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옛길

「경기 옛길 삼남길 제3코스 모락산(백운호수 ·지지대碑)길」

鄕香 2021. 6. 22. 23:49

모락산길은 조선시대에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선비들이 걷던 길입니다. 백운호수와 연결된 이 길은 세종 임금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묘를 지나 의왕시가지 쪽으로 길을 잡으면 정조능행차길의 중요한 지점인 사근행궁터(의왕시청 별관)을 지나 골사그내로 갈 수 있습니다. 골사그내에서 지지대비가 있는 지지대고개를 넘으면 삼남길은 수원에 접어듭니다. 첫 사진은 모락산길의 시발점인 백운호수 주차장에서 계단을 통해 백운호수로 오르는 입구입니다. 

 

모락산길은 백운호수 입구 → 임영대군 묘역 → 오매기 마을 → 사근행궁 터(현 의왕시청 별관) → 골사그내 → 지지대碑 총 13.6km 난이도 상, 3시간40분을 제시합니다.  

 

 

백운호수 둘레를 돌아볼 수 있는 데크로 만든 길 입구에 있는 건물 옆에 세워져 있는 白雲湖水 標石.

 

 

백운호수 둘레산책길 입구.

 

 

호수를 전망으로 한 카페와 데크 둘레길 풍경

 

 

백운호수의 모습,

오리놀잇배 출입제한구역입니다. (수상모터보트 운행지역)

 

 

수상보트 구역과 놀잇배 구역을 줄배로 경계를 짓고 있습니다.

 

 

오리놀잇배 구역

 

 

수상모터보트와  오리놀잇배 경계선 끝에 위치한 승차장

 

 

백운호수를 관망 후 임영대군 묘를 향해 발길을 옮깁니다. 墓域까지는 900m 거리. 

 

 

전신주 뒤에 06번 버스가 보이는데 4호선 인덕원지역 6번-7번 출구 옆에서 환승하면 이곳 모락산길 출발점 백운호수에 올 수 있는 교통입니다. 나는 6월6일 현충일에 남태령에서 출발하여 이 근처 임영대군 묘역까지 걷고 귀가는 06번 버스를 이용해서 인덕원에서 4호선으로 환승했습니다.

  

 

우측 횡단보도를 건너서 백운호수지하차도(평촌 · 수원 방향)를 통과합니다.

 

 

백운호수지하차도 나와 100m 앞 신호등 앞 횡단보도를 건너야 합니다.

 

 

횡단보도 앞 모습.

 

 

길 건너 우측 임영대군 묘역으로 向합니다.

 

 

도로 좌측 '공간' 건물 옆 모락산둘레길 오솔길로 들어섭니다.

 

 

고개 너머 바로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들어서면 임영대군 부인 제안부부인 최씨의 묘가 있습니다.

 

 

앞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오르면 임영대군의 婦人  齊安府夫人 묘소입니다. 

 

 

〈齊安府夫人崔氏之墓〉  

제안부부인 전주 최씨는 우의정 최승령의 따님으로서 1남 오산군 주澍, 2남, 구성군 준浚, 3남 정양군 순淳, 4남 팔계군 정淨, 5남 흠성군 징澄, 2녀 등 5남 2녀를 낳았습니다. 비석은 받침돌에 複蓮을 새겼고 비머리는 연꽃봉오리를 올린 둥근 양 어깨에 귀가 달린 조선 초기 왕실의 옹주이상 내명부 정경부인 이상의 여인이 쓸 수 있는 양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사각형 장명등의 지붕돌(屋蓋石)은 모서리나 모퉁이 선이 날카롭지 않게 부드럽고 유려하며 중후한 품위가 있고 火窓 아래 竿柱石에 3개의 음각선을 돌리고 넓고 깊게 4면을 파내어 허리 홈을 돌렸으며 그 아래 간주석 윗단에 굵은 음각선 1개로 2개의 두터운 돋을선을 마련하고 다시 4개의 음각선을 좁게 둘러 전체적으로 볼 때 단아한 여인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석물은 상단 정 중앙에 호석을 돌린 봉분 앞에 비석을 세우고 혼유석이 놓여 있고 그 아래 단 앞에 장명등과 그 좌우로 망주석을 세웠고 그 아래 좌우로 문인석이 있습니다. 모두 당대에 세운 것이고 봉분을 두른 호석과 후대에 유실되었을 망주석 2개는 새로 후대에 세운 것입니다. 

 

 

제안부부인 묘를 나서 사당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숲길을 나서자 사당 측면이 보입니다.

 

 

臨瀛大君 祠堂 좌측면입니다.

 

 

세종대왕의 넷째 왕자 임영대군의 신주를 모신 이 사당은 묘역에서 동쪽으로 약 200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원래 사당은 마을에 있었으나 조선 후기 즈음 현재의 이곳으로 옮겼다고 전합니다. 사당은 맞배지붕에 3칸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굳게 잠겨 있어 확인할 수는 없으나 가운데 방에는 대군의 신주가 모셔져 있고 양 옆 방에는 제기와 제복 등이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건물은 1967년 1월에 전면적인 보수가 이루어져 현재에 이르렀으며 규모는 아담하고 짜임새나 전체적인 균형이 잘 맞추어져 있습니다. 

 

 

 

사당 前面의 모습입니다. 문 앞 평지공간이 좁아 담장 양쪽이 잘렸습니다. 

 

 

사당문 앞에서 바라본 前景입니다. 바로 앞에 키 큰 대나무 숲과 큰 나무가 앞을 가려 탁 트인 감 없고 앞 산의 능선이 보이지 않는 등 답답한 느낌을 줍니다.

  

 

둔덕 아래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사당에서 대군 묘역으로 向합니다.

 

 

길 끝머리 삼거리에 안내판과 인증함이 보입니다. 

 

 

삼거리 길가에 세워놓은 인증함입니다.

 

 

큰 길로 나와 임영대군사당안내판과 함께  돌아나온 길을 담은 정경입니다.

 

 

 주차된 승용차 안쪽 주택 좌측으로 임영대군 묘로 오르는 돌계단이 있습니다. 

  

 

농가 옆에 임영대군 묘로 오르는 돌계단입니다. 계단 끝에 보이는 소나무 한그루 있는 곳이 묘역인가보다 싶었는데..

 

 

또 이렇게 긴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네요.

  

 

임영대군(臨瀛大君1418-1469)은 조선 제4대 임금 世宗大王과 昭憲王后 沈씨의 넷째 왕자입니다. 太宗 18년(1418년 음1월6일) 태어나 睿宗 1년(1469년 음1월21일)에 운명하셨습니다. 諱는 璆, 자는 獻之, 시호는 貞簡입니다. 아버지는 조선조 제4대 임금이신 세종대왕이며 어머니는 領議政 沈溫의 따님 昭憲王后 靑松 沈씨입니다. 대군의 첫 배위는 左議政 南智 따님 宜寧 南씨인데 정신질환으로 이혼하였고, 두 번째 배위는 우의정 최승령의 따님 齊安府夫人 전주 최씨이며 1남 오산군 주 澍, 2남, 구성군 준浚, 3남 정양군 순淳, 4남 팔계군 정淨, 5남 흠성군 징澄과 2녀를 낳았으며, 세 번째 배위는 府夫人 안동 안씨이며 6남 영양군 함涵, 7남 단계부정 인潾, 8남 윤산군 탁濯, 9남 옥천군 옥沃 등과 5녀를 두셨습니다. 그 중 구성군, 팔계군, 흠성군은 자손을 두지 못했고 6명의 후손은 6만을 헤아리며 번성하였습니다. 전주 최씨 소생 따님인 중모현주中牟縣主는 領議政 愼承善(1436-1502)에게 시집을 가 좌의정 신수근 3형제와 燕山主 妃 居昌 愼씨를 두었습니다. 세종 10년(1428) 大匡輔國 臨瀛大君에 봉해지고 세종12년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세종24년(1442) 원윤조선초기 종실의 大君 또는 君의 양첩 장자에게 주던 작호가 되었습니다. 세종27년에는 父王의 명을 받아 銃筒을 제작 감독하였는데 종전의 화살은 2-3백보 날아간 반면 그가 제작한 화살은 천여보 안팎가지 날아가 대군을 병기와 군사에 관한 지보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종성지반의 경재소 일을 관장하였고 문종 즉위년(1450)에는 화차를 제작하였습니다. 대군은 천성이 활달하였고 무예와 의론에 뛰어났으며 왕자의 신분임에도 사람을 대하는데 교만하지 않았으며 검소하하였습니다. 단종대왕의 선위전후 둘째형 首陽大君이 여러 아우들의 동정을 살피는 것을 눈치챈 大君은 경기도 광주 의곡 (지금의 의왕시 내손동 모락산)으로 은신하여 초가에 불상을 모시고 宗廟社稷과 國泰民安을 기원하였습니다. 

 

 

정갈하고 소박하며 단정한 아름다움이 풍기는 장명등입니다. 

 

 

임영대군은 端宗大王께서 둘째 형 首陽大君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영월에 유배되자 눈이 오나 비가오나 산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며 종묘사직과 국태민안을 기원하였습니다. 이에 서울을 사모하는 산'이란 뜻으로 그리움을 뜻하는 慕자와 서울 洛자를 써서 慕洛山으로 불려오고 있습니다. 또한 端宗을 추모하는 마음이 사무쳐  流配地인 寧越을 향해 拜하였다고 합니다. 모락산정상부근 서북쪽에 있는 망배하던 바위를 사인암이라 명칭하고 주변 마을을 義谷洞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舍人巖에서 보면 서울이 한눈에 들어오며, 멀리 서해바다까지 볼 수 있습니다. 

 

예종1년(1469년) 1월21일 임영대군은 자손들에게 "왕자 왕손간에 분쟁을 일으키지 말 것, 백성에게 해를 끼치지 말 것을 유훈으로 남기고 또한 자손들을 불러 모으고 종이와 붓을 가져오게 하여 친히 '사후에 조가의 예장을 받지 말고 신도비를 세우지 말라"고 쓰고 이어 나는 본디 안평형님과 금성 아우와 함께 절의에 죽고자 하였다. 하고 붓을 놓고 숨을 거두셨으니 향년 51세 일기로 별세하였습니다. 조정에서는 대군의 유지를 참작하여 간단하게 장례를 치르고 神道碑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후세에 묘비만을 세우고 행장은 晉山君(私淑齋 姜希孟)이 지어 석함에 담아 상석 밑에 묻었다고 합니다.

 

 

망주석은 본래 있던 것이 아닌 후대에 세운 것입니다.

 

 

다시 사근행궁 터를 행해 발길 옮깁니다. 버스 뒤 삼거리에서 우측 길로 들어서야 합니다. 

 

 

삼거리에서 바라본 우측 사근행군터로 이어진 길입니다. 

 

 

길가 마을로 들어섭니다. 

 

 

'덤' 건물 옆 샛길로 들어섭니다. 

 

 

샛길은 마을 뒤 산길로 이어집니다. 한 여인이 앞서 가는 일행을 사진에 담는 모습입니다. 

  

 

첫 고개를 오르는 숲길은 30도의 더위를 잠시 잊게 합니다. 

 

 

갑자기 넓어진 길은 우측으로 접어들고 햇볕은 덮쳐 옵니다.

 

 

청목조경 앞을 지나 다시 좁아진 길은 산으로 숨어 듭니다.

 

 

파인애플매트 깔린 언덕을 비록 자전거를 어깨에 메고 올라가지만, 수풀의 향기에 마음도 발걸음도 즐겁습니다.

 

 

숲은 더욱 깊고 흙냄새 정다운 오솔길입니다. 

 

 

고갯마루 삼거리에서 우측 골짜기로 들어섭니다.

  

 

양 옆은 마치 흙으로 벽을 친 듯 깊어진 이 길은 군참호로 이어진 통로를 걷는 기분입니다.

 

 

길은 다시 정다운 오솔길로 이어집니다.

 

 

마을로 나가기 전 몸도 마음도 싱그러움으로 치유 받을 수 있을 녹색터널 앞에서 잠시 목을 축입니다. 

 

 

서울태생에 서울 성동구와 인접 지역에서만 살아왔기에 시흥 의왕 수원지방은 전혀 지리에 어두운 길치에다 삼남길 여정에서 귀가 시 교통여건이나 환경과 길을 모르기에 주말의 전철을 이용하기 위해 자전거를 가지고 왔으나 산으로 오르는 경기옛길 걷는 것보다 어려움이 적다할 수 없습니다. 

 

 

五全里(오매기마을) 마을로 들어섭니다. 

 

 

 1937년 당시 이 마을 오전리(오매기마을)에 사는 洪吉淳여사가 20여리나 떨어진 수원읍 성결교회까지 걸어 다니며 이 마을에 믿음을 처음으로 전파하여 신도 수가 늘어나면서 1937년 6월10일 처음으로 성결교회 오전리예배소가 설치된 곳이라고 합니다. 

 

 

오매기마을을 지나 다시 숲 짙은 길로 들어섭니다. 

  

 

숲길을 나오니 다시 마을 앞 삼거리입니다. 우측 마을길로 들어섭니다.

 

 

콘크리트축대를 끼고 우측으로 갑니다.

 

 

담과 서까래로 보건대 예전에는 번듯한 한옥이었을 건물에 양철지붕으로 개량한 집 앞을 지나 콘크리트길 끝 우측으로 갑니다.

 

 

푯말을 축삼아 좌측으로 갑니다.

  

 

예전 같으면 목메기 한 마리 메여 있을 만한 자리에 귀엽게 생긴 빨간 포크레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모락산길은 우측 개울가로 들어섭니다. 

 

 

하천 둑으로 들어서서 70m 정도 앞에서 하천 건너 좌측 도로로 나갑니다. 

 

 

하천에 건축빔으로 외나무다리형식으로 놓여 있습니다. 

 

 

150m 정도 하천 따라갑니다.

 

 

좌측 상록수농원간판 세워놓은 앞 샛길로 들어섭니다. 

 

 

길옆 평화로운 전원풍경.

 

 

앞을 보니 굴다리가 거무죽죽한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굴다리에서 나지막한 언덕에 올라서니 좌측은 공장건물, 우측 길로 들어섭니다. 

 

 

짧지만, 안전한 down hill !

 

 

이리가나저리가나 만나겠지만 좌측 푯말가리킴에 충실합니다.

  

 

우측으로 들어섭니다.

 

 

홍지골길에서 마을 내 사거리에 이르고 보니 이제까지 못보던 푯말이 새롭습니다. 자세히 보았더니 노선 분기점이랍니다. 

  

 

왕림마을나들목에서 큰길로 나서는 길목입니다. 

 

 

 

〈旺臨마을〉 왕림마을이란 안내문에 의하면,

조선 제10대 임금 연산군 때 정주목사를 역임하고 청평君에 책봉된 金友曾이 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동쪽으로는 白雲山 서쪽으로는 五奉山, 남쪽으로는 遲遲臺, 북쪽으로는 慕洛山에 이르기까지 사방 십리를 賜牌地로 받아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이래,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기 시작하면서 취락이 형성됐다고 합니다. 

구전에 따르면 정조대왕이 수원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을 참배하고 환궁하는 길에 이곳에 親臨했다고 해 旺臨이라 했다. 그런데 본래는 王臨이라고 해야 옳으나 私家에서는 임금 王자를 사용할 수가 없어 임금 왕字 앞에 날 일字를 썼다. 왕림은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마을 위 동쪽 지역은 청풍 김씨의 사당이 있으므로 '別廟' 또는 '웃말'이라고 부르고, 마을회관 주변은 '향촌' 또는 '아랫마을'이라 불렀다. 별묘아래는 향촌과 별묘사이에 자리잡고 있어 '샌말間村'이라 칭하고, 서남쪽 지역은 김치후의 묘가 능처럼 크므로 '새능말'이라 부르리우며, 남쪽지역은 그늘진 곳에 있는 마을이므로 '응단말(陰堂村)'이라고 부른다. 마을 초입은 풍수로 보아 기러기가 앉아 있는 형국이라 '落雁洞'이라고 부른다. 또 개울건너(남쪽)에 있는 마을은 '竹洞', 별묘 남쪽은 '방까시',  아랫마을에서는 통미 주민들과 함께 해마다 음력 10월 초에 길일을 택해서 백운산 아래에 있는 산신당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안내판을 읽어 보니 온전히 옛 풍습을 이어온 촌락입니다.* 

 

 

방금 나온 좌측 왕림마을길을 돌아본 정경입니다.

 

 

왕림마을에서 의왕시 시가지로 들어섭니다. 우측 방향 왕곡초교 담을 끼고 갑니다.

 

 

다시 좌측 현충탑 쪽으로 

 

 

현충탑 앞을 지나갑니다.

 

 

〈사근행궁터/肆覲行宮址〉 

 

 

사근행궁터에는 의왕시청별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폭이 좁고 앙증스런 인증함 안에 도장은 짧은 쇠줄에 묶어 놓고 도장 찍을 받침대 역할을 해줄 문짝을 옆으로 열개 만들어 평해길이나 의주길의 인증함에 비해 사용자의 불편에 배려함이 눈꼽만큼도 없음. 

 

 

사근행궁터에서 직진 큰 도로로 나와 우측 붉은 꽃 만발한 육교를 이용 도로를 건너갑니다. 

 

육교

 

육교 좌측으로 내려갑니다. 의왕시청본청사 방향으로 갑니다.

 

 

로터리 건너서 좌측으로 갑니다. 바로 보이는 건물은  '의왕시청사'입니다. 

 

 

 우측 큰 나무 옆길로 들어섭니다. 

 

 

농가 서너 채 있는 시골마을 풍경입니다. 고추밭을 끼고 좌측으로 갑니다.

 

 

횡단보도 건너 바로 직진합니다.

 

 

〈古古里〉

고고리는 원래 '골골이'에서 연유합니다. 즉 '골골(谷谷+이) > 고골이 > 고고리'로 굳어진 것을 한자를 빌어 취음한 것이 古古里 입니다. 이곳은 전주 이씨 전성군(全城君 : 成宗의 10번째 아들 이변. 귀인 권씨 소생)의 고손인 李禎이 좌승지를 역임한 후 이곳에 낙향하여 기거하면서 촌락이 형성되었습니다. 1960년대 이전만 해도 他姓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누대에 걸쳐 전주 이씨의 집성촌이었습니다. 마을에서는 벌사그내, 안골, 골우물, 주민들과 함께 매월 음력 10월 초에 기일을 택해서 고천동사무소 뒤 산신제당에서 마을의 안정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언덕너머 마을로 들어섭니다.

 

 

큰 도로를 건너 서너 채 농가마을 짧은 산자락을 넘어섰을 뿐인데 불쑥 나타난 엄청난 육교에 놀라워라! 

 

 

다시 차 한 대 겨우 다닐 한적한 마을길이 이어집니다.

 

 

 다시 대로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뻗어가는 길 

 

 

큰길에서 떨어져 마을로 들어서는 삼남길 

 

 

골사그내 50m 지점, 좌측은 군부대, 우측은 주택이 줄지어 있는 길을 갑니다.

 

 

이정표 목적지가 골사그내에서 지지대비로 바꼈습니다.

 

 

주택가에 운동시설을 설치해 놓은 공원마당은 잡초들의 생활터전이 되었네요.

 

 

좌측은 군부대 우측은 아담한 寺刹 '자비정사' 

 

 

산자락을 돌아들어선 곳 산에 둘러싸인 분지 같은 곳에 비닐하우스가 차지한 이곳이 '골사그내'

 

 

비닐하우스 棟을 지나 산자락 길로 들어섭니다. 

 

 

비닐하우스 옆길로 꺾어 듭니다.

 

 

붉게 익은 탐스런 보리수 열매 여기저기 열려 있는 산자락 길로 들어섭니다.

 

 

 

아, 이런 곳에서 존경하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흔적을 대하다니 감격스럽습니다. 오직 나라와 국민을 사랑하시던 그 분의 영도력이 아쉽고 그립습니다. 

 

 

큰 도로에서 얼마 안 들어와 이렇게 울창한 수림이 있다니 마치 깊은 산중을 헤매는 느낌입니다. 

 

 

등성이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갑니다. 

 

 

낮은 언덕위에 삼남길 안내판이 보입니다.

 

 

표지판을 보니 이 자리가 의왕시와 수원시의 경계입니다. 

 

 수원시로 들어서는 호젓한 오솔길입니다.

 

 

현재 시각은 12시51분, 마침 벤치가 있어 가져온 밥알쑥떡과 사과로 요기를 합니다.

 

 

200m 정도 걸어가니 갈림길이 나옵니다. 좌측 하산길로 즐겁게 다운 힐

  

 

150m정도 내려갑니다. 

 

 

좌측으로 지지대비가 있습니다. 

 

 

2021년 6월12일 (토요일)오후 1시 36분 삼남길 제3코스 모락산길 종착지에 도착했습니다. 

 

 

〈지지대비명 / 遲遲臺碑銘〉 (전서체 머릿글 )

이 비는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기 위해 손조7년(1807년)화성어사 신현(申絢)의 건의로 세워졌다. 정조대왕은 생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릉원(화성시 융릉)에 참배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만 넘어서면 멀리서나마 아버지의 묘를 볼 수 없게 되므로 언제나 이곳에서 행차를 멈추었다고 합니다. 무덤을 뒤돌아보며 떠나기를 아쉬워 했기 때문에 이곳에 이르면 왕의 행차가 느릿느릿 하였다고 하여 한자의 '더딜 遲' 두 자를 붙여 '지지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이 비문은 전합니다. 비문은 徐榮輔가 짓고, 尹師國이 글씨를 썼으며, 화성유수 洪明浩가 篆額을 썼습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  

 

〈지지대비閣〉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큰 사람(고관)이던 작은사람(백성) 이던 이곳에서는 모두 말에서 내려라

 

 

지지대비 아래 큰 길에 내려서서 바라본 지지대 비각. 계단 입구 옆 에는' 하마비'가 세워져 있고 4번째 계단 면에 '지지대' 석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의왕시- 수원시를 잇는 국도에 내려와서 측면으로 바라본 지지대비 비각의 모습입니다. 

 

 

지지대 고갯마루에 영동고속도로 北수원 진입로가 있습니다.

 

 

지지대비가 있는 현 위치가 궁금해 큰 도로에 내려와 보니 의왕시와 수원시 경계였습니다. 

 

 

 

2021년 6월12일 (토요일)  - 鄕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