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저수지를 끼고 올라서니 우측 산자락엔 오색으로 물든 고목에 싸여 아담하고 고풍스런 사찰(禪石寺)이 있고 좌측에는 푸른 소나무 울창한 능선에 자리한 胎封群이 위치하고 있다. 송림 아래 주차장에서 바로 소나무 우거진 둔덕처럼 원만한 능선으로 오르는 산길에는 돌을 깔아 단을 쌓듯이 만든 계단을 50여m 오르면 능선가운데 무성한 소나무에 둘려쌓인 19개의 태봉이 정연하게 세워져 있다. 세종 20년(1438)에서 세종 24년(1442)사이에 조성된 19기의 태실은 수양대군을 비롯하여 세종의 嫡庶 17왕자와 왕손 단종의 태를 안장한 곳이다. 전체 19기 중 14기는 조성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수양대군이 단종을 왕위에서 밀어낸 뒤 이를 반대한 동생 금성대군,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 및 계유정란 때 죽임을 당한 안평대군의 태와 장태비 등은 세조 3년(1457)산 아래로 파 던져졌으나 1975년 흩어진 기단석만 찾아 본래의 자리에 복원되어 있고 기단석 위 중동석과 개첨석과 장태비는 유실되고 없다. 태실은 조선왕조 의궤에 따라 지반 아래 석실을 만들고 그 속에 분청사기로 된 胎壺가 들어 있고 그 위에 기단석, 중동석, 개첨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태실을 정비하던 중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분청사기로 빗은 태항아리 뚜컹(粉靑印花文蓋)2점, 무늬를 찍어 새겨 흰 흙으로 매꾸어 가루를 바른 오목한 공기(粉靑印花文盌)1점, 밑이 납작한 항아리(平底壺)1점, 지석(誌石)3점 등 이다.
『세종대왕자태실분포도 』국가지정 사적제444호
《世宗大王 祹, 1397(태종6년)~1450(세종32년) / 자녀 18남 4녀
세종대왕께서는 18왕자(8대군 10군)2공주 2옹주 등 많은 子息을 두셨지만, 수양대군 52세, 임영대군, 밀성군이 50세, 영해군43세 이상 4분을 제하고 이외 왕자들은 10대가 셋, 20대가 세 분, 30대가 일곱 분으로 대다수가 短命을 했다. 그 중 정변으로 사사된 다섯 분을 제외하여도 30대까지 합하면 여덟 분이 일찍 돌아갔다. 실질적으로 세 분 이외 15분은 연유는 차치하고 모두 단명을 하셨으니 이곳이 소위 말하는 명당이라는 풍수적 개념은 현실과 너무 거리가 먼 것 같다.
태봉은 왕세자 향(珦) 문종의 태를 제외한 소헌왕후의 태생인 大君의 태봉 7기와 元孫 弘暐(단종)의 태봉1기 그리고 후궁의 태생인 君의 태봉11기를 두 줄로 구분하여 세웠다. 비석을 전면으로 볼 때 앞줄에는 후궁 아들인 君의 胎封을, 뒷줄에는 소헌왕후의 아들인 大君의 태봉과 세손의 태봉을 세웠으며 右에서 左側으로 출생서열로 세웠다. 그런데 세종실록과 문종실록, 전주이씨종약원 족보 등이나 모든 역사기록에 의하면 세종임금의 아들은 모두 18분이다. 정비 왕후의 태생 8분, 후궁 嬪의 태생이 10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곳 태실에는 신빈 김씨(愼嬪(淸州)金氏)의 소생인 왕자 '당(塘)' 의 태봉이 1기가 더 있어 후궁의 태생인 君이 11분이다. 원손(단종)의 태실을 합쳐 모두 19분의 태봉이 있다. 왕자 당(塘)은 현재 어떤 기록에도 없으며 세간에 알려진바 없는 미스터리의 인물이다.
『 태실배치도/胎室配置圖』
塘 (1442~?) |
1442년12월23일 |
愼嬪(淸州)金氏 |
胎室· 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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潭陽君 渠 (1439~1450) |
1439년5월24일 |
愼嬪(淸州)金氏 |
胎室· 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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寧海君 璋 (1435~1477) |
1439년 8월8일 |
愼嬪(淸州)金氏 |
胎室· 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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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豊君 瑔 (1434~1457) |
未詳 |
惠嬪(淸州)陽氏 |
基壇石 |
胎室· 碑 |
父 文宗大王 珦 母 顯德王后 安東 權氏 |
1441년閏11월26일 |
元孫 弘暐/단종대왕 (1441~1457) |
翼峴君 璉 (1431~1463) |
1439년 8월8일 |
愼嬪(淸州)金氏 |
胎室· 碑 |
胎室· 碑 |
昭憲王后 靑松 沈氏 |
1439년8월8일 |
永膺大君 琰 (1434~1467) |
壽春君 玹 (1431~1455) |
1439년 8월8일 |
惠嬪(淸州)陽氏 |
胎室· 碑 |
胎室· 碑 |
昭憲王后 靑松 沈氏 |
1439년5월26일 |
平原大君 琳 (1427~1445) |
密城君 琛 (1430~1479) |
1439년 8월8일 |
愼嬪(淸州)金氏 |
胎室· 碑 |
基壇石 |
昭憲王后 靑松 沈氏 |
未詳 |
錦城大君 瑜 (1426~1456) |
漢南君 ? (1429~1459) |
未詳 |
惠嬪(淸州)陽氏 |
基壇石 |
胎室· 碑 |
昭憲王后 靑松 沈氏 |
1439년 5월24일 |
廣平大君 璵 (1425~1444) |
義昌君 玒 (1428~1460) |
1438년3월11일 |
愼嬪(淸州)金氏 |
胎室· 碑 |
胎室· 碑 |
昭憲王后 靑松 沈氏 |
1439년 5월29일 |
臨瀛大君 璆 (1420~1469) |
桂陽君 璔 (1427~1464) |
1439년5월24일 |
愼嬪(淸州)金氏 |
胎室· 碑 |
基壇石/碑(半破) |
昭憲王后 靑松 沈氏 |
未詳 |
安平大君 瑢 (1418~1453) |
和義君 瓔 (1425~?) |
未詳 |
令嬪(晉州)姜氏 |
基壇石 |
胎室 · 碑 |
昭憲王后 靑松 沈氏 |
1438년 3월10일 |
首陽大君(瑈) (1417~1468) |
(郡號 生歿) |
(胎室設置) |
모친(母親) |
(存置狀態) |
存置狀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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母親 |
胎室設置日 |
郡號 生歿 |
《 세조대왕태봉 가봉 비문 / 世祖大王胎封 加封碑文》세조가봉비1462년(세조8년)건립.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세종장헌대왕(世宗莊憲大王)께서 卽位한 21년에 有司에 命하여 땅을 점치게 하고 大君과 여러 君의 胎를 星州 북쪽 20리 禪石山의 산등성이에 갈무리하게 하고 각각 돌을 세워 이를 표시하였는데, 주상의 胎도 또한 그 가운데 들어 있어 표시하여 이르기를 '首陽大君 諱之室' 이라 하였다. 지금은 하늘의 명을 받들어 왕위에 오른 지 이미 8년이 지났으므로 禮官이 급히 옛날의 故事에 의하여 따로 자리를 보아 임금의 태를 이안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형제가 胎를 같이 하였는데 어찌 고칠 필요가 있겠는가' 하시고 의장 · 석물을 설치하기를 청하여도 역시 윤허하지 아니하시며 다만 표석을 없애고 碑를 세워 기록할 것을 명하여 힘써 일을 덜게 하셨다. 아아! 우리 주상께서는 하늘을 받들고 道를 몸 받아서 文에 빛나시고 武에 뛰어나시고, 전하의 聰明 叡智하시고 謙遜 儉約한 德은 이루다 말할 수 없으나, 이 한 가지 일을 가지고도 그 겸손하고 검소함을 숭상하여 지위가 더 높을수록 덕이 빛나는 지극함을 알 수 있으니 조선 억만년의 無疆한 기초가 더욱 길이 아름다울 것을 또한 여기에서도 점칠 수 있을 것이다. 碑銘에 이르기를, '아아! 빛나는 오얏나무(李) 천 가지 만 잎사귀라, 산매자 꽃(棣華) 함께 비치는데 홀로 빼어나 밝게 빛난다. 용이 날아 하늘에 오르니 세상이 맑고 편하며, 우뚝한 神功은 제도를 갖추고 밝게 하였다." 돌아 보건대 胎를 예전대로 두고 옮기지 아니하여 예관이 청하여 옛 법을 따르기를 원하였으나 겸손하여 윤허하지 않으시니 검소한 덕이 더욱 빛난다. 龜趺가 높이 섰으니 억만 년의 표석이라, 선석산이 높고 높아 그 맑고 아름다움을 간직하였으니 천지와 같이 길고 오래토록 창성하고 빛나리라."
<禮曺判書 洪允成 撰>
《首陽大君(世祖 )瑈 수양대군 유 1417~1468) 胎封室》
전면 가운데에 세운 '세조대왕태봉가봉비' 우측 앞에 위치한다.
수양대군 이유는 1417(태종 17)에 당시 本宮에서 아버지 忠寧大君(세종)과 어머니 府夫人 靑松 沈氏(소헌왕후)의 차남으로 음력 9월24일 태어났다. 역사와 세간에 너무도 잘 알려진 수양대군이기에 간략하게 요약하면 1428년(세종 10) 진평대군(晉平大君), 1432년 함평대군(咸平大君)에 책봉되었다가 이해 7월 진양대군(晉陽大君)으로, 다시 1445년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책봉되는 등 역대 대군 중 가장 많은 개봉을 받았다.
세종은 왕위에 오르자 유가정치(儒家政治)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세자(뒤의 문종)를 성균관에 입학시킴은 물론 왕업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왕자들의 교육에도 힘썼다.
수양대군은 이미 다섯 살의 나이에 <효경(孝經)>을 외워 주위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영특함은 자라면서 형제들 중 단연 뛰어나 세종과 형인 문종에게 인정을 받았다. 1436년(세종 18) 2월, 그의 나이 약관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세종이 세조가 문학을 좋아한다고 하여 친히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내려 주었다. 이 때 세조가 고금의 서사(書史)를 다 보았고, 더욱 성리학에 정통하였는데 매양 말하기를, '천하의 서적을 다 읽지 않고서는 나는 다시 활을 잡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그의 형인 세자(문종)는 일찍이 말 잘 타고 활 잘 쏘는 수양의 활에다 쓰기를, '철석같은 그 활이여, 벼락인양 그 살이로다. 버팀은 보겠으나 풀어짐을 못 보겠네.'라는 시를 친히 적어주기도 하였다. 세종21년(1439)7월 종친들을 관리하는 종부시 제조(宗簿寺 提調)가 되었다.
세종22년(1440년)에는 세종이 규표(圭表 천문관측기계의 하나)를 바로 잡을 때의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및 다른 유신들에게 명하여 삼각산 보현봉(普賢峯)에 올라 해지는 곳을 관찰하게 하였다. 돌길이 위험하고 또 불측한 벼랑이 내려다 보였으므로 안평대군 이하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눈이 어지럽고 다리가 떨려서 전진하지 못하였으나 세조만은 유난히 걸음이 나는듯하여 순식간에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니 보는 이가 모두 탄복하여 `따를 수 없다' 하였다. 늘 소매 넓은 옷을 입었으므로 궁중 사람들이 모두 웃으니 세종이 이르기를, "너와 같은 용력 있는 사람은 의복이 이만큼이나 넓고 커야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수양대군의 재능을 알아본 세종은 자신의 병환도 있음에 특별지시로 국정전반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대군으로 있으면서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해 도제조(都提調)가 되어 토지제도의 개혁을 맡았으며, 〈치평요람 治平要覽〉·〈역대병요 歷代兵要〉·〈의주상정 儀註詳定〉 등의 책을 찬술했고 중국의 〈운회 韻會〉를 한글로 번역 보급하기도 했다. 세종26년(1444년)전제소 제조(田制所制調)에 임명되었다. 세종27년(1445년)진양대군(晉陽大君)에서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개봉되었다.
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종이 재위 2년 3개월 만에 죽고 12세의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세종 때의 안정된 왕권과 정치는 크게 약화되어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 의정부 대신들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이 초래되었다. 이른바 ‘황표정사(黃票政事)가 그것이다. 종친으로서 정치적 압박을 느낀 수양대군은 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 등을 모사로 삼고, 1453년 10월 홍달손(洪達孫)·양정(楊汀) 등 심복무사를 친히 동원해 김종서· 황보인· 정분(鄭苯) 등을 비롯해 조극관(趙克寬)·이양(李穰)·조수량(趙遂良) 등 정부의 핵심인물들을 추살(椎殺) 또는 주살(誅殺)해 제거했으며, 大君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을 모반의 죄명으로 강화로 축출한 뒤 사사했다. 중앙의 권신을 제거한 수양대군은 그 후환을 막기 위해 함길도도절제사로 동북지방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종서의 추종세력인 이징옥(李澄玉)을 파면하고 그 후임에 박호문(朴好問)을 임명했다. 이에 반발한 이징옥이 박호문을 죽이고 스스로 대금황제(大金皇帝)를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당시 약화된 왕권에 권신들과 왕실 등 권력을 쟁취하려는 세력 난무로 인하여 무단적인 방법으로 실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부사 · 이조판서 · 병조판서 · 내외병마도통사 등 여러 중직을 겸해 전권과 병권을 독차지하고 정인지(鄭麟趾)를 좌의정에, 한확(韓確)을 우의정에 임명하도록 하여 새 정부를 구성했다. 이렇듯 대세가 수양대군에게 기울어진 것을 알아챈 단종은 수양대군 추대세력의 압력에 굴복해 마침내 스스로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물려주었다.
《 安平大君 瑢 胎封室(안평대군 용 1418~1453) 》
계유정난(癸酉政亂)으로 인하여 碑石은 반동강만 남았고 태봉은 몸돌(中童石)과 덮개석(蓋簷石)은 오간데 없고 仰蓮이 돋을새김 되어 있는 기단석(基壇石)만 남아 있다.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은 태종18년(1418년)에 당시 아버지 충령대군(세종)과 어머니 부부인 청송 심씨(소헌왕후)의 3남으로 10월18일(음력9월19일) 태어났다.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낭간거사(琅玕居士)·매죽헌(梅竹軒)이다. 13세 때 아들 없이 요절한 작은 아버지(叔父) 성령대군(誠寧大君)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詩文 · 書 · 畵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칭 하였으며 가야금에도 능하였다. 한석봉과 함께 조선 최고의 명필로 불린다. 그리고 식견과 도량이 넓어 당대인의 명망을 받았으며 文士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도성의 북문 밖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남호(南湖)에 담담정(淡淡亭)을 지어 수많은 책을 수장하였으며 문인들을 초청하여 시회(詩會)를 베푸는 등 호방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유명하다. 서풍은 고려 말부터 유행한 조맹부(趙孟頫)를 따랐다. 하지만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한 활달한 기풍은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그 영향으로 인하여 조선 전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이와 같이 그가 대성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뛰어난 천분을 타고났을 뿐 아니라 궁중에서 생장하는 과정에서 내부(內府)에 소장된 많은 진적(眞蹟)을 보고 수련하였으며, 그 스스로 서화(書畵)수장에도 상당하였기 때문이다. 신숙주(申叔舟)의 『보한재집(保閑齋集)』「화기(畫記)」에 의하면, 모두 222축의 서화를 소장하였는데, 그 중 안견(安堅)의 작품을 제외한 대부분이 중국 서화가의 명적이었다. 따라서 그와 교유하였던 인사들에게 명적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줌으로써 당대의 書.畵系에 큰 역할도 하였다. 그러나 친형 수양대군과 갈등하다가 1453년 김종서, 황보인 등과 정변을 기도한 죄목(계유정란癸酉政亂)으로 사사(1453년 11월18일)당했고 후에 복권되었다. 시호는 장소(章昭)이다. 잠시 여기에서 당시 너무도 유명한 화가 현동자 안견(玄洞子 安堅)이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담은 그림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 대하여 간략하게 쓴다.
안평대군이 무릉도원을 觀遊 하는 꿈을 꾸고 그 내용을 안견에게 설명한 후 그리게 한 '몽유도원도' 에는 안평대군의 표제와 발문을 비롯해 신숙주(申叔舟)· 이개(李塏), 하연(河演), 송처관(宋處寬), 김담(金淡), 고득종(高得宗), 강석덕(姜碩德), 정인지(鄭麟趾), 박연(朴堧), 김종서(金宗瑞), 이적(李적),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윤자운(尹子雲), 이예(李芮), 이현로(李賢老), 서거정(徐居正), 성삼문(成三問), 김수온(金守溫), 만우(卍雨), 최수(崔脩) 등 당대 최고 문사들의 제찬을 포함해서 모두 23편의 저마다의 자필 찬시가 곁들여 있어 그 내용의 문학적 성격은 물론, 서예사적으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안평대군의 발문에 의하면 그림은 1447년 음력 4월 20일에 그리기 시작하여 3일 만인 23일 완성되었다고 하며, 그림의 내용은 통상적인 두루마리 그림과는 달리 왼편 하단부에서 오른쪽 상단부로 전개되어 있으며, 왼편 도입부의 현실세계에서 출발하여 두루마리를 따라 오른쪽 道家의 理想景인 桃園에 이르는 과정까지의 긴 여정이 구현되어 있다. 평원의 잔잔한 풍경에서 시작되는 도원을 향하는 길은 高遠의 험한 절벽과 강물을 힘겹게 건너고 나면 深遠의 넓은 대지위에 펼처진 화사한 복숭아꽃이 만발한 무릉도원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 그림에서의 도원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현실세계와 분리되어 있다. 현실세계와 도원 사이는 기암절벽이 이중으로 가로막고 있다. 그렇게 막막하게만 보이는 두 세계 사이에도 이들을 연결하는 길이 암시적으로 묘사되어 있음은 그만큼 도원으로 가는 길이 험난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그림에 안평대군은 다음과 같은 글을 달았다.
『 世間何處夢桃源 野服山冠尙宛然 著畵看來定好事 自多千載擬相傳 後三年正月一夜 在致知亭因披閱有作 淸之 』「 이 세상 어느 곳을 도원으로 꿈꾸었나, 은자들의 옷차림새가 아직도 눈에 선하거늘 그림으로 그려놓고 보니 참으로 좋구나, 천년을 이대로 전하여 볼만하지 않은가 삼년 뒤 정월 초하룻날 밤 치지정에서 이를 다시 펼쳐보고서 짓노라. 청지(淸之) 」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안평대군의 그 꿈은 훗날 大君 자신의 운명을 예지 받은 것 같다. 이승의 세계에서 험난한 길을 거쳐 저승으로 이르는 것을 암시하는 듯한 꿈을 그림으로 옮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몽유도원도'에 贊詩를 한 名士들 또한 대다수가 首陽大君에 의해 불귀의 객으로 안평대군과 함께 桃園(?)으로 갔지 않은가! 안평이 지금 옥인동, 수성동 계곡에 비해당을 짓고 살다가 몽유도원도를 그리고 무계동, 지금 자하문 터널 위에 무계정사를 지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무계정사 터 위 공터에 올라가 보면 멀리 북한산이 보이는데, 보현봉과 문수봉 평창동을 조망하면 몽유도원도와 너무 흡사하다는 느낌이 든다. 자주 북한산을 바라보다보니 그 모습이 꿈속에 재현된 것 아닐까,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고는 수양대군의 존재에 위기감을 느껴 안평의 집에서 일부러 물건을 훔치고 도망가 계유정란 때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그림을 그리고 3년 뒤에 수십 명의 당시 내노라하는 명사들이 모여 찬문을 짓는 행위는 수양과 정면 대립을 불사하는 정치적 시위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안평대군이 서시(敍詩)에서 말했듯이 " 이 세상 어느 곳을 도원으로 꿈꾸었나, " 라는 시구는 좀 생각해 볼 여지를 남긴다. 단종이 즉위하자 김종서와 황보인 등 의정부 훈구대신들이 왕의 인사권까지 좌지우지 하였다. 이른바 ‘황표정사(黃標政事)다.
당시 세종대왕의 아들들은 모두가 특출하게 영특하여 의정부 대신들의 이런 처사를 간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왕자들은 어린 조카 단종을 옹호한다는 명시 하에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자 했으며 실추되어가는 왕권을 세우고자 하였다. 안평대군은 김종서와 친분을 곤고히 하고 함경도 경성에서 무기까지 옮겨와 무계정사에서 군사를 모아 훈련하기도 하였다. 이에 수양대군은 고립무원의 위기를 느꼈을 것이다. 이때부터 수양대군의 부인 정희부인이 정치적으로 움직인다. 중국 명나라 성종의 비가 된 한확의 누이를 염두에 두고 외교통인 한 확의 여식을 며느리로 들이고, 김종서 등 의정부 대신들의 전횡에 소외된 文武臣과 선비들이 불만을 표출하고 반대하는 일이 잦아지자 그 분열의 틈을 놓치지 않고 정인지의 아들과 자신의 딸을 혼사시켜 정치적 혼맥(婚脈)을 쌓았으며 황희의 아들, 황수신, 정인지, 신숙주, 등과 같은 인재와 권람, 한명회 같은 책사들을 바탕으로 정희부인의 드러나지 않는 내조에 힘입어 수양대군은 계유정란을 통해 정권을 잡았던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 鄕)
안견(安堅)의 출생과 몰의 년도는 미상이며 자는 가도(可度) · 득수(得守), 호는 주경(朱耕) . 현동자(玄洞子) · 지곡인(地谷人)이다. 중인 출신의 화원으로 도화원(圖畵院) 종6품인 선화(善畵)에서 체아직인 정4품 호군(護軍)으로 승진하였다. 화원은 규정상 최고 종6품까지 이를 수 있으나 이런 규정을 넘어 파격적인 대우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을 가까이 섬기면서 그가 소장한 고화(古畵)들을 섭렵하여 화풍을 익혔고, 1447년에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그렸으니 그 그림이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이다.
《 臨瀛大君 璆 (임영대군 구 1420~1469) 胎封室》
碑石은 온전한데 태실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태봉은 덮개석(蓋簷石)에 覆蓮이 새겨져 있는 한 부분이 손실되었지만, 전체적으로 온전한 편이다.
임영대군 이구((臨瀛大君 李璆)는 세종 2년(1420년) 1월6일 아버지 세종대왕과 어머니 소헌왕후 청송 심씨의 4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헌지(獻之)이다. 둘째 형인 수양대군처럼 무술에 능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긍지를 가지고 부모와 형제에게 효도와 우정을 지키며 청백하게 생활하였다. 성격에 꾸밈이 없고 사특(私慝)함이 없어서 늘 진실하고 대쪽 같다고 칭찬을 들었다. 다만 궁녀와 대궐의 성추문으로 물의를 일으킨 일이 있었다. 세종 10년(1428년)에 대광보국 임영대군(大匡輔國 臨瀛大君)에 봉하였고 이듬해 명나라 사신인 지신사 정흠지(鄭欽之)로부터 단자(段子) 5필을 선물로 받았다. 세종12년(1430년) 두 형 수양대군 · 안평대군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무예에 능하여 1433년 3월에는 형 수양대군과 함께 경회루에서 승마시범을 보이는 등 아버지 세종의 총애가 깊어 세종은 여러 번 그의 집에 거동하였다. 가정사는 불행하여 개국공신 남은의 손자로 문종 때 좌의정을 지낸 남지(南智)의 딸과 혼인을 했으나 그녀는 정신질환이 있었다. 혼인한지 한 달 뒤 세종15년(1433)6월14일 세종임금은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우의정 최윤덕 등을 불러 "임영대군 아내 남씨는 나이가 12세가 넘었는데 아직 오줌을 싸고 눈빛이 바르지 못한데다가 혀가 심히 짧고 행동이 놀라며 미친 듯한 모습이기에 내쳐야 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 후 한 달 만에 군부인 남씨는 강제 이혼을 당했고, 같은 해 12월 의정부 우찬성 최사강의 손녀이자 요절한 최승녕의 딸을 부부인으로 간택하였다. 부부인 최씨의 고모이자 최사강의 딸 둘은 세종임금의 이복동생(庶弟) 함녕군의 부인이 되고 다른 딸은 세종임금의 여섯 째 아들 금성대군의 부인으로 태종, 세종의 사돈이 되었다. 최사강은 왕실과 3중 인척관계를 형성한다. 임영대군은 부부인(府夫人) 최씨에게서 5남2녀, 이 후 세 번째로 안동 안씨와 재혼하여 5남4녀를 낳았다. 장남 오산군은 후사(嫡子)없이 사망한다. 세종19년(1437) 관료와 왕족들에게 내려진 과전의 양이 너무 지나치다는 여론이 나오자 형 수양대군, 안평대군과 함께 받은 과전 3백결에서 각각 50결을 감하여 도로 반납하였다. 세종21년(1439) 궁녀와의 성추문으로 직첩이 박탈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임영대군에 봉해졌다. 세종24년(1442) 원윤이 되었으며 세종임금이 임영대군에게 총통 제작을 맡겨 군기감으로 동생인 금성대군과 함께 총통, 화차를 제작하였고 문종 원년에도 문종의 명을 받아 화차를 제작하였다. 단종이 즉위하면서 황보인, 김종서 등이 황표정사를 빌미로 국정을 장악하려 할 때 크게 불만을 나타내었으며 안평대군과 수양대군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질 때 그는 둘째 형인 수양대군의 편을 들었다. 이듬해 1453년 계유정란으로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자 임영대군은 수양대군을 크게 도왔고 수양대군이 즉위하는데 일조하였다. 그 덕에 임영대군은 두 伯父인 양녕대군, 효령대군과 함께 왕실의 어른이 되었고 형제들인 문종,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과 달리 큰 시련을 겪지 않았다. 임영대군은 예종 원년(1469년1월21일)에 50세로 돌아갔다. 임영대군은 임종 때 첫째, 왕자 간에 분쟁을 일으키지 말 것과, 둘째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유훈을 남겼다. 슬하에 9남 2녀를 남겼다. 그 중 아들 구성군은 훗날 영의정에 오르며 승승장구 하였으나 둘째 형 세조의 비 정희왕후에 숙청당하여 유배된다.
《 廣平大君 璵 (광평대군 여 1425~1444) 胎封室》
광평대군 이여((廣平大君 李璵)의 자는 煥之 호는 明誠堂으로 세종 7년(1425년) 5월에 아버지 세종대왕과 어머니 소헌왕후 청송 심씨의 다섯째 아들로 탄생하셨다. 세종14년(1432)정월에 광평대군으로 봉해졌으며,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온 광평대군은 문장은 물론 활쏘기와 격구 또한 잘하고 음률과 산수에 밝아 특히 부왕의 총애를 받았다. 1436년 申自守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 해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에 힘써 『효경』·『소학』· 사서삼경 ·『좌전(左傳)』 등에 능통하였고, 『문선(文選)』과 이백(李白)·두보(杜甫)·구양수(歐陽修)·소식(蘇軾) 등의 문집을 읽어 통달하고 국어·음률·산수에도 밝았다. 1437년 세종대왕의 명으로 후사가 없는 공순공(恭順公 撫安大君)방번의 奉祀孫이 되었다. 1438년에 새로이 개척한 북변(北邊)의 국방강화 및 풍속교화를 위하여 서울에 경재소(京在所)를 두고 종친으로 하여금 주관하도록 할 때, 그는 종성(鐘城)을 맡았다. 성품이 너그럽고 용모와 자태가 풍미하고 총명, 효제하며 서예와 격구에도 능하였다. 2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시호는 장의(章懿)이다.
이 태실은 소헌왕후의 제5 왕자 광평대군의 태봉이다. 광평대군할아버지의 21세직계손으로서 감회가 없을 수 있겠는가, 나의 할아버지 세종대왕께서는 모든 왕자를 하나같이 어여삐 여기시어 이렇게 한자리에 도탑게 모아 보듬으셨건만, 대군 할아버지의 형제분들을 생각할 때 참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다행인지 불행인지 광평대군할아버지께서는 정변이 나기 훨씬 전 세조임금이 즉위(1455년) 하기 10년 전 20세의 나이에 복중의 아드님(영순군) 한분을 두시고 돌아가셨음에 오늘 나도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문중일지에 보면 글 잘하셨고 활 잘 쏘시고 말 잘 타시고 활달한 성품으로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으셨다고 하시니 일찍 돌아가지 않으셨다면 단종임금님을 옹립하셨던 안하셨던 당시 정세는 다른 길로 갔을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나의 광평대군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일에 대해서는 세종대왕실록의 정설에서는 '광평대군 이여가 창진을 앓고 있었는데 임금이 심히 근심을 하여 여러 방법으로 치료를 하였으나 끝내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죽으니 임금과 중궁이 몹시 슬퍼하여 3일 동안 조회를 거두었다."고 쓰여 있다. 야사에서는 "어느 날 세종대왕께서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광평대군의 점을 보게 하였는데 놀랍게도 젊은 나이에 아사할 운명이라는 점괘를 듣게 됩니다. 세종대왕께서는 한낱 미신이라고 치부하면서도 광평대군에게 사고 팔수 없는 땅을 내려 굶어죽지 않도록 대비를 합니다. 하지만 광평대군은 20세가 되던 해인 1444년 식사를 하던 중 생선가시가 목에 깊이 걸려 기도가 막혀 돌아가셨다"는 야사(野史)가 있습니다. 어찌되었거나 광평대군이 운명하자 세종대왕께서는 광평대군이 위독할 때는 밤을 세워 잠을 이루지 않았고 그가 운명한 날은 종일토록 수라를 들지 않았다고 세종실록은 전하고 있습니다.
《錦城大君 瑜 (금성대군 유 1426~1456 ) 胎封室》
비석은 흔적도 없이 없어지고 태실은 몸돌(中童石)과 덮개석(蓋簷石)은 오간데 없고 仰蓮이 돋을새김 되어 있는 기단석(基壇石)만 남아 있다. 세조 즉위 이후 파손되었다.
금성대군 이유는 세종 8년(1426) 음력3월28일 아버지 세종대왕과 어머니 소헌왕후 靑松 沈氏의 6왕자로 태어났다. 양육은 태종대왕 후궁인 의빈 권씨가 맡았다. 세종15년(1433)1월에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세종18년(1436)4월에 한살 터울의 형 광평대군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문종이 돌아가고 1452년 단종이 즉위하자 금성은 조카 단종을 지지하는 뜻을 가졌는데 이것이 수양대군의 반감을 샀다. 수양대군은 한명회 신숙주 등과 결탁하여 1453년 안평대군을 숙청하고 단종을 보필하던 좌의정 김종서 등을 제거하자 금성대군은 형 수양대군의 행위에 반대하고 조카 단종을 보호하기로 결심한다. 단종2년(1455) 1월에는 영의정 자리를 차고앉은 수양대군과 우의정 한확, 우찬성 이계린, 좌참찬 강맹경, 병조판서 이계전, 형조판서 이변, 도승지 신숙주 등이 왕족들이 금성대군 집에서 활쏘기 시합을 한 것을 구실삼아 탄핵하였다. "화의군 이영, 최영손, 김옥겸 등이 금성대군 이유 집에 모여서 射宴하고서도 이를 숨겼습니다. 그리고 이영(李瓔)은 평원 대군(平原大君) 의 첩(妾) 초요갱(楚腰輊)을 간통하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핑계하여 죄를 줄 수가 있으나, 그 숨기는 것을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이영(李瓔)은 외방(外方)에 유배하고, 이유(李瑜)의 고신(告身)은 거두도록 하소서" 결국 세조 즉위 후 1455년(세조1년) 경상도 순흥에 위리 안치되었고, 2년 후 순흥부사 이보흠과 비밀리 단종복위를 위한 거병과 거사를 계획하였는데 순흥부 관노가 탈출하여 한성으로 달려가 세조에게 밀고를 하여 세조3년(1457년) 음력 10월21일 사사되니 대군의 나이 32세였다.
《平原大君 琳 (평원대군 임 1427~1445 ) 胎封室》
평원대군 임 (平原大君 琳)은 세종 9년(1427)에 아버지 세종대왕과 어머니 소헌왕후 靑松 沈氏의 7왕자로 태어났다. 세종16년(1434) 평원대군에 봉군되고 1437년 宗學에 입학하였고 護軍 洪利用의 딸(江寧府夫人 洪氏)과 혼인하였다. 이후 학문에 진력하여 詩, 禮, 大學衍義에 숙달되고 서체와 射御에도 능숙하였으며 성품이 겸손하고 효행과 우애가 있었으므로 세종의 아낌을 받았으나 1445 1월 천연두(痘瘡)로 돌아갔다. 1444년 광평대군에 이어 평원대군의 연이은 죽음은 세종 말년의 신병 등과 함께 세종대왕의 병세을 촉진시킨 한 원인이 되었다. 후사가 없어 성종14년(1483년)5월 강녕부부인 홍씨가 죽자 제안대군 현(齊安大君 玹 : 예종의 둘째아들)으로 뒤를 이었다. 처음 시호는 靖德이었으나 뒤에 定憲으로 추시되었다.
《永膺大君 琰 (영응대군 염 1434~1467 ) 胎封室》
영응대군 (永膺大君 琰)은 자는 明之, 호는 西谷이다. 세종16년(1434)5월23일에 아버지 세종대왕과 어머니 소헌왕후 靑松 沈氏의 8왕자로 태어났다. 세종23(1441년) 영흥대군(永興大君)으로 봉해졌으며, 세종25(1443년)에 역양대군(歷陽大君)으로, 세종29(1447년)에 다시 영응대군(永膺大君)으로 개봉되었다. 세종이 영응대군 염을 매우 사랑하여 일찍이 수양대군에게 부탁하였으므로 수양이 보살펴 주기를 여러 아우들보다 특별히 하였다. 염이 일찍이 병이 드니 세조는 매우 염려하여 무릇 병이 나을 수 있는 것은 해 보지 않은 것이 없었었고 대궐에서 집까지의 길에 사신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영응대군은 父王이 송복원의 딸 여산 송씨를 택하여 혼인을 하였으나 병이 있어 세종대왕이 사가로 내보냈다. 송씨가 쫓겨난 뒤 영응대군은 해주정씨(海州鄭氏) 참판 충경(忠敬)의 딸을 춘성부부인으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본부인을 잊지 못하는 영응대군을 보고 수양대군은 늘 송현수(대방부부인 송씨의 오빠)의 집에 데리고 다녔다. 이러한 잠행으로 영응대군은 궐 밖에 있는 송씨와의 사이에서 두 딸까지 두었고, 세종대왕이 돌아가신 후 단종1년(1453년) 단종은 결국 춘성부부인을 출궁시키고 다시 여산 송씨(礪山宋氏) 판중추(判中樞) 복원(復元)의 딸을 다시 맞아들였다. 영응대군은 타고난 바탕이 순후(醇厚)하고, 글씨와 그림에 뛰어나며, 음률(音律)에 밝았다. 세종이 일찍이 내탕고(內帑庫)의 진귀한 보물을 염에게 모두 주려고 하다가 미처 못하고 사망하였으므로, 문종이 즉위하고 얼마 있다가 내탕고의 보물을 내려 주어 집으로 가져갔다. 이로써 어부(御府)의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보화가 모두 염에게로 돌아가니, 그 재물이 누거만(累巨萬)이 되었다. 그러나 자못 검소하고 절약하여 사치를 일삼지 아니하고, 대궐에 들어가 임금 곁에 있을 때도 자신을 낮추어 공손히 하고 삼가하고 조심하여 조금도 허물과 실수가 있지 아니하므로, 세조가 매우 중히 여기었다. 고려 말의 최무선이 만든 화약 병기 주화(走火)를 발전시킨 신기전(神機箭) 개발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부왕 세종의 총애가 지극하였으며, 세종대왕께서는 그의 저택인 동별궁(東別宮)에서 1450년 승하하셨다. 1463년(세조 9)에 『명황계감(明皇誡鑑)』의 가사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세조 13년(1467)에 세상을 떠나니 시호는 경효(敬孝)이다.
《元孫 弘暐 /(단종대왕1441~1457)胎封室》
단종은 세종 23년(1441년)에 왕세자 향 (珦 : 文宗)과 세자빈 안동 권씨 (安東 權氏 : 顯德王后)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홍위(弘暐)이다.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는 문종이 세자이던 시절 소실로 들어왔다가 앞서 두 명의 세자빈이 불손방자하고 투기하여 폐출된 후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단종을 낳고 사흘 만에 죽었고, 후에 추존되었다. 문종이 더 이상 세자빈을 들이지 않은 탓에 단종은 모후 없이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의 손에서 자랐다. 형제로는 동복누나인 경혜공주와 이복동생인 경숙옹주가 있다.
단종은 1448년(세종 30) 8세의 나이로 왕세손에 책봉되었는데, 세종은 이때 "원손(元孫) 홍위는 천자(天資)가 숙성하고 품성(稟性)이 영특하고 밝은데, 지금 나이가 스승에게 나갈 만큼 되었으므로 너를 명해 왕세손을 삼는다."라고 했다.
1450년(문종 즉위)에는 문종의 즉위와 함께 왕세자가 되었으며, 1452년(문종 2) 5월에 문종이 죽으면서 왕위에 올랐다. 이때 단종의 나이 불과 12세였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단종은 즉위 1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이 일으킨 정란(靖亂)으로 유명무실한 왕이 되었다.
모든 권력이 수양대군에게 넘어간 상태에서 단종은 1454년(단종 2) 1월에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단종은 아직 삼년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혼사를 치를 수 없다며 여러 차례 거절했으나 수양대군은 끝내 이를 관철시켰다. 이름뿐인 왕비가 된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는 당시 15세였다. 단종과 정순왕후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다.
《和義君 瓔 (화의군 영1425~未詳)胎封室》
비석은 흔적도 없고 태봉은 앙련이 새겨진 기단석(基壇石)만 남아 있다. 뒤쪽의 거북받침에 세운 비석은 세조태실가봉비로 당시 예조판서 홍윤성의 글로 세운 것이고 그 뒤에 수양대군(세조)의 태봉이 있다. 화의군은 세종 7년(1425년)세종임금의 여섯 번째 아들(庶1男)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令嬪 晋州 姜氏이다. 1433년(세종15년) 1월에 화의군(和義君)에 봉해지고, 3년 후인 1436년(세종18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그해 10월8일 당시 사헌부 감찰이던 박중손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1441년 8월, 5살 위 이복형 임영대군 구(臨瀛大君 璆)와 공모하여 민간 여인에게 남자 옷(男服)을 입혀 궁내로 들이려다 수문장에게 발각되어 직첩과 과전을 몰수당했다. 1447년(세종29)7월 다시 화의군에 봉해졌지만, 자신의 正妻인 군부인(郡夫人) 밀양박씨의 큰아버지 朴大孫(和義君의 妻 伯父)의 노비 출신 첩을 빼앗은데 이어 1449년 朝官의 기첩을 빼앗은 사건으로 다시 직첩을 몰수되었다가 이듬 해 문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화의군에 봉해졌다. 그러다 이복동생 평원대군(平原大君) 의 첩(妾) 초요갱(楚腰輊)과 간통한 사실로 고신告身을 몰수당하고 경기도에 付處되었다가 곧 방면되었다. 그러나 화의군(和義君 李瓔)은,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양위 받아 즉위하면서, 계양군 이증(桂陽君 李璔)과 영천위 윤사로(鈴川尉尹師路) 등의 탄핵을 받기 시작하였고 또한 臺諫으로부터 금성대군, 혜빈 양씨 등과 결탁해 국가의 기틀을 어지럽혔다는 탄핵을 받고 외방에 부처되었다. 그 후 사육신 등의 단종복위 거사가 일어났을 때 세조가 화의군 이영(和義君 李瓔)을 불러서 그의 심중을 시험할 요량으로 묻기를 "성삼문을 파직 처리함이 옳지 않으냐"는 물음에 화의군은 묵묵무답 함으로써 전라도 금산에 어머니와 함께 유배되었다가 1456년 사면되었지만, 그 해 상왕(단종)복위사건에 가담해 가산을 적몰당하고 고신을 회수 당한 뒤 전라도 금산에 안치되었다. 1457년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李甫欽 등과 단종 복위운동을 도모했다. 그 정보를 입수한 순흥부 관노가 한양으로 도주하여 밀고하여 賜死되고 영월에 방출된 노산군(魯山君 단종)이 교살되자 이에 연루되었다가 1460년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았다. 《선원록 璿源錄》에 이름만 오르고 관작이 삭제되었던 것을 1518년(중종13년)손자 윤(綸)의 요청으로 관작이 추복되고 자손도 종친록에 추록되었다. 품행은 문란했지만 절의가 있었고, 초서와 예서가 능했다. 일찍이 학문에도 조예가 깊어 세종대의 한글창제에도 깊이 관여했으며, 훈민정음 처에 감독관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791년(정조11년)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구축하면서 단종조의 충절이 인정되어 정단(正壇)에 배식되었다.
《 桂陽君 璔 (계양군 증 1427~1464)胎封室》
계양군 증(桂陽君 璔)은 세종9년(1427년) 아버지 세종대왕과 어머니 신빈김씨(愼嬪金氏)의 첫째 아들로 세종대왕의 여덟째 왕자(庶2男)로 태어나 1434년(세종 16) 계양군에 봉하여졌다. 부인은 좌의정 한확(韓確)의 딸 정선군부인 청주 한씨 (旌善郡夫人淸州韓氏)이다. 서자(庶子)중 아버지 세종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았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글씨도 잘 썼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한 뒤 한명회(韓明澮)· 한확(韓確) 등과 함께 수양대군의 측근이 되어, 계유정난을 도왔고, 14454년 수춘군(壽春君)과 익현군(翼峴君)에게 들은 일로 영천위 윤사로와 함께 금성대군을 탄핵하였고 같은 해 파평위(坡平尉) 윤암(尹巖)과 함께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 등을 공격하기도 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수충위사동좌익공신(輸忠衛社同德佐翼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세조의 측근에서 서무의 출납을 맡아 신임을 얻었다. 남을 대접함이 겸손하여 권세를 부리지 않았으나, 주색에 빠져 1464년 4월부터 병석에 누웠다가 8월16일 작고하였다. 자는 현지(顯之), 시호는 충소(忠昭)이다.
《 義昌君 玒 (의창군 공 1428~1460)胎封室》
의창군 공 (義昌君 玒)은 세종10년(1428년) 아버지 세종대왕과 어머니 신빈 청주김씨(愼嬪 淸州金氏)의 아들로 세종대왕의 열 번째 아들이자 세 번째 庶子이며 신빈 김씨의 둘째다. 세조2년(1456년)단종 복의운동에 연루되어 지리산으로 피신 운둔생활 중 극심한 고초로 병을 얻어 세조6년(1460년) 귀경하여 어머니 신빈 김씨의 지극한 노력으로 큰 화를 면하였으나 그해 10월2일 33세로 별세하였다. 장례도 왕자의 예우로 치렀다. 시호는 剛悼이다. 덕원군부인德源郡夫人(1429~1482)에서 고종8년(1872년)에 양원군부인梁源郡夫人으로 개봉된 정부인 사이 아들 사산군(蛇山君)을 두었다.
《 漢南君 ? (한남군 어 1429~1459)胎封室》
비석은 흔적도 없고 태봉은 몸돌(中童石)과 덮개석(蓋簷石)은 오간데 없이 仰蓮이 돋을새김 되어 있는 기단석(基壇石)만 남아 있다.
한남군 어 (漢南君 ?)은 세종11년(1429년) 아버지 세종대왕과 어머니 혜빈 청주양씨(惠嬪 淸州 陽氏)의 아들로 세종대왕의 11번째 아들이자 넷째 庶子이며 혜빈 양씨의 첫째이고 자는 군옥(群玉)이다. 부인(婦人) 양원군부인 안동 권씨(梁源郡夫人 安東權氏 )는 예빈녹사(禮賓錄事) 권격(權格)의 딸이다. 세종23년(1441년) 세종이 왕비와 더불어 온수현(溫水縣) 가마곡(加麽谷)에 행차하였을 때 임영대군(臨瀛大君)과 함께 궁궐의 수비를 관장하였으며, 이듬해(1442년) 7월3일 한남군에 봉하여졌다.
문종 원년(1450년) 개성부(開城府)의 상인 건직(乾直)의 가산을 탈취하였다는 명목으로 종부시(宗簿寺)로부터 송사(訟事)를 당하였으나 결국 무고임이 밝혀졌다. 이것은 그가 건직이 살아 있을 때 건직에게 재화를 주어 식리(殖利)를 꾀하려 하였으나, 그가 갑자기 죽음으로 인하여 그 책임을 물어 재산을 취하여온 것인데 건직의 아내 고온(古溫)이 중추원사(中樞院使) 이승손(李承孫)의 여종(婢)이었던 까닭에 승손의 사주를 받아 종부시에 고한 사건이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금성대군(錦城大君) · 영풍군(永豊君) · 혜빈 양씨와 함께 역모를 꾀하였다는 죄로 윤6월11일에 금산에 유배되었고, 아산(牙山)에 移配되었다가 다시 양지(陽智)로 각각 이배(移配)되었다가 세조 2년(1456년) 음력 6월27일에 함양(咸陽)으로 이배되었다. 그 뒤 세조는 함양 목사(牧使)에게 치서(馳書)하기를, “건장하고 부지런하며 조심성 있는 사람을 골라서 한남군 어(?)의 배소(配所) 네 모퉁이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당자와 잡인(雜人)의 출입을 엄하게 금방(禁防)하되, 힘써 안정(安靜)을 기하여 놀라지 말게 하라." 는 유시를 하기도 하였고,1457년(세조 3) 6월 28일에는 순흥 부사(順興府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도내 함양(咸陽)에 안치(安置)된 한남군 어(?) 금방(禁防)을 허술하게 하면 수령(守令)은 진실로 죄를 받을 것이고, 감사(監司)도 또한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다시 금방을 엄하게 더하라."하였다. 그 뒤 모든 전토(田土)와 노비를 몰수당하고 세조 5년(1459년)에 배소(配所)인 함양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영조 때에 이르러 원통함을 풀고 복권되었다. 시호는 정도(貞悼)이다.
《 密城君 琛 (밀성군 침 1430~1479)胎封室》
밀성군 침 (密城君 琛 )은 세종12년(1430년) 아버지 세종대왕과 어머니 신빈 청주김씨(愼嬪(淸州)金氏)의 아들로 세종대왕의 12번째 아들이자 다섯째 庶子이며 신빈 김씨의 셋째이고 자는 문지(文之)이다. 총명과 지혜가 뛰어나 다른 아들들보다 부왕의 남다른 사랑을 받았다.
(1442년)7세에 밀성군에 봉하여졌다. 1444년 민승서(閔承序)의 딸과 혼인하였다. 1452년 밀성군이 병이 들자 이복형인 문종이 안평대군에게 명하여 승려들을 모아 흥천사에서 기도하게 하자 밀성군의 병이 나았다. 이에 문종은 크게 기뻐하며 밀성군의 처형 두 사람에게 관작을 내리게 하였으며, 내의 전순의(全循義)에게도 안장을 얻은 말을 하사하였다. 형제간의 우애가 있어 문종.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세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우애도 남달리 돈독하였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큰일들은 반드시 그의 자문을 받았다. 세조13년(1467년) 오위도총관, 각 시(寺)의 도제조, 의금부도위관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468년(예종 즉위년)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사신(史臣)은 밀성군의 인품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史臣이 논평하기를, “이침(李琛)은 현명하고 분명하여 일을 처리하는 재간이 있어, 세조(世祖)가 재능과 덕량이 있다고 여겼다. 모든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명하여 종실(宗室) 속에 임하게 하여 가장 위임(委任)을 받았으며, 치산(治産)하는 데 부지런하여 가산(家産)이 아주 부유하였다.” 하였다. 시호는 장효(章孝)이며, 뒤에 효희(孝僖)로 개시되었다.
《 壽春君 玹 (수춘군 현 1431~1455)胎封室》
수춘군 현 (壽春君 玹)은 세종13년(1431년) 아버지 세종대왕과 어머니 혜빈 청주양씨(惠嬪(淸州)陽氏)의 아들로 1431년 8월 20일(음력 7월 13일)에 태어났다. 세종대왕의 13번째 아들이자 6째 庶子이며 혜빈 양씨의 둘째이고 시호는 안도(安悼)이다. 정부인으로는 영천군부인영일 정씨(榮川郡夫人 迎日鄭氏)가 있다. 1437년(세종 19) 12월 8일 수춘군(壽春君)으로 봉해졌으며 1443년 세종이 소헌왕후와 더불어 온양온천으로 거동하게 되었을 때 세종은 광평대군 여(璵)와 수춘군 현(玹)에게 궁을 지키게 하였다. 1455년(단종 3) 6월 19일(음력 6월 5일) 사망하였다. 수춘군의 군부인 영일 정씨는 단종의 비 정순왕후와 함께 '정업원'이란 승방을 차리고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단종대왕과 수춘군의 명복을 빌며 일생을 보냈다. 세종23년(1414년 )혜빈 양씨는 문종妃 현덕왕후가 단종을 낳고 3일만에 임종하자 세종대왕은 혜빈 양씨를 택하여 어린 세손(홍위 단종)을 보살피게 하니 정성을 다하여 세손 홍위를 보살폈고 이러한 지극정성은 단종의 성덕(聖德)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단종3년(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옥쇄를 거두려고 하자 혜빈 양씨는 "옥쇄는 국왕의 重寶이다. 선왕의 유훈에 '세자와 세손이 아니고는 전할 바가 아니라고 했기에' 내 비록 죽더라도 내놓지 못하리라." 하였다. 후궁은 왕이 돌아가면 궁을 나와야 했지만 혜빈 양씨는 어린 단종을 보육하였기 때문에 세종의 사후에도 궐내에서 생활하였다. 단종의 선위로 인해 수양대군이 보위에 오르자 혜빈 양씨는 가산이 적몰되고 청풍으로 유배되었다. 1455년11월9일 대신들의 여러 차례에 걸친 상소로에 따라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혜빈 양씨의 3남인 영풍군 천(永豊君 瑔)은 雲劍을 갖고 입시 하다 동시에 죽음을 당했다. 1남인 한남군 어(?)는 경상도 함양에 유배되었다가 병사했다. 묘는 경기도 고양에 어머니 혜빈 청주양씨(惠嬪(淸州)陽氏) 사당과 함께 있다.
《 翼峴君 璉 (익현군 련 1431~1463)胎封室》
익현군 련(翼峴君 璉)은 세종대왕의 14왕자로 일곱 번째 서자이며 어머니 愼嬪(淸州)金氏의 넷째 아들이다. 자는 광지(光之)이다. 세종19년(1437년) 익현군에 봉하여졌다. 정부인으로는 김제군부인 평양 조씨(金堤郡夫人 平壤趙氏)로 소윤(少尹) 조철산(趙鐵山)의 딸이다. 윗사람의 뜻을 잘 맞추어 수양대군(首陽大君)의 계유정난을 도왔고,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에 책정되었다. 형 계양군(桂陽君) 증(璔)과 더불어 간사한 사람들과 어울려 술꾼이 되어 밤에는 여염집에서 창기(娼妓)를 불러 술을 자주 마시다가 술병을 얻어 운명했다.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 永豊君 瑔 (영풍군 전 1434~1457)胎封室》
영풍군 전 (永豊君 瑔)은 세종16년(1434년) 아버지 세종대왕과 어머니 혜빈 청주양씨(惠嬪 淸州 陽氏)의 아들로 세종대왕의 16번째 아들이자 여덟째 庶子이며 단종을 양육한 혜빈 양씨의 셋째이고 한남군(漢南君) 어(?)와 수춘군(壽春君) 현(玹)의 동생이다. 부인은 형조참판 박팽년(朴彭年)의 딸 郡夫人 順川朴氏이다. 세종23년(1441년)1월11일 영풍군에 봉군되고, 1453년(단종 1) 10월의 계유정변 이래로 정치·군사권을 장악하고 궁극적으로는 왕위에 오르려는 수양대군(首陽大君 : 世祖)과 대립하여 단종과 그 왕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던 혜빈 양씨 · 금성대군 유(錦城大君 瑜) 등이 제거될 때 이와 관련되어 세조의 즉위(1455년)와 함께 예안에 유배되었다가 곧 안성에 이배되었다. 1456년 성삼문(成三問) 등에 의한 단종복위 사건을 계기로 가산과 고신(告身 : 관원의 임명 사령장)을 몰수당하고 임실에 안치되었으며, 1457년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 등의 단종복위 기도가 탄로되면서 죄가 더하여져 청풍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살해되었다. 1712년(숙종 38) 단종의 복위와 함께 관작이 복구되면서 신원(伸寃)되었고, 영조19년(1743년) 정렬(貞烈)의 시호를 추증 받았으며, 정조15년(1791년) 호남유생의 상소를 계기로 단종묘정에 배향 되었다. 묘는 경기도 고양에 있다.
《 寧海君 璋 (영해군 장 1435~1477)胎封室》
영해군 장(寧海君 璋)은 세종17년(1435년) 아버지 세종대왕의 17번째왕자로 아홉 번째 서자이며 어머니 愼嬪(淸州)金氏의 다섯째 아들이다. 처음 이름은 장(璋)이며, 뒤에 당(瑭)으로 바꾸었다. 부인은 임천군부인 평산 신씨(林川郡夫人 平山申氏)이다. 1442년(세종 24) 영해군으로 피봉(被封)되고 화목한 것을 좋아하여 다투는 일이 없었다 한다. 시호는 안도(安悼)이다.
《 潭陽君 渠 (담양군 거 1439~1450)胎封室》
담양군 거(潭陽君 渠)는 세종21년(1439년) 아버지 세종대왕의 18번째왕자로 열 번째 서자이며 어머니 愼嬪(淸州)金氏의 여섯째 아들이다.
12세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王子 塘 ( 당 1442~ ? )胎封室》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전주이씨대동종약원(全州李氏大同宗約院) 족보 어디에도 王子 塘에 대한 기록이 없다. 胎碑에는 1442년 12월23일 태를 안치한 것으로 새겨져 있으니 세종대왕의 원손인 弘暐(단종)의 태봉일(1441년11월26)보다 1년 후에 태어나고 그 해에 태봉을 설치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세종 때는 물론 어디에도 왕자 당(王子 塘)에 대한 기록은 없다. 오로지 태봉과 비석만 그 오랜 세월을 묵묵히 침묵하고 있을 뿐...
조선 왕실에서는 태를 소중히 여겨 좋은 吉地에 태를 묻었다. 왕실의 근원을 곤고히 하여 대대손손 번성하고 發福에 대한 念願이었으리라. 그러나 세종임금의 그런 바람은 한바탕 피바람으로 휩쓸고 간 후 권세도 영화도 한점 흘러간 구름이던가 지금은 송림에 묻혀 고요한 적막만 태봉에 감돌고 있네. 나는 모두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떠난 이는 말이 없나니...
2015년 11월4일 慶北 星州에서 <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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