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나루길은 제4코스 끝머리인 선유삼거리에서(독서삼거리) 37번 국도 적성, 전곡으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서 화석정을 거쳐 임진나루터를 지나 임진강 건너 개성공단과 송악산을 바라볼 수 있는 장산 전망대 를 거쳐 시골 마을의 정취를 느끼며 분단의 상징 철의 장막을 보며 내가 어떤 이념과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 되돌아볼 수 있는 사색의 길입니다.
독서삼거리 좌측 다리 끝 난간 바로 옆 하천둑길로 들어섭니다.
삼거리 좌측 귀퉁이 집은 각종 한미군용품점입니다.
입구를 크게 담아본 정경입니다.
위험한 차도를 피해 하천 둑이나 산자락 길을 발굴해 안전하게 갈 수 있게 애쓴 관계자들의 노력을 느끼며 고마움을 드립니다.
고동색 안내판 하나가 눈길을 끕니다. 900m 거리 마을 안에 "이세화 선생 묘",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마을로 들어섭니다.
홍살문은 멀쩡한데, 그 아래 길은 온전히 망초밭이니 관리상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가?
〈신도비/神道碑〉
忠肅公 李世華의 생애를 기록한 이 비는 종2품이상의 고관에 한해서 세울 수 있는 비석으로 본 인물의 일대기라 하겠다. 이 신도비는 묘소 둔덕 아래 진입로 우측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세화(李世華 1630 - 1701)선생은 조선 후기 文武를 겸한 重臣으로 본관은 富平, 자는 君實, 호는 雙栢堂, 또는 七井으로 생부는 通德郞(正5品 上階) 李以載이며 伯父 莊陵 參奉 李熙載의 양자로 들어갔습니다. 孝宗 3年(1652년) 司馬試에 합격 生員이 되었고, 孝宗 8年(1657년) 식년 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습니다. 그 후 정언, 장령 등을 거쳐 당상관 광주부윤에 올랐고 이후 황해도, 평안도, 전라도관찰사를 두루 거쳐 肅宗 15년(1689년)경상도관찰사를 지내고 鄕里 西湖로 내려갔습니다.
같은 해 仁顯王后를 폐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당함을 상소하여 크게 憤怒한 숙종 임금은 한밤에 친히 국문을 하니 이세화는 臣은 국사로 인해 죽기를 바랐는데 이제 그 소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다만 신의 죽음이 성덕에 누를 끼칠까 두려우며, 신에게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다 하더라도 옥리에게 맡겨 다스리게 하시면 될 것을 밤새도록 친국하시니 옥체를 상할까 두렵사옵니다.“고 諫하였습니다. 다음날 유배지 정주로 가는 도중에 풀려나 坡山의 선영 아래로 돌아왔습니다. 갑술환국 후 肅宗 20년(1694년) 4월 대사간, 호조판서를 제수하였으나 고사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나 인현왕후 복위도감제조로 차정한다는 말을 듣고 곧 상경하였습니다. 그 후 의금부사 겸 지경연사, 세자빈객에 오르고 청백리로 선정되었으며 그 뒤 공조, 형조, 병조, 예조,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지중추부사에 이르러 세상을 달리하시니 사후 豊溪의 忠烈祠에 享祀되었습니다. 諡號는 忠肅입니다.
〈忠肅公李世華/충숙공이세화〉
숙종 때 소론의 거두요 영의정을 지냈으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 언제 갈려 하느뇨' 시로 유명한 남구만(南九萬 1629 - 1711)이 글을 짓고, 18대 현종의 명안공주와 혼인한 부마(海昌尉)이자 시와 서예에 능한 오위도총부도총관 오태주(吳泰周1668-1716)가 글씨를 쓴 이 신도비문에 의하면 충숙공 이세화 선생은 광주부윤에서부터 한성판윤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차관級인 형조참판1회, 도지사格인 경상,전라,평안,함경,황해도관찰사 순무사 등 10번, 대통령 수석비서관格인 동부 . 우승지 2번, 국회사무총장, 운영위원장, 국회상임위원장 등과 같은 격인 좌참찬과 검찰총장 格인 판의금부사 등 7번, 지금의 장관 格인 6조 중 호조를 제한 5조 판서를 9번 지냈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서된 정통 관료로 청백리였던 인물입니다.
〈朝鮮忠臣吏曹判書贈領議政忠肅李公神道碑銘〉
碑 상단 위 全面에 '조선충신이조판서증영의정충숙이공신도비명' 20자를 전서체 큰 글씨로 돌려 새겼습니다.
(前面)
朝鮮忠神吏曹判/조선충신이조판
(左側面) 書贈領/서증영
(後面) 議政忠肅李公神/의정충신이공신
(右側) 道碑銘/도비명
봉분아래 둔덕 중턱에 경기도기념물 제60호 비와 소개 글 판이 있는데 부평 이씨 문중이나 후손들과 경기도에서 관리를 소홀히 하여 잡초가 무성하고 봉분이 쓸려내려 보기에 안타깝습니다.
두 봉분 사이 바로 앞에 비를 세웠으며 부인과 나란히 있습니다.
「贈領議政忠肅李公世華之墓 有明朝鮮國忠臣行吏曹判書 贈貞敬夫人淳昌薛氏祔左」
「증영의정충숙이공세화지묘 유명조선국충신행이조판서 증정경부인순창설씨부좌」
묘는 돌보지 않아 내려앉았어도 굳건하게 서있는 고색창연한 비만큼은 선생의 올곧은 선비정신과 청백리의 기백이 번쩍입니다.
측면으로 바라본 정경입니다.
봉분 바로 앞에 비석 그 앞에 혼유석과 향로받침석, 망주석 1쌍 그 아래 문인석 1쌍 이 있습니다.
문인석은 조선 후기의 석물에서 느낄 수 있는 장중함이 엿보입니다
망주석에는 혼령이 세상 밖 구경 나갈 때 태우고 나가고 들어오는 '細虎'가 새겨져 있지 않고 문양은 아름답고 장중한 맛이 있습니다.
충숙공 봉분 뒤에서 내려다본 묘역 정경.
고혹적인 색깔에 도도한 모습의 엉겅퀴꽃은 말합니다.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이 고개 중턱에서 좌측 마을로 들어서면 화석정으로 이어지겠습니다.
고개 중턱에서 좌측 파주수도문산정수장 앞까지 갑니다.
파주수도지사 문산정수장 앞 고갯길을 오릅니다.
고개를 넘어 내림길 우측 '필 무인텔' 맞은 편 우측 화석정마을길로 들어섭니다. 우측 산자락에 화석정이 위치해 있습니다.
우측 진입로 앞 전신주에 화석정 안내판과 리본이 보입니다.
화석정으로 휘어돌아 이어지는 길 자태
굽어진 길 끝자락에서 좌측으로 들어서야 합니다.
좌측으로 들어섭니다. 바로가면 수자원취수장입니다.
보이는 '화석정 가든' 마당에 화석정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습니다. 큰 느티나무 숲에 화석정이 있습니다.
화석정 앞 주차장과 매점.
『화석정/花石亭』
임진강가에 세워져 있던 정자로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1536-1584)가 제자들과 함께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던 곳이었습니다.
원래 고려 말의 문신인 야은 길재(冶隱 吉再)의 유지가 있던 곳이었는데 세종 25년(1443년) 율곡의 5代祖인 이명신(李明晨)이 정자를 건립하였습니다. 성종 9년(1478년) 이이의 증조부 이의석이 중수하고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이름지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80여 년 간 터만 남아 있다가 현종 14년(1673년)에 후손들이 복원하였으나 6.25동란 때 다시 소실되고 말았는데 1966년 파주의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다시 복원한 것으로 팔작지붕 겹처마에 초익공 형태로 조선시대 양식을 따랐습니다.
율곡 선생이 나이 8살에 지었다는(八歲賦詩)
〈花石亭/시 화석정〉
"林亭秋已晩 騷客意無窮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임정추이면 소객의무궁 원수연천벽 상풍향일홍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塞鴻何處去 聲斷暮雲中
산토고륜월 강함만리풍 새홍하처거 성단모운중"
저만치 임진강을 가로 질러 파주와 연천을 잇은 장남교의 모습이 보입니다. 평화누리길 13코스 종주할 때 저 다리를 건너 연천을 거쳐 철원 백만암까지 걸었던 생각이 납니다.
다시 장산나루를 거쳐 임진각 을 향해 발길을 옮기면서 돌아본 화석정 마당의 모습입니다.
초행은 아니다만 짧은 언덕을 올라서서 어디로 가나...
보이지 않으면 당황스럽고 보이면 반가운 내 길잡이 고동색과 빨강 리본
이리가나 저리가나 마을 어귀에서 만나긴 매일반이지만 임진나루 돛단배라도 볼 양으로 우측 나루터를 향해갑니다.
하! 나루터를 폐쇄했어요. 3년 전 평화누리길 다닐 때 굳게 닫혀 있는 1사단 문장 그려진 저 문 활짝 열렸었고 임진강 관광할 수 있는 돛단배도 운영했었는데 배 떠난 뒤 도착하여 가물가물 멀어져가는 돛단배만 아쉬움으로 바라보던 나루터 볼 수 없어 돌아서 길 갑니다.
언덕에 올라서면 조만치 좌측 임진리 마을 어귀에 버스 정류장이 있습니다.
임진리 마을버스 정류장.
나루터 전에 갈렸던 길과 만나는 마을 어귀입니다.
마을 어귀를 지나 우측으로 장산전망대로 이어지는 기분 좋은 숲속 흙길입니다.
길 끄머리에 차가 보입니다 그곳이 장산전망대 입구입니다.
우측이 전망대로 들어서는 입구이자 흙길입니다.
우측은 방금 걸어온 길이고 좌측이 전망대로 가는 길입니다.
싱그런 수림사이 향기로은 흙냄새 맡으며 100m정도 들어가면 개성 주변과 송악산이 목격되는 자연적인 전명대입니다.
넓고 전망이 확트인 능선 공터 이곳이 전망대입니다.
장산전망대 모습
2018년 9월 26일 평화누리길 제8코스를 돌아볼 때 담았던 설명판 사진 참고로 올립니다.
2018년 9월26일 담은 사진입니다.
가볼 수 없는 북녘 땅,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 됩니다. 장산전망대는 어떤 시설물도 없는 앞이 탁 트인 자연 그대로의 능선입니다 . 갓 모내기한 그 너머 임진강 좁은 줄기 흐르고 그 너머 삼각형의 섬 풀들섬(草坪島)을 비롯하여 우측 넓은 임진강 우측 연천과 그 너머 북한지역 산봉우리들이 파노라마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개성쪽을 중점으로 담은 사진입니다.
임진강을 중점으로 그 너머 가물거리는 산봉우리들은 북녘의 산봉우리들입니다. 우측 遠景은 연천군이지요.
전망대를 나와 임진각을 찾아 길 나섭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갈림길과 장산2리마을이 얼핏 보입니다.
바로 가도 좌측으로 가다 장산2리 마을로 들어서면 두 길은 또 하나가 됩니다. 좌측은 평화누리길 바로가는 길은 경기옛길 의주길입니다.
좌측은 임진마을로 가는 길입니다 의주길은 바로 갑니다.
장산리를 걸노라니 이곳 장산리와는 상관없이 '장산곶 타령'이 절로 흥얼거려 집니다.
" 장산곶마루에 북소리 나더니 오늘도 상봉에 님 만나보겠네 에헤야 에헤야 에헤 에헤야 님 만나 보겠네,
바람새 좋다고 돛달지 말고요 몽금 포구에 들렸다 가려므나 에헤야 에헤야 에헤 에헤야 님 만나 보겠네, "
장산1리마을회관 버스정류장에서 바라본 장산사거리에서 바로보이는 길로 갑니다. 저만치 푸른 숲 앞에 뒤집어 놓은 S자 모양의 길로 이어집니다.
차도 옆 20m길이의 데크로 놓은 다리로 들어서 가다 차도로 합칩니다.
앞서 말한 S자 모양의 길 끝머리 언덕 좌측에 흔치 않은 姓인 교동 인씨 통훈공파 제실 앞을 지납니다.
콘크리트포장도로는 여름이면 햇살이 반사된 가시광선이 눈동자를 사정없이 찌르고 겨울이면 흰 눈이 쌓여 동공을 찌릅니다.
아이고 눈이야!
우측으로 꼬부라진 마정4리로 들어섭니다.
다시 좌측 마을로 꺾어 들어갑니다.
등짐장수처럼 생긴 밤나무 아래를 통과합니다.
언덕 위 갈림길 우측 골목으로 들어서세요.
지난해 떨어진 꽃씨가 다시 꽃은 피운 빛깔 고운 과꽃에 힘을 받습니다.
길가에 모여 흐드러지게 핀 넝쿨장미꽃이 갈채를 보내 줍니다.
몽당나무와 하얀 담장이 이채롭습니다.
골목을 나와 돌아본 마장초등학교 정문과 지나온 골목 정경,
마장초등학교 버스정류장이 버티고 서서 앞을 가로 막고 있는 학교 앞 삼거리 우측으로 갑니다.
길 양 가에 집들이 줄지어 있는 길을 관통합니다.
듬직한 적전차 방어시설이 옛 장군의 기백을 연상케 합니다.
통일로가 가로놓여 있는 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곧장 앞으로 갑니다.
길가에서 볼 수 있는 驛內 標札에 임진강,
임진강역은 문산에서 임진강을 오전시간대에 2회 오후시간대에 2회 운행합니다.
임진각 전망대에 오릅니다.
의주길 제5코스 종착지
망향단을 중점으로 바라본 근래에 건설한 경원선 철로와 자유의 다리, 돌아오지 않는 다리 임진강을 봅니다.
좀 더 당겨본 모습,
북녘의 산봉우리를 중점으로 당겨본 정경입니다. 아, 저 봉우리에 오르고 싶다!
좌측 문산방향으로 담은 전경입니다.
자유롭게 오고가야할 평화의 다리에 너희가 어찌하여 지키고 있느냐!
평화의 다리에서 내려다본 낙원
철조망에 나풀거리는 저 오색의 리본 수많은 넋의 輓章처럼 느껴지네.
여기서 개성이 오십오리, 내 집보다 가깝구나! 겨우 자전거로 2시간 거리일세.
내 나이 76세 해방둥이, 생전에 그 개성 땅 선죽교를 볼 수 있을가...
이념이란 죽고 사는 일이구나!
상처뿐인 철마는 북녘을 바라보고 있나니 그래도 달리고 싶다고.
의주로 가는 길은 여기서 멈춤니다. 철길도 동족간의 情도 모두 단절되었습니다. 그 넘의 붉은 이념 때문에..
귀로에 들려본 반구정,
앞서 2018년 '평화누리길' 종주 때 들렸으나 보수로 인해 볼 수 없었기에 淸政門을 들어섭니다.
〈伴鷗亭〉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호.
이제는 2시간 정도 컴을 하면 눈은 침침해지고 손이 굳어져 힘이 듭니다. 해서 설명은 안내판으로 갈음합니다.
고고한 반구정 모습,
仰止臺
반구대에서 바라본 앙지대
《반구정과 양지대》
황희(黃喜 1363 - 1452)는 세종31년(1449년) 18년간 재임하던 영의정을 물러나니 87세였다.
그 후 이곳에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보낸 정자입니다. 伴鷗亭의 본래 이름을 낙하津이 근접해 있어 그 이름을 따서 洛河亭이라 했었습니다. 맑은 날 반구정에 오르면 개성의 송악산이 보입니다.
仰止臺는 원래 반구정이 있던 자리였으나 1915년 반구정을 현재의 위치에 옮겨 지으면서 본래의 자리에는 새로 육각정을 짓고 앙지대라고 이름 하였습니다.
양지대에는 “오직 善만을 보배로 여기고 딴 마음이 없는 한 신하가 있어 온 백성이 우뚝하게 솟은 산처럼 모두 쳐다본다. 아름답구나! 이 양지대라는 이름은 시경의 好仁이라는 뜻에서 取했다.”라는 상량문이 적혀 있습니다.
반구대를 거쳐 앙지대 돌계단을 내려오다 담장너머 철책선을 바라보는데 두 병사가 나란히 걷고 있습니다. 그 모습 자못 다정하고 평화롭습니다.
고맙습니다.
2021년 5월30일 일요일. - 鄕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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