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사사적비는 경복궁 내 박물관 시절, 접했던 문화재였는데 마침 제천시산악연맹에서 무장산산행 공지가 있어 무장사지를 답사 겸 즐거운 마음으로 신청을 하여 다녀 올 수가 있었다. 무장사지는 계곡에서 100여m 떨어진 완만한 지대에 자리하고 있는데, 사찰의 규모는 그리 큰 절이 아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23대 고종(高宗 재위 1213~1259) 때 1231년부터 30년간에 걸친 몽고의 침입으로 대구 부인사에 보관된 대장경판이 소실되고, 1235년 경주 황룡사 9층목탑이 소실되는 등 문화재에 큰 손실을 입었을 때 무장사도 소실되고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며 나딩굴고 있던 3층 석탑과 복원된 사적비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䥐藏山 䥐藏寺는 투구(鐵帽)를 감춘 즉 묻은 산이라는 예사롭지 않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세간에 떠도는 말에 의하면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 (재위 654-661)이 삼국을 통일 한 뒤 병기와 투구를 골짜기에 묻었기 때문에 무장사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는"제38대 원성왕(元聖王 金敬信 재위 785-798)의 부친께서 뭄무왕을 추모하여 투구와 병기를 묻은 자리에 무장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는 무열왕과 그 뒤를 이은 문무왕 시대까지 삼국과 왜倭 그리고 당나라까지 가세했던 큰 전쟁이 두 번 다시 없기를 바라던 임금들의 간절한 바람이 서린 곳이겠다. 무장사지로 가는 길은 그리 짧다할 수 없는 거리이다.(무릎이 아파서 그리 느꼈는지..) 길은 잘 가꾸어진 길게에 벚나무가 무성하다 계곡의 물빛 산빛이 아름다운 자리에는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7시에 제천을 출발하여 도착한 국립공원 경주 암곡공원지킴터에 도착, 시각은 10시40여분,
무장사지로 가는 길가의 풍경은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벼들과 아직은 푸름을 잃지 않은 나무로 덮인 검푸른 산 능선위 위 티 없이 파란하늘에는 흰 구름 한 조각만 여유롭게 유영하는 상큼한 풍경이 전개되어 있었다.
우리가 늘상 보고 먹는 흔한 배추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단다. 그 푸른 싱싱함이 내게 더욱 싱그럽게 생동감을 불어 넣고 있다. 파란하늘의 허허로운 공간은 조선의 鄭敾이 수려한 필치로 구름 석 점을 찍어 한껏 운치 있게 하였나니..
두 갈래 길에 서서 번갈아 쳐다보니 모든 사람들 아랫길로 만 가는데 나도 저들을 따라 가야 하는데, 눈길 따라 마음은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윗길에 머물고 발길은 머뭇거린다. 길 끝 아스라이 보이는 마을에 집들이 왠지 포근하고 훈훈한 정 폴폴 내게 줄 것만 같아서...
선선한 가을바람에 갈잎이 서걱대며 손 흔들고 있다. 흘러가는 구름을 배웅하고 있나보다.
무장산 들머리를 들어선다, 몰려오고가는 사람들을 넉넉한 품으로 맞아주는 자연은 자식을 보듬는 어미와 같다.
여기서부터 나의 발걸음은 고난의 시간을 밟고 간다.
길은 두 갈래지만 이리가나 저리가나 얼마 못가서 하나로 겹친다.
두 길은 이렇게 겹친다.
이틀 전 나 홀로 설악산 백담사 봉정암 코스 21km 산행을 막차 버스시간에 쫓겨 쉼 없는 무리한 산행으로 무릎이 아프더니 오늘 산행에 더 견딜 수 없이 통증이 온다.
무릎이 온전하지도 않은데 이 산행을 쫓아온 것은 국립중앙박물관 재직시절 소장되어 있던
아미타불조상사적비가 있던 곳인
무장사지를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경주 무장사지 삼층석탑/慶州鍪藏寺址 三層石塔》보물126호.
寶物 第126號인 이 삼층 석탑이 있는 옛 절터는 암곡동 깊은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발견된 "무장사 아미타불 조상 사적비(鍪藏寺 阿彌陀佛造像事蹟碑)에 의해 무장사터임을 알게 되었다. 二重 基壇 위에 三層의 몸돌을 올려고 1층 기단에는 모서리기둥과 2개의 안기둥을 조각하였고 덮개돌(屋蓋石)을 올렸다. 2층 기단은 8개의 돌로 짜 맞춘 다음 각 면에 2개씩의 원형에 가까운 창 모양의 안상(眼象)을 조각하여 모서리기둥과 안기둥에 새겨 넣었다. 1층 몸돌은 1개의 돌로 만들어 모서리기둥을 조각하였다.
1층 지붕돌 역시 1개의 돌로 만들었으며, 지붕돌 아랫면 받침은 5단이다. 2층과 3층도 1층과 같이 몸돌과 지분돌을 각각 1개의 돌로 만들고 5단의 받침을 나타내었다. 무너진 채 깨어져 있던 것을 1963년에 일부 부재를 보충하여 다시 세웠다. 제작연대는 그 형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9세기 이후에 것으로 보이며 높이 4.95m이다.
신라 천년의 찬란한 영화를 누렸을 고찰은 흔적만 명분으로 남았으니 부귀영화 명예가 파란하늘에 떠가는 구름의 덧없음과 무엇이 다른가..
《경주 무장사지 아미타불조상 사적비/慶州 鍪藏寺址 阿彌陀佛造像事蹟碑》
통일신라 때 세워진 寶物 第125號로 지정된 무장사지 아미타불조상사적비는 없고 비를 바쳤던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비몸 위에 올려 얹었던 용(이무기) 모양을 새긴 비의 머리만이 남아 있었으나, 1914년 이 주변에서 비석의 조각이 발견되어 절 이름이 무장사였던 것을 알게 되었다. 무장사라는 이름은 신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병기와 투구를 묻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三國遺事에 전한다.
무장사비 귀부(龜趺)의 머리는 용 모양이며 두 마리의 거북이의 등의 비를 받치던 직사각형의 4면에는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둘려 조각한 것이 특이하다. 비의 머리에는 "아미타불□□"이라는 글자가 두 줄로 새겨져 있다. 비문(碑問)은 마모가 심하여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신라 소성왕(昭聖王)의 왕비인 계화부인(桂花夫人)이 소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미타불상을 만들어 무장사에 모신 내력을 새긴 것이다. 비의 조각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2011년에 비신碑身을 복원하여 다시 세웠다.
살으리 살으리 나홀로 살으리 자연과 어우러져 구름처럼 살으리 두둥실 떠다니다 몸 무거워지면 목마른 땅에 몸 덜어 내리고 영마루에 숨 한번 돌리며 머물지 않고 흘러가며 살으리..
이 장엄하고 경이로운 자연 앞에 누구라고 고개를 들고 오만할 수 있는가! 잡초 한 포기 풀잎하나에도 함부로 대하지 말자.
어디선가, '나도 있어요!' 외침 있기에 놀라 바라본 곳,
억새무리에 보리수가 묻혀있어요. 올망졸망 한 모습에 외침이 수줍었나봐 발갛게 물들었네.
누가 길을 묻거든 무장봉으로 가라 하세요. 수많은 억새들이 손 흔들어 반긴다오.
남기는 것은 발자국, 가져가는 것은 추억.
산행 내내 참을 수없는 무릎의 고통을 덜어 주시던 고운 심성의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그 배려와 성심 그대로 福이 되시어 더욱 건강하시고 좋은 일만 계시리라 믿고 기원합니다. 진심을 다해 고마움을 드립니다. ♧
저 넉넉한 품속으로 안기는 이들이여, 그 아늑함을 사랑하여 서로를 그리 품어 안으시라.
어느 분이 가장 잘 나고 멋지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당신이 그런 분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것은 오로지 당신의 생각일 뿐입니다.
여기에 계신 자매님 또한 장미꽃이요, 수련이요, 백합 같을 진데 어느 한 꽃이 더 고울 수는 없다.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마는 편지..
알록달록 예쁜 추억이 아롱아롱 행복으로 서립니다.
넘 멋짓 두 분, 나는 언제 이리 멋질 수 있을까..
지팡이를 다 짚고.. 그러나 고통이 있기에 환희를 느낄 수 있지 않은가..
긍정과 배려와 자비는 스스로를 헤일 수 없는 기쁨과 열락으로 추락시킨다.
다섯 羅漢 중 두 눈을 감고 무상무념으로 우주의 공기와 융합되어 무아지경이신 분이 있습니다.
고장 난 내 다리, 2.5km가 천리처럼 아득하네.
이렇게 좋은 날에 이렇게 즐거움과 기쁨을 안겨주신 제천산악연맹의 강석주님과 이끌어 주신 대장님들 또한 함께 하신 형제자매님들께 고마움을 드립니다. 늘 福되십시오.
2015년10월11일 <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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