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주대로 〉
경기 옛길 의주대로는 한양과 의주를 잇는 길로 '관서대로', '경의대로', '연행로' 등으로도 불렀습니다.
중국을 오가던 사신들은 모두 이 길을 이용했기 때문에 의주대로는 조선시대 대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길이었습니다.
이 길은 중국을 통해 전 세계의 발달된 문물이 소개되는문명 교류의 장이었으며, 조선의 고고한 정신적 문화와 자긍심이 세계로 나가던 이른바 '한류의 수출로 였습니다. 또한 일본과 중국을 연결하는 동아시아 무역로 중심이기도 했습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무대가 되었던 길이고, 이승훈과 김대건 신부님이 천주교를 배우기 위해 중국으로 갔던 길이기도 합니다. (경기옛길 가이드북에서)
〈의주길〉
산업화로 옛 원형이 많이 훼손된 다른 옛길과는 달리 의주대로는 거의 원형이 보존되어 지금의 56번,78번 등 도로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교통량이 많고 인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곳이 대부분으로 도보 탐방길로 적합하지 못하여 경기도와 고양시, 파주시, 9재0경기문화재단이 힘을 합쳐 도보 여행객을 위한 탐방로로 개척하여 역사문화탐방로 '의주길'을 개통하게 되었습니다. 의주길은 역사문화탐방로일 뿐만 아니라 분단을 넘어 통일을 지향하는 길이며, 유라시아 대륙을 향해 세계로 나아가는 꿈의 길이기도 합니다. (경기옛길 가이드북에서)
〈벽제관길〉
碧蹄館길은 서울에서 의주와 대륙으로 이어지는 첫길입니다.
사람들은 이 길에서 멀리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 일행을 배웅하고 중국에서 온 사신들을 영접했습니다. 벽제관길의 중심인 벽제관은 중국에서온 사신들이 도성으로 들어오기 전에 하룻밤 쉬어가던 곳이었습니다.
한편 삼송역에서 멀지않은 숲길에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조선의 국경문제를 매듭지은 주인공 역관 김지남의 묘를 만날 수 있습니다. 공릉천 부근에서는 고양군민들이 힘을 모아 공릉천에 돌다리를 놓아 의주대로를 탄탄대로로 만든 사람들의 기록이 담긴 덕명교비를 볼 수 있습니다.
〈벽제관길 여정〉삼송역8번출구-덕명교비-송강 공릉천공원-제1대자교-벽제천-벽제관지. 약 9km. 2시간30분.
전철 3호선 삼송역 8번출구 앞 의주길 제1코스 "삼송역 ↔ 고양 벽제관지" 9.7km 시발점 안내판입니다.
8번출구 좌측 길로 들어서서 바라본 전경입니다.
독립문부대 우측 담장 옆길에서 좌측 독립문부대 정문으로 나가는 길목입니다.
부대앞 국도입니다 150m 앞에서 통일로에 합류되는 국도입니다.
부대에서 150m 내려와 옆 데크 계단으로 올라가 공원길로 오릅니다.
올라온 계단 끝에서 바라본 전경입니다. 정면 앞 길가에 안내표시판이 보입니다.
표지판은 벽제관까지 7.1km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좌측 길은 벽제관으로 가는 길이지만 우측 20m 고양오금초등학교 우측 산자락에 있는 조선 후기 중인 출신으로 잡직 역관에서 일약 지중추부사(정2품)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 廣川 金指南 선생 묘지가 있으므로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들렸다가 다시 이 자리에서 좌측 벽제관지로 가야겠습니다. 김지남은 청나라를 상대로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분입니다.
《광천 김지남 우봉 김씨 문중 묘역 입구 (廣川 金指南 牛峰 金氏 門中 墓域 入口)》
묘역은 7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최상단인 7 단에는 김지남 선생 내외 쌍분과 獨墳 6기 모두 8기로 벼슬을 지낸 분이 4분이다. 모두 나란히 모셔져 있다.
6단에는 6기의 봉분에 쌍분이 2기, 독분 2기, 모두 벼슬을 지냈다.
5단에는 4개의 독분으로 3분은 벼슬을 지냈다.
4단에는 10기의 독봉 중 6분이 벼슬을 지냈다.
3단에는 7기의 봉분 중 4분이 벼슬을 지냈다.
2단에는 중앙에 큰 제례상 1개만 배치되었다.
1단에는 중앙에 광천 김지남 선생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증 형조판서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贈刑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
행 지중추부사 김지남공 공적비 行知中樞府事金指南公功績碑
위에서 두 머릿글 중 증(贈)은 주로 사후(死後) 나라에서 명예적으로 장관급(正二品) 벼슬(職位)을 내렸다는 뜻입니다.
또 아랫글의 머릿글 행(行)은 생전(生前)에 지낸 (正二品) 벼슬(職位)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行)입니다. 중추부(中樞府)에는 영중추부사(正一品), 판중추부사(從一品), 지중추부사(正二品) 등이 있으며, 품계는 정승, 판서 급이지만, 모두 특별히 하는 일이 없으며, 주로 원로대신들이 머무는 官廳이었습니다. 다시말하면, 녹은 주고 쉬는 자리이니 보직없는 대기발령자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광천 김지남 묘》
김지남은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조선의 국경 문제를 매듭지은 주인공이자 중인 신분의 역관이었습니다. 무려 만18세에 역과에 급제해 일본과 청나라를 오가며 외교관으로 활약하였습니다. 그 중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당시 내노라는 대국 청나라를 상대로 국경을 확정지었는데 간도 및 토문강 동쪽을 조선의 영토로 세우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여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것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사대와 교린의 외교에 관한 것을 체계화한 『통문관지』를 아들과 함께 편찬한 업적도 가볍다 할 수 없겠습니다. 문사와 중국어에 능통했다고 하는데, 지금도 힘든 중국어를, 중국어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을 시대에 능숙하게 사용했던 것을 보면, 대단한 인물이라 하겠습니다.
「비문(碑文)」
조선국
증 형조판서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행지중추부사 김공 지남 지묘
증 정부인 운성 박씨부좌
김지남 선생 봉분 뒤에서 담은 묘역 정경
공원을 벗어나서 신원교 앞 교차로 좌측으로 돌아보니 저만치 앞서 데크계단으로 오르던 로터리가 보입니다.
그냥 도로를 따라 100m만 오면 이곳인데 쾌적한 보행환경을 위해 계단을 오르고 공원을 거쳐 이곳 오금로터리에 오도록 한 것이겠습니다.
오금로터리에서 우측 오금교 앞 횡단보도를 건너갑니다.
오금교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오금천 둑길 옆 오금천산책길로 내려가야 합니다.
둑길을 버리고 오금천 산책길로 들어섭니다.
하천산책길은 다시 둑 위로 이어집니다.
《고양신원동덕명교비 高陽新院洞德明橋碑》
공릉천 변에 남아 있는 이 고양덕명교비에 의하면 조선 중기 효종9년(1698년)에 장마철만 되면 공릉천이 범람하여 의주로를 오가는 많은 사람들이 불편을 겪던 중 고양군수를 비롯하여 많은 고양사람들이 힘을 모아 큰 돌다리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다리공사에 따른 사항과 그 당시 힘을 보탰던 백성들과 관리의 이름을 빠짐없이 새겨 기록한 덕명비를 세웠습니다.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52호 高陽新院洞德明橋碑의 총 높이 286m, 碑身 가로95cm, 두께 25cm의 화강암으로 제작하였고 비를 바치고 있는 대좌는 현재 지표면 보다 낮은 상태로 비신의 비문은 풍화로 마멸이 심해 일부분 판독이 어렵습니다. 옥개석 또한 부분적으로 마모되어 있습니다.
〈비석 앞면〉
비석 전면 上下部(中上部)에 篆書로 "高陽新院洞德明橋碑(고양 신원동 덕명교비)라 새겼으며 그 아래 작은 글씨체로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옮겨봅니다. '한양과 한반도 북부지방 및 중국을 연결하는 의주길(義州路) 관서대로(關西大路) 구간 중 신원동 공릉천 위에 다리를 놓으면서 그 자세한 사항을 기록으로 표기해 둔다. 비의 건립자는 이한(李澣)과 당시 고양군수인 통정대부 유후성(通政大夫 柳後聖), 그리고 정헌대부 윤면지(正憲大夫 尹勉之), 이산식(李尙植), 홍시우(洪時雨)를 대표로 한 760여 명의 주민들이다.' 즉 앞면은 비의 서문과 본문으로 주민 760여 명이 모두 힘을 합쳐 공릉천 위에 돌다리를 건립했다는 내용이고 뒷면에는 그 명단을 기록해 둔 것입니다.
〈비석 뒷면〉
뒷면 上段에 '京畿高陽郡德明橋' 碑銘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 비면 중단부터 하단까지 다리를 건립한 사람들의 성명이 한자 또는 이두문자로 빼곡히 새겨져 있습니다.
비석뒷면 상단의 "京畿高陽郡德明橋" 라는 비명(碑名)이 횡(橫)으로 새겨져 있고, 그 아래 부터 종(縱)으로 건립과 관계되는 사람들의 명단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둑길에서 다시 공릉천길로 들어섭니다.
조만치 앞에 엄마와 남매의 모습이 더없이 다정하니 보는 내가 정겹구나!
징검다리 건너 공릉천 건너편으로 갑니다.
곡선이 예쁜 징검다리를 건너 우측으로 갑니다.
공릉천 우측 길로 얼마쯤 가다가 다시 또 다른 징검다리를 건너 공릉천 좌측으로 건너와 뒤돌아본 전경입니다. 낮은 야산너머 멀리 북한산이 보입니다.
줌으로 당겨본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가 아련하다.
마천루 같은 아파트 옆에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눈이 오나 꽃이 피나 사철 겁 없이 오르내리던 북한산 추억이 잡힐 듯 가물거린다.
저만치 첫 다리 좌측에 송강 정철 선생을 기념한 공원이 있습니다.
〈 詠紫微花〉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피어 그 예쁜 얼굴은 옥비녀보다 곱구나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말라 거리의 사람들 모두 다 네 모습 사랑하여 다투리 (고향의 봄 석틀 우측 청동판에 새겨진 정철의 시)
정철(鄭澈1536-1593) 松江 정철은 조선조 선조 때 정치가 이자 시인으로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천재적 시인으로 그의 가사는 종래의 한문투를 벗어나 3 · 4조의 운율에 의해 자유자재로 우리말을 구사 했으며, 호탕하고도 완숙한 시풍은 가사문학의 최고봉이라 하겠습니다. 명종 15년 김성원을 위해 지은 〈성산별곡〉, 선조 13년 강원도 관찰사로 갔을 때 지은 〈관동별곡〉, 선조18년-21년 전라도 창평에 은거했을 때 지은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4편이 있고, 사설시조 〈장진주사〉 1편과 단가 77수가 〈송강가사〉에 실려 전해오고 있습니다.
고즈넉한 송강정 뜰에 자전거를 세워 놓고 정자에 앉아 여여한 오후를 즐기는 여인 서넛
新院 院主 되여 되롱 삿갓 메어 쓰고 가랑비 비낀 바람에
낚싯대를 비끼 들고 흰 마름 붉은 여뀌꽃 핀 물가에 왔다갔다 하노라.
《공릉천 》
이곳 송강 누리길에서 보이는 공릉천과 북한산 일대는 인근에 잘 알려진 아름다운 정취입니다. 공릉천은 고양시를 대표하는 하천으로 일명 신원천, 심천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양주시에서 발원하여 고양시를 거쳐 파주시에서 한강에 합류합니다. 파주시에 있는 세계문화유산인 恭陵의 명칭을 따 공릉천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북한산의 주봉인 백운대와 인수봉, 만경봉이 山字 형으로 보입니다. 그리하여 세 봉우리를 합쳐 삼각산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왼쪽으로 보이는 큰 봉우리는 고양시와 양주시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노고산입니다.
공릉천 위로 지나는 철로는 서울 교외선이며 2004년 이전까지 서울역을 출발하여 능곡 원당, 벽제, 송추, 의정부까지 운행하였으나 현재는 여객선은 운행하지 앓고 있습니다. 우측 육교 너머로 백운대 인수봉 두 봉우리가 빼꼼 얼굴을 보입니다.
《교외선 철교, 북한산과 노고산》
좌측 노고산 너머 북한산이 보인다.
송강누리길을 벗어나 공릉천을 건너가기 위해 하천으로 내려갑니다.
공릉천을 건너 좌측 둑으로 올라갑니다.
벽제천 둑으로 올라와 이정표를 봅니다. 제1대자교, 용복교, 빈정교 모두 거치게 됩니다.
제1대자교를 건너갑니다.
벽제천 따라가는 둑길 0.9m지점.
우측 용복교를 건너 좌측 둑길로 갑니다.
용복교를 건너와서 좌측 둑길로 갑니다.
드물게 나와 같은 이들(길 나그네)을 볼 수가 있는데 그 때마다 엄청 반갑다.
다시 좌측 빈정교를 건너 우측 둑길로 갑니다.
빈정교를 건너 200여m 걸어가니 보입니다. 고양제일고등학교..
〈대자동〉
대자동은 고양동의 서쪽과 남쪽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이 마을에는 쌍궁말, 고골, 대적골, 빈정동. 용복원, 한오동, 새원, 간촌 등 자연 촌락 마을이 있습니다. 대자동에는 최영 장군 묘를 비롯해 연산군 시대 금표비 등 적지 않은 문화유산들이 있습니다. 대자동 유래설은 조선조 태종 넷째 아들인 성령대군이 총명하고 용모가 단정하여 태종의 사랑을 받았는데 일찍 14세 나이로 홍역으로 유명을 달리 했습니다. 이에 상심한 태종이 무덤 근처에 암자를 세워 불공을 드리기로 하였는데, 조정에서는 길이 너무 멀어 임금이 이곳을 자주 왕래하면 혹 정사를 소홀히 할가봐 잦은 행차를 삼가도록 진언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태종은 무덤 근처에 큰 자비를 내린다는 뜻으로 大慈寺라는 절을 지어 성령대군의 명복을 빌었으며 이때부터 이 절의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대자리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신호등 기둥에 있는 벽제관길 이정표를 확인하고 좌측으로 갑니다.
고양시 덕양구 벽제관로 시가지 전경입니다. 벽제관은 좌측 길로 들어섭니다.
큰 나무 뒤로 벽제관 터가 보이고 우측에는 공적비群이 있는 곳입니다.
벽제관 육각정 터 (碧蹄館 六角亭)
고양 벽제관 육각정 안내판 이 육각정은 일제 강점기에 약탈되어 일본 야마구찌縣 이와쿠니市 모미지다니 공원내에 있다고 합니다.
訟德碑群 소개문
벽제관 주변의 송덕비 群 모습
벽제관지 앞 '의주길 제2코스 벽제관길' 안내판과 인증함.
옛터에 건물은 오간데 없고 주춧돌만 서넛 덩그러니 세월을 쌓고 있는 벽제관址..
〈옛 벽제관〉 중국 사신들이 한양에 들어오기 전 유숙했던 여관이자 사신들을 마중하고 배웅하던 곳.
제1코스 종점 벽제관지 앞에서 바라본 제2코스 출발지 방향 정경.
『한 말씀』
눈도 침침하고, 귀도 어두운 그리 늙었다 할 수 없을 해방둥이가 정년 후 15년을 이리 포스팅을 하다보니 이제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과 마우스에 손에 얹고 2시간만 있으면 다리는 저리고 손가락이 전류가 통하는지 찌릿찌릿 하고 붓는데도 이리 흔적을 모아 남기고 있습니다. 글귀는 생각대로 타자해서 그대로 올렸습니다. 사진 분량이 많다보니 끼적인 글귀를 일일이 재검할 여력도 느긋함도 없고 분량에 질려서 그냥 올리다보니 오타나 글귀가 어설픈 것이 많습니다. 보시더라도 혜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21년 5월 19일 석가탄일 -鄕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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