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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高句麗本記 建國說話 ( 드라마 주몽과 견주어 보기)

鄕香 2006. 10. 28. 15:15

 

원년 甲申(BC 37) 시조 동명성왕은 성은 高氏요, 이름은 朱蒙(추모鄒牟 혹은 중해衆解라고도 함)이다.

이에 앞서 부여왕 해부루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를 올리고 아들 낳기를 빌었더니,

어느 날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돌을 보고는 마주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돌을 옮겼더니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시는 것이다' 하고는 데려다 기르고,

이름을 금와金蛙라 했다.

그가 성장하매 태자로 삼았다. 그 전에 그의 재상 아란불阿蘭弗에게

어느 날 하늘에서 말하기를

"장차 나의 자손을 시켜 여기에 나라를 세울 것이니 너는 다른 곳으로 피해 가도록 하라,

동해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 부르는 땅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서 오곡을 재배하기에 알맞으니 도읍으로 정할 만하도다" 했으므로

아란불은 왕에게 권하여 그 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이름을 동부여東扶餘라 했다.

그의 옛 도읍에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자칭 천재의 자손이라 하면서 그 곳에 도읍을 정했다.

해부루가 죽고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때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만나 물으니

그 여자가 말하기를

"저는 河伯의 딸 유화柳花라고 합니다, 여러 동생들과 나와 놀고 있는데

이 때 웬 남자가 나타나 자칭 천제의 자손 해모수解慕漱라고 하면서

熊心山아래 압록강가의 집 안으로 끌고 가서 정을 통하고는 그대로 가버리고는 돌아 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은 내가 중매도 없이 남자와 관계한 것을 책망하고 우발수로 귀양보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금와가 이상히여겨 그 여자를 방 안에 가두어 두었더니

그 여자에게 햇빛이 비추었고, 그 여자가 몸을 피하면 햇빛이 따라가 비추었다. 이로 인하여 태기가 있어 알 한 개를 낳았는데,

다섯 되들이 만큼 컷다.

왕이 그 알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먹지 않았고,

길에다 버렸더니 소와 말이 비켜갔고,

다시 들에다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덮어주었다.

왕이 깨버리려 했으나 깨뜨릴 수가 없어, 유화부인에게 돌려 주었다.

유화부인이 옷가지로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골격이 우람하며 영특하고 기이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나이 7세에 보통사람과는 월등하게 달랐다.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에 활을 잘 쏘는 것을 주몽朱夢이라 했으므로 그에 따라 이름을 주몽이라 했다.

 

금와에게는 아들이 일곱이 있어 늘 주몽과 함께 놀았는데, 그들의 재주가 모두 주몽에 미치지 못했다.

그의 맏아들 대소帶素가 왕에게 아뢰기를

'주몽은 사람의 자식이라 하기엔 너무 그 사람됨이 용맹스럽습니다. 만약 일찍 없애지 아니하면 후환이 두려우니 청컨대 없애버리소서' 했으나

왕은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 기르는 일을 시켰다.

 

그런 일을 눈치챈 주몽은 도망갈 생각으로 영리하고 잘 달리는 말 하나를 골라 적게 먹여 깡마르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했다.

왕이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야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그 후 왕이 들에 나가 사냥할 때,

주몽은 활을 잘 쏘았으므로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그가 잡은 짐승은 다른 사람보다 많았다.

 

왕자와 신하들이 또 주몽을 죽이려고 꾀하니

주몽의 어머니가 그 음모를 알고 살며시 아들에게

"왕자들이 장차 너를 죽이려 하니 너의 재주와 지략이면 어디서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냐, 이 곳에 머뭇거리다가 죽음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멀리 가서 큰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에 주몽은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부俠父. 등 세 사람과 더불어

엄호수까지 가서 물을 건너려 하는데 다리가 없었다.

주몽은 뒤쫓는 병사들이 닥칠까 두려워 강물을 향해 소리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자손이요 하백의 외손인 주몽입니다, 오늘 도망가는 중인데 추격병이 가까이 다가오니 어쩌면 좋겠습니까" 하였다. 

 

말이 끝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가 되었다.

주몽과 그 일행이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 무리들이 곧 흩어져 뒤를 쫓던 동부여의 기마병들은 강을 건너지 못하고 말았다.

 

주몽 일행은 모둔곡<위서에는 보술수에 이르렀다고 했다>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베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장삼을 입고,

또 한 사람은 수초로 만든 도롱이를 입었다.

 

주몽이 묻기를

" 그대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며 성은 무엇이며 이름은 무엇이오" 하니

베옷 입은 사람은 이름을 재사再思라 하고,

승복 입은 사람은 무골武骨이라 하고,

물풀옷 입은 사람은 묵거默居라 하면서 성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은 제사에게는 극克씨로,

무골에게는 중실仲室씨로,

묵거에게는 소실小室씨로 성을 삼게 하고

곧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하늘의 명으로 나라의 기틀을 다지려 하는데 마침 이때에

세 현인을 만났으니 이는 하늘이 내게 내린 은혜입니다" 하고

세 사람을 그능력에 따라 벼슬을 주고 일을 맡겼다. 

 

주몽과 그들 모두는 다같이 졸본천卒本('위서'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고 했다)에 이르렀다.

이 지방의 토양이 비옥하고 산하가 험준하고 견고하여 도읍을 정했으나

미쳐 궁궐을 지을 겨를이 없어서 비류수沸流水가에 초막을 짓고는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고高로서 성을 삼았다.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더니 왕이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고 보통사람이 아님을 알고 사위로 삼았 는데 왕이 죽으매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때 주몽의 나이 22세로서 한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BC 37)이며, 신라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 갑신년이었다.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와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 지방이 말갈靺鞨 부락과 인접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이 침범할까 하여 쳐서 물리치니 말갈이 복종하여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왕이 비류수 중류에 채소잎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그 상류에 사람이 사는 것을 알고 사냥을 하면서 찾아 올라가 비류국沸流國에 이르렀다.

그 나라 왕 송양松讓이 나와 보고 겸손하게 하는 말이

"내가 바다 모퉁이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관계로 일찌기 덕있는 큰 인물을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 뜻밖에 그런인물을 만났으니 참 다행한 일이라 하겠오. 그러나 나는 그대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오"라고 했다.

 

주몽이 대답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로 저 쪽에 나라를세우고 도읍을 정했오"라고 했다.

송양이 다시 말하기를 "나는 여기서 위로 부터 여러 대 동안 왕 노릇을 했지만 이 곳은 땅이 좁아 두 임금이 서지 못할 곳이오 그대는 도읍을 정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우리 나라에 의지하는 것이 낫지 않겠오" 라고 하니

주몽이 그말에 분개하여 그와 말다툼을 하다가 다시 활쏘기로서 서로의 재주를 겨루어 보았는데 송양은 주몽의 상대가 되지않았다.

 

2년6월 송양이 비류국 백성과 함께와 주몽에게 항복하므로

왕은 그곳을 다물도라 하고 송양에게 작위를 주어 그 곳 제후로 삼았다.

고구려 말에 옛 것을 되돌려 받는 것을 다물이라 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4년7월 왕궁과 그 주변 성곽을 완성했다.

6년10월 오이烏伊와 부분노에게 명령하여 태백산 동남쪽에 있는 행인국을 쳐 뺏아 그 땅을 고구려 성읍으로 만들었다.

10년11월 부위염에게 명령하여 북옥저를 쳐 멸망시키고 그 땅을 고구려 성읍으로 삼았다.

14년8월 왕의 어머니 유화 부인이 동부여에서 돌아가셨다.

동부여 금와왕이 태후의 예를 갖추어 장사하고 혼을 모실 사당까지 세웠다. 

 

14년10월 왕이 사신을 동부여에 보내 고구려의 토산품으로 선물하면서 그 은덕에 보답했다. 

19년4월 유리流利가 부여에서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 왔다. 왕이 기뻐하며 태자를 삼았다.

19년 왕이 돌아가니 용산에 장사하고 東明聖王이라 시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