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을 이렇게 구석구석 다녀 보기는 처음이다. 한탄강이 흐르는 천연 기념물적인 곳이라 힐링하는 기분으로 영평팔경길을 들어섰는데, 포천천(영평천) 가의 하천 옆 경작지에서 걷어낸 비닐하우스파이프와 폐비닐 각종 쓰레기가 하천 비탈진 둑에 산처럼 쌓여 있고 일부는 무게에 쓸려내려 하천 바닥을 덮었거나 바람에 나풀거리고 건너편 하천둑에는 2.7km에 달하는 거리에 소를 키우는 거대한 축사들이 연이어 들어서 있다. 도대체 이런 하천 둑에 축사를 허가해준 포천시 공무원과 시장은 하천이 똥개천이 되도록 환경 점검은 고사하고 장려한 꼴이 아닌가! 싶다. 저 어마어마한 축사에서 영평천으로 흘려버린 소똥물이 하천 바닥에 침전물로 쌓여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하고 흐르는 물 또한 검붉은 폐수가 되어 마치 피복염색물이 흘러가는 듯이 온 하천을 검붉게 흐르고 있다. 하 -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이만한 시골 위치면 맑은 물이 흐르고 우리나라 토종 물고기들이 살만한 곳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연이 이렇게 죽어가면 사람이 어찌 살수 있단 말인가! 서울을 관통하는 청계천이나 여러 지천인 정릉천, 연신내천 안암천 등 수많은 하천은 물론 중랑천, 그리고 구리시의 왕숙천도 이렇게 썩어 흐르지는 않는다. 오히려 잉어가 살고 있는데 비해 한적한 농촌의 하천이 어쩌다 이렇단 말인가 지하수가 썩고 땅이 병들어 가는데, 포천시는 뭘 하고 환경부는 뭘 하는지 안타깝고 한심한 일이 아닌가 내 고장 향토는 어머니와 같은 곳이다. 내 고장을 사랑하고 아낄 줄 모르는 사람들의 심성을 불 보듯 뻔한 일 아닌가! 내 다시는 포천에 발 들이고 싶은 생각 사라지고 포천에서 생산되는 토산물 또한 불매운동이라도 하고 싶은 심경이다.
이용한 교통편 : 동서울버스종합터미널 신철원 강포리행 버스 승차 - 양문1리버스터미널(영중농협) 하차.
귀 가 : 한탄강지질공원센터정류장 53번 승차 - 포천시청정류장에서138번환승 - 의정부흥선지하도버스정류장하차 - 의정부역 1호선 승차 - 회기역 중앙선 환승 - 구리역.
「포천 영평은 지금의 일동면, 이동면 등 포천의 북부 지역의 옛 이름입니다.
영평에는 예부터 많은 계곡과 빼어난 풍치가 많았는데, 특히 화적연과 와룡암, 선우담, 금수정, 백로주,창옥병, 청학동, 낙귀정지 등 여덟 곳의 경치가 뛰어나 그 이름이 높았습니다. 이들 명소를 묶어 '영평팔경'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영평팔길에서 만나는 '낙귀정지'는 영의정이었던 황희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금수정'은 봉래 양사언의 시조비 현판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시인 묵객들이 지나칠 수 없었던 영평팔경! 선조들이 느꼈던 감성을 생각하며 자연의 웅장한 아름다움을 느껴 보시길 바랍니다.」
(경기옛길 가이드 북에서)
영평팔경 길 (거리 18.2km / 5시간 30분 소요)
영중농협 - 낙귀정지 - 금수정 - 운산리자연생태공원 - 주상절리 길(구라이길) - 한탄강지질공원까지 나는 몇 시간이 걸릴까 .. 현재 07시59분,
경흥길은 구리시에서 가깝고 교통편도 좋아서 아침 이른 시간이 아니라도 제 1 코스부터 6 코스까지는 모두 전철을 타고 의정부역 인근 흥선지하도버스정류장에서 138번 버스로 환승하여 각 출발점에 쉽게 접근 할 수 있었지만, 제 7 코스 영평팔경길은 코스 거리가 무려 18km에다 겨울 해는 짧고 출발점이 가깝다 할 수 없기에, 이제까지와 다르게 짧은 해에 시간을 벌기 위해 동서울시외버스터미널을 이용하기로 했다.
새벽 5시50분에 집을 나와 많고 많은 강변역 가는 버스를 타고 동서울터미널에서 강포리행 7시 차를 타고 양문에서 내려 시각을 보니 7시50분이다. 사진 몇 장 담고 08시00분, 영종농협 옆 골목길로 들어섭니다.
좌측 전신주에 이정표 선생께서 逆順으로 갈 사람은 곧장 뻐꾹천2교로 가시고 나는 우측 영중농협 옆 골목길로 가랍니다.
이 몸은 아직 조반 전인데 백반집은 안 보이고 웰빙인지 뭔지 안 들어가 본 건강원만 보이네.
양문교회 앞을 지나 조만치 둑이 보입니다.
영평천 둑과 두 갈래길 우측 길가에 이정표 씨가 반깁니다. 그 뒤로 뻐꾹교에서 은현교로 이어진 둑길이 보입니다.
이정표 옆 이야기판을 읽어 보니 낙귀정이 있던 자리가 뻐꾹천교와 포천천이 합치는 곳이라 합니다. 그럼 6길에서 지나온 뻐꾹천이 영평천으로 유입되는 곳이겠네요. 은현교를 건너 길 가기 전 좌측 둑길로 들어서 뻐꾹교에서 볼 수 있을 낙귀정지를 보고 다시 이 자리로 와서 은현교를 건너가야겠습니다.
일단 은현교 앞으로 갑니다 은현교 앞에서 좌측 뻐꾹교로 갑니다 낙귀정지를 보기 위해서..
은현교 앞에서 뻐꾹다리로 향해 좌측 둑길로 갑니다.
뻐꾹다리로 가는 길에 둑에서 바라본 낙귀정지 앞 영평천 모습입니다. 하천 풍경은 그림 같은데, 흐르는 물은 검붉은 빛으로 염색물처럼 보입니다.
줌으로 당겨보니 낙귀정 터 아담한 바위봉 앞 영평천 소똥물 흐르는 물길에 예쁜 바위들이 올망졸망 보입니다.
《낙귀정址》
영평천으로 합류되는 위치에 둑길을 이어주는 뻐꾹천교 중간에서 마주본 영평천 건너 둑 안쪽에 위치한 아담한 바위봉입니다.
《뻐꾹교》
낙귀정지를 봤으니 다시 뻐꾹교를 건너 은현교를 향해 갑니다. .
다시 은현교 앞으로 왔습니다. 은현교를 건너갑니다.
은현교를 건너서 은현마을로 갑니다.
거사리 한자가 巨士里라면 = 큰 선비가 산다, 또는 居士里라면 선비가 산다.
은잿말 = 隱宰村 = 재상이 운둔하는 마을,
은현마을 = 隱賢村, 아이러니 하게도 떳떳해야할 어진이가 숨어 살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거사리이든 은잿말이든 은현마을이든 뜻은 한가지로 상통하네요.
차도 · 인도 구분 없는 길인만큼 귀를 쫑긋 세우고 길 갑니다.
이리저리 길도 많다만 굴다리로 갑니다.
큰 선비가 있었다는 거사리를 향해 곧바로 갑니다.
인차도 구분 없는 넓지 않은 길인만큼 좌측 난간으로 바짝 붙어 앞뒤 살피며 갑니다.
가축사료차인가 아무튼 우측 길로 들어섭니다.
한 길이 둘로 갈라지니 삼거리가 되고 두 갈래 길이 되는구나! 조선시대도 아니고 이리 갈 가 저리 갈 가 걱정할 일 없다네 갈래 길 가운데 우뚝 선 전신주에 길잡이 선생 이정표가 있나니 - 이제 외길 두리번 거릴 일 없으니 내 좋아하는 최희준 선생의 노래가 절로 나오는 구나 -
"팔도강산 좋을시고 딸을 찾아 백리길 팔도강산 얼싸안고
나를(아들) 찾아 천리길 에헤야 데헤야 우리 강산 얼씨구
에헤야 데헤야 우리 강산 절씨구 잘 살고 못 사는게
마음 먹기 달렸더라 잘 살고 못 사는게 마음 먹기 달렸더라
줄줄이 팔도강산 좋구나 좋아 "
"팔도강산 좋을시고 살판이 났네 팔도강산 얼싸안고
웃음꽃을 피우네 에헤야 데헤야 우리 강산 얼씨구
에헤야 데헤야 우리 살림 절씨구 잘 살고 못 사는게
마음 먹기 달렸더라 잘 살고 못 사는게 마음 먹기 달렸더라
줄줄이 팔도강산 좋구나 좋아 "
바위 위에 솟아 자란 저 나무, 바위의 굳센 기를 받아 아직도 마른 이파리 떨 굴 줄 모르고 있나니!
농지는 그냥 농지래야 좋은데, 저기 무슨 괴기스런 공장이 불쑥 솟아나 내 그림을 망치는 고 -
어쨌거나 공장을 지나고 보니 길과 둑이 가로 막고 섰네. 정면 가운데 어린 나무 무리지어 자라는 곳에 이정표 선생 리본孃과 대동하여 내 갈 길을 알려주네 -
영평천 둑을 따라갑니다. 둑너머 풍경이 궁금은 한데 보나마나 검붉은 소똥물이 악취를 풍기며 흐르겠지요..
둑에는 빈 참호가 30m간격으로 하천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있네.
참호가 바라보는 풍경은 어떤가? 참호로 들어가서 바라본 전경입니다.
빈 참호를 경기옛길 리본이 지키고 있네.
경기옛길 리본이 지키고 있는 참호에서 볼 수 있는 경치는 어떤가 싶어 바라봤다오. 내 추측처럼 흑갈색 소똥물이 河海 같소이다. 고약한 냄새에 숨을 멈추었소. 참으로 용납할 수 없는 天人共怒할 일일세.
하천을 따라 2.7km에 달하는 거리에 수많은 대단위 牛舍가 줄지어, 배설물을 세척한 더러운 물을 하천으로 흘려보내 포천천은 시커먼 소똥물이 악취를 풍기며 땅으로 스며들며 흐르고 있습니다. 좁은 국토 이 강산의 모든 하천이 오염되고 썩고 지하수마저 오염되고 우린 그 물 되먹으니 만병이 창궐하고 토종 물고기 씨 말리는 건 외래종 배스가 아니라 인간일세. 주변 주민들께 고통을 주고 모두가 누려야할 좋은 환경을 제 것인 양 마구 훼손하는 악질적인 농장주인은 어떤 인물일까! 도대체 환경청이나 포천시 당국은 이런 일을 왜 방치하는지.. 그 까닭이 뭘까!
열악한 환경에서 키워 스트레스 받은 한우 쇠고기 먹느니 미국이나 호주의 넓은 초원에서 평화롭게 키운 수입 쇠고기 먹는 것이 건강에도 좋겠습니다.
큰 길로 올라서니 제법 큰 다리가 반기네.
영평교를 건너 갑니다.
영평교에서 바라본 우측 남쪽 풍경입니다. 이처럼 큰 하천 바닥이 쇠똥 썩은 것이 침전되어 시꺼멓고 소똥 냄새를 풍기며 뻐꾹천 앞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영평교 좌측 북쪽 풍경은 그림 같은 데, 개울 바닥은 침전된 소똥이 썩어 물빛은 검고 향기롭지 못한 나쁜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이 물길은 영평교에서 금수정 앞을 지나 여전히 악취를 대동하고 검게 썩은 물이 흐릅니다. 위로는 금수정 그 너머로부터 시작하여 아래로는 뻐꾹교 그 아래로 끝 모르게 흐르고 있습니다. 그 길이가 몇 십리가 족히 될 것입니다. 좌측에 얼핏 보이는 끝 모르게 이어진 건축물이 모두 축사들입니다.
영평교를 건너서 바라본 全景, 우측 전신주에 달린 이정표가 길 따라 가지 말고 영평교 아래로 들어서라고 일러줍니다.
영평교를 건너와서 다리 밑으로 갑니다. 하천산책길이라도 있나?
영평교를 건너 바로 좌측에 있는 둑으로 가기위해 다리 밑으로 우회하는 겁니다.
리본이 반갑다고 하늘하늘 춤을 추네요.
하천 둑에 자리잡고 있는 엄청난 규모의 축사입니다. 이렇게 크고 긴 축사가 하천을 따라 보이는 것만도 그 길이가 2.7km가 넘습니다. 이 축사들이 하천 오염의 주범이지요.
하천둑길은 외길, 주변은 左牛舍 右비닐막사 쳐다보기도 싫고 공기마저 향기롭지 못하고 저만치 보이는 산자락까지는 가겠다 싶어서인지 내 18번곡 중 하나인 최무룡 님의 노래가 절로 나옵니다.
"헤어지기 섭섭하여 망설이는 나에게 굿바이하며 내미는 손 검은 장갑 낀 손
할 말은 많아도 아무 말 못하고 돌아서는 내 모양을 저 달은 웃으리 -
할 말은 많아도 아무 말 못하고 돌아서는 내 모양을 저 달은 웃으리 -"
노래 한 곡에 분기점에 이르른 듯합니다.
헐렁한 정자 형태를 지나자마자 좌측 이정표 푯말 있는 곳에서 작은 하천으로 내려갑니다.
징검다리를 이용해서 작은 하천(枝流)를 건너 큰 하천 둑길로 들어섭니다.
영평천으로 흘러드는 도랑물은 맑습니다.
징검다리 건너 큰 하천 둑길에 올라서서 30m 거리에서 우측 길로 들어서서 비닐하우스 앞으로 갑니다.
단 여기서 이 길로 들어서지 않고 하천 둑길로 곧장가도 금수정에 도착됩니다.
전신주에 이정표가 좌측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벌판 농경지의 비닐하우스, 외관상 보기는 좀 그래도 환경 면에서 하천을 죽이고 자연을 죽이는 가축농장보다 나는 좋아합니다. 다만 폐비닐 좀 마구 버리거나 방치하지 말아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큰 길로 나섭니다.
여기가 창수면에 속하나 보네요. 창수면 오가리에 내 둘째 이모님이 사시는 곳이지요.
포천야구장 입구 지나서 창옥교 건너자마자 좌측 콘크리트로 포장된 둑길로 들어섭니다.
창옥교를 건너서 바로 좌측으로 둑길이 보입니다. 들어섭니다.
둑길 입구 건너편 전신주에 양쪽 방향의 이정표가 보입니다.
마주 보이는 봉우리 끝까지 갑니다. 동요 '오빠 생각'을 부르며..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때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우는데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둑길의 하천 쪽은 시멘트 옹벽이요 우측은 가을이면 풍요로운 畓입니다.
내 갈 길에 古宅과 육중한 비석을 대동한 분묘가 버티고 있습니다.
옹벽 너머로 바라본 아름다운 경치입니다.
줌으로 당겨보니 운치 있는 亭子가 있습니다. 저 정자가 金水亭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판이 확인되지만, 글자가 또렷하게 보이질 않습니다.
금수정 건너편 하천에서 바라본 정경입니다. 금수정 아래 절벽 바위면에 양사언 선생이 새긴 '金水亭' 刻書가 있습니다.
'금수정'과 고택 그리고 분묘가 한 곳에 어우러져 연관성을 보입니다.
둑길에서 계단을 올라가니 3代에 이르는 분묘 3기가 세모꼴로 안치되어 있습니다.
안쪽에 김구용 선생의 조부 김방경, 그 앞 우측으로 부 김묘, 좌측에 김구용 선생의 묘입니다.
좌측의 묘비를 읽어보니 「大溫公 金九容 先生 之墳」, 고려 말기 成均館大司成 · 左司議大夫 등을 역임한 文臣으로 본관 안동(安東), 초명 김재민(金齊閔), 자 경지(敬之), 호 척약재(惕若齋) 또는 육우당(六友堂)이며 첨의중찬 김방경(金方慶)의 현손으로 김묘(金昴)의 아들입니다.
금수정이 있는 장소로 발길을 옮깁니다.
지금 시각은 09시57분, 영중농협(07시57분)을 출발한지 2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金水亭》포천 향토유적 제 17호.
영평川 휘돌아가는 바위 절벽 위에 세워진 金水亭은 포천의 영평8경 중제2경입니다. 조선 중기에 金明理가 세웠으며, 정자의 이름은 풍수지리상 소의 머리를 닮았다 해서 牛頭亭이라고 했다가 양사언(楊士彦1517~1584)이 소유하면서 '금수정'으로 고쳐 지었다고 한다. 그 후 안동김씨 일가에게 소유권이 넘어 갔으며, 수차례에 걸쳐 중수되다가 한국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었다. 기단과 주춧돌만 남아 있던 것을 1989년 복원하였다. 현 정자의 현판은 암벽에 새긴 양사언의 '金水亭'이란 글씨를 탁본한 것으로 제작한 것이다.
주위에는 창옥병을 비롯해서 준암 · 연화암 · 동척석문 등 경승지가 펼쳐져 있어 예부터 시인묵객들이 많이 찾아와 시와 풍류를 즐겼다고한다. 당대 최고의 시인이며 명필인 양사언을 비롯하여 이덕형(李德馨1561~1613) · 한호(韓濩1543~1605) 등 역대 이름 있는 선비들(名儒)과 얽힌 일화와 유적이 남겨져 있다.
지금도 볼 수 있는동북쪽 암벽에 새겨진 '金水亭'이란 양사언 선생의 글씨를 비롯하여 냇가 한복판 경도(瓊島)라고 쓴 글씨 등은 그 옛 자취의 일부이다.
'금수정'은 영평8경 중 제2경으로 본래의 이름은 우두亭으로 아들 명리가 은퇴 후 아버지를 기려 이곳에 정자를 짓고 평소 아버지 김구용이 이 자리는 소의 머리를 닮았다고 말하곤 하였던 것에 정자 이름을 牛頭亭이라 했습니다. 양사언은 포천 안동김씨 외손이었는데 어떤 연유인지 우두정이 양사언에게 넘어왔습니다.
안평대군 , 김구, 한호,와 함께 조선 4대 서예가로 불리는 봉래 양사언은 안동김씨의 '金'字와 정자가 있는 창수면의 '水'를 따서 '금수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金水亭』
「단염청풍지 천향낙계자 불견면중인 공여석상자 丹染靑渢枝 天香落桂子 不見眠中人 空餘石上字」
"붉은 단풍 푸른 나뭇가지에 들고, 천향은 계수나무 열매에 떨어지는데, 눈 앞에 사람도 보이지 않으며, 부질없이 돌 위에 글씨만 남기네." 양사언의 『봉래시집(蓬萊詩集)』券1에 수록된 시입니다.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1517 ~ 1584)의 태산가》
옛 한글로 刻書되었습니다.
양사언 선생은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기지리(機池里)에서 출생하셨고, 조선 초기~중기에 활동하신 문신이자 서예가입니다.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 · 창해(滄海) · 해객(海客)이요 본관은 청주(淸州)입니다. 조부(楊悌達)는 통훈대부로 장례원사정(掌隷院司正)을 지냈고, 부친 양희수(楊希洙)는 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를 지냈습니다. 아버지 양희수는 부인으로 파평 윤씨 · 진천송씨 · 문화 유씨 세 명을 두었는데, 양사언 선생은 문화 유씨로 삼척부사를 지낸 유위(柳湋)의 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셨습니다.
1546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동승(大同丞)으로 발탁된 이래로 삼등현감 · 함흥판관 · 평창군수 등 3곳의 수령을 거친 후 내직으로 성균관사성,종부시정을 지냈으며 1564년에는 잠시 관직을 떠나 강원도 고성군의 감호(鑑湖) 곁에 비래정(飛來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머물렀으며, 이후 다시 외직을 자청하여 철원군수 · 회양군수 · 강릉부사 · 안변부사를 역임하셨습니다.
회양군수 때 금강산(金剛山) 만폭동(萬瀑洞) 바위에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 8자를 새겼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합니다. 시(詩)와 글씨에 모두 능하셨는데, 특히 초서(草書)와 큰 글자를 잘 써서 안평대군(安平大君) · 김구(金絿) · 한호(韓濩) 등과 함께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로 불렸습니다.
1581년 안변부사 재임시 지릉(智陵)의 화재 사건에 책임지고 해서(海西)와 장연(長淵) 등지로 귀양 갔다가 1584년 5월 2일 적소에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사당과 묘소는 현재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에 있습니다.
《척약재 김구용 선생 시비 /惕若齋 金九容 先生 詩碑》
척약재 김구용은 判典校寺事로 있을 때인 1384년 行禮使로 명나라에 가다가 명나라와 외교적 마찰로 인해 요동에서 체포되어 南京으로 압송되었다가 大理衛로 유배되던 중 濾州 永寧顯에서 病死하였는데 이 시는 대리위로 가는 배船에서 지은 詩입니다.
척약재 김구용 선생 시비 뒤면입니다.
경지 김구용의 시에 대한 도은 이숭인의 찬문 시.
경지 김구용 시에 대한 포은 정몽주의 찬문 시
경지 김구용 시에 대한 목은 이색의 찬문 시
《포천 안동 김씨 고가터/ 抱川 安東金氏 古家터》 경기도 문화재 자료 138호
조감도
① 문간채 ② 사랑채 ③ 대문채 ④ 안채
이 자리는 조선시대 포천 지역에 거주했던 안동김씨의 종택이 있던 곳이라고 합니다.
원래의 종택이 언제 지어졌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본래 건물은 한국전쟁 때 모두 소실 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후손들이 터를 정리하고 주변에 경작지를 조성하였습니다. 2004년에 실시된 발굴조사를 통해 안채와 사랑채가 있던 곳에서 초석이 발견되었고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안채 사랑채, 문간채 등 4채의 건물을 복원한 것입니다.
문간채
사랑채 측면
안채
안동김씨 고가를 나서 절벽에 새겨져 있는 금수정 각서와 바위에 새겨져 있는 각서를 찾아보기 위해 금수정 앞 하천으로 내려 왔습니다.
금수정 아래 동북쪽 암벽입니다 큰 암벽에 양사언 선생이 새겼다는 金水亭 3글자가 보입니다.
음각으로 새겨진 '金水亭' 양사언이 새긴 글자라고 합니다.
다른 각자를 찾기 위해 절벽아래 바위들을 살펴보며 서북방향으로 가다가 밑둥이 물에 잠긴 큰 바위 면에 직사각형으로 바위면을 깎아낸 그 안에 "武滂" 두 글자를 음각으로 새겨 놓았습니다. 굳쌜 무, 젖을 방, 무슨 뜻일까?
옛 묵객의 刻書가 새겨진 바위를 감아도는 검붉은 물과 그 물 속 바윗돌과 바닥에 뒤덮여 쌓여 있는 소똥침전물의 모습입니다.
포천시가 자랑하는 영평8경 중 제2경 금수정 아래 흐르는 하천이 소똥이 가라앉아 썪어 악취가 진동하고 물빛이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지붕 썪은 이엉에서 떨어지는 붉은 낙수물 같습니다. 이러고도 이리 방치하면서도 제 2 경이라는 허울 뿐인 말이나 글 나대지 마십시요.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 이 아름다운 자연을 이렇게 죽이고 물을 오염 시키면 구역질 유발시키는 그 썩은 물 환경관리자 입부터 찾아 들어갈 겁니다. 포천시민은 다 죽었나 피해가 없지 않으련만, 이런 걸 그냥 보고만 있으니 한심하네. 그 시장에 그 시민일세, 환경부, 포천시장 금쪽 같은 세금 축내면서 뭐하자는 건지..
밑둥에 더러운 소똥 냄새 뒤집어 쓰고 있는 바위에 새겨진 글씨 '武滂'입니다만. 옛 선비의 깊은 뜻은 저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영평천 물길 따라 2km가 넘게 둑에다 저렇게 축사를 허가내준 나으리께서는 어찌 지내시는가?
한번이라도 이 정경을 보기나 하셨는가? 그 인사 참으로 꿀 먹은 벙어리 아닌지!
걸어온 곳을 돌아다본 정경입니다. 건너편에 포천 야구장의 모습이 보입니다.
서북방 물 가운데 큰 바위를 중점으로 기묘한 모습의 바위들이 몰려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이 바위들은 유구한 세월에 바람과 모래 섞인 물길이 빗어놓은 바위들이겠습니다.
奇奇妙妙한 바위들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조형미를 뽑내고 있습니다. 저 아름다운 모습을 에메랄드빛 물결 찰랑대며 바쳐 주고 있었으리라 그러기에 한 시대를 풍미한 명필 한호는 옥섬이라 이름 했으리, 어쩌나 지금은 소똥 썩은 오수가 참을 수 없는 역겨움으로 바위들의 뼈속까지 스며 들고 있나니
아, 그 염치 없는 행실을 무엇으로 다스릴 고, 그저 그 食口에 이 소똥물을 모두 퍼 넣고 싶네.
바위와 바위 사이 여울목 같이 좁은 곳에 큰 돌을 들어다가 징검다리를 놓고 건너 가봅니다.
웬만해도 알아보기 어려운 옛 초서체에서 힘이 넘치누나 -
석봉 한호의 글씨 "瓊島"
얼마나 물빛이 맑고 얼마나 주변이 아름다웠으면 바위를 옥섬이라 이름 지웠을까! 단 두 글자로 아름다운 절경을 함축하셨네.
옥섬의 뒤태
옥섬에서 바라본 바위들의 형이학적 아름다운 형태에서 자연의 신비를 보네. 하지만 이곳을 사랑하던 옛 선비들은 하늘에서 통탄해 마지 않으리라.
이 아름답고 유서 깊은 경승지를 소똥물과 악취로 덮어버린 악덕 축산업자와 이를 묵인하고 있는 시장과 포천공무원 그리고 환경부 공무원들 그 마음가짐이 궁금하다.
이 모두 물과 바람이 빗어낸 아름다운 작품일세.
瓊島의 영역을 벗어나 다시 길 나섭니다.
시골마을을 지나쳐도 소시적 보던 초가와 기와집이 주는 정다운 느낌 구수한 인정 볼 수 없음이 아쉽고 빠른 문화발전이 달갑지 않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세월은 그렇게 흐르는데..
조만치 사거리에 이정표가 우측 길을 가리킵니다.
이정표를 보니 오가리 교차로입니다 철원방면으로 가야겠지요.
재작년 가을 어느 날 자전거를 가지고 전철을 타고 소요산역에서 내려 자전거를 타고 이 길을 거쳐 한탄강세계지질공원까지 간 적이 있었지요.
오가리 보장초교버스정류장 앞을 걷습니다.
보는 즐거움 느낄 수 없고 걷기에 달갑지 않은 아스팔트길 가노라니 노래가 보약입니다. 내 젊은 날에 즐겨 부르던 18번 중 하나 역시 최무룡 님의 '외나무 다리'
"복사꽃 능금꽃이 피는 내 고향 만나면 즐거웠던 외나무다리 그리운 내 사랑아 지금은 어디 새파란 가슴 속에 간직한 꿈을 못 잊을 세월 속에 날려 보내리,
어여쁜 눈썹달이 뜨는 내 고향 둘이서 속삭이던 외나무다리 헤여진 그날 밤의 추억은 어디 싸늘한 별빛 속에 숨은 그 님을 외로운 세월 속에 어이 잊으리-"
재작년 자전거를 타고 갈 때는 조 앞에서 우측 길로 갔었는데..
왠지 낯설지 않은 이 길, 아, 내 이모님 댁 가는 길이 맞습니다. 경기 광주군 돌마면 하대원리에서 이곳 박氏 집안으로 출가하신 둘째 이모님, 12남매중 왕초이신 우리 어머님은 90세의 일기로 하늘에 오르신지 어느덧 5년이 넘었습니다. 그 얼굴 이모님에게서 얼핏 찾을 수도 있으련만, 북바치는 가슴으로 먼 길 가는 나그네 다음을 기약하고 그냥 스쳐 가옵니다. 아- 어머니 내 엄마! 너무 그립습니다 -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에 기나긴 밤 어머님 하고 둘이 앉아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서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 알아보리라 알아보리라-"
긴 덕고개를 넘자니 노래만 나옵니다.
" 머나 먼 저곳 스와니 강물 그리워라 날 사랑하는 부모님 이 몸을 기다려
이 세상에 정처 없는 나그네의 길 아 그리워라 나 살던 곳 멀고 먼 내 고향,
정처도 없이 헤매 이는 이 내 신세 언제나 나의 옛 고향을 찾아나 가볼 가
이 세상에 정처 없는 나그네의 길 아 그리워라 나 살던 곳 멀고 먼 내 고향- ,"
표지석의 형태에서 여인의 몸매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만치 삼거리에서 운산리 쪽으로 횡단보도를 건너갑니다.
광산골 이라는 이름이 왠지 강원도 광산촌의 鄕愁처럼 애잔한 생각이 들어 정류장 전체를 품어 봤습니다.
조만치 보이는 횡단보도를 건너서 흰 천막 같은 건물 쪽으로 갑니다.
봉은사 입구 정류장을 지나 곧장 갑니다.
구라이골로 가는 버스가 있네요.
포천시 운산게이트볼장(하얀 건물)을 지나 곧장 갑니다.
우측의 흰 화강암 표석을 보니 '운산리 자연생태공원' 입구입니다.
운산리자연생태공원에 들어서니 포천천에서 맞아 코에 밴 소똥 냄새가 이곳 맑은 공기에 씻겨나가는 기분이 듭니다..
경관도 좋고 공기도 좋으니 마음은 상쾌하고 몸도 생기 차오르니 더 없는 행복입니다.
"저 새벽 이슬 내려 빛나는 저 언덕은 그대 함께 언약 맺은 내 사랑의 고향 참사랑의 언약 나 잊지 못하리 사랑하는 애니 로리 내 맘속에 살겠네
샛별 같은 그 눈동자 아름다운 얼굴 이 세상에 그 무엇도 비할 수 없도다 어여쁜 네 모양 나 잊지 못하리 사랑하는 애니 로리 길이 길이 살겠네-"
자연의 길을 가노니 사랑이 기쁨이 고마움이 샘 솟습니다. 신이시여 이 자연이 고맙습니다.
예쁜 구라이골 글 碑들
《구라이골》
한탄강 8 경 중 제 7경 구라이 지역은 바위굴이 있는 위쪽에 있다하여 굴바위라고도 불리는데 굴과 바위가 합친 명칭이 이후 변음되어 '굴아위 - 구라이'가 되었습니다. 골짜기 양 옆으로 주상절리가 잘 발달되어 있고 경관이 아름답습니다.
구라이골 둘레길은 바위굴과 맑은 물, 현무암 골짜기가 조화를 이룬 구라이골과 한탄강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둘레길입니다. 현무암 침식지형으로 주상절리와 협곡이 발달한 자연경관이 아름답습니다.
저 다리 이름은 알 수가 없다. 분명 하늘다리는 아닌데 - 구라이협곡을 가로 지른 다리인가 구라이협곡구름다리?
시리도록 파란 하늘아래 하얀 방칼로 앙상하지만 아름다운 나목들, 연갈색의 마른 풀과 유려하게 휘어진 길, 이 모두가 아름다운 감성으로 내 가슴으로 파고 든다.
다리 건너 언덕 위에 야영장인가본데 주상절리 형태로 지은 시설들이 재밌다.
시각을 보니 ㅎ 正午일세.
잠깐 길을 벗어나 둔덕 위에 올라서보니 구라이골 캠핑장이라는 글판이 보인다.
가운데 관리동, 화장실, 매점 등 공용시설물을 두고 원형으로 한쪽은 시설물이 기울어진 상자 모양을 하고 반원으로 배치되었는데 아마도 주상절리를 모토로 한 것 같다.
다른 한쪽은 카라반 앞에 하나같이 모두 흰 천막을 세워 언뜻 보기에 마치 고깔모자를 쓰고 있는 듯 보인다. ㅎㅎ
캠핑장을 나와 다시 가던 길로 들어섭니다.
저만치 한 중년남성이 무선장난감 차를 앞세우고 걸어갑니다. ㅎ
구라이골을 가로지른 이름모를 구름다리가 점점 크게 다가옵니다.
구라이골을 살펴볼 수 있는 두 번째 관찰대 입니다.
관찰대에서 바라본 구라이골이 한탄강협곡과 합치는 곳입니다. 아, 비취색의 아름다운 물이 보입니다. 이제 까지 소똥물에 찌든 눈을 저 경이로운 물빛에서 치유를 받습니다.
용암의 발생과 흐름에 따른 생성된 형태와 주상절리의 형성과정 등을 설명을 현무암에 새겨 놓은 바위입니다.
측량 점 옆 벤치에서 협곡을 살펴보기에 좋은 곳입니다.
큰 여울강(漢灘江)의 모습이 모두 옥빛만 같습니다
앙징스런 다리?를 건너 오염되지 않은 황토빛 흙을 밟으며 흥겨워진 마음으로 다시 비둘기낭폭포 방향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작은 오작교?를 건너 좌측에 있는 관찰대의 모습 너머 하얗게 빙결된 물을 봅니다.
좌측 상부 귀퉁이가 구라이골이 한탄강 협곡과 합치는 곳으로 물빛도 신비한 큰 여울물이 흐르는 좌측 빙결된 곳입니다.
여울 건너는 멋진 주상절리요 이 쪽은 금빛 모래와 현무암 잔돌들이 오손도손 정답고 그 사이로 만물의 생명수가 맑고 고운 빛으로 감동을 줍니다.
다리 이름을 찾으려고 살펴보니 아직 준공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미명의 다리 밑에서 다리를 처다 봤다 시선이그대로 파란하늘로 관통한다.
바닥이 없었던 걸가 줌으로 다시 보니 촘촘한 마름모형 그물망이 보인다.
일부 가운데에는 일정한 폭으로 직사각형 투명한 창을 낸 판을 깔았다. 공정이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인다.
이제 큰 여울을 끼고 돌아간다.
한탄강협곡을 배경으로 한 포토존이 보인다.
청석을 곱게 간 면에 한탄강 형성 기원을 간략하게 세겨놓은 석비에 사진틀과 어우러 멋진 포토존을 꾸몄다. 그 청석의 빛깔 내 눈을 홀린다.
둘레길 종점은 100m 남았다는데, 내 종점은 얼마나 남았을까? 현재 시각은 12시39분,
건너편 파란하늘에 그려 넣은 듯 둥글둥글한 이어진 봉우리들 보노라니 갈색 진흙을 뒤집어 쓴 거무죽죽한 협곡의 현무암이 눈을 흘긴다.
이정표를 보니 여기에서 비둘기낭까지 3.65km 남았다네.
큰 산을 병풍을 삼고 좌청룡 우백호를 양 옆에 두고 앞에 큰 여울 금천(큰 여울강)이 흐르는 그 안에 고즈넉이 앉아 있는 작은 봉우리 보노라니 그 아늑함에 아슴아슴 잠이 온다. 아 저곳이 길지요 천하명당이로구나!
길은 잠시 큰 여울가를 떠나 산자락을 감는다.
산자락을 돌고보니 평평한 마당이 있네.
마당을 가로질러 나간 길은 다시 되돌아오듯이 휘어진다.
길은 다시 작은 마당으로 들어선다.
검은 푯말 뒷머리에 경기옛길 이정표가 화사하다.
푯말 앞면은 뒷모습과 생판 다르게 화려하다.
7길 종착지까지는 3.5km, 지금 시각은 12시 50분,
군을 오합지졸로 만들고 철책선도 방치하면서 그래도 대전차방호벽이 남아 있는 곳도 있네!
길은 내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큰 여울로 내려가는 가 보다.
현재 시각은 12시 54분, 영종농협에서 08시에 출발했으니 현재 4시간54분이 걸렸구나!
다리 밑 영중농협으로부터14.9km 지점이요 갈 길은 3.3km이다.
쉬면서 咸興差使의 이야기도 읽어 보네. 내 이제까지 이 이야기를 몇 번이나 읽고 들었을까! 애증의 살곶이다리 이야기와 함께 ..
한탄강협곡에 내리는 겨울햇살이 봄볕처럼 따습다.
큰 여울이 흘러가는 쪽 정경,
큰 여울이 흘러오는 쪽 풍경, 내 가야할 방향일세.
아, 얼마나 예쁜가! 울퉁불퉁한 이 곰보돌들이 .. 너절한 꾸밈도 가식도 없는 순수함에 넋을 놓겠네.
오리 한 무리가 평화롭다 오염된 하천이 아닌 청청옥수에서 노니는 너희를 보는 내가 즐겁다.
고요한 협곡에 흐르는 물소리는 맑은 향기가 난다.
경기옛길에서 처음 만난 얼음빙판, 네 발 짐승이 되었다.
여울 건너편 절벽에 홀로세의 열화꽃이 피었네.
비록 곰보는 아니지만, 너도 내게는 금강석이라네.
열화꽃 아래 진행 중인 침식 동굴도 보이고, 여울에 흰 문양도 예쁘고..
물길의 힘을 받은 이짝은 완만해 졌고 물길에 시달림을 덜 받은 건너는 주상절리로 남아 있고 그런데 물빛은 어찌 저리 고운 거냐! 보는 내가 너무 좋구나!
이제 길은 가파른 계단으로 오르고 있다.
계단을 오르다 맑고 고운 너를 본다.
보고 또 보고 아무리 봐도 네 모습 또 보고 싶구나!
에고 하마터면 머리통 깨질 뻔 했네.
이제 협곡 위 벼룻길을 갑니다. 현재 시각은 오후 1시11분
저 기분 좋은 억새풀 너머 뭉실뭉실 봉우리도 아릅답구나!
아, 길이 노래를 청하네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자 산 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으련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산골짝엔 물이 마르고 기름진 문전옥답 잡초에 묻혀있네 - "
"새들도 집을 찾는 집을 찾는 저산 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으련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바다에는 배만 떠 있고 어부들 노래소리 멎은 지 오래 일세 - "
오랜 만에 오기택의 '고향 무정'을 불러 본다. 경기 옛길 덕분에,
길은 예쁜 산자락 아래로 숨어 들어가네.
"생각난다 그 오솔길 그대가 만들어준 꽃반지 끼고
다정히 손잡고 거딜던 오솔길이 이제는 가버린 아름다운 추억- "
그대가 만들어준 이 꽃반지 슬픈 밤이며 품에 안고서
눈물을 흘리네 그대가 보고 싶어 그대는 머나먼 밤 하늘의 저 별- " 은희의 노래도 부르고..
제 7길 종착점 비둘기낭까지 이제 1.67km 남았다. 지금 시각은 오후 1시 21분이다.
옥빛인들 저리 고울까 초록 고운 저 물빛 천상의 빛깔 일세. 입에서 저절로 동요가 흘러 나오네 -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뭔지도 모르는 마치 軍 초대소 같이 생긴 건물을 향해 리본을 따라갑니다.
궁금한 건 못 참지! 해서 줌으로 당겨 보지만, 모르긴 마찬가지 마치 고려 때 대접처럼 깔때기 모습에 유리로 되었는데 승강기까지 딸려 있네 거참!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 ㅎㅎ 좀 걸어 왔더니 이제 조금 힘이 든다 이거요?
이 정도 계단이 지금은 길게만 느껴지네.
나선형 전망대를 오르기 위해 계단을 오르려는데, 갑짜기 어려서 여자애들이 고무줄 놀이를 하면 부르던 동요가 생각이 나는지, 나이 들면 어려진다더니 나도 그런가 보다. 어쨌거나 이제부터 '고추 먹고 맴맴 담배 먹고 맴맴 ~~,
"아버지는 나귀 타고 장에 가시고 할머니는 건너 마을 아저씨 댁에 고추 먹고 맴맴 담배 먹고 맴맴"
펼쳐질 경관에 대한 호기심에 이끌려 나선형의 소라 속 같은 곳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목마처럼 발길이 맴을 돌며 오릅니다.
큰 여울강(漢灘江)을 중심으로 좌측은 '한탄강생태경관단지' 우측은 '한탄강세계지질공원' 입니다.
《한탄강 용암대지의 진화 - 생태경관단지》
한탄강에 홍수조절댐이 건설되면서 광활한 홍수터 부지가 생겨났습니다. 이곳은 한탄강의 용암대지로 예전에는 논농사를 하던 곳이었는데, 홍수터 부지가 되면서 많은 이주민들을 발생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침제된 지역 경제를 활성화기키기 위해 대규모의 생태경관지를 조성하게 되었습니다. 논으로 사용되던 용암대지가 자연이 숨쉬는 드넓은 꽃밭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이 겨울이 꼬리를 감추면 이내 봄의 정령이 저 넓은 대지에 아름다운 숨을 불어 넣어 꽃들의 향연을 열겠지요.
봄 여름 가을이면 온갖 꽃이 저 들을 알록달록 꽃들이 수를 놓을 것입니다.
파란 하늘 아래 큰 여울강을 중심으로 좌측은 '한탄강생태경관단지' 우측은 '한탄강세계지질공원' 을 보는 것 만으로도 가슴이 확트이고 폐가 즐겁다고 마구마구 뜁니다.
그런데 이 전망대 이름이 뭐지? 아무리 둘러봐도 이름이 안 보이네..
좌측 길로 들어섭니다. 현재 시각은 오후 1시 49분,
도로 좌측에는 데크계단이 보이고 우측에는 이정표 푯말이 있습니다. 좌측 데크계단으로 내려갑니다. 길 옆 우측 이정표를 보니 비둘기낭까지 0.18km 입니다.
데크계단으로 들어섭니다.
가파름이 좀 심합니다.
올해는 겨울 가뭄이 심해 제대로 눈을 볼 수 없었다. 잔설이나마 이리 보니 시 하나 떠오르네
'初野'
지난봄 배꽃 질 때 왼 밤을 지세더니,
겨울밤 내리는 눈을 배꽃인양여기고
올빼미 조릅던 눈을 그리 부릅떴느냐
초행이 아닌 듯 거침없이 오시는 눈,
도탑게 쌓여 노니 보는 내가 따숩다.
바람은 또 어이알고 먼저 덮고 누웠느냐
쌓이고 더 쌓이면 情 만큼은 쌓이는가
봉창을 여잡으니 梨園인듯 좋다 만은,
어진님 오시는 길에 버선목이 젖을라.
올겨울은 풍성한 눈 내림이 없었다. 마른 겨울에 이렇게 보는 잔설만으로도 반가움이 앞선다. 잔설을 보노라니 어릴 적에 여자 애들이 고무줄놀이를 하며 부르던 노래도 생각이 난다. 두 여자아이가 고무줄을 길게 늘여 맞붙잡고 노래를 부르면 한 아이는 그 곡조에 맞춰 팔랑팔랑 춤을 추듯 고무줄 선을 이리저리 넘나 든다.
"깜깜한 밤중에 하얀 눈이 왔구나 하얀 눈이 밤새도록 내렸구나! 가자가자 눈길로 자꾸자꾸 내려가 우리가 걷는 이 길이 백두산까지 뻗었다 백두산 구경을 하러 가자."
큰 여울의 협곡과 비둘기낭협곡이 만나는 지점입니다만 나무들과 위치적으로 시원하게 보고 담을 수가 없어 아쉽습니다.
길 옆 나뭇가지 사이로 계곡 건너편에 비둘기낭폭포로 내려가는 데크계단이 보입니다.
비둘기낭폭포로 가기위해서는 계곡 끝머리에서 다시 반대편 길로 되올라가야하겠습니다.
걷기 좋은 길이건만 지금은 좀 버겁다는 생각만 듭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훔쳐본 기묘한 주상절리의 모습입니다.
비둘기낭 계곡 끝머리에 있는 다리의 모습.
다리에서 바라본 비둘기낭 폭포 상단 계곡 끝 모습입니다. 포천시 영북면 대회산리 415-2(야미리)의 불무산에서 발원한 작은 물줄기가 만들어 낸 비둘기낭 협곡의 꼭지 모습입니다.
드디어 지질공원광장으로 들어섭니다.
한탄강세계지질공원 입구 옆 비둘기낭폭포 입구가 얼핏 보입니다
이곳 비둘기낭에서 촬영한 영상물 소개판이네요.
(비둘기낭폭포 공원지대)
'비둘기낭'이라는 이름은 옛날부터 이곳 동굴과 갈라진 암석의 틈(절리라고 부름)에 멧비둘기들이 많이 서식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합니다. 비둘기낭으로 불리는 폭포는 이곳에서 50m좌측 협곡에 있습니다.
비둘기낭 폭포지역은 폭포, 동굴, 맑고 푸른 물, 협곡의 주상절리 등이 어우러져 신비로움을 자아내고 있어 최근 '선덕여왕, 추노, 최종병기 활, 늑대소녀 등 각종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도 널리 알려지고 있습니다.
좌측에 비둘기낭포포로 내려가는 입구가 있습니다.
비둘기낭폭포 입구
꼬불꼬불 고개를 내려가듯 데크계단을 밟고 내려갑니다.
비둘기낭폭포 이래 沼는 하식동굴로 물이 흘러나오면서 용암지대를 깎아낸(침식작용) 동굴입니다.
천연기념물 제537호 한탄강주상절리는 지금으로부터 약 50만년 전~13만년 전 사이 신생대 제 4기에 휴전선 북쪽 강원도 평강 부근 오리산(해발453m)과 680m 고지에서 화산활동으로 인하여 수 차례 현무암질의 용암이 분출하였습니다. 잘 흘러내리는 성질을 갖고 있는 이 현무암질 용암은 주로 '680m 고지'에서 흘러나와 서울 -원산을 잇는 낮은 지대를 따라 약110km 정도 흘러내려 '평강-철원-포천-연천'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용암대지라는 평원을 만들었습니다. 한탄강을 따라 오늘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깊고 뛰어난 경관의 현무암 협곡은, 이 용암대지를 흐르고 있는 현재의 한탄강을 비롯하여 주변 하천들의 오랜 침식작용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식동굴은 하천의 흐름에 의해 만들어지는 동굴로서 절리나 침식에 약한 부분이 깎여 나가면서 만들어 집니다. 비둘기낭폭포의 하식동굴은 한탄강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침식이 계속 이루어지면서 동굴이 더 커지고 있습니다.
하식동굴의 모습
'비둘기낭 폭포'는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대회산리 415-2(야미리)의 불무산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이 한탄강과 만나는 부근에서 용암대지를 깎아내려(침식작용) 멋진 폭포와 동굴, 깊은 협곡을 만들었습니다. 비둘기낭폭포'는 상류의 작은 낭 폭포, 중간의 비둘기낭 폭포 그리고 4각 내지 6각의 기둥 모양으로 갈라지는 주상절리가 잘 발달한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체의 길이가 약 500m이고 검은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협곡은 폭포, 동굴(하식동굴), 주상절리, 얇게 갈라지는 판상절리, 가뭄에도 지하수가 흘러나와 마르지 않는 맑은 물, 식물 등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탄강 협곡과 비둘기낭 폭포'는 화산활동에 의한 철원-포천-연천 지역의 지질과 지형의 형성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학술적 교육적 가치와 경관적 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되어 국가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기둥 모양을 의미하는 주상절리와 물이 깎아 놓은 하식동굴 》
주상절리는 '기둥모양의 돌 틈'이란 뜻으로 암석이나 지층에서 나타나는 기둥모양의 평행한 틈(절리)입니다. 주로 용암이 분출되어 굳어진 화산암지역에서 많이 나타나는 현상으로, 뜨거운 용암이 분출하여 식을 때 부피가 줄어들면서 만들어집니다. 일반적으로 단면이 6각형 모양을 이루며 용암이 식는 환경에 따라 4~8각의 다양한 모양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와 동해안 해안 등에서 잘 발달되며 내륙에는 한탄강이 대표적인 주상절리 지역입니다.
절리는 형태에 따라 '기둥모양의 주상절리' , '땅과 수평을 이루는 판상절리' . '부채꼴 모양의 방사상절리' 등이 있습니다.
하식동굴은 하천의 흐름에 의해 만들어지는 동굴로서 절리나 침식에 약한 부분이 깎여 나가면서 만들어 집니다. 비둘기낭폭포의 하식동굴은 한탄강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침식이 계속 이루어지면서 동굴이 더 커지고 있습니다.
이제 제 7길 영평팔경길 종착지입니다. 현재 시각은 2시14분, 영종농협에서 사진372장을 담으며 이곳까지 6시간14분이 소요되었습니다. 경기옛길님 덕분에 즐겁게 휠링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영흥길의 마지막 길인 제8길 한탄강세계지질공원길의 출발점입니다.
사진 372장을 올리자니 엄두가 나지 않아서, 추리고 추려서 229장을 올렸습니다.
2022년 2월10일(수요일) 고맙습니다. -鄕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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