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옛길

「경기 옛길 삼남길 제1코스 한양관문(남태령.온온사)길」

鄕香 2021. 6. 5. 23:31

눈도 침침하고, 귀도 어두운 그리 젊었다 할 수 없을 해방둥이가 정년 후 15년을 이리 포스팅을 하다보니 이제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과 마우스에 손에 얹고 2시간만 있으면 다리는 저리고 손가락이 전류가 통하는지 찌릿찌릿 하고 붓는데도 이리 흔적을 모아 남기고 있습니다. 글귀는 생각대로 타자해서 그대로 올렸습니다. 사진 분량이 많다보니 끼적인 글귀를 일일이 재검할 여력도 느긋함도 없고 분량에 질려서 그냥 올리다보니 오타나 글귀가 어설픈 것이 많습니다. 보시더라도 혜량해주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삼남길 제1길 '한양관문길'은 4호선 전철 2번 출구를 나와서 직진 30m 정도 거리의 4212번 시내버스 종점을 지나 남태령 고갯마루 도로 중앙에 우뚝 솟은 남태령 비에서 100m 지나가면 좌측에 남태령 옛길 비석이 있고 바로 그 앞 좌측으로 관악산 등산로 입구 우측에 제법 큰 삼남길 안내판과 인증함이 나란히 있으며 그 옆 아래에서 한양관문길이 시작됩니다.

 

 

4호선 남태령역 엘리베이터는 수직으로 오르내리는 여느 엘리베이터와 다르게 45º 정도 언덕지게 설치된 에스컬레이터 처럼 마치 산에 설치된 케이블카를 탄 그런 느낌입니다. 앞뒤 양쪽이 문으로 된 승강기에 몸을 실자 문이 닫히고 그 자리에서 2m 정도 천천히 미끄러지듯 레일이 설치된 뒤로 이동해서야 비로써 지극히 조심스럽고 스무스하게 언덕을 오르듯이 오릅니다 지하에서 위층으로 오르는 승강기 안에서 유리창으로 내다보니 와이어, 기어를 물려 주는 장치, 점검이나 수리를 위한 사다리식 계단 등이 레일 안쪽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 

 

오르는 중 돌아서서 올라온 곳을 내려다본 정경입니다. 좌우의 유리벽으로 오르내리는 계단이 보입니다. 

 

〈삼남대로〉

조선시대 6대 大路 중 한양과 충청, 전라, 경상의 三南地方으로 이어졌던 1,000리 길을 三南大路라 불렀습니다. 

조선시대 육로교통의 중심축으로 삼남지방의 풍부한 물산이나 각지의 특산물 등이 이 길로 오고갔으며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던 선비들이 걸었던 길입니다. 또한 이 길은 정조대왕께서 아버지 사도세자를 참배하기 위해 현륭원으로 행차하던 길이었으며,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으로 부임하던 길입니다. 또한 삼봉 정도전, 다산 정약용이 유배를 가던 길이며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이 남원으로 달려가던 길이자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의 격전지이기도 합니다. (경기옛길 가이드북에서)

 

 

南太嶺 옛 길은 이곳을 넘어 수원 안성을 거쳐 남쪽 三南(충청,전라,경상)으로 갔으며, 반대로 충청, 전라, 경상도에서는 과천에서 이 고개를 넘어  사당동, 동작동, 흑석동을 거쳐 노들나루(노량진)에서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한양에 이르렀습니다. 

 

 

남태령의 본래이름은 여우고개(狐峴)였습니다. 어느날 조선 제22대 이산 임금님께서 아버지 사도세자 능원으로 행차할 때 이 고개에서 쉬면서 과천현 이방에게 고개 이름을 물었습니다. 이방 변씨가 임금께 속된 이름을 아뤌 수 없어 남태령(남행할 때 첫 번째 나오는 큰 고개)이라 아뤈 이후 남태령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좌측에 남태령 옛길표석과 등산로 입구 안에 한양관문길 안내판과 인증함이 보입니다.)

 

(남태령 표석 → 온온사 → 과천향교 → 과천시청 → 인덕원 옛터. 10km, 2시간30분,)

개인에 따라 거리도 걸리는 시간도 다를 수 있겠습니다. 

 

보이는 전봇대 옆으로 내려갑니다. 

 

 

 

도로를 조금만 벗어나도 신선한 대기로 온 몸과 마음이 즐거운 과천, 출발부터 다져진 돌계단이지만 마음은 즐겁습니다. 

 

 

제법 가파른 돌계단이 녹색통로로 이어집니다.

 

 

내려온 계단과 녹색통로의 아름다움입니다.

 

 

우측 계곡에는 맑은 물이 노래합니다. 

냇물이 졸졸 너의 집이 어디냐 숲속이냐 땅속이냐 바위틈이냐 ~~ 

 

 

숲길은 끝나고 마을이 마중을 합니다.

 

 

오손도손 정답던 숲속의 형제 나무들과 잡초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대로변에 멈춰서보니 낯설고 그 삭막함에 갈 길 몰라하노라 

  

 

어려서 흥인국민학교 교정에 자라던 플라타너스의 수피가 떠올라 담은 사진입니다.

 

 

플라타너스 줄지어 섰고 빨간 길에 붉게 핀 열정의 꽃들, 내 가슴을 물들이네. 

 

 

처음으로 만난 횡단보도를 건너야 합니다.

 

 

횡단보도를 건너자 우측 방향에서 바로 좌측 마을로 개울 따라 갑니다. 

 

 

저만치 배낭을 질머지고 가는 일행 삼남길 길손인가? 관악산 오르려는 산꾼들인가 행색을 볼 진데 후자에 한표! 

 

 

등산로 입구 산불감시초소 앞에서 암반에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으로 팔랑대며 앞선 리본따라 나도 들어섭니다.

 

 

속세의 길에서 다만 한걸음 옮겼을 뿐인데 바로 신선의 세계라니 경탄해 벌어진 내 입 함지박이 따로 없네.

 

 

깊고 깊은 골짜기에 있는 느낌에 동요 하나 절로 나옵니다. 

산 높고 물 맑은 우리 마을에 꽃 피고 새우는 봄이 왔어요 한 겨울 땅속에 잠자던 개구리 바스스 잠 깨어 뛰어 나옵니다 ~~, 

 

계곡을 타고 좀 오르니 계곡은 좁아지고 물은 보기 어렵네.

 

 

골짜기에서 우측 산허리로 오릅니다.

 

 

이내 고갯마루와 이정표가 보입니다. 

 

 

정처 없는 나그네 잠시 쉬어가기 좋을 곳이네요.

 

 

이정표를 보니 지나온 암반골짜기가 용마골인가 봅니다.

 

 

다만, 숲이 무성하고 낙엽 덮인 길도 예뻐 담은 거예요.

 

 

길도 숲도 더없이 편함을 줍니다. 이래서 길 찾아 길 떠납니다.

 

 

호, 저 요술지팡이 좀 보소! 한순간 나무로 변신하여 나를 속여 먹네. 

 

 

작은 둔덕너머 나뭇가지 사이로 하얀 햇살이 나를 찾는 양 숲속을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조만치 녹색터널 끝에 빛이 밝아지는 걸 보니 큰 길이 가까워지고 있음이겠지요. 

 

 

 버스가 지나가는 걸 보면 커도 아주 큰 길이군요. 어디 쯤일가?

 

 

길 건너에 관문체육공원이란 큰 공원이 있습니다. 리본을 켜 담다 보니 도로건너는 잘려 볼 수가 없네요. 

  

 

우측 차가 들고나는 길로 꺾어 들어가야 합니다. 

 

 

들어 설 길목에 서서 한 눈에 그 속을 다볼 수 있네요. 알고 싶은 온온사는 400m요, 관악산 들머리는 1천m요, 조선의 통치이념의 전당 과천향교는 1.100m요 아득한 절벽 위 연주대는 4천3백m에 있음을..

 

 

온온사라 하기에 寺刹로만 생각했더니 지징 지극히 평온하다는 果川縣 官衙의 東軒 穩穩舍 였습니다.

 

 

온온사는 엄연히 사적지이건만, 주차관리를 안하니 슬쩍 주차시켜도 돈 내라는 이 없다보니 인근 과천교회 교인들의 주차장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주차된 차와 주차하려는 차들로 복작거립니다. 조금 안쪽의 부림헌에는 인기척도 느낄 수 없으니까요. 어떻게 주차를 한 사람은 희색이 만면해서 교회로 가더라고요. 주차비가 무서우면 차를 갖지 말던지 정서를 갖고 사색을 즐길 수 있는 희망이 조각이나 바람에 흩어져 버립니다. 

 

 

입구 안쪽 우측에는 엄청난 느티나무 옆에 공적이나 선정비 성격의 비들이 십여 기가 세워져 있습니다. 

안내문에 의하면 이 비석군은 시흥군 과천면 관문리 홍천말 249의5번지 도로변에 있던 것을 이 자리에 옮겼다고 합니다. 비는 조선 정조6년(1782년)에 건립된 현감 정동준의 비로부터 1927년에 세워진 변성환에 이르기까지 모두 15명의 비석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비석들은 장방형의 비좌에 비신을 갖춘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양식을 보입니다. 

이 비로 인해 과천현에 부임했던 역대 현감의 변화상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건립연대를 일 수 있어 당대에 유행했던 비석의 형식을 이해하는데 자료가 되겠습니다.

 

 

〈과천현 관아터/果川縣 官衙址〉

이곳은 과천현의 수령(縣令)이 업무를 보던 건물인 官衙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穩穩舍는 정조대왕께서 아버지 장조(사도세자)의 현릉원 가는 길에 머물면서 이곳에서 매우 편하게 쉬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현판의 글씨는 정조께서 집적 썼다고 합니다. 돌로 만들어진 유물이 발견되고 나이가 많은 나무가 많은 점 등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온온사를 중심으로 관아가 지어졌을 것으로 봅니다. 

 

 

과천현 신수읍지(숙종25년 1699작성)에 과천현 관아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연혁(沿革)

인조27년(1649)객사동헌客舍東軒 창건 → 부림헌(富林軒)

효종7년(1656) 衙舍 - 內東軒 중건.

현종2년(1661) 外東軒 - 관청 - 司倉 중건. 현종 7년(1666) 客舍西軒 창건 →穩穩舍.

숙종6년(1680) 鄕廳, 蓮亭 중건. *숙종13년(1687) 公須廳 중건. *숙종14년(1688) 作廳 창건. *숙종15년(1689) 軍器廳, 獄 창건. *숙종21년(1695)使令廳 창건. 

 

《富林軒》

 

과천현의 관아는 조선 초기 무학대사의 제자인 열이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이 없어 정확한 내용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임금이 묘소(능), 온천, 사냥을 오고가면서 이용하던 행궁의 기능과 지방관청의 기능을 모두 처리했기 때문에

다른 곳의 관아보다 규모가 더 컸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측면으로 본 온온사 주변에 나이 많은 古木들이 온온사를 감싸고 있습니다. 

 

 

담장 안 비석군 옆 담장 곁에 수령 500년은 족히 넘을 거대한 은행나무의 위용입니다. 

  

 

온온사를 뒤로 하고 과천향교로 향합니다. 

  

 

가로수 짙푸른 초여름 나무는 잎이 무성하여 켜켜이 옷을 입은 듯이 무게감을 주는데, 오가는 사람은 옷도 마음도 날아갈 듯 가볍네.

 

 

과천향교에서 300m 정도 거리에 관악산 들머리이자 유락지 초입 우측 산자락에 과천향교가 있습니다. 

  

 

부모와 함께 나들이 나온 아이들이 계곡 맑은 물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습니다.

 

 

《과천향교 》

홍살문을 통해 바라본 과천향교는 마치 산자락에서 다리를 길게 벋고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이 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년) 관악산 기슭에 세워졌으나, 자주 불이 나고 과거에 오르는 학생도 없는 등의 일이 생기자 터가 좋지 않다고 여겨 숙종16년(1690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고 1944년 시흥향교, 과천향교, 안산향교를 통합하여 시흥향교로 하였다가 1996년에 과천향교로 복원하였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숙종16년에 이곳으로 옮기면서 세워졌던 것을 1975년에 환전히 해체하여 복원한 것입니다.

 

향교는 조선시대 국가에서 설립한 지방교육기관으로 중 · 고등학교 수준의 교육을 담당하였습니다.

良民이상이면 향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詩나 文章을 짓는 사장학과 유교의 경전 및 역사를 공부하는 經學이 주요 교육내용이였습니다. 또한 향교에서는 교육뿐만 아니라 중국과 조선의 先賢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에 들어서면 명륜당 한 건물에 좌우측에 동 · 서재로 보이는 방이 있고 내삼문에 들어서면 대성전 정면으로 있을뿐 그 아래 좌우로 있을 동 · 서무가 없으나 외삼문, 명륜당, 내삼문, 대성전이 있는 대부분 향교와 마찬가지 양식을 지녔으며 건물의 배치는 단조로우나 지형에 따라 터를 크게 네 단으로 나누어 공간이 수직적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외삼문을 들어서 바라본 명륜당 좌우에 딸린 유생들의 숙소가 특이합니다. 일반적으로 유생들의 숙소인 東齋와 西齋는 명륜당 아래 마당 동쪽과 서쪽에 위치해 있는 것이 정례입니다. 

 

 

과천향교는 前學後廟의 배치이며 홍살문과 외삼문을 지나면 교육기관인 명륜당이 있고 그 뒤에 있는 내삼문을 들어서면 대성전이 있습니다.

 

 

인간의 윤리를 밝히는 집이라는 의미를 가진 明倫堂 뒤 내삼문의 모습입니다.

 

 

대성전은 孔子와 聖賢의 位牌를 모신 祠堂으로 이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간입니다.

 

大成殿 중앙 안에는 大成至聖文宣王 孔子를 위시하여 郕國 宗聖公 曾子, 兗國 復聖公 顔子, 鄒國 亞聖公 孟子, 沂國 述聖公 子思 등 다섯 聖人의 위패를 모셨고, 그 좌우(西享 · 東享)로는 중국 송나라 2賢(주희.정호)과 우리나라의 18賢 등 25位를 모시고 있습니다. 

 

 

西享에는 從으로 열분 徽國公 朱熹, 文昌侯 崔致遠, 文忠公 鄭夢周, 文獻公 鄭汝昌, 文元公 李彦適, 文正公 金麟厚, 文簡公 成渾, 文烈公 趙憲, 文正公 宋時烈, 文純公 朴世采의 위패를 모셨고,

동향에는 역시 從으로 열분 豫國公 程顥, 弘儒公 薛聰, 文成公 安裕, 文敬公 金宏弼, 文正公 趙光祖, 文純公 李滉, 文成公 李珥, 文元公 金長生, 文敬公 金集, 文正公 宋浚吉의 位牌를 모셨습니다.

 

 

外三門에서 내려다본 모습입니다. 

 

 

향교를 나와서 인덕원지를 향해 발길을 옮깁니다.

  

 

주거 환경이 쾌척하고 마음 넉넉해 지는 단독주택와 빌라단지를 지나 갑니다.

 

 

아파트와 다르게 품격 있는 살만한 동네 같습니다. 

 

 

과천청사와 정부청사 앞을 지나 과천중앙고등학교 방향으로 洪村川을 끼고 갑니다 

〈洪村川〉

관악산 주봉인 연주대 남쪽의 한봉우리인 칼바위 남동쪽 골짜기로부터 발원한 홍촌천은 소하천으로 산지 계곡을 따라 급경사로 사행을 반복하며 남동쪽으로 흐르다가 국사관에서 비교적 원만한 직선수로를 이룹니다. 수자원공사 부근에 이른 홍촌천은 과천 도심지 입구의 암거로 유입하게 되며 양재천의 본류가 됩니다.

 홍촌천의 이름은 문원동에 있던 남양 홍씨 집성촌인 홍촌마을 앞을 지나가는 하천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수자원공사 옆 홍촌천에 가로 놓인 홍촌橋 건너 언덕에 위치한 과천중앙고등학교 전경 

 

 

삼거리에서 우측 안양 방향으로 들어섭니다. 

 

 

정조대왕께서 마셨다는 찬우물이 이 근처에 있다는데.. 

  

 

우측 찬우물로, 정조 임금님께서 아버지 사도세자(추존 장조) 능침 참배 행차 때 물맛이 좋다하여 내린 加資우물로 들어섭니다.

 

 

공원을 지나 150m 거리에 찬우물이 보입니다. 

 

 

인척 없는 공원에 아이들 없는 미끄럼틀 왠지 허전합니다. 공원 안에 화장실이 있습니다.  

 

 

〈가자우물/加資井〉

이 우물은 효성이 지극한 조선 제22대 정조대왕(正祖大王1752-1800)이 아버지 사도세자(思棹世子1735-1762)의 능침 현릉원을 참배하러 가던 중 갈증을 느끼자 한 신하가 이 우물물을 떠다 바쳤다고 합니다. 정조께서 이 물을 마시고 물맛이 매우 좋다고 하시며 堂上의 品階를 내리니 이 때부터 이 우물을 "가자우물加資井"로 부르게 되였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암반의 틈에서 솟아나는 샘물로, 수량이 많고 약수로도 유명하였으나 근래들어 애전의 수량에 미치지 못하여 과천시에서 향토유적의 보존을 위해 인근의 지하수를 유입하여 복원 정비하였습니다

 

 

찬 우물길에서 다시 인덕원을 향해 가는데 행색으로 보나 걸음걸이로 보나 삼남길을 걷는 듯한 한 여인이 저만치 타박타박 걷고 있습니다. 

  

 

인덕원으로 이어지는 큰길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짙은 수풀 옆을 무심히 지나던 눈길에 나뭇가지사이로 얼핏 보이는 태극기에 멈춰서서 들여다보니 꽃바구니 놓인 비석이 보입니다. 숲을 헤치고 비석을 향해 다가갔습니다.

 

 

《고 김승철 중위 전사지지 (故 金承鐵 中尉 戰死之地)》

 

군별 : 육군, / 계급 : 중위, / 군번 : 15792 / 전몰일자 : 1950년 7월 2일 

 

고 김승철 중위는 1927년 12월24일 평안북도 선천군 선천면 남산리에서 태어났습니다. 

1950년 1월14일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복무하였습니다.  

6월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 공격을 받자 동두천-포천 축선을 방어하는 제7사단에 배속되어 백병전까지 벌이며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퇴로 차단의 위험으로 인하여 퇴각 후 북한군의 한강도하를 지연하는 한강선 방어 작전(신사동-과천 전투)에 투입되었습니다. 작전에 따라 고 김승철 중위는 이한림 장군의 부관으로 적의 진출을 지연시키는 임무를 수행 중 장군을 감싸 보위하다 과천시 갈현동 산 13번지에서 장렬히 전사하였습니다. 이에 이한림 장군이 1959년 9월9일 투철한 군인정신을 기리는 뜻으로 당시 전사현장과 인접한 지역에 충혼비를 건립한 후 국가보훈처에서 현충물로 지정(관리번호 : 13-2-11)하여 과천시에서 관리하여 오고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그의 살신보국정신殺身保國精神을 선양하고 후세의 교훈으로 남기기 위해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하였으며 국립현충원(48-1-208)에 봉안하고 영령을 추모하고 있습니다. 

 

〈과천-신사동 전투 개요〉

果川-新寺洞 戰鬪는 한국 전쟁 발발 초기 1950년 6월28일에 한강 이북의 서울이 북한군에게 함락되자 한강 이남으로 철수한 국군이 한강을 대치선으로 두고 한강 북쪽의 북한군과 대치하여 혈전을 벌인 한강 방어선 전투 중 하나로 공세적인 입장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북한군 보병 4개 사단과 전차 1개 여단에 맞서 국군의 혼성 5개 사단이 사활을 걸고 방어에 임하여 한국 전쟁의 흐름에서 승패의 향배를 결정짓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전투 중 하나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국군의 입장에서는 이 전투는 실지를 회복하고 적을 격퇴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지원군의 도착을 기다리는 시간을 얻기 위한 싸움이었다. 결과적으론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한 후 6일 동안이나 한강변과 과천을 비롯한 지역을 고수하여 국군이 흩어진 부대를 재편성하고 회복할 수 있는 시간과 유엔군의 참전에 필요한 황금 같은 시간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북한군으로서는 이 전투에서 의외의 시일이 지연됨으로 말미암아 당초 그들이 기도한 '수원북방에서 아군 병력을 타격'하고자 했던 의도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또 그렇다고 미군이 참전하기 전에 방어선을 조기 돌파한다는 것도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이 같은 작전계획의 차질은 나중에 그들 스스로가 적화통일을 달성치 못한 가장 큰 원인의 하나로 분석하였을 정도인 것이다.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10자가 세겨져 있습니다. 「故 金承鐵 中尉 戰死之地」 김승철 중위가 전사한 곳입니다.

오늘 현충일을 맞이하여 거수경례를 올리고 호국영령의 冥福을 빕니다.  

 

 

《故 金承鐵 中尉 戰死之地》 

6월25일 일요일 북쪽 공산 괴뢰군은 우리 군이 일요일을 맟이하여 병사들이 외출 외박을 나간 틈을 이용하여 탱크를 압세워 파죽지세로 서울을 점령하였을 때 이 고개에서 괴뢰군의 남하를 막으라는 이한림 장군의 지시를 받고 혼신을 다해 장군을 호위하며 싸우다 이 자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습니다. 이에 그에게 화랑무공훈장을 내리고 전사지인 이 자리에 김승철 중위의 충성심을 기리고 기념하고자 이 비석을 세웠다고 합니다. 오늘 현충일을 맞이하여  대한민국 전물 군경 유족회에서 보낸 꽃바구니가 올려져 있습니다.  

 

 

비석 壇 烏石 전면에 다음과 같은 詩가 새겨져 있습니다. 

 

"오가는 길손 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위해 단 하나 뿐인 내 청춘을 이 자리에서 불 살랐노라 그리고 겨레가 통일되어 그대들이 진정 행복에 겨워 하는 날 나는 이 언덕에 누워 조국의 하늘을 우러르며 기꺼이 미소지으리라. " 

 

또한 壇과 詩가 새겨 있는 오석 사이 틈새에 끼워놓은 소박한 장미꽃다발은 가슴 뭉클하게도 넝쿨장미를 어디에선가 꺾어서 즉석에서 신문지로 꽃다발을 만들어 작은 메모지에 달필의 한자로  " ※ 先輩 冥福을 빕니다. 無名退役陸軍中尉 ", 한글과 한자를 섞은 16자를 써놓았습니다. 이러한 충정이 있는 한 그 어떤 역경에서라도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공산주의로 가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입니다. 저 또한 가슴이 뭉클합니다. 고맙습니다. 고이 잠드시옵소서. 명복을 빕니다. 

 

 

고갯마루에서부터 인덕원 사거리 전까지 판넬 가림막이 감싼 저 안이 그 길이만큼 궁금하다.

 

 

마침 터진 곳이 있어 들여다보니 장중한 관악산이 아름답고 기쁨을 준다. 그런데 여기에 아파트 공사라도 하는 것일가 땅을 온통 헤집고 지반기초공사용 쇠말뚝(pile)을 박아 놓았으니 앞으로 이 자리에 오가는 길손 저 멋진 관악산 조망권 빼앗기네.

 

 

인덕원 사거리에서 우측으로 들어섭니다.

 

 

4호선 전철 인덕원역 8번출구 20m 앞 횡단보도를 건너 가야합니다.

 

 

전철역 앞 버스정류장 부스에서 바라본 횡단보도 앞 정경.

  

 

횡단보도 앞 꽃집 꽃동산화원, 

 

 

길 건너 좌측(인덕원사거리)으로 갑니다.

 

 

인덕원사거리 코너에 있는 전철 6번 출구 앞에서 우측 길로 들어서야 합니다.

 

 

4호선 인덕원역 6번 출구 우측 '하루샘에 꽃 필때' 파란 간판 골목길로 들어섭니다.

 

 

골목안 나무 자라는 자리에 인덕원 옛 터 표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자리는 과천과 안양, 의왕을 잇는 삼남대로의 중심지로서 옛길에 관련된 문헌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곳입니다. 

일찍부터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곳을 찾는 사람이 많았고 따라서 주막과 여러 가지 가게들이 많이 생겨나는 등 상업이 발달하였을 것입니다. 지금도 음식점들이 번다하기는 똑 같습니다. 이제 다시 발길을 삼남대로 제 2길 인덕원길로 들어서야 겠습니다. 인덕원길은 학의천을 따라 빼어난 경관으로 알려진 백운호수로 이어집니다. 

 

 

2002년 8월에 안양시에서 세운 이 표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인덕원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에 환관들이 퇴궐하면 이곳에 내려와 모여 살면서 주민들에게 어진 덕을 베풀었다 하여 붙여진 인덕이란 말에 마침 이곳에 관리들의 숙식처였던 원이 있어 두 말을 자연스럽게 합쳐서 인덕원이라 칭하게 되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1597년 5월 초사흘에 인덕원에서 쉬어 갔다는 내용이 있고, 특히 조선 제22대 정조대왕께서 부친 사도세자능 참배시 여섯 차례에 걸쳐 인덕원의 옛길을 지나갔다는 원행정례의 기록으로 보아 이곳이 유서깊은 역사의 현장이기에 이를 기리고 후세에 전하고자 이 표석을 세운다."고   

 

 

2021년 6월6일 현충일에  -鄕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