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미륵길은 조선시대 의주대로인 78번 도로를 곁에 두고 파주의 작은 마을들을 지나는 길입니다. 쌍미륵길에서 만날 수 있는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쌍미륵'으로도 불리는 큰 바위에 조각된 불상으로 높이17.4m에 이르는 거대한 石像입니다. 예로부터 이 지역을 지나는 길손들은 쌍미륵을 이정표삼아 길을 잡았다고합니다. 쌍미륵을 모시는 용암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려시대의 명장 윤관장군의 묘를 지날 수 있는데, 기세등등했던 청나라 사신들은 여진족을 물리친 윤관장군의 묘를 지날 때는 어떤 생각을 했을지.. (경기옛길 가이드북에서)
雙磨崖彌勒佛像이 있는 용암사를 향해 용진교를 건너 좌측 하천 둑길 따라갑니다.
이름 모를 다리 건너서 차도 해음로 건너 마을로 들어서야 합니다.
한적하고 잡초 무성한 작은 도랑 둔덕을 길 삼아 기울어진 전신주에 매어단 리본만 믿고 따라갑니다.
의주길 안내리본이 인도하는 논두렁은 길은 아니지만, 길은 길입니다. 자전거를 끌고 갈 수도 없어 어깨에 들어 메고 갔습니다. 벼가 익을 가을에는 작물에 손실을 주지 않을 가요. 수많을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길은 아니지요 그렇지 않아도 내려앉은 논둔덕을 흙으로 돋았는데 이렇게 사람의 발길이 오고가면 무너져 내리기 십상입니다.
논두렁길이 끝나니 개인집 마당을 질러갑니다. 미안하고 쑥스럽고...
이제 길다운 길로 들어서 마을의 면면을 감상하며 갑니다.
갈림길 앞 전신주에 달린 이정표가 차도 건너 지게차 대여점 옆길을 알려 줍니다.
차도를 건너서자 바로 좁은 길 입구 좌측 옆 산자락의 나뭇가지에 매달린 리본이 숲길로 들어서랍니다.
좋은 기운 넘치는 숲길 들어서는 순간 가슴이 기쁨으로 춤을 춥니다.
가볍던 발걸음이 당황스럽습니다 어느 문중의 묘역이 불쑥 산자락을 차지하고 길은 사라졌으니까요.
두리번거리며 리본을 찾는데 묘역 앞머리 숲 나뭇가지에 리본이 하늘하늘 몸을 흔들어 보입니다.
지난해 낙엽이 소복하게 깔린 길의 자태는 가슴속에 저장된 젊은 시절 아름다운 여인의 곡선처럼 향기롭고 예쁜 추억을 꺼내 줍니다.
아련함과 기쁨도 잠시 불쑥 환한 햇살과 함께 주차장이 나타나네요.
용암사로 오르는 돌계단 옆 뭇사람들의 눈길 잦은 자리에서 자그마한 지붕 올린 함이 나를 반깁니다.
장지산 용암사
부처님 오신날이건만 처사, 보살의 행렬이 그리 많다할 수 없습니다.
쌍 미륵불로 오르는 입구 측면에 칠층탑과 불상이 있기에 살펴보니 탑과 불상 사이에 유래비가 있어 글을 옮겨봅니다
〈동자상과 칠층석탑에 관한 유래〉
구전에 의하면 구 이승만 대통령 모친께서 용암사 쌍 미륵불에 득남발원기도를 하여 고 이승만 대통령께서 탄생하였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1954년 故 李承晩 대통령 재임시에 용암사를 방문 참배하시며 남북통일과 후손 잇기 기원 기념으로 동자상과 칠층 석탑을 세우셨다. 동자상은 정면에서 좌측의 미륵불상 오른편 어깨 옆에. 7층석탑은 동자상 뒤편에 세워져 있었으나, 고 이승만 대통령께서 4.19로 인하여 하야하시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신 후 재야관련단체들의 문화재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심하여 1987년 철거되어 종무소 우측에 모셔 있던 것을 일반인들이 잘 알지 못하여 늦은 감은 있으나 여러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여러 불자님들과 현주지 포운당 태공스님께서 이곳으로 옮겨 모시다.
2009년 6월15일 대한불교조계종 장지산 용암사.
〈용미리 석불입상에 얽힌 전설〉
보물 제93호로 지정된 이곳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에는 불상 조성과 관련된 전설이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고려시대 중기 13대 왕 선종(宣宗 재위 1083-1094)은 자식이 없어샛째 부인인 원신궁주 이씨(元信宮主 李氏)까지 맞이했으나 여전히 아이가 생기질 않아다 이것을 못내 걱정하던 궁주의 꿈속에 어느 날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長芝山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이요, 배가 매우 고프니 먹을 것을 주시오"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꿈에서 깬 궁주는 그 내용을 왕께 아뢰었다. 왕은 곧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는데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왕은 즉시 이 바위에 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리도록 하였더니 그 해에 원신궁주께서는 태기가 있었고 왕자인 漢山侯가 탄생했다고 전해진다고 합니다.
자애롭고 온화한 얼굴에 보일듯 말듯 미소를 머금은 마애쌍미륵부처(磨崖雙彌勒佛)
마애쌍미륵불상을 참배 후 다시 대웅전 마당으로 내려가는 계단 양옆 낮은 난간 대 위에 작은 미륵부처들이 줄지어 놓였습니다.
용암사 건너 마을에 위치한 '정교회 주부활 성당 모습. 정교회라면 먼저 생각나는 나라가 러시아와 그리스 그외 세르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동유럽의 국가들입니다.
공사로 인한 불편이야 어쩔 수 없지만, 너절한 산업쓰레기 등은 미관상 좀 치워 주었으면 좋겠네요.
아스팔트 도로를 벗어나 하천둑길로 갑니다.
요즘은 시골 농촌에서도 흙냄새 맡으며 걷기가 쉽지 않습니다. 흙길은 걷는 촉감도 좋고 흙냄새는 모든 동물은 물론 사람에게도 면역력을 키워준답니다. 또한 따가운 햇살을 흡수해서 복사열을 방지하고 열기를 식혀 주지요.
마을로 들어서며 흙길은 어느새 아스팔트길로 모습이 바뀌고 전신주는 갈 길을 알려주네요. 윤관장군묘 4.3km 지점.
따분한 아스팔트길에 흐르는 물소리도 경쾌한 물결만 보며 걷습니다.
국도와 만나는 사거리에서 우측 장곡교 건너 좌측 길로 갑니다.
항아리 집? 불고기집인가 해물칼국수집이였던가 아님 항아리를 파는 집? 관심 없어 눈여겨보질 못했다오.
제법 긴 아스팔트길에 느슨한 언덕길 윤관장군묘까지는 3km가 남았습니다.
느슨하기는 하지만 제법 긴 언덕길입니다. 노래라도 불러야겠네요.
"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외로운 길 나그네 길 안개 짙은 새벽 나는 떠나간다 이별의 종착역
사람들은 오가는데 그 이 만은 왜 못 오나 흐린 달빛 아래 나는 눈물진다 이별의 종착역"
산포도 익어가는 고향산길에
산포도 따다주던 산포도처녀
떠날 때 소매잡고 뒤 바라주던
설익은 이 가슴에 순정을 바친
산포도 첫사랑을 내 못 잊겠네.
노래를 부르다보니 언덕은 끝나고 저만치 큰 마을이 보입니다. 아마도 모름지기 광탄면소재지가 아닐 가 싶습니다.
푯말을 보니 신산5리 윤관장군 묘가 있는 곳인데 마을을 가리킵니다.
윤관장군을 일컬어 해동의 명장이라고 합니다. 말 잘타고 활 잘 쏘는 여진족을 물리치고 9성을 쌓아 북방 경계를 넓힌 윤관장군은 파평 윤씨로 자는 同玄, 諡號는 文肅으로 고려 태조 때 三韓功臣 尹莘達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檢校小部小監을 지낸 執衡입니다.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숙종7년(1102년) 추밀원부사에 올라 宰樞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숙종 8년(1103년)에 吏部尙書同知樞密院使를 거쳐 知樞密院事 겸 翰林學士承旨에 올랐습니다.
윤관장군은 肅宗 · 睿宗 때 왕권 강화시책의 주역으로 활동하였고 曷懶甸일대의 여진족들은 고려의 기미주로 존재하면서 그들의 토산물을 부족한 생필품과 무역하고 있었으며 고려는 그 들의 추장들에게 武散階나 鄕職을 주어 유대를 가졌으나 松花江지류 아르추카河 유역에서 일어난 완옌부完顔部 부족이 주변의 여진 부족들을 정복하면서 이러한 관계가 변동하였으며 완예부 여진은 고려로 투항해 오는 여진인을 추경하여 고려의 定州의 長城부근까지 이르니 고려와 여진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고려에서 1104년 문화시랑평장사 임간을 보냈으나 패했습니다
이에 추밀원사 윤관이 동북면 행영병마도통이 되어 대적했으나 패하였습니다.
윤관장군은 패한 이유를 숙종에게 考하기를 우리는 보병 중심인데 반해 그들은 모두 기병임으로 당할 수 없었다고 말한 후 그해 12월부터 別武班을 조직했습니다.
별무반은 騎兵인 神騎軍과 神步軍이외 승병인 降魔軍, 跳盪, 梗弓, 精弩, 發火 등의 특수군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다음해 太子少保判兵部事가 되어 병권을 장악하고 11월 예종이 즉위하자 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습니다.
예종 1년(1106년) 9월에는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수행되는 天壽寺의 일을 감독하는 등 여진정벌을 작실히 준비한 후 윤관(尹瓘1040~1111)은 1107년 12월 大元帥가 되어 斧鉞을 하사 받고 吳延寵을 副元帥로 하여 17만 대군을 중 · 좌 · 우군으로 편성하여 일거에 쳐들어가 여진을 두만강 북쪽 700리까지 몰아내고 9성을 축조하고 북방의 백성 75,466戶를 점령지에 이주시켜 생활의 안정을 영위토록하였으며 선축령에 高麗定界碑를 세웠습니다. 그 9城을 흔히 咸州, 英主, 雄州, 吉州, 福州, 公嶮鎭, 崇寧鎭, 眞陽鎭, 通泰鎭으로 이해되며 진양진 숭년진 대신 宜州, 平戎鎭을 꼽기도 합니다.
윤관장군은 1108년 3월 개선하여 그 공으로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에 봉해지고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지군국중사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持軍國重事'가 되었으며 이어 鈴平縣開國伯영평현개국백 食邑 2천호, 食實封 3백호에 봉해졌습니다.
고려의 정벌과 9성 설치로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여진족은 완옌부를 중심으로 모여 무력항쟁을 하는 한편, 9성을 돌려주고 생업을 편히 해주면 배반하지 않고 조공을 바치겠다고 하며 애걸하였고 고려의 형편으로는 9성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 지키기 어렵고 무리한 군사동원으로 백성들의 원망이 일어 조정회의를 열어 9성을 여진족에게 돌려주기로 결정하고 7월부터 9성에서 철수하기하였습니다. 이렇게 정세가 바뀌자 윤관은 중신들로부터 패군의 죄를 뒤집어 쓰고 관직과 공신호를 박탈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숙종대와 예종대에 왕권강화을 위한 정책을 충실히 수행한 정치세력임으로 예종의 비호로 벌을 받지 않고 1110년 복직되어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 守太保 門下侍中 判兵部事 上柱國 監修國史가 되었습니다. 인종 8년 예종 묘정에 配享되었습니다.
윤관장군이 고위직으로 진급하고 출세한 데에는 며느리(尹彦榮 또는 둘째 아들 尹彦純의 배필로 추정됨)가 肅宗妃인 明懿太后의 동생이었던 사실이 작용했던 듯합니다.
睿宗 6年(1111年)음력5월8일 72세로 서거하였습니다. 睿宗 配享功臣이 되었습니다.
윤관장군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에도 成宗, 宣祖, 肅宗, 英祖 임금도 윤관의 후손에게는 7役을 면제하라는 敎를 내렸습니다. 묘는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여충사 경내에 있으며 1988년 사적 제32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습니다.
윤관장군묘를 뒤로하고 다시 오늘의 종착점 광탄어린이집을 향해 데크산책길로 들어섭니다.
광탄면사무소를 찾아 시내를 거쳐 갑니다.
다시 하천 데크산책길로 들어섭니다.
하천따라 얼마 정도 지나 종착지에 도착합니다.
해는 서산마루에 향해 달리고 나는 파주역을 향해 페달을 힘차게 밟아요 ~~ ☆
파주역에 도착한 시각은 19시38분. 오늘도 고맙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하루 였습니다. 모두 건강하십시오 ♣
2021년 5월 19일 석가탄신일 - 鄕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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