鄕校는 公子의 儒敎를 바탕으로 한 교육기관이다. 그러므로 향교에는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를 위시하여 儒學에 지대한 공헌을 한 현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大成殿)이 존재한다. 鄕校향교는 고려 태조 13년(930년) 평양에 향교를 설치하여 6부생을 가르치고 文廟를 세워 유학의 성현들의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이 시초가 된다. 따라서 공자의 사상과 성현들의 학식을 배우는 교육기관으로 성균관과 더불어 각 지방에서 우리나라 전통시대의 교육을 맡아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배출한 국공립성교육기관으로 일명 校宮교궁, 재궁齋宮이라 하였다. 향교의 본격적인 발달과 체제의 완비는 조선조 개국 초기에 와서 이루어졌다. 이에 영향을 끼친 것은 고려 말에 수입되어 조선왕조의 개국이념으로 자리 잡게 된 성리학이다. 향교는 각 고을마다 1개소의 향교가 세워지니 모두 360개소가 되었다. 현재 남한 내에만 234개소의 향교가 남아 있으며 유학진흥과 지역사회 교화의 본산으로서 본연의 역할을 수행해 나가고 있다.
<제천향교연혁>
조선조 초기 문신 陽村 權近이 지은 堤州鄕校 記에 의하면 본 제천향교는 고려 공양왕(恭讓王1389년 己巳年)에 당시 堤州監務였던 金君綏由가 堤州郡의 옛 治所인 白雲面 花塘里에 창건되었다. 이 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초기 제천縣의 治所가 鳳陽面으로 옮기었다가 다시 堤川邑 縣右面으로 옮기게 됨에 따라 향교도 봉양면 봉양리, 長坪리 등에 일시 位置하였다가 堤川의 馬山 서쪽(靑田洞)으로 다시 옮기게 되었으며 그후 朝鮮 宣祖 23년(1590 庚寅年) 지금只今의 향교가 위치한 마산의 남쪽 校洞으로 移轉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향교는 朝鮮朝의 새 政治 理念인 儒敎를 새 社會 秩序의 根幹으로 삼아 정치구조를 조직화하려는 改革의 契機였다. 그러므로 基層社會의 유교이념을 浸透시키려는 정치 意志具顯의 根幹이 鄕校이다. 國家의 公共 교육기관으로서의 향교의 役割이 국력의 衰退와 정치의 방향 상실과 조선조 말의 혼란기에 들어서면서 향교의 운영 體制가 儒林으로 選出된 都有司가 있었고 그 밑에 장의掌議가 있어서 향교의 諸般事項을 管掌運營하면서 校屬을 두었다가 高宗 甲午更張 後로 교속제校屬制가 없어졌다. 그리고 校生과 校僕數人을 두었다가 純宗 戊辰年에 經學院制가 發效되면서 都有司도 廢址하고 유림의 추천을 받아 郡守가 發令한 직원直員이 향교 재산을 관장훈영하고 각 面의 유림들이 선출한 장의가 一切의 향교의 업무를 운영관리 하였다. 이와 같은 사회의 변화와 함께 격변激變하는 국내 정세가 鄕校史와 不可分의 관계를 갖고 있다는데 있다. 조선조 말 연이은 洋擾와 국제정세가 倭國으로 하여금 開港을 무리하게 요구하게 이르자 친일 관료의 등장으로 왜국은 노골적으로 조선침략의 야욕을 行動化하기 시작하였다. 國母를 弑害하고 斷髮令과 服制變改가 강압적으로 領布되니 국민은 통곡했다. 국권을 확립해야 역사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다는 자각의식을 外勢(外來文化)는 자국력으로 消化할 수 있을 때만이 수용이 가능하다는 현실론이 衛正斥邪의 旗幟를 높이 들게 했고 이 사상의 중심지가 제천이어서 전국의 義血士類들이 雲集하여 倡義를 조선팔도(八域)에 선언한 乙未義兵의 首倡之地가 되었다. 왜구는 융희 원년(隆熙 元年 丁未 1907) 7월12일 의병말살작전의 단행은 惡魔的인 殺傷과 제천시내전역에 放火하여 家屋을 1棟도 남김 없는 灰塵위에 버려진 民生이 生不如死로 苦難이 極에 達했다. 이 때에 향교도 燒盡되었는데 校生 金義卿이 화염속으로 뛰어들어 大聖 및 群賢의 位牌를 모시고 나와 頭鶴里 博約齊에 奉安하였다.
<교생 김의경 지비/ 校生金義卿之碑>과 <효자유생 최일경지비/孝子儒生崔一京之碑>
이 두 비석은 묘비가 아닌 기념비 성격의 비석이다. 향교 풍화루 좌측 담장 옆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校生 金義卿 之碑> 향교 연혁에 의하면 김의경은 1907년 일본군에 의해 불타는 대성전에 뛰어들어 大聖 및 群賢의 位牌를 모시고 나와 頭鶴里 博約齊에 奉安하였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하여 향교에서 세워 준 것으로 생각되며 비석은 풍화루 우측에 세워져 있다.
<효자유생 최일경지비/孝子儒生崔一京之碑>
비석 뒷면에 이 비를 세우게 된 까닭이 있지만, 풍화로 알아볼 수 없어 그 내력을 추측하건대 이 비석은 제천향교의 유생으로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남달라 이 비를 제천향교에서 세워 기념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 후 1922 壬戌年에 只今의 址에 重建하고 奉安 하였다. 왜구는 이사이 본격적인 搾取착취에 혈안이 되어 조선민족의 正體破壞정체파괴를 위하여 鄕校機能향교기능을 痲痺마비시켜 봄가을에 文廟문묘 祭享제향만을 지내게 하고 皇國植民敎育황국신민교육을 劃策획책하였다. 하지만 제천향교에서는 抗日항일을 위한 국가 항쟁의식인 衛正斥邪위정척사의 義烈精神의열정신을 繼承계승시키고자 6년제의 明倫學校를 개설하고 1939년 봄부터 開講개강하여 光復이 될 때까지 이어져 오다가 開講當年개강당년 일제 강압에 의해서 명륜학교에서 제천사설학술강습소로 개명되어 운영되었으며 학업을 이수해도 사회의 인정을 받지도 못했고 받으려고 생각지도 못했다. 당시 명륜학교 위치는 풍화루 옛 자리 밑으로 현재의 명륜회관 밑에 一字形 校舍에 7개 교실에 남여 합반에 6학년까지있었다. 敎師는 7명이 있었는데 강습소장은 京城師範을 졸업한 鄭洛鉉씨, 朴啓勳, 鄭文陽, 鄭龍澤, 許壽亨씨는 남선생, 그리고 여교사 金德實가 있었다. 현재 모두 作故하고 몇 분의 후손은 현재 제천에 거주하고 있다. 堤川私設學術講習所는 1945년 3월까지 존속하면서 六回 졸업생을 배출하고 7회는 새로 설립된 의림초등학교 1회 졸업생이되고 이하 학년은 의림초등학교에 편입되었다. 제천사설학술강습소장 정락현씨는 의림초등학교 교장으로 자진취임했을 뿐만 아니라 週當 5시간 학생들을 望을 세워가며 朝鮮史를 열강할 때마다 鄭교장은 울면서 강의했고 학생은 울면서 강의를 들었다고 望八의 弟子들은 回想에 잠기어 證言하고 있다. 1947년 丁亥年에 종래의 鄕校直員이 典校制로 바뀌고 향교재단을 구성하면서 성균관 산하로 편입, 1950년 庚寅年 動亂에 典校 申星均과 校生 鄭汝直이 別室에 위패를 봉안하여 지켰고, 1951년 辛卯年 1.4후퇴 때 儒生 金魯馹, 校生 金昌鎭이 諸聖 位牌를 自家에 봉안하였다가 收復 후 대성전을 수리하고 위패를 모시었다. 1984년12월31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5호로 지정되고, 2001년 4월20일 李喆源 典校를 중심으로 유림총회를 거쳐 명륜회관 건립을 위한 회관건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國費 5억원, 道市費 5억원을 지원받고 자체경비 2억5천만원을 捻出하여 合 12억5천만원의 건축기금으로 현 향교부지 제천시 교동87번지 대지에 310평의 철근 콘크리트 造로 전통과 현대를아우른 절충식 회관을 2003년 9월28일기공하여 2004년 9월3일 준공, 2008년 4월15일 성균관 시범향교로 選定되었다. 2012년 風化樓를 복원하였다.
제천향교는 고려 공양왕 1년(1389년)에 제천 마산의 서쪽에 처음 지었다. 그 후 조선조 선조 23년(1590년)에 지금의 자리에 옮겼다. 순종 1년(1907년)의병장 이강년이 왜군과 싸울 때 대성전이 불타자 위패를 '박약재'로 옮겼다. 1922년에 대성전과 명륜당을 복원하고 1980~81년에 동재, 서재를 복원하였다. 2012년 풍화루를 복원하였다. 풍화루 앞 좀 떨어져 홍살문이 있다.
재천향교의 건물의 배치는 前學後廟전학후묘로 앞에는 유학 교육을 위한 강당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거처인 동재와 서재가 있으며, 중간에 內三門내삼문을 두어 구분하고 그 뒤에 文宣王문선왕 公子공자의 位牌위패를 모신 文廟문묘 大成殿대성전이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여러 聖賢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봄, 가을로 제향을 받들고 있다. 그러나 갑오개혁으로 인한 근대 교육제도 개편에 따라 점차 교육기능은 폐지되고 문묘文廟의 제향 행사만이 유지되어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다. <제천향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5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풍화루는 2층으로 1층은 3개의 대문으로 이루어졌으며, 2층은 누각으로 지었다. 풍화루의 문을 들어서면 돌계단이 있고 그 계단을 올라서면 향교이다. 정면에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명륜당 앞뜰 좌우로 동쪽에 東齋 서측에 西齋라는 건물이 있는데 이는 儒學生의 거처이다.
校生 金義卿 碑와 孝子儒學崔一京之碑.
서측 안으로 본 풍화루의 모습이다.
風化樓풍화루의 안쪽 모습이다. 사찰에 비유한다면 사천왕전을 지나 대웅전 앞에 세워져 있는 門樓문루와 같은 방식이 아닌가 싶다.
풍화루 복원기이다. 풍화루 안 동편에 편액되어 있다.
정문인 풍화루와 유생들이 글을 배우는 명륜당 사이 마당과 좌우로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위치해 있는 전경.
明倫堂명륜당 東側동측에 위치란 東齋동재
東齋동재는 儒生유생들이 거처하는 生活館생활관이다. 지금의 學校학교 寄宿舍기숙사와 같은 곳이다.
明倫堂명륜당 西側서측에 위치한 西齋서재의 全景전경
西齋서재도 東齋동재와 같이 儒生유생들의 처소로 生活館생활관이다. 지금의 學校寄宿舍학교기숙사와 같은 곳이다.
風化樓 三門풍화루삼문으로 오르는 길(돌계단)과 풍화루의 문, 明倫堂명륜당에 오르는 길(돌계단)과 명륜당건물 뒤 벽에 문이 셋이 있으며 대성전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3개, 명륜당과 대성전을 구분한 담에도 문이 3개가 있다. 따라서 홍살문을 들어서 풍화루에서부터 대성전에 이르기까지 모든 통로와 문은 3개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文宣王 公子 및 賢子들의 神位를 모신 대성전에 祭祀를 올리는 禮의 法道로 祭官제관과 從事者종사자의 길이 구분지어져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경복궁 근정전 앞에 길이 3개로 구분되어 君臣간의 길을 구분 지은 것이나. 王陵왕릉에서 神道신도와 王道왕도, 臣道신도로 구분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제천향교 옆 뜰의 모습.
제천향교의 서쪽 담장. 담장 끝 좌측에 충천북도 기념물 제158호. 수령 약 300년으로 추정되는 음나무가 보인다.
대성전 서측 담장 뒤에서 내려다 본 제천향교 내 건물이 가까운 순서로 대성전, 명륜당, 풍화루가 일직선으로 배열되어있다.
<제천 교동 음나무/堤川 校洞 '刺桐' >충천북도 기념물 제158호.
제천향교 뒤에 있는 이 음나무는 수령 약 300년으로 추정되며, 나무 높이18m, 가슴 높이의 나무 둘레는 5.2m, 밑둥 둘레는 8.4m이다. 현재 충천북도 기념물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음나무(일명 엄나무)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중국, 만주 등지에 분포하며 우리나라에는 청원군 공북리 음나무 등 3개소의 음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받고 있다.
(나무 윗쪽에서 본 모습으로 마치 허리를 비틀고 있는 여인의 둔부를 연상시킨다. )
두릅나뭇과에 속한 낙엽 교목으로 최고 25m에 이르며 가지에는 가시가 많다. 잎은 어긋나고 여러 갈래로 갈라지며 잎의 가장자리에는 작은 톱니가 있다. 꽃은 황록색이며 7~8월에 산형 꽃차례로 무리 지어 핀다. 10월경에 검은색의 열매가 익으며, 어린 잎은 나물로 먹는다. 목재는 다루기 쉽고 큰 널판을 얻을 수 있어 합판이나 가구, 악기를 만드는 재료로 쓰인다.
( 나무 아래에서 본 모습은 여인이 춤을 추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대성전 동측 담장 밖에서 드려다 본 제천향교.
문선왕 공자의 위패와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의 모습.
본래 대성전에는 孔子, 顔子, 曾子, 子思子, 孟子 오성위(五聖位)와 송조이현(宋朝二賢) 및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문선왕(文宣王)은 중국 당나라 현종이 孔子에게 내린 시호(諡號)를 이른다. 우리나라의 18현위는 다음과 같다.
《東從位》
<宋朝二賢>
道國公도국공 周敦頤주돈이(濂溪염계) / 洛國公낙국공 程 頤정 이(伊川) * 정 호의 아우
<東國 9현>
弘儒侯홍유후 薛聰설총(氷月堂빙월당 慶州人) / 文成公문성공 安裕(珦)안유(晦軒회헌 順興人) / 文敬公문경공 金宏弼김굉필(寒喧堂한훤당 瑞興人) / 文正公문정공 趙光祖조광조(靜菴정암 漢陽人) / 文純公문순공 李滉이황(退溪퇴계 眞寶人) / 文成公문성공 李珥이이(栗谷율곡 德水人) / 文元公문원공 金長生김장생(沙溪사계 光山人) / 文敬公문경공 金集김집(愼獨齋신독재 光山人) / 문정공文正公 宋浚吉송준길(同春堂동춘당 恩津人) 이상 9位.
《西從位》
<宋朝二賢>
豫國公예국공 程 顥정 호 (明道명도) / 徽國公 朱熹주희 (晦菴회암)
<東國 9현>
文昌公문창공 崔致遠최치원(孤雲고운 慶州人) / 文忠公문충공 鄭夢周정몽주(圃隱포은 迎日人) / 文獻公문헌공 鄭汝昌정여창(一蠹일두 河東人) / 文元公문원공 李彦迪이언적 (晦齋회재 驪興人) / 文正公문정공 李麟厚이인후(河西하서 蔚山人) / 文簡公문간공 成渾성혼(牛溪우계 昌寧人) / 文烈公문열공 趙憲조헌(重峰중봉 白川人) / 文正公문정공 宋時烈송시열(尤菴우암 恩津人) / 文純公문순공 朴世采박세채(玄石현석 瀋南人) 이상9위
학당인 명륜당과 문묘인 대성전을 구분 지은 담과 內三門.
<내삼문/內三門>
동측 담장 밖에서 본 명륜당과 동재 그리고 풍화루.
풍화루 삼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명륜당이다. 명륜당은 선비(儒生)들이 사서 오경을 공부하고 강독하며 초시준비와 향음주례 및 각종행사를 하던 곳이다.
동측 담장 밖에서 들여다 본 풍화루.
동측에서 본 풍화루
홍살문 밖 골목길가 집들의 벽과 담장에는 민화와 5~6십년대의 풍속들을 그림으로 치장하여 제천시의 명물거리가 되어 찾는 이들의 발길이 심심찮게 이어지고 있다.
<교동민화마을>
교동민화마을 안내게시물이다. 제천향교 맞은 편 골목입구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호랑이가 안내지도를 왼손에 들고 오른 손으로 보라고 가리키고 있습니다.
《 문자도/文字圖 》
문자도는 유교의 도덕관을 대표하는 효(孝)·제(悌) ·충(忠)· 신(信)·예(禮)·의(義)· 염(廉)·치(恥) 여덟 글자를 그림으로 형상화하여,
교육용 또는 사대부 취향의 장식용 그림으로 만들어졌습니다.
文字圖는 대개 8폭 병풍으로 제작됩니다.
먹으로 글자의 윤곽을 그리고 글자의 획속에 각각의 문자와 관련이 있는 고사(故事)나 상징물을 그려 넣어 화면을 구성합니다.
문자그림은 중국에서 시작한 글자의 의미와 관계 있는 상징적 사물이나 故事를 글자의 획 속에 그려넣어 글씨체를 구성한 그림입니다. 유교사상이 통치의 이념으로 중요시 되었던 조선시대의 도덕적 가르침을 담은 글자가 주제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꼭 지켜야할 덕목을 의미하는 여덟 글자 효(孝)·제(悌) ·충(忠)· 신(信)·예(禮)·의(義)· 염(廉)·치(恥)를 그리는 효제문자도가 주종을 이루는 이유입니다.
제(悌)는 부모와 스승을 공경하는 주제를 바탕으로 하여 이에 향응하는 동식물의 그림으로 조합하여 글자의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신(信) 그림에는 신의(信義)가 담긴 편지를 전해 준다는 흰 기러기와 물고기가 짝을 이루어 등장하는 내용을 전제로 합니다.
충(忠) 그림에는 개자추(介子推)와 소무(蘇武) 등 중국 역사상의 충신(忠臣)들의 이야기가 묘사되는 것이 상례입니다. 용, 대나무, 등으로 왕에 대한 신하의 충성과 절개를 강조하는 성격이 담깁니다.
향교에서 바로 들어선 골목길의 풍경입니다. 김흥도의 풍속화 중 '서당"을 벽에 그려 놓은 것도 보입니다.
한 아이가 훈장님 앞에서 울고 있는 장면으로 조선시대 서당의 한 장면을 익살스럽게 표현한 그림입니다.
쪼그리고 돌아앉아 훌쩍이는 학동을 화면의 초점에 두고,
그 주위에 방건方巾을 쓰고 유생의 옷차림을 한 훈장을 축으로 학동들을 둥글게 배치하였습니다.
화면의 구성이나 생략된 배경, 옷주름의 필치, 얼굴 모습 등 모두가 현장감 넘치는 분위기를 줍니다.
어쩌다 서러움이 북받쳤을까!
학동의 표정도 재미있지만, 주변 인물들의 익살스러운 모습에도 정감이 넘쳐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미소를 머금게 합니다.
동심을 꿈꿀 수 있는 소담스런 골목입니다. 한쪽 담벼락에 나목과 나비(蝴蝶) 그림으로 간결하게 골목길을 채웠습니다.
《 편액이 있는 길》
日月五峰圖일월오봉도는 해, 달 소나무와 다섯 봉우리를 청록 산수화풍으로 그린 그림으로 임금이 앉는 龍床용상이나 御眞어진 뒤에 그려놓은 그림입니다.
여러 사람이 각자 또는 합작으로 일월오봉도를 비롯하여 호랑이, 화초 등 민화적 그림을 편액 식으로 축대에 설치해 놓았습니다.
바퀴가 돌아가는 자동차바람개비입니다. 색깔의 조합이 아름답습니다.
부엉이 바람개비도 이채롭습니다. 오곡이 익어가는 논밭에 긴 장대에 달아 놓을 용도로 만든 것은 아닌지...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한 사람이 어사화를 꽂은 관모에 관복을 입고 풍악대를 앞세우고 있는 모습입니다.
잠시 막걸리 한 잔 하고 오겠습니다.
참새가 방앗간 그냥 못 지나친다고,
막걸리를 마시자 하는데 그것도 젊은 아주머니가 청하니 그냥 갈 수 없잖아요. ㅎ
<모란그림> 모란꽃은 조선시대 왕실에서 가장 사랑받던 꽃입니다.
〈책가도/冊架圖〉
책가도의 그림은 대체로 병풍이나 족자에 그렸습니다. 이 벽화의 책가도에 나오는 도자기는 중국청나라도자기의 그림을 본 뜬 것으로 18~19세기에 등장했던 그림들입니다. 이런 책가도 그림으로는 경기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책가도병/冊架圖屛'이 있습니다.
이렇게 책꽂이(冊架)이와 함께 책, 지필묵, 화병과 같은 장식품들을 그린 그림을 '책가도/冊架圖'라고 합니다.
《학업성취길》
「긍재 김득신의 파적도(兢齋金得臣筆破寂圖)」와 『단원 김흥도의 빨래터 / 檀園金弘道筆風俗畵帖中漂母』가 그려져 있습니다.
"파적도破寂圖"는 고요함을 깼다란 주제의 그림입니다.
'꽃망울이 맺힌 어느 봄날 한낮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골 농가 뜨락에 별안간 소란이 벌어졌습니다.
고양이가 병아리를 채가자 다른 병아리들은 혼비백산하여 숨을 곳을 찾아 필사적으로 달아나고 그래도 어미 닭은 부리를 세워 고양이에게 대들고 주인은 어찌나 급했던지 돗자리를 짜던 기구가 마당에 나동그라지고, 탕건이 벗겨져 땅에 딩굴고, 마루에서 떨어져 몸도 가눌 새 없이 마음만은 급해 담뱃대를 길게 뽑아 고양이를 쫓고 있습니다.
붉은 꽃이 핀 나무조차 고양이를 향하고, 부인은 소리를 지르고 황급히 주인을 잡으려고 달려드는 절박한 순간입니다.
"빨래터漂母" 는 냇가에서 빨래하는 아낙네의 모습과 바위 뒤에서 몰래 훔쳐보는 선비의 모습이 해학적으로 그려져 있는 오원 김흥도의 빨래터를 간략한 필선으로 스케치 되어 있습니다.
닭은 새벽을 열어주는 상서로운 동물입니다.
12지 띠 가운데 유독 두 발에 날개를 가진 것은 닭이 유일합니다. 또한 수많은 날짐승 중에 고상하다는 학(鶴)도 아니요. 용맹스런 수리(鷲)나 매(鷹)도 아니고 제왕(帝王)을 상징하는 봉황도 아닌 닭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금(禽)의 대표 격으로 낮이 저물고 밤이 스며드는 초저녁녘의 중한(幕重) 시각을 지키며, 또한 모든 귀신을 물리치고 새벽을 맞이하는 닭이 之神의 자리에 오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벼슬(官職), 공명(功名), 벽사(酸邪)>등의 의미가 있는 닭, 그 수탉이 서 있는 것은 집안에 길한 운세가 일 년 내내 가득하기를 나타낸다고 하였습니다. 밝음을 예고하는 새로 신조(神鳥)로 생각했으며, 새벽에는 귀신을 쫓는 대길(大吉)의 새로 여겼습니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옛사람들은 새해를 맞을 때 온 집안의 재앙을 물리치기를 기원하며 호랑이, 용, 닭 등의 세화(歲畵)를 대문에 붙였습니다.
이렇듯 닭 그림이 백수의 왕이라 하는 호랑이나 신령스러운 동물인 용과 함께 세화(歲畵)로 채택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새벽을 알리는 닭의 울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날이 밝으면 어둠이 걷히고 어둠 속에서 활동하는 온갖 귀신들이 물러난다. 시계를 사용하지 않았던 옛사람들은 새벽이 밝는다는 것을 닭의 울음소리로 알았고 귀신도 그러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옛사람은 또한 닭이 오덕(五德)을 갖추었다고 여겼습니다. 머리에 관을 썼으니 문(文)이고, 발에 날카로운 발톱이 있으니 무(武)이고, 적을 보면 물러서지 않고 싸우니 용(勇)이고, 먹을 것을 보면 서로 부르니 인(仁)이고, 어김없이 때를 맞춰 우니 신(信)이라 했습니다. 머리의 관(冠)이라 함은 닭의 볏을 은유한 것으로, 관을 썼다는 것은 관직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닭은 벼슬길에 나아감을 기원하는 의미의 그림으로 그려졌으며, 지금까지도 닭의 볏을 닭 벼슬이라 부르는 사투리가 쓰이고 있습니다.
특히 수탉은 웅계(雄鷄)라 하여 영웅을 상징하며 수탉의 울음소리를 공계명(公鷄鳴)이라 하여 부귀공명의 공명(功名 : 공을 세워 이름을 떨침)과 같은 의미로 파악했습니다. 닭과 함께 맨드라미를 그리기도 하는데, 이를 관상가관(冠上加冠 : 관 위에 관을 더함)이라 하여 입신출세의 최고의 경지를 뜻하는 길상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맨드라미 역시 그 모양이 닭의 볏과 같기 때문입니다.
병아리를 돌보는 닭 그림 또한 여러 점 전하는데, 이러한 그림은 닭이 병아리를 돌보듯이 자식들을 잘 키워 출세시키고자 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렇듯 옛날부터 닭은 신성시 되었으며 상서로움의 길상물로 전해오는 동물입니다.
우리나라의 전통혼례의식을 그린 곳입니다. 신부보다 신랑이 더 어려 보이고 귀염성 있어 보입니다. 옛날 동옥저와 고구려에서는 여자의 나이가 10세쯤 되면 남의 민며느리로 주었는데, 이것은 주로 가난 때문이었습니다. 시가(媤家)에서는 민며느리가 성인이 되면 돈과 비단을 지참시켜 일단 친정으로 돌려보내고 나서, 그 뒤 다시 정식으로 부부관계를 맺게 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가난한 양민들 사이에서 간혹 있던 혼인풍속의 일종이었으며, 대체로 신랑 집이 신부 집보다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던 것이 상례였습니다. 또한 잘사는 중인이나 상민 집에서 매파를 통해 몰락한 사대부가의 여식을 며느리로 들이기 위해 성립되었는데 이때 혼수자금으로 선채(先綵) 300냥 내지 100냥 정도를 지불하고 데려오는 수도 있었으나, 이 경우 민며느리라기보다 매매혼(賣買婚)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대체로, 민며느리는 장래의 시가에 와 혼인할 때까지 노역봉사를 하는 것이 상례였으니, 일종의 봉사혼(奉仕婚)의 성격도 띠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일손을 얻기 위해 신랑보다 나이 많은 며느리를 들였습니다. 이를 민며느리라고 부릅니다.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애절한 이야기는 이등령을 박달재로 부르게 된 동기지요.
옛날 영동.영남지방 선비들이 과거보러 한양 가는데 넘는 큰 고개가 5재(嶺)가 있는데,
그 고개가 鳥嶺. 竹嶺. 利花嶺. 秋風嶺. 二嶝嶺(박달재)으로 이를 남한고개라 이릅니다.
조령고개는 제1관문으로 행세하는 사대부집 선비만 다닐 수 있었고, 배경이 좋으니 당연 合格이지요.
그러나 당파에 휩쓸려 관운이 험난하고,
죽령고개는 어려운 선비들이 선호하는 고개로, 어려운 만큼 노력을 했겠지요. 그래서 合格,
퇴계 이황선생도 어머니의 신신당부로 죽령고개를 넘어 급제를 했다지요.
이화령고개는 합격가능성이 반반이고,
추풍령고개는 秋風落葉같이 떨어진다 해서 科客이 꺼리던 고개랍니다.
박달재는 원래 이등령(또는 다릿재)인데 박달이 죽은 후 박달재라 한답니다. 합격은 이등분하여 반반이었던 모양입니다 .
애석하게도 박달도령은 낙방半에 끼었던가 봅니다.
옛 선비들이 과거보러 넘어가던 박달재는
첩첩산중에 구비구비 휘 돌아 구름과 나무와 바람만 벗이 되어주던 곳이었습니다.
지금은 그 정취를 아쉬워하는 후세들의 그리움덩어리만 듬성듬성 부표처럼 서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술래잡기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6,7,8십 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이라면 동네 골목이나 초등학교 쉬는 시간에 교정에서 이 놀이 안 해본 사람 없을 정도로 인기 있는 놀이였지요. 특별한 놀이기구가 없던 시절에 여럿이 더불어 즐기던 놀이 그 시절의 모습들이 고스란히 배어나는 즐거움을 줍니다.
여럿이 편을 갈라 즐기던 말타기는 주로 사내아이들이 겨울이면 볕이 따듯하게 드는 담장이나 학교마당에서 추위를 덜어내던 놀이였지요.
ㅎㅎ 밤사이 오줌으로 요에 지도를 그렸군요. 당연히 키를 머리에 쓰고 옆집에 가서 소금을 얻어와야겠지요. 그런데 옆집에는 같은 반 짝꿍 예쁜 순희가 있으니 어쩌죠. ㅜㅜ
제천은 참 정겨운 곳이지요. 길가에 연탄재가 저의 어린 시절 서울 풍경의 꿈같던 시절의 그리움을 솔솔 풀어주고 있으니까요. 지금 내가 제천에 와서 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무 곳에나 오줌을 누면 강아지가 된답니다.ㅎㅎ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나라 방망이로 두두리면 무엇이 될까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잘 사는 욕심 많은 형과 가난하지만 착한 동생과 고염, 그리고 도깨비 이야기는 많은 어린이의 마음을 더욱 착하게 이끌어 주었지요. 환풍기가 있는 창이 60년대의 텔레비젼으로 둔갑을 했네요. 기발한 생각입니다.
의리의 사나이 김보성과 섹시한 마릴린 몬로를 봅니다. 그런데 이들은 어떻게 만났을까 ..
「지은순민화연구소 」
교동민화마을은 지은순 민화연구소가 주도적으로 일궈낸 곳이다. 민화에 관심 있는 이들을 위한 강습과 이곳 민화마을의 소문을 듣고 찾은 이들이 호기심으로 직접 그려보고 싶은 의욕을 표출할 수 있게 길가에 칠판도 마련되어 있다. 또한 연구소 안에는 부채, 잔 받침, 패널 등 본인이 가져가고 싶은 물건에 직접 그림을 그려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착안은 서울 경복궁 내 국립민속박물관이 들어서면서부터 삼청동 길 옆 북촌에 여러 장르의 민속적 박물관이 들어섰고 한옥마을과 어우러져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을 연유된 것으로 생각한다. 민화는 대다수가 소망을 담아낸 그림으로 富貴功名, 富貴多男, 無病長壽, 壽福康寧 등으로 매우 다양하며 또한 나쁜 일을 막고자 하는 주술적 바람을 호랑이나 용, 또는 귀면 같은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옛사람들이 그린 이러한 민화 속에서 그들의 꿈과 사랑, 희노애락을 엿볼 수 있겠다. 누구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인 그림을 그리며 그 안에 넣는 메시지 또한 각양각색일 것이고 자기 자신만의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것이 바로 민화지만 그림의 소재와 의미가 도식적으로 자리매김되기도 했던 것이 또한 민화일 것이다.
제천교동민화마을의 산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부채, 잔 받침, 패널, 벽걸이 장식용 등이 전시 되어 있습니다.
각종 문양을 새겨놓은 목판화들이 있습니다.
★우측 족자의 여인 그림은 조선 후기 김홍도와 쌍벽이라 할 수 있는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를 본 떠 그린 것입니다.
"지은순민화연구소"는 어떤 곳인지는 대담할 기회가 없어 자세히 알 수 는 없지만, 동국대 대학원 민화석사이신 지은순 님이 민화를 바탕으로 관심 있는 이들을 위한 강습 및 모임활동을 이끄는 곳이 아닌가 싶습니다.
<까치호랑이>
호랑이 그림은 고대의 암각화나 신화 고분벽화 석조물 흉배 지신 등 여러 방면에서 보았듯이 이미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주로 회화나 도자기에 많이 그려졌는데 대표적인 호랑이 그림으로는 傳 高雲(1495~?)筆<松下猛虎圖>, 傳 沈師正(1703~1769)筆<猛虎圖>, 傳 金良驥(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松下猛虎圖>, 그리고 김홍도가 호랑이를 그리고 姜世晃이 소나무를 그린 합작품의<松下猛虎圖>,를 들 수 있습니다. 이 호랑이 그림 가운데 커다란 호랑이를 중심으로 하고 주위에 소나무 위에 앉아 호랑이를 바라보는 까치 그림을 보게됩니다. 이를 소위 "까치호랑이"라고 부릅니다.
호랑이는 용맹과 민첩성을 지닌 산중의 왕입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민화 속에 자주 영물로서 등장하여 교훈과 지혜를 주고 때로는 산신령으로서 자리잡고 있습니다.
소나무는 우리나라 산야에 그 어느 나무보다도 고르게 분포되어 사시사철 시원하게 푸르름을 안겨주는 대표적인 나무로 지조志操의 상징으로서 자리잡은 영물靈物이기도 합니다.
까치의 경우 우리 산하의 텃새로서 또 민가의 근처에서만 서식합니다. 대비되는 하얗고 까만 두 색조가 참신한 매력을 주고 그 크기도 적지 않아 한눈에 다른 새와 구별됩니다. 그리고 민가의 주변에서만 살고 있어 이 새를 대하기가 남달랐던 것입니다. 이 새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오신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또 파랑색 까치가 중국 서왕모의 심부름꾼이라고 하듯이, 까치는 서낭신의 심부름꾼으로 상정되고 있습니다. 민속학에서 서낭신은 민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주관하는 신神인데, 천지사방 가운데 미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는 까치를 시켜 호랑이에게 신탁神託을 전달, 시행케 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호랑이와 소나무 그리고 까치는 우리 계레의 영물로서 길상吉祥, 장생長生의 존재로서 생각하였으며, 특히 호랑이의 경우에는 그 용맹성으로 인하여 잡귀雜鬼를 물리친다는 벽사辟邪 기능이 강하다고 봅니다. 새해 명절, 섣달 그믐밤 전날에 호랑이虎, 닭酉, 각귀角鬼, 종규鍾馗, 복두를 쓴 官人 등의 그림을 그린 종이를 문, 창 사립문에 붙여 사악한 기운이나 잡귀가 물러나기를 바랍니다.
'까치호랑이' 그림의 경우 호랑이를 용맹스럽기 보다는 그 표정이 해학적이고 우스꽝스럽습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개국신화에서 보듯 호랑이를 친근하게 여긴 우리 민족의 전통적 사고의 발로라고 봅니다. 또한 가장 용맹스럽고 강한 동물인 호랑이를 우둔한 존재 해학과 우화의 주인공 나아가 권선징악勸善懲惡의 화신化身으로까지 부각시켜 나타낸 것이지요. " 담배 피우는 호랑이, 토끼에게 속는 호랑이, 어린 오누이를 잡아먹기 위하여 썩은 동아줄을 타고 오르다가 수수밭에 떨어진 호랑이, 효자의 시묘에 먹을 것을 날라다 주며 함께 긴 밤을 지새워주는 호랑이, 목에 걸린 가시를 빼주자 은혜를 갚는 호랑이 이야기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새상이 열린 이래 사람은 잡귀雜鬼와 질병疾病 그리고 재액災厄 등에 시달렸고 이를 막아내는 어떤 가공할 신비적 주술적인 힘을 추구해 왔습니다. 이들을 막아 낼 수 있는 주술적인 힘은 대개 종합하여 벽사辟邪라고 부릅니다. 이 辟邪에는 흔히 鏡面朱砂 같은 붉은 색을 사용하거나 또는 용맹과 위력 신력을 지닌 동물이 등장하는데 호랑이는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호랑이의 벽사적 기능은 흔히 (힘, 武力, 武官)에 비교 적용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호랑이가 지닌 위용威勇과도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옛날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있었는데 자주 천하(天下)를 넘보아 사람의 세상을 탐내고 있었답니다. 이때 그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아보고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 보니 널리 사람들을 유익하게 해줄만 하였다. 이에 환웅에게 천부인(天符印)세개를 주어 가서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답니다. 환웅은 삼천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에 있는 신단수(神壇樹) 밑으로 내려가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였으니 그가 환웅천왕입니다. 이때 곰 하나와 호랑이 하나가 같은 굴 속에 살며 늘 환웅에게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 달라고 빌었었습니다. 그러나 환웅은 쑥 한줌과 마늘 스무쪽을 주면서 "너희가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소원대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곰과 호랑이는 이것을 받아 먹고 조심하여 이십일 만에 곰은 여자의 몸으로 변했으나 호랑이는 조심을 하지 못해서 사람으로 변할 수 없었답니다. 곰은 여인으로 변하기는 했으나 혼인할 사람이 없으므로 날마다 신단수 밑에서 기원을 드렸습니다. 마침내 그 정성으로 환웅이 거짓 몸을 해서 그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가 곧 단둔왕검(檀郡王儉)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의 개국신화에서부터 호랑이가 우리 생활과 풍토속에 밀첩하고 깊게 투영된 존재임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기록입니다. 이 신화에서 神市, 神壇樹 그리고 곰을 <神熊>이라고 표기한 것은 호랑이도 단순한 현상계의 호랑이가 아님을 알려줍니다. 호랑이는 곰과 비교하여 인내가 떨어졌을 뿐 단군이 선택한 兩大 동물이거나 신호(神虎) 또는 오늘날 학자들의 견해처럼 (호랑이를 숭배하거나 또는 호랑이의 용맹을 숭배하는 種族, 호랑이라는 동물을 시조로 여기는 종족)을 지칭합니다. 동물을 종족의 시조로 보는 수조사상(獸祖思想) 즉, 소위 토템은 전 세계에 걸친 보편적인 관념으로 이 가운데 호랑이나 곰을 숭상하는 토템은 우리나라와 시베리아를 포함하는 고대 퉁구스族에게도 발견됩니다. 중국 산동성(山東省) 가상현(嘉祥縣)에 소재한 武氏 祠堂 무량사(武梁祠)에는 대략 기원후 147년경에 만들어 졌으리라 추정되는 화상석(畵像石)이 전하는데 이를 우리 단군신화와 거의 八九分이 합치된다고 본 견해도 있습니다.
까치호랑이 그림을 그려 놓은 담장아래 커다란 칠판을 마련해 놓아 이곳을 찾은 이들이 스스로 그려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소나무와 학은 십장생의 하나로 물, 산, 괴석, 영지(불로초), 거북, 구름, 해, 사슴 등과 함께 병풍에 그려 왕과 왕비의 침소에 펼쳐 놓았습니다.
감은 곶감을 만들지요. 곶감이 호랑이보다 무서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밤중에 아이가 보채고 울면 할머니들께서는 아이를 달래려고 '울면 호랑이가 물어간다. 하셨지요. 그래도 울면 저기 곶감 있다'는 말에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칩니다. 이때 문밖에서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호랑이가 나보다 더 무서운 곶감이란 녀석이 있는가 보다싶어 슬그머니 산으로 도망갔다지요.ㅎㅎ
이 교동민화마을은 제천향교와 더불어 제천의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교동校洞이란 지명은 제천향교와 더불어 인접해 있는 제천고등학교와 무관치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담장 안에 심어진 감나무에 빨갛게 익어가는 감이 탐스럽군요. 아담한 초가집 돌담 안에 이처럼 풍성한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던 어린 시절의 외갓집이 절로 그립습니다. 그 정겹던 돌담 초가집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교동민화마을 집들의 명패와 번지패
벽화는 계속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 작업은 40년 전 이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지은순 민화연구소장"이 어린 시절의 포근한 정감으로 꾸미고 있답니다.
타일을 붙인 벽에 그려 넣은 교동민화마을 길잡이입니다. 좋았어요.☆
※ 이하 게시글과 그림은 제천민화마을을 둘러보고 참고로 올립니다.
《김홍도의 풍속화첩》
김홍도의 풍속도하면 바로 이 화첩에 속한〈씨름〉〈무용〉 〈서당〉이 연상되리 만큼 지금까지
이 분야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화첩은 1918년 조한준(趙漢俊)에게서 구입했고 모두 27점이었으나 1957년(年) 원 화첩의 수미(首尾)에 위치한
〈군선도(群仙圖)〉2점은 별도의 족자로 만들고 풍속도 25점만 새롭게 화첩으로 꾸몄습니다.
이 화첩에 속한 그림 중 4점이 1934년(年) 간행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게재되었습니다.
1970년(年) 〈군선도(群仙圖)〉를 제외한 이 화첩은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이란 명칭으로 보물 제52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들 작품명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각계층의 생업장면과 놀이 등 생활의 이모저모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외도 없지않으나 대체로 배경을 생략하고 등장인물들이 취하는 자세와 동작만으로 적절한 화면구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평범한 일상사이나 화가의 따뜻한 시선과 예리한 시각에 의한 순간의 포착은 이를 볼거리로 부각시켜 그림이 그려진 사회분위기를 잘 전하고 있습니다. 이 화첩에 속한 그림 중 〈점괘〉는 <시주〉로, 〈고두놀이〉는 〈윷놀이〉로 보기도 합니다.
또한 이 화첩에 대한 이와 유사한 그림들이 적지 않게 전해지는 사실, 그림사이에 기량과 격조에서 차이를 보이는점, 부분적으로 감지되는 표현의 미숙함, 보수와 가필(加筆) 등의 요인으로 이 화첩에 대해 일각에서는 다소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 화첩의 게제순은
1) 논갈이, 2) 활쏘기3) 기와이기, 4) 대장간, 5) 노상과안, 6) 점괘, 7) 나룻배, 8) 주막, 9) 고누놀이, 10) 빨래터, 11) 우물가,
12) 담배썰기, 13) 자리짜기, 14) 벼타작, 15) 그림감상, 16) 길쌈, 17) 편자박기, 18) 고기잡이, 19) 산행, 20) 점심, 21) 장터길
22) 씨름,23) 서당, 24)무동, 25) 행상 입니다.
김홍도필풍속화첩(金弘道筆風俗畵帖) 寶物527號
朝鮮時代 / 金弘道 (1745~?) /紙本設彩 縱 39.7cm×橫26.7cm / 國立中央博物館所藏
〈책가도병/冊架圖屛〉
장한종은 궁중의 화원이면서 야담인 『어수록 禦睡綠』 일명 『어수신화 禦睡新話』를 지은 작가로도 유명합니다.
잠을 붸을 만한 이야기를 모아 세상을 경계하기 위해 바보 이야기와 음담패설을 많이 수록하였습니다.
그의 <책가도병>은 노란 휘장을 걷어 올리자 그 안에서 서가의 위용이 드러나 보이게 하는 극적인 구성을 취하였습니다.
서가는 아랫단에 문갑이 달리고 여러 칸으로 나뉘어져 있고,
그 안에는 책을 중심으로 도자기, 문방구, 과일, 꽃 등이 진열되어 있는데,
당시 서양회화의 영향을 받아 유행한 선투시도법의 공간에 음영법까지 표현되어 중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서가에 있는 도자기는 청나라에서 수입한 분채(粉彩) 도자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문방구나 가구는 조선의 것이 구요.
조선후기에는 왕실과 사대부가에서 청나라의 도자기를 수집하는 열풍이 일었는데,
바로 그러한 현상을 이 책거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짙은 갈색의 틀 속에 회색의 천장, 갈색과 회갈색의 벽으로 책장을 표현하여 갈색과 황색의 따뜻한 색조가 주조를 이루고 있고,
휘장에는 약간의 음영을 넣어 입체감을 내어 서양화풍의 영향도 엿보입니다.
이처럼 복잡하고 정형화된 짜임새 속에서 그림 하단 오른쪽에는 두껍닫이 문 한 쪽을 떼어 놓아 엄격한 규범 속에서
숨통을 여는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낙관이 없는데 어떻게 장한종이 그린 것으로 보느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지요.
궁중에서 제작된 책거리에는 그림 중 도장을 글자를 새기는 부분이 보이도록 슬쩍 눕혀 놓습니다.
이 병풍에서는 왼쪽 끝 위에서 3번째 단에 '장한종인(張漢宗印)'이란 글자가 보이는 인장이 옆으로 뉘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숨겨진 인장으로부터 궁중 책가도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겠습니다.
열청재 장한종의 책가도병(閱淸齋 張漢宗筆冊架圖屛) ↑
조선시대 / 종이에 채색195.0×361.0 cm / 경기도박물관 所藏
《긍재 김득신의 파적도(兢齋金得臣筆破寂圖)》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은 조선 후기의 유명한 화원(畵員)집안인 개성김씨(開城金氏) 출신의 화원으로,
단원 김홍도의 선배로 알려진 복헌(復軒) 김응환(金應煥, 1742∼1789)의 조카이자 초원(蕉園) 김석신(金碩臣, 1758∼?)의 형이다.
그는 산수, 화조, 인물, 풍속등 모든 분야에서 단원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 이를 토대로 자신의 화풍을 형성하였습니다.
이 파적도는 김득신의 뛰어난 역량을 감지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파적(破寂)이란 단어가 말하듯이 고요를 깬 한순간의 상황을 빈틈없이 표현한 기치로운 작품입니다.
꽃망울이 맺힌 어느 봄날 한낮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골 농가 뜨락에 별안간 소란이 벌어졌습니다.
고양이가 병아리를 채가자 다른 병아리들은 혼비백산하여 숨을 곳을 찾아 필사적으로 달아나고 그래도 어미 닭은 부리를 세워 고양이에게 대들고 주인은 어찌나 급했던지 돗자리를 짜던 기구가 마당에 나동그라지고, 탕건이 벗겨져 땅에 딩굴고, 마루에서 떨어져 몸도 가눌 새 없이 마음만은 급해 담뱃대를 길게 뽑아 고양이를 쫓고 있습니다.
붉은 꽃이 핀 나무조차 고양이를 향하고, 부인은 소리를 지르고 황급히 주인을 잡으려고 달려들지만...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건물과 붉은 꽃이 핀 나무는 수직, 수평 방향의 정적이고 무심한 모습이다.
돌발적인 사건으로 벌어지는 소란스런 상황을 이처럼 박진감 넘치게 표현한 작품은 거의 드물 정도로 특출합니다.
김홍도의 「행려풍속도병」중 「놀란 물새」에서도 다리 위를 건너는 일행에 놀라 날아가는 물새라는 돌발적인 사건을 주제로 잡았지만, 김득신의 이 그림이 완성도가 더 높은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가장 안정되고 이상적인 장면만을 그리는 조선 중기의 산수인물화와 비교해볼 때, 이작품은 서민의 일상적 순간포착 풍속화로써 충분한 주제가 됩니다. 김득신은 당대에는 속화로 이름이 높아도 김홍도의 아류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적어도 이 그림만은
김홍도의 그림보다 낮게 평가될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김득신의 소재의식과 그에 걸맞은 표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입니다.
《 긍재 김득신의 파적도(兢齋金得臣筆破寂圖)》 ↑
朝鮮時代 / 《18世紀》紙本淡彩 縱 22.5cm×橫28.0cm / 澗松美術館 所藏.
《 단원 김흥도의 빨래터 / 檀園金弘道筆風俗畵帖中漂母 》
냇가에서 빨래하는 아낙네의 모습과 바위 뒤에서 몰래 훔쳐보는 선비의 모습이 강한 해학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옷주름과 바위 등의 간략한 필선과 담박한 채색이 돋보입니다.
단원 김홍도 필 풍속화첩 중 빨래터(檀園金弘道筆風俗畵帖中漂母) ↑
朝鮮時代 / 金弘道 (1745~?) /紙本設彩 縱 39.7cm×橫26.7cm / 國立中央博物館所藏
<단오도/端午圖>
신윤복(申潤福, 1758 ?-1817 이후)은 화원(畵員)이자 '참지정사' 벼슬을 지낸 신한평(申漢枰, 1726-?)의 아들이며,본관은 '고령'이고 자는 입부(笠夫), 호는 혜원(蕙園), 벼슬은 '첨사'를 지냈습니다. 김홍도(金弘道, 1745-1816 이후)와 더불어 조선 후기 풍속화의 대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주로 기생과 한량이 펼치는 풍류(風流)와 애정행락(愛情行樂)을 대담하게 그려 조선 후기 활기찬 도시 생활의 단면을 표현했다고도 평가됩니다. 그러나 그에 대하여 알려진바가 거의 없습니다. 양반 사회의 비판적 그림을 그려 배제 되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할 뿐 입니다.
그의 화풍은 김홍도의 영향을 받은 점이 있으나, 보다 부드러운 필치와 청록, 빨강, 노랑 등 화려하고 감각적인 채색을 쓴 점이 눈에 띕니다.
풍속화에서는 김홍도와 달리 주변 배경을 치밀하게 설정하여 분위기와 인물의 심리 묘사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 그림은 김홍도의 '빨래터'처럼 주제의 인물들이 물가 여인이고 그 여인들을 훔쳐보고 있다는 것에서 그림의 의도가 비슷하여 덧붙입니다.
단오절에 여인들이 냇가에서 그네도 뛰고 일부는 감은 머리단장도 하고 몸을 씻고 있는데 동자승 차림의 두 아이가 바위에 몸을 감추고 호기심 가득찬 눈으로 몸을 씻고 있는 여인을 훔쳐보고 있습니다. 우측 물가 한 켠에는 앞치마를 두른 찬모가 새참을 담은 찬합과 술병을 싼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왼손을 올려 붙잡고 둔덕을 오르는데 탐스런 젖이 저고리를 비집고 나와 검게 잘 익은 오디처럼 젖꼭지가 매우 선정적입니다.
<단오도/端午圖> ↑
조선시대(朝鮮時代) /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1758~?) / 幅 35.2x28.3cm 종이에 엷은 채색(紙本淡彩) / 澗松美術館所藏
<담배 먹는 호랑이> ↓
京畿 烏山市 紙串里 寶積寺 壁畵
<호랑이 탄 스님> ↓
조선 18세기 김홍도(金弘道1745~) 紙本淡彩35.7 x 31.8cm 한국민족미술연구소 所藏
<松岩伏虎>
소나무 밑동 바위 옆에 호랑이는 배를 깔고 엎드려 있고 그 곁에 노인(山神靈)이 바위에 앉아 호랑이를 쓰다듬고 있다. 소나무나 호랑이는 신령스런 영물이다. 여기에 호랑이를 대동한 노인은 산신령으로 우리나라 민속신앙의 근간이라 하겠다. ↓
조선 18세기 정선(鄭敾1676~1759) 紙本淡彩31.5 x 51.0cm 한국민족미술연구소 所藏
우리나라의 호랑이 그림은 정초(正初)에 벽사용(辟邪用)으로 대문이나 벽에 붙이는 민화(民畵)가 유명하지만, 김홍도가 그린 이 작품은 감상용으로 제작된 것같다. 화면 위쪽에 굵은 소나무 둥치와 가는 가지를 그려 넣어, 화폭을 가득 채운 호랑이의 위엄 있는 모습을 강조하는 동시에, 여백을 적당히 메우는 공간 활용이 절묘하다. 천천히 걷다가 갑자기 앞을 향해 머리를 돌린 호랑이의 자세는 조선시대 다른 맹호도와 비슷한데, 이런 형식의 맹호도가 하나의 도상(圖像)으로서 유행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화면 오른쪽 위에 "표암화송(豹菴畵松)"이라는 글귀가 있어 소나무 부분은 표암 강세황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단원의 재능을 무척 아끼고 후원했던 표암이 단원과는 나이와 신분을 무시한 친구 사이라고 했던 것을 보면, 이러한 합작(合作)은 충분히 가능한 것으로 보이지만, 소나무를 그린 화법에 단원 화풍이 완연하여 표암의 솜씨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朝鮮 18世紀/金弘道(1745~1806?) 畵虎, 姜世晃(1713~1791) 畵松/絹本水墨淡彩/90.4×43.8cm/湖巖美術館 所藏
2015년 10월2일 <鄕香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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