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소수서원(紹修書院)

鄕香 2009. 6. 8. 22:13

 

<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

당간지주는 절의 위치를 알리는 상징적인 조형물입니다. 절에서는 불교의식이나 행사가 있을 때 幢이라는 깃발을 높이 달았는데, 당간지주는 당을 매달던 깃대, 즉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돌기둥(石柱)입니다.

유교의 聖地인 소수서원에서 불교유적을 만나는 것이 이채롭습니다만. 원래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숙수사라는 절이 있었던 자리입니다. 

출토된 유물이나 유적을 보면 인근 부석사 못지않게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간지주 역시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절터에 소수서원을 세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크기는 높이 365cm이며, 보물 59호 입니다.

 

섬돌을 건너 오솔길로 해서 경자바위(敬字巖)를 거쳐 취한대(翠寒臺)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가 ... ^^ 

 

시내(竹溪)를 끼고 경자바위로 가는 오솔길입니다.

 

이 정자가 취한대(翠寒臺)인가! 현판을 봐야 알겠군요. 고풍스럽죠? 그러나 찾아봐도 현판이 보이지 않습니다.

 

《翠寒臺》단청이 없는 단아한 멋이 儒學의 서기가 서린듯 합니다. 저 위에 앉아 죽계의 물총새 빛갈의 푸른 물을 바라보면 절로 정신이 서늘하고 맑아져 詩 한 수 아니 나올 수 없다는 곳인데..  어,  들어가지 마시라, 입니다. ㅎㅎ 

 

시냇물 옆 빼끔이 보이는 것이 경자바위인가 봅니다.  敬字를 보려면 물로 들어가야겠으니 건너에서 봐야겠지요. 한 바퀴 돌아가서 보기로 하겠습니다.

 

시내 건너편에 수령이 몇 백 년은 됨직한 은행나무의 푸르름이 하늘을 치솟고 있는 그 기개가 대단하죠 ^^.

 

이 木橋는 霽月橋 랍니다. 비갠 후 달이 차 오른는 다리라...  참 이름도 선비답게 멋이 흐릅니다. ^^

'제월'이란 宋史 周敦傳에 나오는 霽月光風에서 따온 말입니다. 宋나라 때 명필인 황정견()이 무숙 주돈이의 인물됨을 보고 "흉회쇄락 여광풍제월 (胸懷灑落 如光風霽月)"뜻을 새기자면, '가슴에 풍은 뜻의 맑고 맑음이 마치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도 같고 맑은 날의 달빛과도 같네' 라고 한 데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제월 . 광풍이란 이름을 붙인 樓亭가 광주 동북쪽 무등산 북쪽 기슭과 맞대고 있는 담양군 고서면에 있는 곳에, 조선시대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제자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스승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유배됨에 따라 낙향하여 소쇄원(瀟灑園)을 조성하면서 사랑채와 서재가 붙은 집은 제월당(霽月堂)이라 하고 계곡 가까이 지은 누정은 광풍각(光風閣)이라 하였습니다.  

 

주돈이(周敦) : 中國) 北宋의 유학자. 자는 茂叔,호는 溪,라고 불리우며, 「 태극도설()」과 『』를 하여 종래의 에 宇宙觀을 통합하고, 거기에 한 원리를 하였습니다.  이것이 곧 性理學으로 하였습니다.

 

이 정자의 현판을 보니 光風亭 이라고 합니다. 본디 인근에 이황선생이 命名한 광풍대(光風臺)가 있었답니다.

이 亭子는 2002년에 세운 것으로 앞에는 시내(竹溪)가 감아 돌고 뒤로는 산(蓮花山)이 에워싸고 있어 주변경치를 한 눈에 볼 수가 있습니다.  "광풍대"란 宋史 周敦傳에 나오는 霽月光風에서 따온 말입니다.

 

 

소수서원의 박물관 후원입니다. 역순으로 돌다보니 정문이 아닌 뒤뜰을 거쳐 후문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 

 

 

선돌(立石)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마을 어귀나 무덤 주변에 큰돌을 세웠는데 이를 선돌이라합니다.

선돌은 위 아래로 길쭉하며 자연석을 일부가공하여 세웠습니다. 대구 진천동유적 발굴조사에서는 선돌 주위에 돌을 쌓아 만든 구획이 발견되었는데 그 위에서 여러 점의 토기가 깨트려진 채 출토되었습니다. 이는 선돌유적이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제사를 지내던 공간이었음을 추측하게 합니다.

이 선돌은 영주 가흥동 마애삼존불 주위에 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대광익회옥편(大廣益會玉篇)

 중국 송나라 때에 진평년(陳彭秊) 등이 황제의 명을 받아 만든 옥편이라고 합니다.

 

 

하사준(下賜樽)

이 樽들은 숙종 대왕이 주세붕(周世鵬)선생 사당에 하사한 술 항아리로 祭祀에 쓰는 器物입니다. 

준(樽)이라고 하는 이 술항아리는 동물의 형상으로 만든 것으로, 그 주된 형상으로는 코끼리. 소. 돼지. 양 등 제물로 쓰이는 동물들 입니다.

주로 왕실이나 서원 성균관 등 유학기관의 제실에서 祭을 올릴 때 사용하는 일종의 祭器입니다. 

코끼리 모양으로 만든 이것은 象樽이라고 합니다.

 

 

 준(樽)이라고 하는 술항아리이며,  동물의 형상으로 만든 것입니다.

주로 왕실이나 서원 성균관 등 유학기관의 제실에서 祭을 올릴 때 사용하는 일종의 祭器입니다. 

양(羊) 모양으로 만든 이것은 未樽이라고 합니다.

 

 

준(樽)이라고 하는 술항아리이며 여러 동물의 형상으로 만든 것입니다.

주로 왕실이나 서원 성균관 등 유학기관의 제실에서 祭을 올릴 때 사용하는 일종의 祭器입니다. 

돼지(豚) 모양으로 만든 이것은 亥樽이라고 합니다. 이외에 소의 형상의 樽은 희준(犧樽)이라고 합니다.

 

 

도광(道光) 2년(1822) 임오년 정월에 영주군에서 봉화면에 거주하는 51세의 장사랑(將仕郞) 안여택(安如宅)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입니다. '將仕郞'아란 종9품의 하위직 문관입니다. "準戶口 " 란 조선시대 호적등본입니다.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창건한 신재 주세붕은 군민을 사랑하여 선정을 베푼 뛰어난 牧民官이자 학자였습니다. 그는 도학을 강화하고 그 교육을 통해 백성을 교화하고자 하였는데, 그것이 구체화 된 것이 바로 서원의 창설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서원의 설립은 유교 윤리 보급은 물론 풍기 지역 향촌민의 교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주세붕은 道東曲을 지어 서원에 배향된 선현의 제사를 지낼 때 그 노래를 부르게 하였으며, 서원 창건과 관련된 내용을 상세히 기술한 「죽계지(竹溪誌)」를 남겨 뒷날 규범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山蔘을 인공 재배시켜 貢蔘 폐단을 덜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주세붕(周世鵬, 1495년 ~1554년)은 서원을 창시한 조선의 학자·문신으로, 자는 경유(景遊), 호는 신재(愼齋)·손옹(巽翁)·남고(南皐)이며, 시호 문민(文敏)입니다.

1522년(중종 17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가 되어 '사가독서'한 후 검열·부수찬 등을 지내다가 김안로의 배척을 받아 좌천된 후 곤양 군수를 거쳐 풍기 군수로 있을 때, 1542년(중종 37) 백운동에 고려 말의 학자 안향의 사당을 세웠습니다. 이듬해 백운동 서원(소수 서원)을 창설하였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서원입니다.

그 후 직제학·도승지·대사성·호조 참판을 역임하고, 1551년 황해 감사로 있을 때 해주에 수양 서원(문헌 서원)을 창설하였고,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죽은 후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습니다.

저서에 《무릉잡고(武陵雜稿)》, 편서로는 《죽계지(竹溪誌)》·《동국명신언행록(東國名臣言行錄)》·《심도이훈(心圖彛訓)》 등이 있으며,〈도동곡(道東曲)〉·〈육현가(六賢歌)〉·〈엄연곡(儼然曲)〉·〈태평곡(太平曲)〉 등 장가(長歌)와 〈군자가(君子歌)〉 등의 단가 8수가 전합니다.

 

 

빠짐없이 보여 드리고 싶은 마음, 밀려드는 구름 같지만, 

소수박물관의 전시물은 대다수가 古書 . 公文書 . 敎旨 등 이어서 담아 올리는 것을 생략하였습니다.

머리 아퍼요~~~ ㅎㅎㅎ  박물관 얘기 끝임다. ^^

 

나온 여기가 정문이군요. ^^

 

 

 아까도 잠깐 말씀 드렸지만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입니다.

조선 중종37년(1542) 풍기 군수 주세붕이  이 지역 출신인 고려시대 유학자 '회헌 안향'의 위패를 모신 祠廟를

세우고 이듬해 백운동서원을 세웠습니다. 후에 퇴계 이황이 명종임금께 건의 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친필 현판을 하사 받음으로서 명실공이 나라에서 인정한 최초의 서원이 되었습니다.

이를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고 합니다. 

書院은 강학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으로 나누어졌으며, 강학공간에는 강학당을 중심으로 지락재, 학구재, 일신재, 직방재 등의 건물이 있고 제향공간에는 문성공묘, 전사청, 영정각 등이 있습니다.

 

안향(安珦, 1243년~1306년)은 고려의 명신(名臣)·학자입니다. 충렬왕 때 원나라를 왕래하며

직접 주자서(朱子書)를 베껴오고,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는 등 성리학의 도입과 보급에 힘썼습니다.

본관은 순흥(順興). 초명은 유(裕). '향'(珦)자가 조선 왕조 문종의 이름자와 같았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모두 초명으로 불렀습니다.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 

 影幀閣이라는 현판이 말해주듯 이 건물은 영정을 모신 곳입니다.

 들여다 본 위치에서 좌측인데,  조선의 명재상인 '미수 허목' . '오리대감 이원익' 두 분의 영정이 걸려있습니다.

 

정면에는 '朱子' 그리고 '안향' 두 분의 영정입니다.

 

오른쪽인데요, '주세붕'과 "한음 이덕형" 두 분의 영정입니다.

 

講學堂중 그 하나입니다.  직방재(直方齋) 라는 현판을 보듯이 곧고 반듯한 유학의 선비 정신이 엿 보입니다.

 

백운동(白雲洞) 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스승의 집무실 같은 곳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전체적인 보수공사로 많은 곳을 제대로 볼 수 없었음이 아쉬웠습니다.  

 이 문을 마지막으로 서원건물을 나왔습니다. ^^

 

 앞서 지나온 오솔길 아래 있던 주세붕 선생이 쓴 '敬' 字가 보입니다.

 

'주세붕'선생은 "敬"이라는 글자 한자를 바위에 새겨 남겼습니다. '敬'자는 선비의 덕목을 집약하여 나타낸 글자로 공경과 근신의 자세로 학문에 집중한다는 의미입니다. 더불어 安珦을 공경하고 기리는 마음을 후대에 전한다는 뜻도 있겠습니다. '敬'字 위의 白雲洞은 소수서원의 본래 이름입니다.  

 

 

 오묘하게 틀어져 올라간 노솔가지 사이로 깊이 모를 파란하늘에 피어 오르는 하얀 구름 그 아래

고즈넉한 조선의 기와지붕 ...   아~~  나는 지금 천상을 봅니다.

 

翠寒臺는 자연을 벗하며 詩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곳입니다. 退溪 李滉 선생이 터를 닦고 취한대라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이는 옛 시<松翠寒溪>에서 따온 것으로 푸른 산의 기운과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의미입니다.

 

 

이곳이 정작 들어가는 정문입니다. 이로서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어느새 돌아 나왔습니다.

 2009/6/4 仁香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