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역사문화

동정(銅鼎)과 동복(銅腹)의 意味

鄕香 2006. 8. 3. 19:36
 

지구상 유목민의 대표격인 스키타이人들은 콜드론cauldron이라는 속이 깊은 靑銅製 솥(銅腹)을

말에 실고 다녔답니다.

그래서 어느 유적에서 콜드론이 발견되면 유목민의 유적이라 단정해도 좋습니다.

 동의대학의 박물관 팀이 김해의 양동리의 가야 고분에서 동복을 발굴하여 가야의 지배 계급은

유목민의 전통이 있었음을 밝힌바가 있습니다.

 

 

〈 동복(銅鍑) : 원삼국-초기철기시대/ 김해 대성동 47호墳/높이18.8cm/ 경성대학교 所藏 〉

 

반면에 중국의 고대 왕조인 은(殷)나라와 주(周)나라에서는 통치의 상징으로

네발 달린 靑銅製 방정(方鼎)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목민의 동북 문화권과 농경인의 방정 문화권은 확연히 구별되어 그 두 문화권의 주민들은

흉노(匈奴)와 한(漢)족의 대결로 이어져 지금까지도 그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한반도에서 중국식 방정이 한개도 발견되지 않은 현상은 한(韓)민족의 역사가

한(漢)족의 문화와는 관계없이 시작되었고 이상스럽게도 地理的으로 먼 유목민의 문화를 기초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고고학적  유물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유목민의 언어인 알타이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에와서 우리나라가 저들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것에,  

많은 우리의 遺物들이나 風俗들이 '어불성설語不成說'인 것을 입증합니다.

 

< 동정(銅鼎) : 원삼국시대/울산 하대 23호塚/높이 49.8 cm/ 부산대학교 所藏>

 

중국에서 상주(商周)시대 이래 사용된 예기(禮器)의 하나로서,

소유자의 신분과 권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물입니다.

주대(周代)에는 신분에 따라 사용에 엄격한 차등이 있었고, 정(鼎)을 옮기는 것은

곧 나라를 잃는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녔습니다.

<<禮記>>에는 " 士는 1 혹은 3鼎, 大夫는 5鼎, 鄕은 7鼎, 諸侯및 天子는 9鼎을 쓴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신분에 따라 크기와 형태에서 차이가 있고, 대체로 중앙에서 배급하여 사용되었습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期)를 거치면서 엄격한 용정제도(用鼎制度)는 파괴되었으나

그 상징적 의미는 여전하였습니다.

한대이후(漢代以後)에는 동정의 규모가 작아지고 또한 도정(도정)을 대체되어 부장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낙랑(樂浪)의 중심지인 평양과 진·변한 지역에 해당되는 울산 하대, 김해 양동 유적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이 세발솥은 양식적인 특징으로 보아 중국 전한(前漢) 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크기나 형태에서는 중국에서도 유례가 없는 독특한 것이어서 우리나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리고, 제작과 부장에는 약 200~300년의 시간차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동정의 제작과 입수 과정, 부장 의미는 당시의 대외 관계와 정치적 성격 파악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