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옛길

「경기옛길 영남길 제3 (구성현길)」

鄕香 2021. 8. 21. 19:11

 

중앙선 구리역(07시42분) - 수인분당선 왕십리역(08시08분) 환승 - 서현역(08시50분) 도착. 지난 7월5일 제2길 낙생역길 종주했을 때 길 머리를 익혔었건만 그때와 다르게 역방향으로 가려니 길을 헤맨다. 겨우 찾아든 중앙공원에서부터 구성현길에 들어섰다. 

 

"구성현은 삼국시대의 용인이 고구려에 편입되면서 옛 용인의 중심지가 되었던 지역입니다. 현재는 기흥구에 편입되어 행정동으로 변화하였지만 영남길을 걷다보면 아직도 옛 용인의 중심지였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탄천을 거쳐 구성역을 지나면 잘 보존된 마북동 석불입상과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자결한 민영환 선생의 묘소를 마주칩니다. 조금 더 옛 용인의 중심으로 들어가면 용인향교와 옛 구성의 영화를 보여주는 '구성동 행정복지센터'가 보입니다. 여기서 고즈넉한 법화산 숲길을 지나면 용인의 신도시로 각광받는 동백지구의 호수공원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경기옛길 가이드북)

 

 

용인과 성남의 경계이자 불곡산 출구에서 구성현길은 시작됩니다. 여기서 좌측 용인으로 들어섭니다. 이제까지의 경기옛길의 삼남길, 의주길, 평해길에서 보고 느낀 놀람과 아름다움이 그랬듯이 구성현길은 내게 어떤 가르침이 기다리고 있을지 설렙니다.

 

 

불곡산 출구에서 좌측 용인으로 들어섰습니다.

   

 

용인 대지로 교차로입니다. 직진은 애버랜드 (동백죽전대로)방면, 우측은 수지구청 방면, 좌측은 광주시 방면입니다. 영남길은 횡단보도를 건너 이정표 푯말이 가리키는 것은 길이 아닌 좌측에 있는 건물 출입구 입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반대편 문으로 나갑니다. 즉 건물 북쪽 문으로 들어가 남쪽 문으로 나갑니다. 하천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 입니다.

 

 

육교 앞 우측 건물 안으로 들어가라는 이정표의 모습입니다. 

 

 

건물 북쪽 문으로 들어가서 남문으로 나와 바라본 정경입니다. 보이는 다리를 건너갑니다. 

 

 

다리 건너 우측으로 갑니다.

 

 

우측 육교 밑을 통과합니다.

 

 

교각에 '경기옛길' 스티커가 보입니다.

 

 

보이는 계단 아래 우측으로 내려갑니다.

 

 

하천길(안대지천) 좌측으로 갑니다.

 

 

하천길에 내려서서 좌측을 바라본 정경입니다. 잠시 산뜻한 구리빛 길에 마음 물들이며 갑니다.  

 

 

갈림길에서 안대지천교 밑으로 갑니다.

 

 

안대지천 따라 좀 걸어가려니 조만치 다시 육교가 보입니다. 

 

 

道路川邊 측면 보수공사를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천에 교각을 세워 상판을 덮어 넓힌 도로 밑을 통과합니다. 

 

 

교각 밑을 나서니 바로 탄천입니다. 구성역방향으로 갑니다. 

 

 

죽전교 밑을 지나갑니다. 

 

 

우측 탄천 건너에 신세계백화점과 죽전역이 있습니다. 

 

 

샛길은 무시하고 오성역까지 잘 꾸민 하천변 정경에 취해 갑니다.

 

 

道痴가 더구나 초행에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어서 여러 번 헤맸기에 방향이 엇비슷한 두 길이 나오면 가슴부터 뜁니다. 신호등 기둥 좌우에 리본이 있고 기둥에 기대놓은 자전거 안장에 가려진 푯말이 얼핏 보이기에 예사롭지 않다싶어 다가서서 고민해 보기로 했습니다. 

 

 

푯말을 가린 자전거 안장을 치우고 보니 이정표 가리킴이 계단으로 오르라는 것 같아 올라가 양방향을 뒤집어 봐도 이정표나 리본이 반경 50m 이내에 없습니다.  

 

 

다시 계단을 내려와 푯말의 이정표 가리킴 방향을 면밀하게 보니 자전거도로에서 둑 위로 갈려진 자전거나들길과 데크로 만든 인도를 가리키는 것 같기도 해서 자전거 나들길과 데크로 만든길을 확인해 보니 둑으로 오른 자전거길은 아니고 데크로 된 산책길을 대략 100m 정도 걸어가 보니 죽전교 교각 안쪽에서 리본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있는 위치 정도 안전대에 리본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 없지 않습니다. 

 

 

죽전교 밑 반가운 영남길 리본

 

 

탄천1교

  

 

거리의 인문학이 아닌 경기옛길의 인문학을 읽고 배웁니다. 

 

 

리본 따라 직진입니다.^^

 

 

구성1교 밑을 통과합니다. 

 

 

 우측 끝에 구성역사가 보입니다.

 

 

하천을 건너 구성역으로 가기 전에 있는 사찰의 모습입니다.

 

 

구성2교 전에 좌측 길로 들어서 구성2교 반대편 좌측 길로 갑니다. 

  

 

좌측으로 갑니다.

 

 

횡단보도 건너 우측 타이어 '인터넷보다 싼 집'을 지나 '경기동부보훈지청' 방향으로 갑니다. 

 

 

'경기동부보훈지청'을 지나 로터리에서 좌측 모퉁이를 끼고 좌측 길로 갑니다.

 

 

공사장 휀스를 따라가면 갈치조림음식점이 나옵니다.

 

 

갈치조림 음식점 끝 정자나무 좌측 안쪽으로  '마북리 석불입상'이 있습니다.

 

 

우측 앞 효자 김사철에서부터 시작하여 시계침 반대 방향으로 돌아 좌측 앞 현령 윤태국까지의 碑銘입니다. 

 

〈各 碑石 위치와 碑銘〉

① 孝子 閑良 金海 金士喆 之里 /'본관이 김해인 한량 신분의 효자 김사철 마을'이라는 뜻으로 용인 어느 마을 입구에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② 縣令 柳公 鳳輝 淸德愛民宣政碑 / 유봉휘는 숙종 29년(1703) 6월부터 숙종 31년(1705) 2월까지(승정원일기) 용인 현령으로 재임하였고 이 비는 숙종31년11월(康熙乙酉十一月日立)에 세워졌다.

③ 行 縣令朴厚容珉 淸簡善政碑 / 박용민은 고종 4년 2월부터 고종 6년 9월까지 용인 현령을 재임하였고 이 비는 고종 6년 3월(乙巳三月日立)에 건립되었다. 고종 4년 6월15일 경기감사가 올린 장계에 의하면 "용인 현령 박용민은 창고의 곡식을 썩히지 않고 잘 간수하여 궁핍한 백성들이 이에 힘 입어 구제되었으니 상께서 서류를 열어 살펴주시옵소서"라고 하였다.

④ 行 縣令 崔公 錫斗 永世不忘碑 / 최석두는 고종 22년 12월~고종 14년 10월까지 용인 현령에 재임하였고, 이비는 고종 25년(戊子四月日立)에 건립되었다. 비문에 따르면, "마음가지기를 깨끗하고 검소하게 하며 송사 판단하기를 강직하여 굴하지를 아니하였고, 녹봉 덜어내기를 어렵지 않게 여겨 한결같았으며 감영에 보고하기를 재물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듯이 하였다."(持心淸簡 決訟剛毅 損凜簿儉 報營防幣)고 합니다.  

⑤ 善惠堂上 閔公泳駿 永世不忘碑 / 민영준은 고종 30년에 내무부 督辦을 비롯해 宣惠廳 堂上官 등을 겸직하였고 이 비는 고종 30년 2월(癸巳二月日立)에 건립되었다. 비문에 따르면 "보좌함이 나라에 도타움이 있게 하였고, 이득이 백성에게 미치도록하였다." 

⑥ 縣令 金公履中 愛民善政碑 / 김이중은 정조 6년 8월부터 정조 7년 6월까지 용인 현령으로 재임하였고 이 비는 정조 10년 9월(丙午九月日立)에 건립되었다.  

⑦ 縣令 朴公應鍾 永世不忘碑 / 박응종은 고종 20년 5월~고종 22년 12월 용인 현령으로 재임하였고, 이 비는 고종 21년 6월(甲申六月日立)에 세워졌다. 비문에 의하면 "나라에 내야할 많은 돈과 곡식을 탕감해 주어 많은 굶주린 백성을 구하였다."

⑧ 觀察使 金公弘集 永世不忘碑 / 고종 19년 10월~고종 20년 9월까지 경기도 관찰사로 재임하였고 이 비는 고종 21년 6월(甲申六月日立)에 건립되었다. 비문에 의하면 "마음을 다잡기를 지극히 공평하게 하고 정치를 행하기를 어짊으로 하였다."

⑨ 縣令 徐公命均 淸德愛民 善政碑 / 숙종 42년 11월~숙종43년 7월까지 용인 현령에 재임하였고 이 비는 경종 원년(辛丑五月日立) 건립되었다.

⑩ 行 郡守 金候嬴漢 愛民善政碑 / 이영한은 고종 광무 5년~광무 6년 1월까지 용인 군수로 재임하였고 이 비는 고종 광무 7년 2월(癸卯二月日立)에 건립되었다.  

⑪ 縣令 沈公存之 恤民善政碑 / 심순지는 순조 19년 9월~순조 20년 2월까지 재임하였고 이 비는 순조 21년12월(辛巳十二月日立)에 건립되었다.

⑫ 縣令 李候源一 淸德善政碑 / 이원일은 현종 15년 8월부터 철종 4년 6월까지 용인 현령에 재임하였고 이 비는 철종 2년 12월(辛亥十二月日立)에 세웠다.

⑬ 縣令 洪候顯普 善政碑 / 홍현보는 고종 12년 12월부터 고종 16년 3월까지 용인 현령에 재임하였고 이 비는 고종 16년 2월(乙卯二月日立)에 건립되었다.  

⑭ 行 縣令 尹公泰國 淸簡善政碑 / 윤태국은 정조 3년 7월부터 정조 6년 7월까지 용인 현령으로 재임하였고 정조 10년 2월(丙午二月日立)에 건립되었다.

 

 

현 용화전 뜰에는 상단에 堂宇를 중심으로 좌우에 비석들이 한줄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옛 용인현의 관문이고 한양으로 통하는 대로변이었으며, 앞에 길과 평행으로 세워져 있었으나 도로 정비 등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합니다. 비는 모두 14기입니다. 이 중 송덕비가 10기, 군수 선정비 1기, 효자비1기이고 나머지는 잠시 경기관찰사를 지낸 김홍집과 내무부 督辦을 비롯해 宣惠廳 堂上官 민영준 등 구한말 인물의 것입니다. 문헌에 의하면 이곳 용화전에는 고려시대 '획주사'라고 하는 절이 있었던 곳이라고 전합니다. 

 

 

마치 문인석을 보는 느낌 없다할 수없는 이 석상에 대해서는 세세한 해설문이 있음에 그에 갈음한다.

 

 

눈은 크고 눈꼬리는 위로 솟았고 콧등은 낮고 길며 코끝은 뾰족하고 턱은 각지고 귀는 어깨에 닿도록 큰 얼굴에 높은 통관을 쓰고 장삼 복식에 두 손을 공손히 겹쳐 모아 마치 홀(笏)을 들고 있는 듯한 자세는 임금 앞에 시립해 있는 고관을 떠올리게도 한다. 

 

 

측면으로 본 모습은 손을 모으고 고개를 약간 숙여 예를 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堂宇 뒤에서 바라본 정경입니다. 

 

 

불상을 탐방 후 우측 길을 돌아 200m 정도 떨어져 있는 구성초등학교 정문 앞 정경입니다. 초교정문 좌측 나무숲 터널로 들어섭니다.

 

 

나무숲 터널을 지나면 문정공 묘역입니다.

 

 

《충정공 민영환(忠正公 閔泳煥)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 호조 판서 민겸호(閔謙鎬)의 아들로 1861년 8월7일 서울 전동(종로구 견지동)에서 출생하였다. 1878년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정자로 시작하여 병조 형조, 한성판윤 등 요직을 두루 거쳐 주미 전권대사에 임명된 후 의정부찬정, 군부대신을 역임하였다.

1897년 1월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 6개국 특명 전권공사가 되었으며, 영국여왕의 즉위 60년 축하식에 참석하였으며 귀국하던 중 孫炳均 金秉玉 등을 대동하고 러시아에 들려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 각국 외교사절을 예방하였다. 이와 같이 두 차례에 걸친 해외 여행으로 각국 발전된 문물제도와 근대화 모습을 직접 체험하고 귀국 후 독립협회의 취지에 찬동,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1898년 의정부 참정, 내부대신 겸 군부대신을 지냈으나 어용 단체인 황국 협회의 지탄과 공격을 받아 한 때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하였으며 그 뒤 다시 참정 대신, 탁지부 대신에 임명되었고 민영환의 건의에 의하여 설치된 元帥府의 회계국 총장, 표훈원총재, 헌병사령관 등을 역임하였고 훈1등태극장, 대훈위이화장을 받았다. 러일전쟁 후 내부대신, 군법교종총재, 학부대신을 역임하여으나 날로 심해지는 일본의 내정 간섭에 항거하여 친일 내각과 대립하였기 때문에 한직인 시종무관으로 좌천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원임의정대신 趙秉世를 疏頭로 백관들과 聯疏를 올려 조약에 찬동한 5적의 처형과 조약 파기를 요구하였으나 

황제의 批答이 있기도 전에 일본 헌병에 의해 조병세는 구금되고 백관들이 해산 당하자 다시 자신이 소두가 되어 다시 백관들을 거느리고 두 차례나 상소를 올리고 궁중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이에 일제의 협박에 의한 왕명 거역죄로 구속되어 平理院(재판소)에 가서 대죄한 뒤 풀려난 후 다시 종로 白木廛都家(육의전)에 모여 疏廳을 설치하고 항쟁할 것을 의논하였으나 이미 국운이 기울었음을 깨닫고 죽음으로 항거하여 국민을 각성하게 할 것을 결심 자택에서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한통은 국민에게 각성을 요망하는 내용, 재경 외국사절에게 일본의 침략을 바로 보고 한국을 구해줄 것을 바라는 내용 그리고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었다. 

민영환 선생의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원임대신 조병세를 비롯한 전 참판 洪萬植, 학부 주사 李相喆, 平壤隊 일등병 金奉學 등 많은 인사들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민영환의 인력거꾼도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항거하였다. 

 

 

〈桂庭閔忠正公泳煥之墓〉

이 墓碑의 글씨는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초대 이승만 대통령 각하의 친필입니다. 민 충정공 호 桂庭에서 정字가 특이 합니다. 

 

 

《민영환 선생 묘》

대한제국기 文臣 민영환(閔泳煥1861-1905)의 묘소입니다. 선생은 1878년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특히 외교관으로서 서양의 여러 국가들을 방문하여 근대적인 문물제도를 배웠다. 이후 독립협회를 적극 지원하면서 개혁을 시도하였고 일본의 제국주의와 내정 간섭을 비판하였다. 

1905년 일본이 강제로 을사늑약을 맺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았아 가자 민영환은 이 조약에 찬성한 5명의 대신을 처형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수 차레 요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죽음으로 항거하기 위해 자택에서 자결하였다. 대한제국 2천만 동포와 각국의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와 고종에게 유서를 남겼다. 선생의 죽음은 국민의 항일 의식을 북돋고 의병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文正公 閔泳煥 선생의 묘는 원래 수지구 풍덕천동에 있었으나 1942년 후손들이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 부인과 합장하였다. 봉분 뒤쪽에 높게 언덕을 쌓고 그 위에 담(曲牆)을 설치한 구조로 되어 있다. 봉분 앞에는 床石과 香爐石이 있고 좌우로 文人石과 望柱石이 각각 雙을 이루었고 중앙에는 長明燈이 있다. 상석 오른쪽에는 1959년에 건립된 묘비가 있는데 글씨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박사께서 쓰셨다.  

 

 

 

충정공 묘역을 돌아서서 바라본 정경입니다.

 

 

 도로 우측 건너서 첫 사거리까지 100m정도 곧장 갑니다.

 

 

사거리 모퉁이의 이정목을 끼고 좌측 용인향교를 향해 갑니다.

 

 

앞 도로표시판이 가리키는 구성로77번길로 들어섭니다. 

 

 

 

50m 전방 우측에 용인향교가 있습니다. 

 

 

鄕校는 조선 시대에 각 고을마다 유학을 교육하고 유교의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나라에서 세운 국립 교육기관이다. 각 고을의 중심지에는 관아, 사직단, 향교를 설치하여 고을의 기본 틀을 만들었고 고을의 핵심으로서 고을의 모든 질서를 바로 잡았다. 용인향교는 용인의 중심지인 구성에 건립되었다. 법화산에서 서쪽으로 뻗은 능선 끝 자락에 서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가장 높은 자리에 대성전이 위치하고 내삼문을 두어 신성한 곳으로 구분하였다. 그 아래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있다. 가장 낮은 곳에는 부속 건물인 충효교육관, 용서재, 외삼문을 두었고, 입구에 향교의 영역을 나타내는 홍살문이 세워졌다. 

 

용인향교는 조선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최초 설립 후 3차례 옮겨 지었다. 본래 용인현 동쪽 2리(하마비 마을, 구 경찰대 후문 인근)에 위치했다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자 조선 인조19년(1641)에 縣의 북쪽 1리(구교동)로 옮겨 지었고, 숙종12년(1686)에 원래의 터 縣의 동쪽 2리로 다시 옮겨지었다.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잦은 移建에도 대성전은 17세기 경기도 향교 건축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용인향교는 한국전쟁 시 대성전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이 소실됨에 따라 1963년 명륜당을 중건하면서 현재까지 외형적인 모습을 갖추어 나가고 있다. 용인향교 대성전에서는 매년 음력 8월27일 공자를 비롯한25분의 유교 성현에게 석전대제라는 제례를 지낸다. 조선 시대 용인향교는 유학 보급과 과거 급제를 위한 유교 경전 교육에 중점을 두고 운영하였다. 1900년대에 들어서는 근대 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명륜학교가 설치되어 잠시 운영되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곧 단절되었고 1980년대부터 충효 교육과 전통문화교육이 이루어지면서 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용인향교 / 龍仁鄕校)》 경기도 문화재자료188호.

 

용인향교 건문 배치도

 

 

용인향교 외삼문 

 

 

외삼문에서 바라본 명륜당, 마땅히 보여야할 명륜당 현판이 없다. 

일반적으로 다른 향교들의 명륜당이 외삼문을 향해 바라보고 있는 것과 다르게 용인향교의 명륜당은 전면이 대성전을 향하고 있다. 

 

 

대성전으로 오르는 계단 중간에서 내려다본 명륜당의 모습은 대성전을 우러러 바라보는 형국이다.

 

 

건물 안쪽에 걸려 있는 명륜당 현액

 

 

명륜당 댓돌에 앉아 바라본 대성전 내삼문의 위엄스러움에서 선비들이 공자를 하늘처럼 떠받들었음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유림의 정신이 조선500년의 버팀목이었다. 

 

 

내삼문은 굳게 잠겨 있어서 담장너머로 대성전을 담았다. 

 

 

외삼문앞에서 홍살문을 바라본 정경,

 

 

용인향교 홍살문 우측 방향으로 발길을 옮겨 좌측 CU편의점 방향으로 갑니다.  

 

 

CU 편의점 건물 끝머리 옆으로 진입합니다. 

 

 

CU 편의점 옆 법화산 진입로이자 영남길 구성현길입니다. 

이제부터 대략 6km의 시원한 숲길로 오르내리는 산행이 시작됩니다. 

 

 

여기서부터 법화산 정상까지 3.2km입니다. 

 

 

침목으로 놓은 계단을 필두로 숲으로 들어섭니다. 

 

 

계단이 끝나고 산길로 들어선 후 내 앞길을 쏜살같이 가로질러 우측 숲 가랑잎에 숨는 꽃뱀 유혈목이입니다.

 

 

하마터면 너와 악연이 될 뻔 했구나! 허참! 어서 네 갈 길 안가고 빤히 보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냐? 

어서 안전한 곳으로 가거라 나도 내 길 가련다. 

 

 

도시근교의 산들은 모두 체력운동기구가 설치되어 공원으로 탈바꿈되었습니다. 

 

 

파인애플 매트는 질기고 든실해서 길 패임을 방지하는데 최적일 뿐만 아니라 보행자의 미끄럼 방지와 발바닥의 미칠 충격을 없게 하고 느끼는 촉감도 폭신하여 참 좋습니다. 

  

 

우측으로는 골프장이 있고, 법화산정상까지는 2.4km 입니다. 

 

 

새로운 느낌을 주는 말끔한 데크계단을 오릅니다.

 

 

경찰학교 안 골프장 정경 일부 모습.

 

 

정상을 갔다 오시는 님이신가 발걸음 사뿐하시네.

 

 

이 매트가 보이기 시작한 지가 아마, 몇 년 되었지 이 매트를 깔아놓은 건 잘한 일일세. 

 

 

갈수록 늘어나는 등산인파로 파인 길이 큰비로 수로가 되어 산사태에 이름을 방지하기 위해 계단을 설치하건만 사람들은 계단 오르기가 힘들다고 계단 옆 숲으로 다녀 길을 만들어 산이 파이고 나무뿌리가 들어난다 계단이 힘들 정도면 차라리 평지 공원이나 하천산책길을 다니시지 산에는 왜 오시는가?

 

 

오늘 참 기분 좋고 운 좋은 날입니다. 도심 가까운 산에서 요즘 흔히 접할 수 없는 생명이 살아있음을 볼 수 있었으니 행복한 날입니다. 바로 꽃뱀과 장수풍뎅이(투구벌레)입니다. 

 

 

투구벌레 그 이름답게 당당하고 늠름하구나!

 

 

《6.25 전사자 유해발굴 기념지역(제6호)》 전투명 :썬더볼트 작전, 용인시 모현면(법화산)

 

당신들의 고귀한 희생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이곳 법화산은 1951년 1월25일~2월16일까지 국군6사단과 미국24단 그리고 그리스 대대가 법화산, 석성산, 청왕산을 연하여 중공군38군 예하 112-113-114사단 등 3개 사단과 전투를 했던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육군 제55보병 사단은 12. 5.7~6.29간 "6.25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을 실시 국군전사자 유해74구, 전투화 ,군번줄 등 유품 500점을 발굴하여 뒤늦게나마 조국의 품으로 모실 수 있었습니다. 경기도와 용인시, 제55보병사단은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내조국 내강토를 물려주고 호국보훈 의식과 애국애족의 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이곳 법화산에 "평화의 쉼터"를 마련하였습니다. 이곳을 찾는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나라사랑 정신과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의 의미를 되새겨야할 것입니다.  

 

 

정면으로 본 조형물의 모습은 두 쪽의 판석을 맞물린 그 사이 틈새의 공간의 형상입니다. 그 공간의 형상은 소중한 목숨을 祖國과 국민과 사랑하는 부모형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산화한 전우를 맨 땅에 묻고 그 전우가 지녔던 착검한 총을 무덤 앞에 꽃아 세우고 철모를 올려 묘비를 대신한 것을 형상화한 것으로 영웅의 묘비를 구현한 형상입니다.   

 

 

다시는 이 땅에 이렇게 비통한 묘비가 없기를 간구합니다. 

 

 

호젓하고 싱그런 이 길이 한 때 화약 냄새 자욱하고 처절하고 비통했을 것을 묵상하며 지금의 평화를 감사합니다.

 

 

발길은 어느새 정상에 이르고 있습니다.

 

 

법화산 정상은 데크로 이루어진 휴식처요 조망대입니다.

 

 

법화산 정상은 데크로 덮어 휴식처를 만들었습니다.

 

 

법화산 정상 데크에서 바라볼 수 있는 단 한 곳의 전망 풍경,

  

 

전망대에서 바라본 하산길, 이정목 거리표시는 동백호수공원까지 4.8km임을 알려줍니다. 

  

 

곧바로 언덕길로 오릅니다.

 

 

가파르지도 완만하지도 않은 능선을 타고 내려갑니다.

  

 

공원으로 이어진 임도를 따라 갑니다.

 

 

용인시상수도사업소 성덕배수장

 

 

마을로 내려가는 길을 확장공사 중입니다. 

 

 

큰 길로 내려가지 않고 좌측 오솔길로 들어서서 육교를 건너갑니다. 

 

 

육교를 건너서면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게 됩니다.

 

 

단지 내 공원에 영남길 안내목과 리본이 눈에 잘 띄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조만치 보이는 다리를 건너 아람공원으로 들어섭니다.

 

 

골짜기에 가로놓인 다리를 건너 숲길로 오르는 계단 앞으로 갑니다. 

 

 

다리 위에서 내려다본 좌측 계곡의 모습입니다. 

 

 

다리에서 내려다본 우측 계곡입니다.

 

 

계단으로 올라가 우측으로 갑니다. 

 

 

계단 끝에서 바라본 이정목은 우측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공원 이름은 아람근린공원이라고 합니다. 이정목의 거리표시를 보니 영남길 제3 '구성현길' 종착점 동백호수공원까지의 거리는3.8km입니다. 

 

 

매끄럽게 깔아놓은 파인애플 매트 위를 걷는 기분은 비로도 카펫 위를 걷는 기분에 버금갑니다.

 

 

공원산책길의 끝머리 전망대입니다.

 

 

물푸레마을 휴먼시아 아파트 단지가 보입니다.

 

 

성남시로 이어지는 청덕지하차도가 보입니다.

 

 

지그재그로 놓인 계단을 이용해 도로변 인도로 내려갑니다.

 

 

계단을 내려오니 그 옆에 공원약도를 새긴 동판이 부착된 아람공원 표석이 있습니다.

 

 

이정목 거리표시에 의하면 이곳 아람공원 입출구에서 동백호수공원까지의 거리는 3.4km 입니다.

 

 

용인시청, 동백지구 방향으로 갑니다.

 

 

SK주유소를 지나 계속 어정역 방향으로 직진입니다.

 

 

좌측 이마트 앞을 지나면 동백호수공원입구입니다.

 

 

이마트 앞 이정푯말입니다. 동백호수공원은 800m 거리에 있습니다.

 

 

횡단보도 건너 바로 동백호수로 이어집니다.

  

 

호수 둘레길 우측으로 갑니다.

 

 

제 3 길 구성현길의 종착점은 호수 건너편 야외무대 뒤 인공폭포 앞입니다.

제 4 길 석성산길은 동백호수 건너 야외무대 뒤에 보이는 작은 산에서부터 산행으로 시작하여 그 뒷산(석성산)으로 이어집니다.  

 

 

 물오리들의 遊泳이 평화롭습니다. 물고기가 살 정도로 호수는 맑은 편입니다. 악취도 없는 것으로 볼 때 생활하수가 유입되지 않는 것 같아 기쁘고 다행입니다.

 

 

〈잉어들의 群舞〉

호수 중간 다리위에서 내려다본 정경입니다.

 

 

동백호수공원 야외무대 모습

 

 

제3 구성현길 종착점입니다. 물이 낙차하는 인공 폭포의 모습입니다. 

 

고맙습니다. 

2021년8월13일 (금요일) -鄕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