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관청길은 고양의 옛 관아 자리(址)인 고읍마을과 파주를 잇는 관청고개(官廳嶺)를 지나는 길입니다.
이 지역 고양사람들은 파주 땅으로 넘어가기 위해 해음령을 지나는 의주대로 외에 이 길 역시 자주 이용했습니다.
두 지역의 경계가 되는 관청고개는 전망이 탁월해서 멀리 관악산까지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옛 벽제관터 근처에서는 고양지역 유교문화의 산실 고양향교와 중남미의 이색적인 문화를 맛보고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는 중남미문화원을 만날 수 있습니다.
벽제관 터 뒤 산자락을 좌측으로 끼고 돌아가던 의주길은 벽제관지 공사로 휀스로 막아놓아 의주길 안내판 앞 좌측으로 벽제관지를 돌아 마을길로 리본 따라 고향향교로 갑니다.
벽제관터 모퉁이를 우측으로 꺾어 들어서면 공사로 임시 쳐놓은 울타리 사이로 갑니다.
우측 휀스 안은 벽제관터입니다, 좌측 공사로 인해 임시 설치된 울타리 밖은 상가도로입니다.
벽제관 끝 모퉁이에 붙어 있는 작은 공원에 창포와 수초가 있는 아담한 연못도 있지요. 물이 있고 수초가 자라니 개구리도 있겠습니다.
마을길 중간에서 좌측 골목길로 들어섭니다.
골목길 끝까지 가면 고양향교 주차장입니다.
〈홍살문과 하마비〉 마땅히 말에서 내려 몸가짐을 엄숙히 해야 했을 자리입니다.
홍살문 안 정면으로 고양향교 외삼문이 보입니다 그 전 우측에 중남미문화원 정문입니다.
중남미문화원
중세의 수도원처럼 폐쇄적인 느낌이지만 중후하고 거부감은 전혀 느낄 수 없는 느낌은 외벽으로 쌓은 벽돌색깔이 풍기는 이채로움이 그 까닭이라할 수 있는 건축물입니다.
오늘은 갈 길이 바쁘고 목적이 따로 있으니 다음을 기약합니다.
고양향교 정문인 대성문(外三門)
대성문 안 마당 중심 건물로 학문을 익히고 연마하는 강의실 격인 명륜당의 모습.
명륜당 서쪽의 건물은 유생들의 기숙사격인 서재西齋.
명륜당 동쪽의 건물은 유생들의 기숙사격인 동재東齋.
명륜당明倫堂과 동재東齋 사이로 들여다본 내삼문內三門과 담장 그리고 그 안쪽의 공자와 저명한 유학자의 위패를 모신 大成殿과 東廡의 일부가 보입니다. 대성전 좌우로는 제례기능을 담당하는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로 불리는 건물이 있습니다.
왼편 김욱家 담장과 대성문 담장 그 틈새 사이로 의주길은 이어집니다.
돌과 진흙으로 쌓은 조선시대형식의 담장과 담장 사이 좁은 길로 고양관청길은 이어집니다.
향교 안을 볼 수 있는 향교담장 뒤 모서리 끝 위치로서 향교 안 정경을 사진에 담기 좋은 곳입니다.
향교를 온전히 담을 수 있는 자리로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대성전 뒤는 산자락이 급경사로 접근할 수 없어 향교 전체를 담을 수가 없습니다.
깊은 숲으로 들어가나 싶었는데..
능선에 이르니 좌우로 밭을 일궈 여러 경계를 망으로 둘러 표시한 정경이 보기에 아름답지 못합니다.
거리푯말은 940m 거리에 최영장군의 묘가 있다고 합니다.
의주길 안내 말뚝 앞에 국유지 표석이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난잡한 저 경작지들은 불법으로 이 사람 저 사람들이 무단으로 점거해서 경계망을 두르고 경작행위를 하는 것이 분명하겠습니다. 경작을 논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연을 임의로 훼손하고 일대가 너무 미관상 난잡한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무단경작지를 갓지나 쾌적하고 아름다운 숲을 맞이하니 이러했을 숲을 그 처럼 황폐시켰을 것을 생각하니 다시 한 번 마음이 씁쓸합니다.
삼거리 좌측은 최영장군 묘와 정상으로 이어진 길이고 우측 길은 군표비 있는 곳으로 이어진 의주길입니다. 이왕에 이곳까지 왔으니 최영장군 묘를 둘러보고 가기로 합니다.
100m정도 침목계단을 자전거를 들머 메고 오릅니다.
최영장군 묘와 대자산 정상으로 가는 쉼터 삼거리 앞입니다.
〈大慈山〉
대자산은 덕양구 대자동과 고양동의 경계지점에 위치한 높이 해발210m의 산으로 대자라는 명칭은 조선조 전기 세종대왕이 현 대자동에 사찰 大慈寺를 준공하고 마음의 이름을 대자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대자산의 산세는 북쪽으로는 파주시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통일로변 공릉천에 닿습니다. 산 기슭에는 최영장군 묘를 비롯하여 고양향교, 성령대군, 경안군, 임창군 묘 등 문화유산이 남아 있습니다. 바위가 적고 숲이 짙으며 경사가 완만하여 산색이나 문화유산 답사코스로 좋습니다.
최영장군 묘로 가는 내리막길
〈최영장군 묘〉
최영장군(崔瑩 1316-1388)은 고려 후기 명장이요 충신으로 고려를 끝까지 받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인물입니다. 묘는 대자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형적인 고려 양식의 장방형의 2단 둘레석을 두른 방형묘로서 부인 문화 유씨와 합장된 單墳입니다. 주위에는 곡장을 둘렀습니다. 묘소에는 묘비, 충혼비, 상석, 향로석,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이 있습니다. 조성 당시의 석물로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묘비가 있으며 기타 다른 석물은 1970년에 후손들에 의해 세워진 것입니다. 한편 최영장군 墓墳 윗편 두 단 위에는 최영의 부친인 동원부원군 최원직의 묘가 있습니다.
하나의 곡장 안에 정면으로 보이는 묘는 최영장군 묘 그 뒤에 부친 최원직의 묘가 있습니다.
최영장군의 묘의 방형 둘레석은 2단으로 둘렸으며 부친 최원직의 묘의 방형 둘레석은 1단으로 둘려져 있습니다.
최영장군 묘비 전면에는 다음과 같은 관직 명들과 삼한국 대부인 문화 유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高麗盡忠奮義佐命安社功臣判密
直事大將軍門下侍中贊成事六道
都巡察使鐵原府院君謚武愍東州
崔公 諱 瑩之墓
三韓國大夫人文化柳氏 祔左.
〈고려진충분의좌명안사공신 판밀직사 대장군 문하시중찬성 사육도도순찰사 철원부원군 익 무민 동주(철원) 최공 휘 영지묘 삼한국대부인 문화유씨 부좌.〉
〈무민공 충혼비/武愍公忠魂碑〉
비 전면에는 다음 같이 새겨져 있습니다.
公高麗朝盡忠奮義宣威佐命定亂安社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文下侍中領三司事判密直司事上將軍兼判重房事八道都統使
鐵原府原君謚武愍姓崔諱榮號奇峰東州人也公綱直忠淸風姿魁偉膂力過人臨戰未曽不剋公爲國忠節出將入相之功如備戰
高麗史世論曰高麗忠臣名將當以崔瑩第一其頌德傳於千萬世.
공고려조진충분의선위좌명정란안사공신벽상삼한삼중대광문하시중영삼사사판밀직사사상장군겸판중방사팔도도통사
철원부원군익무민성최휘영호기봉동주인야공강직충청풍자괴위려력과인임전미증불극공위국충절출장입상지공여비전
고려사세론왈고려충신명장당이최영제일기송덕전어천만세.
최영장군의 부친 동원부원군 최원직 묘비
묘비 전면에는 "贈推忠雅亮廉儉輔世翊贊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判門下府事上護軍兼判藝文春秋館事東原府原君崔公墓(증추충아량렴검보세우찬공신벽상삼한삼중대광판문하부사상호군겸판예문춘추관사동원부원군최공묘)"라 새겨져 있으므로 동원부원군에 추봉된 崔元直의 묘임을 알 수 있겠습니다. 비 뒷면에는 아들 최영이 1386년(洪武十九年) 건립하였다는 음기가 새겨져 있습니다.
〈최영장군 부친 최원직의 묘 정경〉.
이 묘는 최영장군 묘 바로 위에 위치한 최영장군의 부친 최원직의 묘입니다.
최원직의 본관은 동주이며 부친은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를 지낸 최옹, 조부는 최정소, 증조부는 동주 최씨 원외공파 파조 최양이며 집현전 대학사를 지낸 문숙공 최유청의 현손으로 어머니는 미상이며 2남 중 차남으로 상서를 지낸 최원중과 동기간입니다. 부인은 봉산 지씨이며 1남1녀를 두었는데 그 외아들이 문하시중 무민공 최영이며 예빈시 동정을 지낸 여남 이안길은 사위입니다. 또한 중서문하성 급사중을 지낸 최담은 손자이며 조선조 세종 때 의정부 좌의정을 지낸 청백리 문정공 고불 맹사성은 증손녀사위입니다.
형과 함께 부친으로부터 수학한 崔元直은 '사헌규정'을 지냈다는 것 외에는 이렇다할 기록을 현재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1331년 어린 아들(최영의 나이16세)을 두고 생을 마감한 그는 사후 아들의 顯達로 판문하부사(從2品)에 추증되고 동원부원군으로 봉군되었습니다. 최원직은 자신이 죽기 전에 아들에게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유언을 남겼던 인물입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서 국민학교 시절 배운 최영장군의 노래를 부르며 쉼터 삼거리로 갑니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르신 아버지 뜻을 받들어 한평생 나라위해 바치셨으니 겨레의 스승이라 최영장군"
최영장군 묘에서 다시 쉼터 삼거리에 도착
쉼터 삼거리에서 다시 고양향교 방향 침목계단을 거쳐 삼거리로 갑니다.
좀 전에 오르던 100m거리의 침목계단을 내려와 인증을 남깁니다.
좌측 길 최영장군 묘에서 내려와 용미3리로 가기위해 우측 길로 들어섭니다.
자전거를 탈만한 길이지만 그리 오래가진 못합니다.
수풀 우거지고 조금 언덕진 좁은 오솔길 걷기 좋은 길입니다.
자전거를 잠시 즐길 수 있는 감칠맛 나는 길입니다.
조만치 축대 쌓은 공터가 보이네요.
이제 대자산을 벗어나는 순간입니다.
길 건너에 푯말이 기다리며 알려줍니다 연산군금표비가 1.4km거리에 있다고요.
오가는 이 없는 인도를 달립니다 "찌르릉찌르릉 비켜나세요 자전거가 나갑니다 찌르르르릉 저기 가는 저 사람 조심하세요 우물쭈물 하다가 큰일 납니다. ㅎㅎ
첫 삼거리에서 직진합니다.
두 번째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들어서 600m 정도가면 길가에 금표석이 있습니다.
〈연산군시대금표비(燕山君時代禁標碑)〉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88호 이 비석은 높이1.38m, 폭 0.54m, 두께 22.5cm크기입니다.
비면에는 "禁標內犯入者論棄毁制書律處斬/금표내범입자논기훼제서율처참" 14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비는 연산군 때 세운 것으로 연산군의 사냥터 고양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기 위하여 세운 금표비입니다. 비석에 세긴 글자는 "무단으로 들어가면 처벌하겠다"는 내용입니다. 이 금표비는 고양시 대자동에 있는 金川君 이변익 묘역 안에서 1994년11월에 발견되어 대자동 고읍마을 입구인 이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옛날 조선시대 중종 39년(1544년)부터 인조3년(1625년)까지 고양군청이 있었던 고읍마을까지 도로를 따라 1.1km 정도 갑니다.
고읍마을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등산복 차림의 50대 정도로 보이는 여인 세 사람이 나처럼 의주길을 걷고 있습니다.
고읍노인회관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문에 의하면
이곳 고양시 대자동 고읍마을 (덕양구 관산동)은 오랜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곳으로 북한산과 계명산에서 이어진 산줄기가 우뚝 솟은 국사봉(일명 玉女峰) 아래 남향하여 자리하고 있어 명당자리로 유명합니다. 國祀峰은 이 산봉우리에서 고양군수 등이 이 봉우리에서 나라의 안녕과 왕의 萬壽를 기원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곳의 행정구역 명칭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이며 자연촌락 마을 이름은 고읍古邑이라고 합니다.
고읍은 조선시대에 고양군 전체를 다스리던 高陽郡廳이 있어 붙여진 이름입니다.
지금도 그 흔적을 곳곳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고합니다.
이곳 국사봉 아래(대자동 산1-10)있던 고읍 고양군청은 중종 39년(1544년)부터 인조3년(1625년)까지 81년간 존치했으며 처음 이곳에 고양군청이 들어선 시기는 중종 39년(1544년)5월10일입니다. 당시 고양군청은 현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 부근에 소재하고 있었는데 조선조 12대 인종의 어머니인 장경왕후 윤씨의 禧陵이 들어서게 되면서 왕명에 의해 이곳 고읍으로 고양군청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고양군청이 있던 자리에 잔재해 있던 주초와 기와편으로 미루어볼 때 위용이 대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읍마을에 고양군청이 있을 당시 군청 관아 이외에도 향교, 감옥, 포청, 남별관, 사직단 등이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도 이와 관련된 지명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81년간 이곳에 있던 고양군 관아는 이곳에 효종의 부마인 鄭齊賢의 묘소와 원찰인 白蓮庵이 들어서면서 인조3년(1625년) 현 고양동 벽제관 부근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官廳嶺(관청고개)〉
고읍노인회관 바로 뒤에서 시작되는 관청고개는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의 고읍마을과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사이에 있는 고개입니다. 이 고개를 관청고개라고 부르는 것은 고개 아래 고읍마을이 조선시대에 고양관아를 비롯한 주요한 관청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 지역에는 古邑, 읍내, 관청재, 향교골 등 옛 관청과 관련된 地名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주로 혜음령이 옛길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관청고개 역시 고양과 파주를 오가는 중요한 도로였습니다.
맑은 계곡물이 졸졸 흐릅니다. 물을 건너 소나무와 참나무가 어우러져 숲을 이룬 오솔길로 들어섭니다.
제법 힘에 겨운 언덕을 올라서니 굽어진 길이 예뻐서 리본과 함께 인증,
도심에 나무들과는 비교가 될 수 없을 만큼 건강한 나무들, 그 수피를 보면 알 수 있겠습니다.
제법 가파른 산길을 오릅니다.
도중에 잠시 목을 축이며 가져온 간식으로 늦은 점심을 대신합니다.
등마루 보이는 곳에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기쁨을 안깁니다.
오늘의 종착점 용미3리도 성큼 다가왔습니다. 이제 남은 거리는 1.4km입니다.
용미리에 공동묘지가 있다더니 여기가 아닌가 쉽게 묘들이 많습니다.
이제까지 능선으로 오르기까지는 짙은 산림이었는데 반대편 남쪽은 묘지群입니다.
능선에서 좌측 계곡으로 들어서니 샘물이 철철 넘칩니다.
땀 에 절은 머리와 얼굴을 씻으니 날아갈듯 상쾌합니다.
낙엽 덮인 내리막길은 융단을 깔아놓은 듯 그 촉감이 부드럽고 폭신합니다.
적당히 오르고 내리는 길에 발길은 흥겹게 너울을 탑니다.
능선에서 느낀 생각보다 숲이 짙고 향기롭습니다.
향기롭고 아름다운 숲길에 걸음 걸음마다 리드미컬하니 행복의 노래가 저절로 나옵니다.
꿈같은 젊은 시절 행복을 꿈꾸며 즐겨 부르던 "행복의 샘터"
"심심산골 외로히 피어 있는 꽃인가 소박한 너의 모습 내 가슴을 태웠네
그리움에 날개 돋쳐 산 넘고 물 건너 임 찾아 사랑 찾아 나 여기 왔노라"
"외딴곳에 피어난 이름 없는 꽃인데 찾아주는 그대는 정녕 나의님인가
어린 가슴에 그리던 그 사랑이라면 반겨 맞아 받드오리 따르오리다. "
"세상이 넓다 해도 그대만이 내 사랑 소녀의 순정에도 그대만이 나의 님
무지개 피는 하늘 밑 행복의 샘터를 우리 서로 손을 잡고 찾아 갑시다."
엄마 일 가시는 길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 고픈 날 한 잎 두 잎 따 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 먹었다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에 젖어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잊을 사람아
달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동창생 천리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작년 봄에 모여 앉아 찍은 사진 하염없이 바라보니 즐거운 시절아
상큼한 숲길에 향기로운 꽃에 취해 선인이 되어 노래 몇 곡 부르니 저만치 속세의 그림이 꿈을 깹니다.
오늘의 종착점 용미3리 길 건너 마을 입니다. 오늘도 고맙습니다.
2021년 5월19일 -鄕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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