커다란 보퉁이에 싸서 등에 지고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전전하면서 행상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방물장수는 여염집 여인들에게 세상 물정이나 저간의 사정 등을 전하여 주는 전달자 구실도 하였으며, 특수한 심부름을 하여 주는 중개자, 혼인 중매를 하는 매파의 구실도 했습니다.  

 

 

 

이 만물장수는 아래 사진을 보듯이 온갖 생활도구들을 두 대의 차에 가득실고 앞차는 남편(남자)이 뒤차는 부인(여자)이 나란히 몰고 다니며 시골마을이나 외진 곳으로 다니며 팔고 있었습니다. 여기 죽령에서 만난 이 부부를 부석사를 답사하고 주차장으로 나오니 두 대가 나란히 서행하며 확성기로 외치고 있더군요. 옛 방물장수의 후예가 아닌가 싶습니다.ㅎㅎ

 

 

 

소백산등산로표시판이 있기에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니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참고로 올립니다.

 

 

소백산맥에 나란히 자리한 이 죽령과 문경새재, 추풍령을 일러 영남과 기호(畿湖)지방을 통하는 관문의 삼형제라면 죽령은 바로 그 맏형격입니다. 그 연대, 그 자리, 그 높이, 그 구실이 단연 으뜸인 까닭입니다. (개척 연대가 사기에 기록된 것은 오직 죽령 만이 있음에 그 기록에 의존합니다.)   

유구한 유서와 온갖 애환이 굽이굽이에 서려 있는 죽령은 삼국시대 한동안 고구려의 국경으로 신라와 대치, 삼국의 군사가 뒤엉켜 치고 좇기고 엎치락 뒤치락 불꽃튀는 격전장이기도 했습니다. 고구려가 죽령을 차지한 것은  장수왕 말(470년 경), 신라 진흥왕12년(551년)에 백제와 연합하여 거칠부 등 여덟장수에게 명하여 죽령외 열 고을을 탈취합니다. 이후 40년 뒤 영양왕(瓔陽王)1년(590년) 고구려의 명장 온달장군이 왕께 자청하여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며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 라고 하였듯이 군사적 요충지 였습니다. 1910년 까지도 공무를 띤 관원이나 동북지방 여러 고을의 관. 민 들이 이 길을 이용했으며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를 보기위한 선비들이 선호하던 길이 었습니다. 퇴계 이황선생도 과거보러 갈 때 '꼭 이 고개를 넘어서 한양으로 가라'는 어머니의 신신당부로 죽령고개를 넘어갔다고 합니다.

 

 

 이 소로는 옛 사람들이 한양으로 오고가던 죽령 옛길입니다.

 

 

 영주 부석사로 가는 길가에 이렇게 사과나무에 봉지만 대롱대롱 달렸습니다. ㅎㅎ

 

 

 이 나무에는 사과만 주렁주렁 예쁘죠? 아차! 사과가 아닌 복숭아 입니다.ㅎㅎ

 

 

이곳 순흥은 조선시대인 1413년(태종 13) 군현제 개편에 따라 도호부가 되었으나, 1457년(세조 3)에 발생한 단종복위 사건에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이 깊이 관련됨에 따라 순흥도호부를 혁파하여 폐쇄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순흥의 행정구역은 영천군(榮川郡)·봉화현(奉化縣)·풍기군(豊基郡)으로 분할 소속되었습니다. 1683년(숙종 9)에 주민들의 상소에 따라 226년 만에 다시 순흥도호부가 설치되었습니다. 순흥의 별호는 순정(順定)이었습니다. 순흥은 소백산과 죽령(竹嶺) 아래에 위치한 고을로,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과 영남으로 통하는 중심 역 가운데 하나인 창락역(昌樂驛)이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 벽화고분은 비봉산 남쪽 산자락 중턱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10여기의 고분이 산재해 있습니다.

신라 영토에 있는 석실분 중 몇 안 되는 벽화고분 중의 하나로 지름14m높이4m인 원형 封土墳입니다.

무덤으로 들어가는 길이 서편에 치우쳐 있는 'ㄱ자'형 석실을 가진 單室분으로서, 무덤안 방(玄室)의 내벽은 거칠게 다듬은 장방형의 화강 석재를 안으로 경사지게 쌓았고 그 위에 2개의 板石놓아 천장을 만들었습니다. 墳墓 내부에는 봉황, 구름, 연꽃, 물고기문양의 깃발과 힘센 壯士像 등의 채색화가 있어 삼국시대의 회화는 물론, 당시의 종교관, 來世觀 그리고 고구려와의 문화교류 등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유물은 도굴로 없어지고, 5점의 토기편만 출토되어 정확한 편년 근거자료로 삼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봉분입구 안 널길 양 옆면 벽에 두 인물이 그려져 있습니다. 하나는 '무덤을 보호하는 力士'이고, 다른 한 인물은 "잡귀를 쫓는 力士"입니다.>

 

< 무덤을 보호하는 力士 >

널길의 동벽에 자리한 반라의 力士像은 길쭉하게 상투머리를 한 듯한 흰 머리모양, 부릅뜬 눈과 크게 표현한 코 등 西域風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외부로 부터 잡스러운 것을 막는 벽사적(僻邪的)인 의미로서 묘실내의 평온하고 고요한 여러 화면들과는 달리 본래의 임무만수행하고 있는 듯 널방(玄室)입구를 향하여 삼지창(三枝槍)을 들고 있습니다.

 

 

<잡귀를 쫓는 力士>

널길의 서벽에 자리한 半裸의 力士像은 오른손으로는 뱀의 목 부분을 움켜쥐고, 한 번 휘감은 뱀을 머리 위로 다시 돌려 꼬리 부분을 왼손으로 쥐고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문 입구의 잡귀를 쫓아 버릴 듯이 그 모습이 매우 생동감이 있습니다.

 

 

내실 북서쪽 입니다. 많은 훼손으로 벽화가 그려진 백회가 유실되어 石壁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아래 높인 바닥은 무덤 주인공의 棺을 놓은 자리입니다.  

 

 

널방의 남벽에 그려진 물고기 모양의 깃발을 쥐고 있는 인물과 "乙未中墓像人名□□□"의 묵서명은 본 벽화고분의 결정체라 볼 수 있습니다.

묵서명은 벽화와 함께 고분의 주인공과 그 당시의 사회상까지도 밝힐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그런데 묘주의 이름으로 추측되는 부분이 지워졌기 때문에 확실한 이름은 알 수 없으나, 무덤의 조성 연대는 알 수 있습니다.

붓으로 쓴 '乙未'라는 간지로 보아 479년,539년,599년으로 추정되나 학계에서는 539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내실의 동측 정면으로 보이는 벽입니다. 무덤의 주인공과 시종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얼굴부분이 흐릿하게 일부 확인됩니다. 삼국및 고려 때 석실 벽 정면에는 무덤 주인공이 정좌한 모습의 전신을 그려 놓는 예가 대다수 입니다. 아래 바닥에는 棺을 놓았던 墩臺가 벽에 붙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널방의 북벽에는 사실적으로 표현된 蓮花圖와 雲文圖가 큼직하게 그려졌습니다.

이것은 佛敎와 道敎의 요소들이 반영된 한 폭의 풍경화로, 죽은 자의 영혼을 西方淨土로 안내하는 천상세계의 한 부분을 표현하고 있어 당시의 來世觀을 엿보게 해 줍니다.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소재 벽화고분의 전경입니다.

 

 

2009/6/4    고맙습니다.  <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