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먼저랄 것도 없이 두 남자가 의기투합 도시의 테두리를 탈출하여 시원한 강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무작정 간 곳이랍니다.
29℃를 넘나드는 찌는 더위를 땀으로 연실 퍼내며 오르는 길에
제법 짙은 녹색의 숲에서 이름 모를 산새들이 싱그러움을 노래에 담아 바람을 부릅니다.
그 핫바지 차림 한번 시원하시겠소..
깨진 기왓장만 보아도 설레던 세월을 아직도 못 잊었는가...
가지런히 와당으로 쌓아올린 담이 그렇게 정다울 수가 없습니다.
산신각이 절에 있는 것은, 산신은 본디 우리민족의 토속신앙인 것을 불교에서 편입하여 如來 아래 많은 神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하였지요.
(응진전/應眞殿)
응진전은 나한전(羅漢殿)이라고도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의 제자인 16나한(羅漢)을 모신 전각은 응진전이라고 하며,
500나한, 즉 부처님의 500제자를 모신 전각은 나한전(羅漢殿)이라 부릅니다.
수종사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범우고(梵宇攷)에 의하면
세조가 이 절에 친히 행차하여 땅을 파서 샘을 찾고, 혹은 종을 발견했다고 해서 수종사라 하였다고 전하며
1939년 석조 부도를 중수하면서 1439년(세종 21)에 조성된 정의옹주 부도로 확인되어 조선 초기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세조임금이 금강산을 유람하고 용선을 타고 한강으로 환궁 길에 날이 저물어 두물머리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때 아닌 맑고 창아한 종소리에 기이한 생각이 들어 알아보니 古刹遺址의 동굴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였음을 알게 되어 지었다는
水鐘寺의 이 고목도 세조임금이 심은 나무라고 전해옵니다.
차 한 잔의 행복에 젖기 위해 빈자리를 기다리는 중에 삼정헌三鼎軒 뜰에서 두물머리의 유구한 흐름을 배경삼아 담아봅니다.
이 한옥을 타고 오르는 초록의 생명, 그 눈부신 고운 빛깔에
지금은 광화문복원공사로 헐린 옛 경복궁 광화문 옆 돌담을 타고 오르던 담쟁이넝쿨이 불현듯 그립습니다.
아니 그 시절이 그리웠을 겁니다. 젊었으니까..
언제나 가보아도 마음 편한 곳 이제 꽃들의 제전도 막바지에 이르고 청록이 짙게 물들기 시작한 날에
좋은 벗과 水鐘寺 三鼎軒에 앉아 茶 한 잔 나누며 마주보는 눈빛에 미소를 담아보는 기쁨을 가져보는 행복입니다.
구름 위의 앉아 있는 양 아름다운 차실, 水鐘寺 三鼎軒에서 두 강(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지는 양수리(두물머리)를 바라보니
그 풍경이 이루 말할 수없는 아름다움입니다.
심산계곡 맑디 맑은 물에 정성모은 찻잎,
잠시의 禪이 흐르니 흰 찻잔에 연한 옥빛일색의 선록차,
한 모금에 눈이 트고, 두 모금에 마음이 맑으니
또 한 모금에 詩가 되어 흐르는 고요
"三鼎軒" 당호는 말 합니다. 禪과 茶와 詩 이 세 가지가 담긴 곳이라고...
님이여, 그대의 默想이 禪을 타는 순간 아름다운 詩香이 피어오르더이다.
돌아오는 길목에 중생을 굽어 자비를 내리시는 이여... 나무아미타불~~
다시 걸음을 돌려 향한 곳은 여주 신륵사입니다.
우리 역사에 많은 흔적을 남긴 詩仙 나옹선사懶翁禪寺께서 입적하신 신륵사,
神勒寺 일주문을 바라보며 두 기둥에 올린 누각 만큼의 죄과의 무게를 느낍니다.
神勒寺는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로 신
라 진평왕(579~631 재위) 때 원효(元曉)가 창건했다고 하나 정확하지 않습니다.
신륵사라 부르게 된 유래는〈동국여지승람〉 권7 여주목불우조(驪州牧佛宇條)에 의하면
신륵사는 보은사(報恩寺) 또는 벽사(璧寺)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벽사는 고려시대에 경내의 동쪽 언덕에 벽돌로 된 다층전탑이 세워지면서 붙여진 겁니다.
이 절이 대찰(大刹)이 된 것은 나옹화상(懶翁和尙:혜근)이 입적할 때
기이한 일이 일어난 뒤부터라는데, 어떤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1379년(우왕 5)에 각신(覺信), 각주(覺珠) 등이 절의 북쪽에
사리를 봉안한 부도와 나옹의 초상화를 모신 선각진당(先覺眞堂)을 세우면서 많은 전각을 신축하고 중수했고,
1382년에는 2층의 대장각(大藏閣) 안에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발원해 만든 대장경을 봉안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인해 절이 위축되었으나 1469년(예종 1)에 영릉(英陵:세종의 능)의 원찰(願刹)이 되었고,
1472년(성종 3) 절이 확장되고 다음해에 정희왕후가 보은사로 개칭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671년(현종 12)에는 계헌(戒軒)이,
1702년(숙종 28)에는 위학(偉學)·천심(天心) 등이 중수했다고 합니다.
이어 1858년(철종 9)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내탕전(內帑錢)을 희사해 중수했답니다.
현존 당우로는 금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조사당(祖師堂:보물 제180호)·명부전·심검당·적묵당·노전(爐殿)·칠성각·종각·구룡루(九龍樓)·시왕전 등이 있고요
또한 다층석탑(보물 제225호)·다층전탑(보물 제226호)·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보물 제228호)·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보물 제230호)·석등(보물 제231호) 등과 같은 문화재들이 있습니다.
뭇사람들 구름처럼 저 강물처럼 무수히 다녀갔어도
그 흔적은 바람과 세월에 삭아 지워지고 없나니
이 몸의 흔적인들 한 세월의 티끌이나 될까..
명예도 부귀도 시기와 질시도 삶의 애착도 한 세월 한 가닥 바람인 것을...
무엇을 남기고자 이리 섰느뇨..
이 탑은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려의 塼塔입니다.
기단은 화강암으로 7단의 층단이고 탑신부는 여러 단의 벽돌로 쌓아 만들어 졌으며
몸돌에 비해 지붕들은 간략하게 처리되었습니다.
상륜부는 塼으로 만든 노반 위에 화강암으로 만든 복발,보개,보주 등이 얹혀있습니다.
건립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벽돌의 문양 등으로 보아 고려 시대로 보는 견해가 많은데,
탑 북쪽에 있는 수리碑 내용에 의해 조선 영조2년(1726)에 고쳐지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높이 9.4m 입니다.
20세기 말 漢學의 대가 고 임창순 선생이 1981년12월에 신륵사 대장각기 비문을 해역한 글을 새긴 것입니다.
이 비는 대장각을 세운 내력을 새긴 碑입니다.
故 임창순 선생님이 해역한 것에 의하면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선대에 조상의 명복을 빌고자 이루려고 한 대장경 만들기를 이루지 못하고 영민하자
그 뜻을 이뤄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고 그 숙원을 풀기 위해
나옹선사의 제자들과 함께 발원하여 대장경을 인쇄하고 이를 보관하기 위해 이곳에 2층의 대장각을 지었다.
예문관제학 李崇仁이 짓고, 글씨는 進賢館提學 權鑄가 지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뒷면에는 인쇄와 대장각 건립에 참여한 승려와 신도들의 명단이 적혔고
비는 연꽃무늬를 새긴 臺石위에 비몸을 새우고 기둥을 댄 다음
그 위에 지붕 모양의 蓋石을 올렸습니다.
이러한 형식은 고려말기에 나타난 것으로 조선시대 碑 형식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관음전으로 관세음보살像이 모셔져 있는 殿입니다.
심플하고 젊음이 물결치는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보물 제 225호 신륵사 多層石塔
이 탑은 대부분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다른 탑과는 달리 특이하게도 백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기단에서 몸돌에 이루기까지 각각 하나의 돌로 조립되었습니다.
4각형의 지대석 위에 2층 기단을 놓고 하층 기단 하대석에는 연꽃문양이 중대석의 각 면에는 파도 문양이,
모서리에는 꽃모양이 새겨져 있으며, 각층의 줄어드는 비율이 완만합니다.
지붕들의 추녀는 수평으로 흐르다가 전각에 이르러 살짝 올라갑니다.
팔층 지붕돌 위에 작은 몸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더 많은 층수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륵사가 새워진 시기는 신라시대까지 올라간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존하는 유물이 모두 고려 중엽 이후의 것이고
성종 3년(1472)에 여러 건물이 다시 건립된 것으로 보아 이 석탑도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입니다.
극락보전(極樂寶殿)
신라 진평왕 때 건립되었고 나옹(懶翁)선사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난 후 고려 우왕2년(1376) 크게 중창된 유서 깊은 절입니다.
영릉이 여주로 이장된 예종1년(1469)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로 삼았고 성종3년(1472) 부터 대규모 중창이 이루어졌습니다.
극락보전은 숙종4년(1678)에 다시 지어진 이후 정조21년(1797)에 중수되었습니다.
절의 중앙에 있는 법당인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팔작집입니다.
전면의 기둥과 지붕이 만나는 곳에 사용되는 부재인 공포의 쇠서 끝에 연봉이 장식되어 있으나
후면 공포의 쇠서에는 연봉이 없는 단순한 형태로 전면의 장엄에 치중하는 수법을 보이고 있습니다.
내부 중앙에는 불단위에 중생을 위하여 자비를 베푼다는 아미타삼존불이 봉안되어있습니다.
오늘은 노무현 前대통령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있습니다.
이제 모두 잊고 편히 가시도록 하는 것이 남은 이들의 몫이 아닐까요.
원망과 보복은 악순환이요, 분열을 가져올 뿐입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노무현 전 대통령도 바라지 않으실 겁니다.
인생은 누구나 사는 동안 온통 아쉬움뿐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분열을 바라는 것은 주변의 열강들입니다.
그들에게 득 될 일을 언제까지 발등 찍어가며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모두 한 마음 되어 자유 진리의 방식으로 통일을 이루어야합니다.
인생은 어차피 空手來空手去라 하지 않습니까
일찌기 禪僧 懶翁禪師(1320-1376)께서도
이리 읊조리셨지요.
청산은 날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날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청산은 날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날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세월은 날 보고 덧없다 하지않고 우주는 날 보고 곳 없다 하지 않네.
번뇌도 벗어놓고 욕심도 벗어놓고 강같이 구름같이 말없이 가라하네.
범종각 안에는 삼라만상을 깨우칠 법고와 범종, 범어, 편경 등이 보입니다.
경내를 휘 돌아 이제 떠나는 길에 그래도 미련에 무언가 남기고 싶었나 봅니다.
"空手來 空手去" 한 가닥 바람같은 인생인 것에..
碑頭(碑蓋石)의 양식이 상이하게 다른 두 비석이 이채롭습니다.
고색 창연한 이 비, 이 고움, 또한 비바람 세월에 그 얼마나 견딜까 !
찾아 간 내 할아버지 계신 곳(英陵)은 쉬는 날이라는군요. 모처럼 古古손이 문후 여쭙고 절 올리려했는데,
인위적이라지만, 우리 고유의 정감어린 돌담이 자연과 너무도 잘 어울립니다.
배례를 올리지 못한 빈 마음으로 돌아서려니 서운하여 안내판을 담아봅니다.
고맙습니다. 2009/5/25 <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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