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에서 중앙선을 타고 회기역에서 1호선 전철로 환승 후 의정부역에서 내려서 의정부역 흥선지하도입구 정류장에서 138번(의정부 -경복대입구)을 타고 포천시외버스터미널 정류장에서 내려 제5길 반월산성길로 들어섭니다. 여정은, 〈포천시외버스터미널 - 청성역사공원 - 반월산성 - 포천향교 -포천둘레길 - 신북면행정복지센터〉 총 10.4km 소요시간 4시간입니다.
《제5길 반월산성길》
청성산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반월산성은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반월산성은 경흥대로와 수직으로 놓여 있어 대로를 따라 이동하는 적의 경로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지리적인 강점이 있습니다. 반월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경흥대로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경흥대로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문화유적입니다. 특히 청성문화공원, 포천향교, 구읍리석불입상 등과 둘레길로 연결되어 살아있는 역사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기도 합니다.
(반월산성길안내판에서)
〈포천시외버스터미널〉
포천시외버스터미널 앞 우측길에서 첫 사거리 우측 43번 국도로 들어섭니다.
첫 사거리 코너에서 우측 한내교 방향으로 갑니다.
한내교 건너 사거리를 지나 언덕길을 향해 곧장 갑니다.
한내사거리입니다. 앞에 보이는 산이 반월성입니다. 횡단보도 건너 곧장 갑니다.
청성역사공원으로 가는 이 언덕길가 벽에 그린 꽃들이 환하게 반깁니다.
길 건너편 반월산성 아래 청성역사공원으로 들어섭니다.
〈청성역사공원〉
포천시의 역사의 상징물들이 응집되어 있는 곳입니다.
청성역사공원 안 충혼탑 앞은 공사관계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고 스탬프 함 주변은 공사로 인해 어수선합니다.
제5길 반월산성길 스탬프 함입니다. 공사로 인해 충혼탑은 접근할 수 없기에 스탬프 함 뒤편 산성오름길로 발길을 옮깁니다.
청성역사공원을 대변한다고 봐도 지나침이 없을 이정표에서 거쳐가야할 순서를 보니 현충탑은 접근할 수 없었고, 이 후 순서는 '포천시민대종, 포천600년기념탑, 반월성 순입니다.
포천의 숨결과 현충의 혼이 서려서 인가 오르는 길이 자못 엄숙함을 내뿜는다.
고개턱에서 좌측으로 보니 종이 매달려 있습니다.
〈幸運의 鐘〉
〈幸運의 鐘〉
우리 모두 사랑하는 마음과 따뜻한 情으로 21世記 새 천년의 希望찬 미래를 열어가기 위하여 由緖 깊은 靑城문화체육공원에 행운의 鐘塔을 세웠습니다.
뜨거운 사랑과 간절한 所望을 마음에 담아 이 鐘을 치십시오. 온누리에 울려 퍼지는 이 종소리는 抱川의 無窮한 繁榮과 郡民의 所願을 이루게 하며 幸運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抱川郡守 李進鎬)
행운의 종에서 조금 더 들어가보니 측면으로 현충탑이 보입니다. 마음을 경건히하고 잠시 묵념을 드려 명복을 빌고 다시 발길을 돌립니다.
반월성으로 오르는 길입니다.
조만치 언덕 위에 넓은 마당이 있는 듯합니다.
마당 우측(서쪽)에 있는 반월각의 모습입니다.
반월각은 포천시민들이 정성을 모아 건립한 종과 누각입니다.
〈포천 탄생 600년 기념탑〉
반만년 동안 포천을 수호했던 이곳 반월산에 포천 탄생 600년을 기념하여 영원무궁 새롭게 비상하는 상징 기념탑을 세우고 600년의 기록을 담아 100년 후(2113년) 개봉해 후손들에게 길이 전하기 위하여 타임캡슐을 수장하였습니다. 2013년 10월15일. 포천시장 서장원.
600년의 역사 새로운 도약
이 기념탑은 포천에서 생산되는 화강석을 10m 높이로 쌓아 올려 무궁무진 발전하는 포천의 힘찬 기상을 표현했으며, 2개의 주탑은 과거 600년과 미래600년 그리고 포천지역과 영평지역을 상징하여 뫼비우스 띠로 엮어 과거와 미래를 연결함을 뜻한다고 합니다. 주탑 전면부에는 포천시가 길이길이 상승하는 비천상과 市鳥인 원앙을 새겨 포천의 기상이 전 세계로 뻗어 나가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4개 읍.면.동은 市花인 구절초 꽃잎에 새겨 넣어 하나의 포천임을 표현 하였습니다.
포천 탄생 600년 기념탑 좌측 뒤 반월성 오르는 길로 들어섭니다.
오가는 이들의 발길에 낙엽이 가루가 되어 갈색의 포근함으로 뒤덮이고 소나무 울창한 숲길이 향기로움을 가득 뿜어내 심신을 홀립니다.
삼거리에 이정표가 우측은 면사무소요, 좌측 오름은 반월성이라고 친절을 베풉니다.
첫 계단을 오릅니다.
두 번째 계단에서 능선을 봅니다.
《반월성 / 半月城》
《반월성 / 半月城》
포천 청성산 정상을 둘러가며 쌓은 산성 반월성址는 둘레가 1080m로 포천시 주변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성곽 중에 가장 규모가 큽니다. 산성은 고대 삼국시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전란이 일어났을 때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장소입니다. 半月城址는 삼국시대 백제에 의해 축조되기 시작하여으며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한강 지역을을 차지할 당시에 완공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것이 일종의 전설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발견된 홀수해공구단(馬忽受解空口單)이라는 銘文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의 "마홀군"이 바로 포천이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산성이지만, 고려시대에는 폐성되어 한동안 잊혔습니다. 이후 조선시대의 광해군 때 후금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다시 축성하기 시작하면서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삼국시대에 쌓은 성곽터 위에 다시 돌을 쌓는 방식으로 산성을 완성시킵니다. 하지만 인조반정으로 인해 광해군이 폐위된 후 반월성지는 또다시 버려집니다. 정치적 이유로 인해 탁월한 군사적 요지에 세워진 요새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입니다. 반월성은 주변 일대를 파악하기 좋으면서 동시에 적들이 공격하기 어려운 장소입니다. 제대로 활용하였다면 청나라 침공을 막는데 큰 역할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군사적 요새가 정쟁으로 인해 제역할을 못한 것에 아쉬움 없다 할 수 없겠습니다.
반월성 남쪽 성벽입니다. 복원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반월산성 남문〉
잠시 남문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서치성/西雉城〉
서치성은 서쪽에 위치한 치를 이릅니다.
서치성 바로 뒤에 위치해 있는 둥글게 돋아져 있는 지형입니다.
서치성으로 오르면서 측면으로 담은 雉城의 돌출된 모습.
서치성에서 바라본 포천시내 정경.
서치성 위에서 바라본 성 안쪽 뒤에 있는 큰 무덤처럼 솟아있는 윗면은 평평합니다.
《반월성/半月城》
반월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산성으로 1998년에 사적 제40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 청성산(靑城山 283m)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의 형태가 마치 반달과 같아 반월성(半月城)이라고 불립니다.
성의 둘레는 1,080m, 면적 116,305㎡로 산 정상을 둘러 쌓은 퇴뫼식 산성입니다. 반월성은 포천을 관통하는 경흥로와 수직으로 놓여 있어 대로를 따라 이동하는 적의 경로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지리적 장점을 가지고 있는 요충지로 백제가 한강 지역을 점령하고 북진했을 시기에 축조되기 시작하여 고구려와 신라가 한강지역을 점령했을 시기에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신라는629년에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인 반월성을 차지하면서 한강 이북 지역의 영토를 확장하는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반월성은 「여지도서(與地圖書)」, 「대동지지(大東地志)」 등 조선시대 문헌에 "광해군 10년(1618)에 판관 이성구가 개축하여 1623년까지 사용하였으며, 둘레가 1,930尺이고 성 안에는 두세 곳의 우물 및 장령, 삼대, 기우제단, 성황사 등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문헌과 발굴조사를 토대로 볼 때 삼국시대에 주로 이용되었고 이후 폐성되었다가 조선 중기 후금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하여 개축하였고 포천지역을 수호하는 중심 산성으로서 기능하였습니다. 현재 산성에는 발굴조사를 통해 치성雉城과 문지, 건물지, 우물지. 토광, 제단 등의 시설이 발견되었으며 옛 성벽의 2/3 정도 복원되어있습니다.
*퇴뫼식 : 산봉위리를 중심으로 정상 주위에 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성을 축조한 방식.
*경흥로 : 서울과 함경도(강원도)를 연결하는 최단 노선으로 현 43번 국도입니다.
다시 남문을 나서 경기옛길 리본을 따라 갑니다.
경기옛길 리본은 반월산성 북벽으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앞에 돋아나온 성벽이 西雉城입니다.
雉城은 적군이 접근하기 용이하고 좌우 쪽의 방어하기 취약한 성벽을 측면에서 지원 공격하기 용이하게 성을 외부로 돌출시켜 쌓은 요새입니다.
치성 앞에서 바라본 서쪽 성벽의 모습
서쪽 성벽 끝 모퉁이에서 바라본 북쪽 성벽의 모습으로 서벽과 북벽이 만나는 모서리(귀퉁이)도 좌우 성벽을 살펴보기 용이하여 치성의 역할을 합니다.
〈북문 입구〉
안내리본이 북문을 통해서 성 안으로 들어섭니다.
서치성 뒤에 있는 원형의 돈대 위 모습은 원반처럼 둥글고 테두리에는 점점으로 돌이 둘려져 있고 중심부는 조금 움푹한 모습입니다.
원형의 돈대 뒤편 모습입니다. 우측에 토광지터가 있고 좌측은 북쪽 성곽이 뻗어 있습니다. 경기옛길 리본이 성곽을 따라 이어지고 있습니다.
〈토광지 /土壙址〉
토광의 명칭은 저장공(貯藏孔), 저장혈(貯藏穴), 구덩유구, 소형유구 등으로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고 있으나 대체적으로 저장시설이라는 개념입니다. 반월성에는 총 27기가 확인되었는데, 헬기장 주변에서 8기, 동치성 주변에서 4기, 동문지 안쪽 대형기와 건물지 내부에서 12기, 동문지 남쪽 내벽 근처에서 3기가 확인 되었습니다. 형태는 장방형, 원형, 타원형, 긴 타원형, 부정형 등이며, 상면크기는 82~229cm, 하면크기는 45~302cm, 단면형태는 원통형, 주머니형, 화분형, 복주머니형 등입니다.
유물로는 각선문 기와, 완, 고배류, 장동호편, 연질기와, 목탄, 철제 밀낫, 장란형 토기편, 삼발형 토기편, 백제 토기편 등이 수습되었습니다.
《반월성 / 半月城》
성안에서 바라본 좀 전에 들어온 북문의 모습이다.
성벽 따라 리본 따라 발길을 옮깁니다.
둔덕을 올라서니 마치 백제토성에 올라선 느낌이 듭니다.
문화해설 강연장?
"삼국시대 한강 이북 방어시설의 거점"
포천지역은 지리적으로 경흥로의 육로를 통해 남북이 이어지고 영평천, 한탄강, 임진강 등
수로를 통해 동서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경기 북부 지역을 방어하는 산성들은 철원에서 포천으로 통하는 남북교통로(경흥로)를 방어축으로 삼아 남북방향으로 축조되었습니다. 그리고 하천을 자연적인 장애물로 마치 해자처럼 활용해 동서를 잇는 산성을 축성하여 '십자' 모양의 방어 체계를 구축하였습니다. 포천에는 남북축으로 냉정리산성(포천 관인면), 성동리산성(포천 영중면), 반월성(포천 군내면), 고모리산성,(포천 소흘읍)이 있으며, 고소성(포천 창수면), 주원리 산성(포천 창수면), 성동리 산성(포천 영중면), 운악 산성(포천 화현면) 등이 축조되어 유기적인 방어체계를 구축하였습니다.
해자(垓子) : 성곽 밖에 땅을 파고 물을 채워 놓은 방어시설.
〈백제/百濟〉
백제는 한강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영토를 확장하던 4세기 후반부터 석성을 쌓으며 군사시설을 정비하였다.
포천 반월성도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백제 관련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동북방까지 영토를 확장하고자 북방 교통의 요지였던 포천지역에 산성을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북방의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산성을 북쪽 방향으로 반월 형태로 쌓았으며 침입하는 적을 관찰할 수 있는 장대 등을 설치하였다.
〈고구려/高句麗〉
1995년 반월성의 발굴조사지 포천지역의 고구려 지명인 '마홀(馬忽)' 명문 기와가 출토되어 고구려가 반월성을 점령한 것을 증명한다. 당시 반월성의 관할 범위는 포천지역을 비롯해 양주지역까지 경기 북부지역을 총괄했던 것으로 보이며, 한강 일대를 점령한 신라와 완충지대 역할을 담당하였다. 반월성에는 한강유역 고구려 산성의 건물지와 동일한 구들시설이 발견되고 있으며, 6세기 말 이후의 고구려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신라 진흥왕의 북방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新羅〉
신라는 고구려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629년 반월성(낭비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더우기 낭비성 전투에서 승리하며 김유신이 신라의 최고의 장군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승전의 기세를 바탕으로 고구려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게 되었다. 신라는 한강 이북에서 반월성을 최대 군사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해 동문지, 동치성 등을 설치하며 방어를 강화했다. 그리고 기와를 올린 누각 형태의 대규모 건물을 짓고 무기 보관과 군사 주둔을 위한 시설로 활용하였다.
〈통일신라/統一新羅〉
대동강 일대를 점령하며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경기북부지역에서 당나라와 대치하고 있었다. 이 시기 신라는 반월성의 장대지와 동문지 일대를 보수하며 중요 군사거점으로 활용하였다. 특히 8세기 중엽 발해와 국경을 접하며 대치하던 시기 반월성에 8棟 정도의 건물을 짓고 군사 및 행정 거점으로 이용하였다. 이는 발굴조사 결과 8세기를 전후한 시기 당시 관청에서 사용하던 막새와 벼루 등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알 수 있다. 통일신라 시기 포천지역의 지명은 '견성군(堅城郡)'으로 견고한 반월성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朝鮮〉
반월성은 고려시대부터 이용되지 않고 방치되어 오다가 조선 광해군代(1618년, 광해군10년)에 와서 북방의 후금을 방어하기 위해 무너진 성벽을 고치고 군사를 주둔시켰다. 특히 반월성을 중심으로 포천현을 도호부로 승격시켜 군사거점으로 삼았다. 이후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즉위하면서 반월성에 주둔했던 군사를 해체시켜 더 이상 활용되지 못했다.
문화해설 강연장을 지나 성벽 따라 장대 터로 발길을 옮깁니다.
장대지를 향해 가다가 뒤돌아본 정경
〈장대지/將臺址〉
장대址 안쪽에서 앞 방향을 담은 정경입니다.
장대지에서 정면으로 바라본 정경.
장대지에서 우측 면을 바라본 정경.
장대지에서 좌측 면을 바라본 정경으로 포천시가 눈에 들어옵니다.
장대지에서 성벽따라 애기당 터로 갑니다.
애기당址가 조만치 보입니다.
남동방향에서 바라본 애기당 터
성 안쪽에서 바라본 애기당 址
동쪽방향에서 바라본 애기당 터
성벽따라 동문址로 갑니다. 보이는 성벽이 지그재그 방식으로 들이쌓고 내어쌓은 것은, 능선은 밖으로 내어쌓고 골은 안으로 들여쌓은 지형에 따른 점도 있지만, 공격하는 적을 양면에서 협공하기 유리하도록 전략적으로 축성한 것입니다. 또한 지금처럼 성곽 위는 평면처럼 평평한 모습이 아니고 담이 있고 성가퀴가 있었겠지요.
말끔하게 복원된 동문 상부가 보입니다. 성문은 깔때기처럼 성벽과 성치가 감싸듯이 안으로 들여서 축조되어있어 적의 접근 시 좌우 양면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축조되어 적을 퇴치하기에 유리한 구조입니다.
복원된 모습에서 즐거움이 솟습니다. 城 안쪽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문 옆 좌우로 城雉가 있어 적으로부터 공격에 취약한 문을 보호하기에 용이합니다.
성문(東門) 바깥에서 바라본 정경입니다. 성문 바깥 앞은 가파른 비탈입니다.
동문 안쪽 바로 앞에 있는 건물 터의 모습입니다.
《수혈주거지》
1, 헬기장 주변
부뚜막 시설의 일부로 보이는 석재와 주변에서 백재시대 高盃 1점 및 연질토기와 철제 도끼 1점. 생활용기로 보이는 토기편이 출토되었으며 발굴된 수혈주거지는 모두 백제시대 조성된 군 막사로 추정됩니다.
2, 동치성 주변
東雉城 서쪽에 위치한 남벽 주변에소 6棟 정도의 수혈주거지 흔적이 확인 되었습니다. ' T ' 형태의 부뚜막 시설이 확인 되었으며, 유물로는 연질토기편과 생활용기인 백제토기편 등이 출토되었으며,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물이 혼재되어 있었습니다.
3. 동문지 주변
건물지에 사용되었던 대형 초석, 기단열, 석촉열 등이 노출되었으며, 대형 기와 건물지의 북쪽 담장 및 석축을 조사하던 중 수혈 주거지 1동과 기와 건물지 초석 아랫부분에서 구들시설이 확인되었습니다.
《기와 건물지》
1, 장대址 주변에서 3동의 건물지가 확인 되었으며 각 건물지는 유구의 파괴가 심한 관계로 정확한 규모를 밝힐 수 없었으나 민무늬토기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2, 헬기장 주변
이곳은 반월성 내에서 가장 넓은 평탄지로 지표에서 초석의 일부가 노출되어 있었으며 트렌치 조사에서 석렬과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기와편이 출토되었습니다.
3, 우물址 주변 건물지
조사에서 유구로 보이는 석재와 다량의 기와편이 출토되었으며, 확인된 건물지는 대부분 파괴되어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으나 각각 시기를 달리하며 3~4차례에 걸쳐 보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동문 앞 건물지 모습입니다.
대형 초석, 기단열, 석축열 등이 보입니다. 발굴조사 당시 대형 기와 건물지의 북쪽 담장 및 석축을 조사 할 때 수혈 주거지 1동과 기와 건물지 초석 아랫부분에서 구들시설이 확인되었습니다.
건물지를 지나 보이는 성벽 귀퉁이에 위치한 東城雉로 갑니다.
동문 방향을 살펴 볼 수 있도록 성 바깥쪽으로 돌출된 城雉 좌측 모서리의 모습입니다.
정면으로 바라본 성치의 모습입니다.
남쪽 성벽에서 바라본 성치 우측의 모습입니다.
남측 성벽으로 가는 도중에 보이는 南城雉의 좌측 모습입니다. 취약한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기 유리하도록 성 바깥쪽으로 돌출되어 있습니다.
옛 성벽을 둘러보고 가려니 떠오르는 노래가 있어 불르며 발길을 옮깁니다.
(1928년 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 이애리수 노래)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 가엾다 이네 몸은 그 무엇을 찾으려고 끊임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여 있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못 이루어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
나는 가오리다 끊이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어도
아- 괴로운 이 심사를 가슴속 깊이 안고 이 몸이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개성의 옛 궁궐도 아니지만 옛 성터를 돌다보니 저절로 이 노래가 내 심사를 토해낸다.
정면으로 본 모습입니다. 城雉의 머리가 좌우측으로 이원화되어 축조하였습니다. 많은 산성의 城雉를 보았지만 이렇게 二頭城雉로 축조한 것은 처음 본 축조양식입니다.
우측에서 바라본 二頭城雉의 우측 모습입니다. 복원은 여기까지 이고 남쪽 성벽은 복원되어 있지 않습니다.
복원되지 않은 남쪽 성곽.
또다시 찾아와 세세하게 답사할 생각을 가슴에 품고
경기옛길 이정표 따라 반월성을 나서다가 돌아서서 바라본 정경입니다.
반월성을 나서는 길가에 아름다운 나무의 자태와 가지의 折枝를 담아본 모습입니다.
나무는 모든 동물에 자유와 평화와 풍요로움을 줍니다.
휘어지는 길모퉁이에 경기옛길 이정표를 담아봅니다.
굽어지고 휘어진 길 따라 마음도 발길도 구비구비 유려해집니다.
아름다운 곡선에 느낌은 즐거운데 .. 입으로 흘러나오는 노래는 마음 아파라
"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 지진 않을 거예요
오늘처럼 길을 걸으면 저 산 넘어 어렴픗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예요.
생각나면 들러봐요 조그만 길모퉁이 찻집 아직도 흘러나오는 노래는 옛 향기겠지요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예요."
우측 산자락에 청결하게 줄지어 놓은 벌통 겨울나기 준비 중일세.
길가의 이정표가 우측에 데크로 설치된 계단길을 가리킵니다.
데크계단 너머 산자락에 길이 보입니다.
약수터 방향으로 가지능선을 타고 오릅니다.
구릿빛 소나무줄기 사이 금빛 오솔길에 한껏 설렙니다.
삼거리입니다. 가야할 길은 약수터 방향이지만, 우측에 포천 향교가 자리하고 있어 잠시 둘러보고 가렵니다. 향교지붕을 방수막으로 덮은 듯합니다.
포천향교는 명륜당과 동무 서무를 제외한 외삼문, 대성전 등은 대대적인 보수공사중입니다.
홍살문 앞에서 바라본 포천향교의 모습,
다시 삼거리에서 아래 계곡에 보이는 석불입상이 모셔져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삼거리 능선에서 바라본 석불입상 주변의 정경입니다.
〈구읍리 석불입상〉 (포천시 향토유적 제5호)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입상으로서 불상 앞에 2단의 석축이 있고 주변에는 기와와 토기 조각이 흩어져 있어 옛 절터였음을 알 수 있겠습니다. 불상은 하나의 화강암으로 만들어 졌으며 머리에는 부처의 지혜를 상징하는 육계가 있고, 마모가 심한 얼굴은 윤곽만 파악할 수는 있습니다. 목에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중생이 걷게 되는 세 가지의 길(삼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세 줄의 주름을 갖췄습니다. 수인(手印)은 가슴 쪽에는 오른손을 올려 엄지와 검지로 원을 그려 손바닥을 보이고 있는 上品中生의 來迎印을, 왼손은 배 부분에서 손바닥이 위를 향하고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든 上品下生의 來迎印을 하고 있습니다. 법의는 양쪽 어깨에 걸쳤습니다. 그러나 몸에 비해 손이 크고 섬세하지 못한 조각 기법과 마모 등으로 표현된 기법이나 모양과 옷 주름이 뚜렷하지 못합니다. 다리의 하단 부분이 땅속에 묻혀있어 노출부분의 총 높이는 2m정도 입니다. 이 불상은 포천 지역의 불상 중 가장 시대가 오래된 고려 전기 불상으로 불교 미술의 중요한 자료가 되겠습니다.
석불입상을 뵙고 다시 등고개를 오릅니다
나뭇가지 절지에서 춤사위를 배우고 그 사이로 마을을 보며..
고갯마루에 올라서서 또다시 이어지는 고개를 바라봅니다.
가지능선이 손가락처럼 연이진 휘어진 자락길을 휘적휘적 걸어갑니다.
문살같은 나무사이로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해말간 손짓으로 길 위에 줄무늬를 수놓습니다.
청솔이 내뿜는 푸른 기운이 내게로 스며들어 생기를 돋아줍니다.
길도 참 예쁩니다. 수도 없이 걷는 자연 속에 숨어 있는 길이 물리지 않고 질리지도 않는 까닭은 하나 같이 몸매가 다르고 꾸밈이 다르고 가르침이 다른 까닭입니다.
가지능선을 넘어서니 조만치 한 여인이 보입니다. 어허 으슥한 숲에서 보는 내가 불안해서 다가가서 말을 붙이려는데, 난데 없이 우측에서 이정표님이 불쑥 튀어나와 훼방을 놓습니다. " 고개를 우측으로 돌리고 우측 길로 곧장 가세욧! 공연히 남의 처자에게 마음 두지 말고욧" 허 참! 남의 속도 모르면서 ..
아, 소리도 못하고 바라본 우측 길입니다. 앞으로 5.5km를 더 가야 오늘의 종착점 '신북면행정복지센터'인데 해가 기웃거리며 발길을 독촉하고 있습니다.
산책길 끝머리에 가로놓인 오솔길 좌측으로 들어섭니다.
조만치 벧엘기도원 문이 보입니다.
벧엘기도원을 지나 마을 인삼밭 앞 들길을 갑니다.
마을 앞을 지나는 차도 우측으로 들어섭니다.
골말교 건너 좌측 산자락 길로 들어섭니다.
산자락 축대를 끼고 휘돌아갑니다.
좌측에 하천을 끼고 마을 입구를 행해 갑니다.
마을을 지나 43번국도 우측으로 들어섭니다.
다시 우측 간선도로로 들어섭니다.
43번국도 아래 굴다리로 들어갑니다.
굴다리에 경기옛길 벤치와 이정표가 격려의 갈채를 보내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굴다리 바깥 바로 앞 좌측 길로 들어섭니다.
굴다리 앞 좌측 농로를 따라갑니다.
긴 축대와 축대 중간의 건물, 그리고 송전탑을 아울러 볼 때 큰 선박을 연상케 합니다.
43번국도와 나란히 평행을 이루고 갑니다.
농로는 슬며시 자취를 감추고, 43번국도 옆 인도로 들어섭니다.
저만치 시가지에서 신호등 앞 횡단보도를 이용해서 길 건너편으로 가야 합니다.
시가지 초입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건너편 우측 방향으로 갑니다.
보도가 없어 소나무 자라는 옆을 거쳐서 작은 다리 앞까지 갑니다.
하천을 가로지른 짧은 다리를 건너 좌측 하천을 끼고 뻗은 길로 들어섭니다.
하천을 끼고 가는 농로 따라 갑니다.
저만치 보이는 다리(신북대교)에서 길 위로 올라갑니다.
신북대교로 이어진 길로 올라갑니다.
신북대교
신북대교 앞에 있는 측량을 위한 수준점입니다.
신북대교 앞에서 바라본 두 갈래길 좌측 포천현대자동차모터스 정비공장 마당으로 들어섭니다.
현대자동차정비공장 건물 끝머리 좌측으로 들어섭니다.
스티로폼 쌓아놓은 뒤쪽 우측 하천둑길로 들어섭니다.
정비공장 담장 끝머리에서 바라본 하천둑길로 들어섭니다
하천둑길 끝나는 곳에서 우측 길로 들어섭니다.
43번국도와 만나는 곳입니다. 좌측 다리를 건너갑니다.
걸어온 길에서 V자 형으로 꺾어 다리를 건너 신북면 시가지로 들어섭니다.
신북면행정복지센터, 오늘의 종착지입니다.
바르게 걷자! ^^ 고맙습니다.
신북면행정복지센터는 공사중입니다.
2021년 12월12일(일요일) 경기옛길 제5 반월성길 - 鄕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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