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산성/溫達山城>
단양의 온달산성으로 들어가는 이 들머리는 아래 촬영세트장이 있는 주차장 쪽이 아니라 '구인사'로 가다가 우측으로 꺾어 가파른 소차로(小車路)를 굽이굽이 올라가면 바로 온달산성 뒤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이 산성은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성산'의 정상부근을 돌로 둘러쌓은 산성으로, 고구려 평원왕(재위 559∼590)의 사위인 온달장군의 이야기가 이 지방에 전해오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생각됩니다. 이 성이 언제 쌓아졌는지는 확실한 고문헌이 없고, 다만 ‘성산고성(온달산성)’이라는 기록을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성의 북동쪽 남한강의 강변 절벽 아래에는 온달굴이라는 석회암 동굴이 있고, 성을 바라보는 북쪽 강 건너의 산에도 온달과 관계되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으며. 성벽의 보존 상태가 좋아, 축성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유적으로 고구려 온달장군이 신라군과 싸우다 전사했다고 전해지는 산성입니다.
얼마 안가서 (800m 거리) 산성의 돌담이 있습니다.
고구려 평원왕(559~590)때, 집이 가난한 온달은 늘 떨어진 옷과 신을 신고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마음씨 착한 ‘바보온달’이라 불렀습니다. 당시 고구려 평원왕은 공주가 울 때마다 “너는 크면 바보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라고 말하며 놀렸습니다. 공주는 16세가 되자 스스로 궁을 나가 진짜로 바보온달의 아내가 되어 온달을 지극정성으로 가르치고 깨우치게 도와 장군에 이르도록 했다고 합니다. 온달은 요동을 침략한 북주를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워 왕으로부터 장수로서 신임을 얻었으며 부귀와 권세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온달은 신라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나간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온달산성은 바로 온달장군이 신라와 전투를 벌이다 전사한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1400년 전이란 시차를 믿을 수 없게 너무나 정교하게 잘 축성된 성곽의 바깥 모습입니다.
성벽위에 올라서니 주변 뿐만 아니라 먼 거리의 산세와 골짜기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나 한눈에 들어옵니다. 올망졸망한 산봉우리들이 지닌 연초록의 빛깔들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섭니다.
온달산성의 안쪽입니다. 같은 시대의 산성으로 단양의 또 다른 산성인 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 國寶제198호)가 세워져 있는 '적성산성' 보다는 좁습니다. ( 면적 : 26.354 ㎡ )
적군의 동태를 살피기에 좋은 천해의 요새처럼 주변을 살피기에 전망이 매우 좋습니다. 三國의 첩경지역이었던 만큼 수많은 전투로 피에 얼룩졌을 이곳의 처절함을 이 아래 남한강은 수정처럼 맑은 푸름으로 그 유구한 역사를 침묵하며 묵묵히 흐르고 있습니다.
외곽성벽에 커다란 말벌집이 붙어있기에 멀리서 사진기에 담아봅니다.
내 섰던 곳 뒤돌아보니 어느새 내 흔적은 간 곳없고, 다른 이 그 자리에 있네.
사적 제264호. 둘레 682m. 점판암(粘板岩)으로 쌓은 석축산성으로서, 성벽이 산의 정상 부근부터 북쪽을 향해 형성된 경사면의 윗부분에 둘려 있는 테뫼식 산성으로 성벽의 구조는 내외협축(內外夾築 : 흔히 산에서 보는 돌탑 쌓은 방식)의 형식을 취해 축조되었습니다. 1989년 충북대학교 박물관의 지표조사에 의하면, 성벽의 기단부는 암반을 이용해 기초를 삼고 있으나 일부 구간에는 암반부를 보강하기 위하여 계단상으로 기단석축을 한 곳도 있습니다. 이러한 축조방법은 고구려 산성에 많이 나타나고 있어 주목됩니다. 또한 수축된 북쪽 성벽의 기단 보축(補築)은 45° 각도로 역삼각형의 돌쌓기를 하고 거기서 1m 안쪽에 성벽이 축조되는 방법을 사용하였음이 확인되었습니다. 보은의 삼년산성에서 이러한 방식의 가장 전형적인 예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문은 남문·동문·북문의 3군데가 확인되고 있는데, 통행을 위한 보조시설을 갖추고 있고, 성 안에 본래 우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매몰되었습니다. 성 안의 물을 밖으로 빼는 배수시설인 수구(水口)가 북쪽 성벽에 있는데 높이 65㎝의 긴 사다리꼴입니다.
성 안에서 채집된 유물로서 토기편·기와편·숫돌·철화살촉 등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토기조각들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로 한정되고 있어 그 사용기간은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온달산성은 광개토왕릉비문에 보이는 아단성(阿旦城)으로 비정하기도 하는데, 원래 아단성은 396년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공취한 58성 700촌 가운데 하나로 봅니다. 실지회복을 위하여 출정한 고구려 온달장군의 전사한 곳이라는 전설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성벽을 보고 있자니 이 엄청난 돌들을 일정한 규격으로 만들어 쌓은 그 저력이 놀랍습니다.
정렬된 모습이 규격화된 벽돌을 쌓은 듯 치밀합니다. 주변에 산재해 있는 돌의 성질이 각성석 편마암(角閃石片麻巖)으로 벽돌처럼 일정한 두깨로 쪼게지는 성향이 있는 점판암(粘板岩)입니다. 사진에 보이듯이 마치 칼이나 낫을 갈던 옛날의 숫돌로 쌓은 것처럼 보입니다.
이 사진은 원래 쌓은 성벽과 무너진 곳을 보수한 흔적이 뚜렷이 보입니다.
적성산성을 한 바퀴 돌아보고 원점으로 왔습니다. 이렇게 세월은 흘러 또 다른 아쉬움을 남깁니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 산67> 온달산성. 2009/5/5 <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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