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조령관문 / 鳥嶺關門 (문경시 聞慶)

鄕香 2013. 10. 21. 17:09

문경새재 주차장 주변 모습입니다. 길가 집들은 모두 식당이고 사과축제가 열리고 있는지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번다한 시장거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길(문경새재)은 조선 태종 14년(1414년)에 열린 관도로 영남지방(嶺南地方:  조령(鳥嶺) 남쪽이라는 뜻에서, 경상남도와 경상북도를 이르는 말.)과 기호지방(畿湖地方 : 경기도,황해도 남부, 충청남도 북부 지방을 통틀어 이름) 을 잇는 영남대로 중 가장 유명하며 지금은 조선시대 옛길의 대표적인 길입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초점(草岾)’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으로 기록된 길로 조선시대 영남도로에서 충청도(한강유역권)와 경상도(낙동강유역권)를 가르는 백두대간을 넘는 주도로의 역할을 했습니다.

 

 

옛길박물관입니다.

 

 

옛날 영동.영남지방 선비들이 과거보러 한양 가는데 넘는 큰 고개가 5재(嶺)가 있는데, 그 고개가 鳥嶺. 竹嶺. 梨花嶺. 秋風嶺. 二嶝嶺(박달재)으로 이를 모두 남한고개라 이릅니다. 조령고개는 제1관문으로 주로 서원에서 수학한 세도있는 사대부집 선비들이 다녔고 뒤(背景)도 든든하니  당연 合格, 그러나 파당에 휩쓸려 관운이 험난했고, 죽령고개는 어려운 선비들이 선호하는 고개로 이도 당연 合格, 생활이 어려웠던 만큼 피나는 노력으로 글공부에 전념을 했겠지요. 퇴계 이황선생이 과거보러 떠나던 날, 그 어머니가 반드시 죽령으로 넘어가라고 신신당부를 했답니다. 합격한 그는 원만한 관운과 명망을 얻었던 것도 죽령을 넘어간 것과 무관치 않은 듯 싶습니다. 이화령(梨花嶺)고개는 " 꽃에 취하고 한 잔 술에 취하다 보니 합격가능성이 반반이고, 추풍령고개는 秋風落葉같이 떨어진다 해서 科客이 꺼리던 고개랍니다. 지금은 박달재로 불리는 이등령(二嶝嶺 또는 다릿재)은 합격은 이등분하여 반반이었을 것입니다. 그 半數에 박달(朴達)도 끼어 낙방거사가 되어 금봉과 애절한 사연에 얼켜 이등령이 박달재로 불리게 된 것이지요.

 

 

 

가수 '수와진'이 심장병 어린이를 위한 자선공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에 명동성당 앞에서 자주 보았는데, 이곳 새재까지 와서 자선공연을 하는 한결같은 그 정성이 아름답습니다. 적은 금액이지만 그 마음에 고마움을 담았습니다.

 

 

조령산과 주흘산에서 모아진 물이 흐르는 계곡의 물이 하늘만큼이나 맑습니다.

 

 

건너편 생태연못이 있기에 어린 추억이 담긴 징검다리를 건너갑니다.

 

 

연못가 옆 개울을 따라 가는 호젓한 길에서 건너다보니 울긋불긋한 여행객들이 조령관문을 향해 줄지어 갑니다. 저 사람들의 마음의 빛깔도 옷 색깔만큼이나 물들어 예쁘겠지요.

  

 

숲과 호수는 금슬 좋은 원앙과 같은 사이라고나 할까! 그 어울림이 자연스럽고 편함을 느끼게 합니다.

 

 

이엉을 올린 아늑한 흙돌담에 정겨운 사립문, 잡초가 성긴 초가지붕의 헛간 벽에 매어단 멍석, 그 옆 단조한 장독대, 그 어느 것 하나 눈에 밟히지 않는 것이 없네.

  

 

구구락지, 참종개, 버들치, 강미꾸라지, 중걸태, 송사리, 울긋불긋 아름다운 불거지 등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맑은 물에 당장이라도 종아리 걷어붙이고 뛰어 들어 어린 시절 동심으로 그 예쁜 우리 물고기와 어우러지고 싶습니다.

 

 

문경새재를 과거길이라는 별칭을 준 것은 명문대가를 이루고 있던 영남지방의 선비들이 다른 길보다 이 길을 통해 한양 科場을 오갔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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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짙은 녹음으로 덮인 주흘산자락으로 주흘관으로부터  이어진 성벽의 일부가 햇볕을 받아 하얗게 드러나 음산한 나무숲을 밝게 조화를 줍니다. 

 

 

<문경관문/聞慶關門>

사적 147호 문경관문은 서울과 영남지방간을 잇는 관문이며 군사적으로 중요한 변방(要塞)입니다. 삼국시대에는 이보다 동쪽의 계립령(雞立嶺)이 중요한 곳이 었는데 고려 초부터는 이곳 초참(草站)을 혹은 새재라고 하므로 鳥嶺이라 이름하고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하였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경주를 순행차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을 지날 때 城主 興達이 세 아들을 차례로 보내어 귀순하였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왜장 고시니 유끼나가(小西行長)가 경주에서 북상해 오는 카토오 키요마사(加藤淸正)의 군사와 이곳 조령에서 합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습니다. 이 때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킬 것이라 생각했지만 신립장군은 때가 늦었으므로 충주로 후퇴하였습니다. 그후 충주에서 일어난 의병장 신충원(辛忠元)이 오늘날의 제2관문에 성을 쌓고 교통을 차단하며 왜병을 기습하였습니다. 이곳의 군사적 중요성이 재확인 되자 군사시설을 서둘러 숙종 34년(1708년)에 이르러서야 3중의 관문을 완성하였습니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1관문을 주흘관(主屹關), 제2관문을 조동문(鳥東門) 혹은 조곡관(鳥谷關), 제3관문을 조령관(鳥嶺關)이라고 합니다.  

 

 

<주흘관/主屹關>

첫 관문으로 "主屹關"이라는 글씨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성돌에 각자된 명문>

삼국시대 이래 성을 쌓을 때(築城) 구간을 두고 감독관을 두어 부실여하에 따라 책임을 물었습니다. 이 성축에 새겨져 있는 銘文도 그러한 연유가 있는 것입니다. " <강희 신축 개축 별장 이인성/康熙 辛丑 改築 別將 李寅成> 강희(康熙)는 중국 청나라 황제(高宗46년) 년호로 고려 말 부터 상국이라 하여 중국의 연호를 썼습니다.  신축(辛丑)은 1721년 (정조 5년) 입니다. 따라서 정조대왕 5년에 城을 개축하였으며 그 책임자는 별장(正三品) 벼슬의 이인성(李寅成)이라는 인물임을 알 수 있겠습니다.

 

 

<영남제1관/嶺南第一關 >

주흘문 안쪽 모습입니다.  "嶺南第一關"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제1관문 주흘관, 제2관문 조곡관, 제3관문 조령관 등 3개의 관문과 원(院)터 등 주요 관방시설과 정자와 주막 터, 성황당과 각종 비석 등이 옛길을 따라 잘 남아 있고, 경상도 선비들의 과거길로서 수많은 설화가 내려오고 있는 등 역사적, 민속적 가치가 큰 옛길입니다.


 

 

 

<현감 홍로영 철비>

쇠를 녹여 만든 이 철제비는 銘文에 의하면 1824년에서 1827년까지 문경현감을 역임한 홍로영의 비석으로 1826년(순조 26년)에 건립한 것입니다. 이 비는 받침돌 위에 비몸(碑身)과 지붕(螭首)을 함께 주물기법으로 제작하였으며, 도드라진 글씨로 "현감 홍후로영영세불망비/縣監洪候魯榮永世不忘碑"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거의 모든 비석이 돌로 만든 것에 비해 무쇠로 만든 예는 보기 드문 일입니다. 

 

 

역대 경상도관찰사들의 공덕이나 치적을 기념해 세운 비석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런 공적비는 선정(善政)을 베푼 관리에게 고마움을 보답하기 위하여 고을 백성들이 스스로 힘을 모아 세워주는 것이지만, 과연 이 비석들이 그런 과정으로 세워졌을까는 의문입니다.

 

 

많은 사극들이 촬영된 세트장 입구입니다. 입구 넘어 백두대간 조령산 봉우리가 발그레 물들어 가기 시작합니다.

 

 

<조령주변조감도>

 

 

촬영세트장으로 건너가는 다리, 그 넘어 조령산 줄기 능선이 아름답습니다.

 

 

채석을 위해 바위를 뜬 장소로 보이는데, 1관문의 성돌을 이곳에서 채석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조산/造山>

말 그대로 인위적으로 조성한 산을 말합니다. 옛 사람들은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땅의 기가 약하거나 허한 곳에 조산을 만듦으로써 그곳의 기를 보강하고자 하는 의식(意識)이 있었습니다. 또한 마을 입구나 경계지점에 세워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주차장에서 주흘관을 거쳐 제2관문인 조곡관에 이르기까지 울창한 나무 아래 평평하게 잘 닦여진 흙길은 나이든 분들이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 길입니다.

 

 

<지름틀바우>

조선시대 기름을 짜는 도구인 기름틀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지름틀'은 기름틀의 경상도 사투립니다.

기름틀은 받침틀과 누름틀로 구성되는데 받침틀 위에 볶은 참깨, 들깨, 콩 등을 보자기에 싸서 올려놓고 누름틀을 그 위에 덮고 지렛대를 이용해 누르면 기름이 흘러내리게 된 구조입니다. 

 

 

 

 

<등용정/登龍亭>

조선시대 한양 성내 북촌의 경복궁 주변에는 5개의 활터(弓射亭)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종로구 필운동 등과정(登科亭), 옥인동 등용정(登龍亭), 삼청동 운룡정(雲龍亭), 사직동 대송정(大松亭 또는 太極亭), 누상동 풍소정(風嘯亭 또는 白虎亭) 등을 서촌오사정(西村五射亭)이라고 불렸습니다. 사직동의 등과정 자리는 한말까지 궁술 연습장으로 유명했으며, 옥인동의 등용정은 이순신의 장인이자 스승이며 당대 최고의 강궁(强弓)이었던 "방진"이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며 임진왜란 당시 서애 유성룡과 원균이 함께 무예를 익힌 곳으로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습니다. 이 정자는 등용정을 본떠 KBS에서 '불멸의 이순신' 촬영을 위하여 이 곳(문경 조령)에 재현한 촬영 세트입니다.

 

 

<조령원터>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447-1 문경새재도립공원內

주흘산 조령관문(主屹山 鳥嶺官門) 1관문과 2관문 사이에 위치한 조령원터는 고려와 조선조 公用으로 출장하는 관리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공익시설입니다.  

 

 

문경시에 의하면 조령원터 복원을 위해 1977년과 1997년 2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건물의 터가 2개 층에 걸쳐 발견되었는데 발굴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상단의 건물지에서 고려시대 온돌유지와 부엌시설 일부가 드렀났고 또한 이를 비롯하여 와편, 토기편, 자기편, 어망추, 철제 화살촉, 마구류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문경세재는 한양과 영남을 이어주던 길목에 위치하여 수많은 길손들이 오고가는 중요한 통로였으며, 역과 원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세재내에만 동화원, 신혜원, 조령원 등 3곳의 원처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령원터의 규모를 보면 전체 면적이 600평(1,980㎡),으로 주위를 둘러 싸고 있는 돌담은 너비 2.8m, 높이 2.9m 내외이고, 동쪽 57.6m, 서쪽 53m, 남쪽 38.9m, 북쪽 37.7m에 대칭변 길이가 모두 다른 남북으로 길게 쌓여진 장방형입니다. 서쪽 돌담에 문지가 남아 있는데 돌담을 성벽의 육축모양(六軸形)으로 마무리하고 그 사이에 2매의 방형 석주를 문설주로 세웠습니다.

 

 

<무주암/無主岩>

누구든지 올라 쉬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바위로 옛날에는 이 바위 아래 무인 주점이 있어 술과 간단한 안주를 준비하여 두고, 길손들이 이 바위 위에 올라 주변 경치를 즐기면서 목을 축인 후 마신만큼의 주대를 함에 넣고 가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새재골의 옛 넉넉한 인심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바위 위에 앉으면 맞은 편 조령산의 아름다운 경관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옛 과거길>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는 선비들이 다녔던 길입니다.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관도로 일명 '벼슬길'로도 불립니다. 영남의 대갓집 문중의 선비들이 이 길을 통해 과거를 보러 다닌 것에서 유래된 이름이라 하겠습니다.  

 

 

<마당바위>

타원형으로 된 이 바위는 긴쪽이 약 5m, 짧은 쪽이 약 4m 입니다. 지금은 새재를 찾는 관광객의 쉼터이지만, 옛날에는 도적들이 이곳에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덮치기도 했던 곳이라고 합니다.

 

 

<교귀정/交龜亭>

교귀정은 새롭게 도임하는 신임 감사와 업무를 마치고 이임하여 돌아가는 감사가 관인(官印)을 인수인계 하던 곳으로 문경세재 용추폭포 옆에 있습니다. 문경 현감 신승명(愼承命)이 1400년대 후반(1466~1488)에 세웠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구한말에 불에 타 없어졌던 것을 1999년 중창하였다고 합니다. 감사 이취임 행차에는 300여명으로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미암일기초/尾巖日記草> . <탐라순력도/眈羅巡歷圖> 에서 기초함.

 

 

 

조선시대 임금으로부터 명을 받은 신임新任과 구임舊任의 경상감사가 업무를 인계인수 하던 곳으로 그 상징인 官印을 주고받은 交印處로 1470년경(成宗初)에 건립되어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896년 3월 의병전쟁 시 소실되어 폐허로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 6월에 팔작지붕 이익공,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복원된 것입니다. 지금은 매년 경상감사 교인식 재현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하여 이 지방문화행사로 맥을 잇고 있습니다. 

 

 

<교귀원/交龜院> 詩 (이행/李荇)

 

 

「 교귀란 이름은 그 유래 있어도, 지난 자취는 전해짐이 없어라.

어여쁜 새는 진정 마음 쏠리지만, 시든 꽃은 다만 가련할 뿐이네.

예와 이제가 한 가지 모습인데,지혜와 어리석음 무슨 차이있으랴.

아직은 견마 잡힐 신세 아니어서 산과 계곡이 반겨 주는 것이리라.」

이 행 <이행/李荇 1478(성종9)~1534(중종29)>  조선 중기 문신으로 본관은 德水, 호 容齋, 좌의정을 지냈으며 저서는 용재집(容齋集) 등이 있습니다.

 

 

<용추 / 龍湫>

한장의 바위 가운데에 龍의 몸처럼 파인 곳으로 비취색 청자빛처럼 고운 물결이 긴 沼를 이루어 마치 청룡이 하늘에 오르려는 듯 몸부림을 하는 듯이 다함없이 흘러 갑니다.   

 

 

<용추 (龍湫) / 詩 / 이 황(李滉 作)

 

『 巨石贔贔雲溶溶(거산비비운용용), 山中之水走白虹(산중지수주백홍).        

    怒從崖口落成湫(노종애구낙성추), 其下萬古藏蛟龍(그하만고장교룡).        

    蒼蒼老木蔽天日(창창노목폐천일), 行人六月踏冰雪(행인육월답빙설).         

 

 

  " 큰 바위 힘 넘치고 구름은 도도히 흐르네. 산속의 물 내달아 흰 무지개 이루었네.

    성난 듯 낭떠러지 입구 따라 떨어져 웅덩이 되더니, 그 아래엔 먼 옛적부터 이무기 숨어 있네.

    푸르고 푸른 노목들 하늘의 해를 가리었네, 나그네는 유월에도 얼음이며 눈을 밟는다네.

 

 

 

 

        湫邊官道走王京 (추변관도주왕경),     日日輪蹄來不絶 (일일륜제래불절).

        幾成歡樂幾悽苦(기성환락기처고),      笑撫乾坤睨今古 (소무건곤예금고).

        大宇淋漓寫巖石(대우림리사암석),      後夜應作風和雨 (후야응작풍화우).

 

" 깊은 웅덩이 곁에는 국도가 서울로 달리고 있어, 날마다 수레며 말발굽이 끊이지 않는다네.

  즐거웠던 일 그 몇 번이며 괴로웠던 일 또 몇 번이었던가, 하늘 땅 웃고 어루만지며 예와 오늘 곁눈질하네.

  큰 글자 무르녹은 듯 바위에 쓰여 있으니, 다음날 밤에는 응당 바람 비 내리리라. "』

 

 

이 황(李滉) <1501(연산군7년)~1570(선조3년)> 학자 文臣, 본관 眞城, 호 退溪 시호 文純, 예조판서 등 역임, 영남학파 주류 형성 성리학 발전에크게 이바지 했으며, 저서 '퇴계전서' . 성학십도' 등이 유명합니다.

 

 

 

 

 

<구구락지/구구리/꾸구리/곰태/얼룩동사리>

 

 

여기서 '꾸구리'는 본디 '얼룩동사리'를 말합니다. 그 이름이 지방마다 달라서 불리는 이름도 많습니다.  구구락지, 구구리, 곰태, 꾸구리 등으로 불리는 것은 건드리면 구구소리를 내는 것에서 구구리 또는 구구락지 등으로 불리며 '곰태' 라는 이름은 손으로 슬그머니 움켜 잡아도 도망가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에서 붙여진 이름인 것으로 봅니다. 부성애도 강해서 암컷이 알을 낳으면 알을 지느러미로 감싸고 잘 부화되도록 흔들어주며 알에서 새끼가 나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보호하다 새끼들이 떠나면 기진해서 죽음을 맞습니다. 맑은 1급수 하천 중 하류 모래와 자갈이 깔린 물살이 비교적 느린 여울에서 살며 낮에는 바위나 돌 밑에 숨어 있다가 주로 밤에 활동하며 수생곤충이나 물고기, 새우류, 등을 잡아먹는 육식성 우리나라 고유어종 입니다. 육질은 담백하고 쫄깃하여 맛이 좋은 고급어종으로 관상어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크기는 10~15cm 정도 자랍니다.

 

 

 

 

긴 통나무에 홈을 파서 수로를 만들었습니다.

 

 

 

길가에 있는 폭포는 우거진 수림 사이로 5단에 걸쳐 많은 물이 낙차를 하는 아름다운 폭포입니다. 폭포줄기 옆에 숲을 이루고 떨어지는 물의 양이 많은 것에 비해 물이 떨어지는 바위표면이 매끄럽지 않은 점으로 볼 때 물길을 끌어 폭포를 만든 느낌이 듭니다.

  

 

<조곡폭포>

 

 

<영남제2관 조곡관/嶺南第2關 鳥谷關>

 

 

<영남제2관 조곡관 / 嶺南第二關 鳥谷關>

제1, 제3 문과 더불어 사적 147호인 조곡관은 삼국시대에 축성되었다고 전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찾을 수 없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조 선조25년(1592년)에 왜란이 일어난 후 충주사람 신충원(辛忠元)이 의병을 일으켜 이곳에 성을 쌓은 것이 시초가 되었습니다. 朝鮮朝 肅宗 34년(1708년) 조령산성을 쌓을 때 매바위(鷹岩) 북쪽에 있던 신충원이 쌓은 옛성을 고쳐 쌓고 中城을 삼아 관문을 鳥東門이라 이름하였습니다. 현재의 시설은 그 후 폐허가 된 것을 복원한 것입니다.

 

 

 

 

 

제2관문 주변의 쉼터입니다. 시각을 보니 오후 1시가 가깝습니다. 여기서 제3문인 조령관까지 거리는 3.2km에 1시간 40분 정도가 소요된다고 합니다.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조령관 까지 갔다 식당들이 있는 주차장까지 가려면 오후5시30분은 돼야할 것 같아 오늘은 2관문에서 되돌아섭니다.

 

 

<조곡약수/鳥谷藥水>

기암절벽으로 둘러싸인 청산계곡 사이로 흐르는 용천수(湧泉水)로서 물이 맑고 청량한 맛이 있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오가는 이들의 갈증과 머리를 맑게 해 주는 이 약수를 靈藥水라고 한답니다. 

 

 

 

 

 

 

제2관문 조곡관 안쪽입니다. 넓은 솔밭에 길손들이 쉬어 갈 수 있도록 평상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돌아내려가는 길에 조선 말기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 천주교 사제 서품을 받고 한국인으로서 두 번째 신부가 되신 고 최양업 神父님이 전교를 위해 새재를 넘어 다녔는데, 교인박해로 신도와 함께 숨어 기도를 드렸다는 자연굴입니다. 

  

 

<기도굴로 들어서는 입구입니다. 길옆에서 바로 돌계단으로 30m정도 올라가면 바로 큰 암벽 밑입니다.>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避身하여 기도를 드렸던 굴 입구입니다.

 

 

 

 

 

허리를 굽히고 엎드려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낮은 곳입니다.

 

 

제1관문인 주흘관 앞 잔디광장입니다.

 

 

제1관문인 주흘문을 나서 주차장으로 가는 길가 단풍나무 가로수들이 아직은 靑靑합니다. 앞서 가는 저 여인의 윗도리처럼 붉게 물이 들면 저 여인보다 더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다시 올수도 없고 아쉽지만 발길을 돌려야지요.  

 

 

2013년 10월17일 문경새재. <鄕仁香>