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두 개의 교육기관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국공립의 성격을 가진 향교(鄕校)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설기관이라 할 수 있는 서원(書院)이 그것이다. 서원은 향촌 선비들에 의하여 私的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나라에서 관여할 필요가 없었다.
서원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소수서원(紹修書院)은 통일신라 때 처음 건립된 숙수사 옛 터였다. 숙수사는 고려시대까지 존속되어 왔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어느 시기에 터만 남아오다가 고려 후기의 학자 안향이 숙수사에서 수학하여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도 이 숙수사에서 수학하였다고 하며, 안향이 원나라로부터 주자학을 도입하여 이것이 조선 건국의 정신적 이념이 되었음을 들어 조선 중종37년(1542)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이듬 해인 중종 38년(1543년)에 안향의 고향이며 수학했던 이 寺址에 祀堂과 講堂을 세우고 유생들을 공부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교육기관인 白雲洞書院이다.
그러다가 명종 5년(1550년) 풍기군수였던 퇴계 이황의 요청으로 명종이 ‘백운동서원’에 대하여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어필(御筆) 현판과 서적을 하사하고 노비를 부여하여 사액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서원이 지닌 교육 및 享祀的 기능이 국가의 인재양성과 敎化政策에 깊이 연관되어 조정에서 의논하여 특별히 임금이 서원의 명칭을 부여한 것이다. 이러한 특전을 부여받은 국가공인의 서원을 사액서원이라 하여 비사액서원과는 격을 달리하였다. 그 뒤 전국의 도처에 서원이 세워지면서 사액을 요구하자, 국가에서는 사문진흥(斯文振興)과 선유(先儒)에 대하여 보답한다는 뜻으로 대부분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인조 이후 부자격자를 함부로 제향하는 등 남설(濫設)의 경향이 심해지면서 사액에 대한 통제가 가해져 도덕과 충절이 뛰어난 인물을 제향하는 곳이 아니면 허락하지 않았다.
1953년 소수서원 뒤편에 소수중학교 운동장을 마련하다가 청동불상 25구가 출토되었는데, 모두 통일신라 때의 양식으로 밝혀졌으며, 소수서원 경내에 숙수사 당간주를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여러 석조물이 남아 있어 당시 사찰의 규모와 存廢를 짐작케 한다.
1.영귀봉(靈龜峰), 2.학자수(學者樹) 3.소혼대(消魂臺), 4.지도문(志道門), 5.성생단(省牲壇), 6.경렴정(景濂亭).
《지도문 주변/志道門 周邊》
서원 왼편에 봉긋하게 솟아있는 둔덕은 거북이가 알을 품은 모습이라 하여 靈龜峰이라 한다. 그 주변으로 수백 년 된 적송이 보기도 아름다운데 소나무에게서 선비의 충절을 배운다는 뜻으로 學者樹라 불리기도 한다. 보기에도 멋진 소나무 숲은 서원의 품격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영귀봉 위에는 작별의 情을 나누던消魂臺가 있다.
서원 정문인 志道門 앞 잔디 제단은 省牲壇이다. 매년 봄가을로 '안향(安珦)'선생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할 가축의 흠결을 살피고 잡던 제단 터이다. 지도문 오른쪽 景濂亭은 죽계수를 따라 펼쳐지는 멋진 경관을 바라보며 학문을 이야기하던 곳으로 1543년 '주세붕(周世鵬)'이 세웠다. 景濂亭에는 스승인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앞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썼다고 傳해지는 초서의 大家 고산 '황기로(孤山 黃嗜老)'의 현판이 남아 있다.
오백여 년을 이곳의 숨결을 지켜보고 담아온 은행나무 밑 경렴정(景濂亭)에 앉아 竹溪를 바라보는 경치는 한잔 술에 시 한 수가 어찌 없으리만큼 아름답고 죽계 건너 바위에는 주세붕이 새긴 주홍 글씨 '敬'자가 보인다. 敬자바위 우측에 취한대(翠寒臺)가 고즈넉이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다.
《경자바위/敬字巖》
주세붕은 敬이라는 글자 한자를 바위에 새겨 남겼다. 敬자는 선비의 덕목을 나타내는 글자로 공경과 근신의 자세로 학문에 집중한다는 의미이다. 더불어 안향을 공경하고 기리는 마음을 후대에 傳하고자는 뜻도 있다. 敬자 위에 백운동(白雲洞)은 소수서원(紹修書院)의 본래 이름이다.
조선 세조(世祖)2년(1456)에 成三問 등 死六臣의 端宗復位運動에 연루되어 世宗의 여섯째아들 금성대군이 順興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습니다. 錦城大君은 이곳에서 順興府使 李甫欽 및 鄕中 儒林과 더불어 端宗의 복위을 도모하다 실패하여 모두 殉節하였습니다. 그 때 순절한 유림(선비)들의 시신을 모두 이곳에 수장하여 물이 온통 붉은 피로 물들였습니다. 이후 주세붕 선생이 그들의 넋을 기리고 공경한다는 뜻으로 이곳에 '敬'자를 새기고 글자에 朱漆을 하여 위로했다고도 합니다.
《취한대/翠寒臺》
취한대는 자연을 벗하며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곳으로 '퇴계 이황'이 떠를 닦고 취한대라 이름을 붙였다. 이는 옛 시 '송취한계/松翠寒溪'에서 따 온 것으로 푸른 산의 기운과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의미이다.
1.강학당(講學堂), 2.지락재 · 학구재(至樂齋 · 學求齋), 3.일신재 · 직방재(日新齋 · 直方齋), 4.장서각(藏書閣).
《지도문/志道門》
뜻을 세워 학문을 닦으러 들어가는 의미를 가진 지도문을 들어서면 바로 강학당을 마주하게 된다.
書院은 크게 강학영역과 제향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강학영역은 학문을 닦고 배우던 공간이다. 정면의 제일 큰 건물이 강학당(講學堂)이고 오른쪽 뒤편으로 돌아가면서 '지락재'와 '학구재', 일신재'와 '직방재'가 위치한다. 강학당 왼쪽으로 '장서각'이 있다.
《강학당/講學堂》 보물 제1403호
건물배치는 하학상달(下學上達), 즉 학문의 차례와 단계의 의미를 가진다. 독서를 통한 학문의 즐거움을 의미하는 至樂齋를 시작으로,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구하는 學求齋, 날마다 새롭게 한다는 日新齋, 그리고 깨어있어 마음을 곧게 한다는 直方齋, 이 직방재에 이르면 학문을 크게 이루게 되므로 비로소 明倫堂이라 불리는 강학당에 들어 세상의 이치를 밝히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배출된 人材가 4,00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1543년에 건립된 강학당 내부에는 명종임금이 내려준 친필 편액을 위시하여 많은 편액이 걸려있으며, 원본은 인근에 위치한 소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소수서원은 임금이 편액을 내린 서원이라 하여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고도 한다.
강학당과 일신당 사이 공간이다. 소나무 있는 곳은 '제향영역(祭享領域)'으로 分籬된 담장 넘어로 문성공 안향의 廟 보인다.
담장에 둘려 있는 곳이 '제향영역/祭享領域'으로 문성공 안향의 사당이고, 우측에는 서원의 책과 목판을 보관하던 '장서각'이다.
1.문성공 묘(文成公廟), 2.전사청(典祀廳), 3.영정각(影幀閣)
'제향영역(祭享領域)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보물 제 1402호로 지정되어 있는 문성공묘(文成公廟)와 전사청((典祀廳), 영정각(影幀閣) 등의 건물이 있다. 문성공묘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라 불리는 '회헌 안향/晦軒 安珦'의 위패를 모신 사묘(祀廟)로 격을 높여 부른 것은 흔치않은 일이다. 매년 봄가을로 두 번의 제사를 지낸다. 문선공묘 뒤편에 있는 전사청은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준비하던 곳이다.
일반적으로 전당후묘라 하여 강학공간 뒤에 제향공간을 두는데 서쪽방향을 중시하는 우리 전통사상에 따라 강학공간 측면 서쪽에 제향공간을 배치한 독특한 사례이다. 서원에 영정각이 있는 것도 특이한 일로 국보 제111호 안향초상과 보물 제717호 주세붕초상을 위시하여 보물급 영정을 많이 소장하고 있어 1975년에 특별히 지어진 건물이다. 현재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이 건물 안에는 정면에 신국공 주자(信國公 朱子/朱熹)와 '회헌 안향(晦軒 安珦)'의 영정이 걸려 있고 좌측에 '미수 허목(眉叟 許穆)'과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 우측에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과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의 영정이 있다.
'미수 허목(眉叟 許穆)' ·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
'신국공 주자(信國公 朱子/朱熹)' · '회헌 안향(晦軒 安珦)'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 ·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
《일영대/日影臺》
일영대는 해시계로 알려져 있다. 맑은 날 윗 부분 돌의 평면 가운데 있는 구멍에 꽂은 막대기의 그림자가 아랫돌에 드리워지는 것을 보고 시간을 알았다고 한다. 자연석 주춧돌 위에 문지도리석을 올려놓은 것으로 소수서원 이전 통일신라 때 이곳에 있었던 옛 숙수사(宿水寺)의 유적이라는 설도 있다. 실제 소수서원 매표소 들어서서 우측 초입 죽계 쪽에 숙수사의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보물 제59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전사청(典祀廳) 과 영정각(影幀閣) 그리고 일영대(日影臺).
서원과 서원관리사무소 사이를 구분 지은 담장의 아름다움을 담았는데 아쉬움이 남는다. 오석으로 세운 碑石이 없었으면 보기 좋았을 텐데..
서원 후문을 나오니 竹溪 한 편에 석축을 쌓아 만든 연못이 있는데 늦은 철에 수련이 雙으로 꽃을 피웠다.
맑은 바람 스미는 초가을 연못에
모든 시름 잊은 듯 초연하게 피는 모습
홀깃 보면 여민 듯이 다시보면 웃는 듯이
연연히 풍겨오는 그윽한 님의 향기
해가 지는 산기슭 고요한 연못에
임은 가도 홀로 남아 청아하게 피는 모습
눈을 뜨면 선연하게 눈 감으면 아련하게
오탁의 연못 속에 아름도 하시어라.
오랜 지난날에는 대나무가 숲을 이루었던가 그래서 竹溪였을까 지금은 갈대만 무성하니 蘆溪라 부름은 어떠할지, 그러나 대나무나 갈대나 대(莖)는 비슷하니 둘 중 무엇이면 어떠리 보는 이 또한 옛 사람이 아니거늘...
죽계 건너 지나온 곳에 은행나무 두 그루, 그 나이 오백년을 넘겼다니 그 한 자리에 서서 엄동의 설한, 모진 비바람 견디며 서원의 흥망성쇠 가슴에 묻고 있나니 唯我獨尊이라한들 뉘라서 눈 흘겨보겠느냐
'敬'자 바위 옆 산수유, 瓊玉처럼 곱네. 머잖아 세월의 심술에 너 또한 나를 닮아가겠지..
저 징검다리는 어찌하여 정면으로 물살을 받게 놓았을까! 마름모형으로 놓아 물살을 가르게 하면 장마철 큰 물의 流水壓力을 분산하여 힘을 덜 받아 떠내려가는 일은 없을 텐데..
나 징검다리에 서서 죽계를 내려다보네. 너를 어찌 竹溪라 했을까 아무리 둘러보고 생각해도 연유를 알 수 없네. 대나무처럼 곧은 절개, 맑은 시내물의 淸凉함을 닮고자 글 좋아하는 선비들이 竹溪라 했느냐!
나 징검다리에 서서 죽계를 올려다보네. 너를 어찌 竹溪라 했을까 그 사연을 너는 알려마는 온 하늘을 다 품고 세월마냥 흐르고만 있구나..
2015년 10월30일금요일,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소수서원, <鄕香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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